새로운 질병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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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664회 작성일 20-01-17 17:10본문
사향고양이와 뱀으로 만드는 용호봉황탕 요리사 황싱추가 폐렴에 걸려 3개월간 305명에게 전염시킨 2002년 11월의 사스는 이들을 치료한 리우지안룽 교수가 잠복기 상태로 홍콩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 참석해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캐나다인, 싱가포르인, 아일랜드인 등 10명에게 전염시킴으로써 일주일 만에 세계 30여개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베트남 북부 타이빈현의 신혼 부부에게서 시작된 조류독감은 태국으로 전파돼 방콕에서 서쪽으로 3시간쯤 차를 몰아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무대로 유명한 캍차나부리에서 2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수백명의 유사 환자가 생겼다.
아프리카의 풍토병으로만 알려진 웨스트 나일 뇌염은 미국 애틀랜타의 질병통제본부 전염병정보국 사무실 상황판을 온통 시뻘겋게 만들었다. 1999년 8월 뉴욕에서 처음 발병한 괴질이 전국 44개 주로 확산됐다는 표시였다. 현재 미국에선 매년 4000~5000명의 환자가 발생하며 치사율은 50% 이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 전염병인 에볼라는 1976년 아프리카 수단과 자이르의 시골 마을 주민과 의료진 397명을 몰살시키면서 출현했으나 거짓말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1995년 자이레에서 재차 발생해 244명의 사망자를 냈고, 1996년에는 가봉에서도 발병했으며 치사율 90%의 치명적 질병이다.
유럽은 광우병이 유행하고 미국․아르헨티나․일본 등지에선 O-157균 감염증도 확산되고 있다. 에이즈의 경우 지금껏 2000만 명 정도가 사망했고 약 4000만 명의 환자가 생존해 있다.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전염병이 세계 도처에 등장해 확산되고 결핵, 페스트, 말라리아 같은 오래된 전염병도 부활하고 내성 때문에 점차 항생제는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EIS(전염병정보국) 요원으로 세계 각국의 질병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활약한 경험을 갖고 있는 내게도 이번에 발견한 질병 앞에서는 속수 무책이었다.
이 질병의 증상은 본인에게는 전혀 무해하면서 타인에게는 치명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핵과 미토콘드리아를 갖고 있는 세균과 달리 DNA와 RNA로 구성된 핵산과 이를 둘러싼 단백질껍질로만 구성된 관계로 무생물 분류될 수 있지만 사람에게 감염되면 세포에 기생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증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간혹 새로운 유전자로 변형되면 돌연변이를 일으켜 치명적인 증상으로 주변인물에게 상처를 남긴다.
내가 이 질병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중년이 채 안돼 보이는 여자가 상담실을 찾아왔다. 남편이 이틀째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일로 전염병정보국에 와서는 안된다며 가까운 파출소에 가출 신고를 할 것을 권했지만 여자는 얼굴 표정이 순간적으로 파리해지며 경찰이 할 일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확신에 찬 어조로 분명하게 말하는 여자의 표정으로 볼 때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질병이 아니라고 단정지었던 짧은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커피포트에서 따뜻한 커피를 따라 잔을 건내자 여자는 다소 진정이 되는지 굳은 표정을 풀며 입김을 후후 불어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기 시작했다. 경찰을 찾지 않고 이 곳을 찾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 나는 의자를 고쳐 바짝 책상에 붙혀 앉고 여자의 얘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자상한 아빠, 다정다감한 남편이다가도 어느 날 소리 소문없이 잠적해선 몇 일만에 돌아와요.”
“아, 전력이 있군요?”
“들어와선 한마디 변명도 없이 바가지 욕을 다 감당해내죠.”
“왜 가출했는지 이유를 말 안해요?”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평소 하던 일에 매달려 살아요.
두어 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다간 또 소리 없이 사라지곤 하죠.”
“그럼 지금은 가출한 상탠가요?”
“네, 한 달만에 돌아와선 또 가출한지 이틀 됐어요.”
“예전에도 그 정도 터울로 돌아왔다면서요?”
“이번엔 달라요. 집에 들어온지 겨우 이틀 밖에 안된 상태에서 또 나갔으니까요.”
“부부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없어요. 아무런 이유가 없다니까요.”
“문제라는 것은 당사자들은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왜 나갔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아야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여기 온 이유도 그걸 몰라서 온거에요.”
“그런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서 전염병정보국에서는 해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도와 주세요.”
여자는 신경질 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얘기를 중간에 끊어 버리는 나의 대화 방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비록 이른 아침시간에는 정보국 업무가 한가하지만 수없이 쌓여있는 임상실험결과를 검토해야 하고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날 새로운 질병에 대한 경계와 숙주 차단을 위해 전국을 헤메야 하는 나로서는 사사로운 집안 일을 갖고 이 곳까지 찾은 여자를 빨리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현판을 보고 아셨겠지만 여기는 전염병을 감시하는 곳입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이곳에서 취급할 사안이 아닌 것 같군요.”
“제 얘길 조금만 더 들어보고 판단하시면 안되겠어요?”
진지하게 자신의 얘기를 들어 줄 것을 호소하는 여자를 위해 일어서려던 자세를 다시 고쳐 앉고 다음 얘기를 듣기로 했다.
“결혼한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십년째에요.”
“이런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죠?”
“스무번도 넘어요.”
“두어달에 한번씩 가출 했으니까 삼년 반전부터 그런 셈이군요?”
“맞아요. 삼년전 어느날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가 몇 일 만에 돌아온 적이 있어요.
세상이 복잡하고 사고도 많아서 혹시 사고난 것 아닌가 싶어 엄청 걱정했었어요.
가출 신고도 하고 언론사에도 찾아가서 사건사고를 일일이 캐 묻고 난리를 쳤었었는데 몇일 만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집에 들어왔어요.“
“가출 이유를 말하던가요?”
“아뇨, 집에서 난리를 쳤는지 굿을 했는지 모른척하고 태연스럽게 들어왔죠. 딴 년이랑 살림 차린 줄 알고 몇 일 밤을 달달 볶아 잠도 안 재우고 난리를 쳤지만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일상 생활을 하더군요.”
“그때 원인을 확실히 파악해 놨어야 하는건데 기회를 놓쳤군요?”
“말이 없어요. 그 일 이후에 더 자상하고 더 사랑하고 더 참고 살길래 잊어버렸죠.”
“그럼 두 번째 가출 한 것은 언젭니까?”
“두달이 됐을까? 토요일에 애가 아파서 병원엘 다녀오는 사이에 없어졌어요.”
“토요일이면 병원엘 같이 가지 그랬어요?”
“감기라서 동네 병원에 다녔거든요. 그래서 애만 데리고 갔던거죠.
잠시 마실 나갔나 싶어 신경도 안쓰고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났는지 뉘엿뉘엿 해가 질 때가 되도 나타나지 않는거에요. 더럭 겁이 났지만 행복한 시절이라 금방 돌아오겠지 하는 믿음이 더 강했죠.”
“그땐 몇 일 만에 돌아왔죠?”
“삼일만에 돌아왔어요. 새벽녘인데 땀 냄새로 찌들어서 가까이 할 수도 없었어요. 잠결에 들어온 사람이 하도 피곤해 보여서 안 좋은 일이 생겼나 걱정이 앞서는 통에 감히 입도 못 열고 있는데 목욕탕에 들어가더니 샤워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더니 회사 일이 급해서 출근해야겠다며 나가더군요. 저는 회사일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몇 일 밤 꼬박 새우고 온 줄 알았어요.”
“회사로 전화는 해 봤나요?”
“회사에서 남편이 가출했다면 가만있겠어요?”
“그렇군요.”
“아무튼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안쓰러워서 정오쯤 회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남편이 받더라고요. 가슴이 찡 한게 우리 그이가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느라 못들어왔던 것이구나 싶어 그동안 가슴에 멍든 응어리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었죠.”
“그 다음엔 언제 가출했죠?”
“추운 겨울이었어요. 몸이 찌뿌등한게 눈이 많이 왔나 보다 싶어 창 밖을 내다보니 거리가 온통 흰눈으로 덮였더군요. 몸이 피곤해서 눈을 잠시 다시 붙였나 싶었는데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어요. 서둘러 남편을 깨우고 회사에 늦어서 미안하다고 전화하라고 시키고 난리 법석을 떤 뒤에 등 떠 밀다 시피 출근 시켰어요. 회사까지 평소에는 한시간 정도 걸리는데 눈이 많이 온 날은 두시간도 넘게 걸리겠다 싶더군요. 조심해서 운전하라고 몇 번을 당부하고 들어왔는데 오후 늦게 회사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또 두 달이 됐나보죠?”
“네, 출근하다 눈길에 사고 난 것 아닌가 싶어 뉴스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봤지만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은 없었어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놓곤 경찰서며 병원엘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찾아 헤멨지만 찾을 수 없더군요.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얼어 죽은 것은 아닐까? 온갖 망상을 다 하며 망연자실 하는데 시어머니 마저 눈 오는날 등 떠밀어서 회사 보내니까 사고난 것이라고 난리를 쳤어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눈비 가려가며 출근하는 것 아니잖아요.”
“아무튼 열흘쯤 난리를 쳤을까? 슬그머니 새벽에 기어 들어왔더군요. 추워서 오돌오돌 떠는 몸에선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양말을 한번도 안 갈아 신었는지 발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방안을 오염시키는데 코가 맹맹하고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죠. 그날도 들어서자 마자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더니 출근해야 한다며 빠져 나갔어요.”
“뭔가 결판을 내야 할 때가 아녔던가요?”
“꼭두 새벽에 들어와요. 곤히 잠든 시간에 나타나선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자기 할 일만 서둘러 하곤 빠져 나가죠. 그런 날 저녁땐 장난감이랑 먹거리를 잔뜩 사들고 와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족들에게 너무 잘 하는거 있죠?”
“그 때도 가출 이유를 묻지 않았나요?”
“물었죠. 하지만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모든 일에 애정을 쏟으며 너무 잘하는 바람에 슬그머니 없었던 일로 덮어 버렸어요.”
“가출한 기간 동안 뭘 했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딴 여자가 생겨서 살림을 차린 걸까 하는 의심에서 부터 시작해서 교통 사고로 죽거나 길거리에서 쓰러저 자다 얼어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안해 본 상상이 없어요.”
“상상속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군요?”
“인물이 훤하긴 해도 여자를 밝히는 편은 아니에요. 저랑 잠자리에 들 때도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오히려 저였으니까요. 정상체위 외에는 모르는 쑥맥이거든요.”
“신용카드 이용명세를 확인해 본다든지 통장내역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나요?”
“거기까진 안해 봤어요.”
“반복적으로 가출할 때 마다 파출소에 신고 하고 계시죠?”
“아뇨, 이젠 몇일 있다 들어오겠지 하는 마음에 가출 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단련이 된 마당에 저희 전염병정보국을 찾은 이유를 모르겠군요. 제 생각엔 단순한 스트레스를 못 이기는 정도의 증상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병원의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열 번쯤 가출했을 땐가? 가족의 어른들과 상의해서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적이 있었는데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판단을 받았을 뿐이에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판단을 받았는데도 반복적으로 가출을 일삼는단 말이죠?”
“네, 친구들도 가출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남편이 사라지고 나면 여기저기 전화를 해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더군요.”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습니다. 분명 발견되지 않은 스트레스성 원인에 의해 반복적인 가출을 유도한다고 봐야겠죠.”
“모두 다 그런 말들을 해요. 그래서 더 힘들어요. 시어머니는 박봉에 시달리는 남편 사정도 모른 채 과소비를 하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 것이라며 난리를 치죠. 직장에선 제발 부부싸움 하지 말라며 은근히 책임을 저에게 돌리죠. 친구들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집을 나갔을 것 아니냐며 싸우지 좀 말라고 충고 하죠. 정말 원인 제공 한 적도 없고, 그런 오해를 받고 살기도 싫어요.”
“지금 가출 상태라고 하셨죠?”
“네.”
가정을 가진 중년의 남자가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어떤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번의 실행만으로도 가족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면 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리 없이 몇 일간 여행을 다녀올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행위가 반복적이라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우주인과 정기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순간 머리가 쭈삣 일어서며 더 많은 상황을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출한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전혀 모릅니까?”
“스무 번도 넘게 물어봤지만 한번도 대답한 적이 없어요. 언제 가출한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일상 생활에 푹 파뭍혀 살기 때문에 속이 문드러질 정도로 울화가 치밀어도 가출 한 동안의 행적을 밝혀 내질 못했어요.”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을 것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중년의 남자가 한달 동안 머물만한 곳이 없군요. 심야사우나를 들락거려도 하루 이틀, PC방에서 죽 때린다 해도 몇일 밤을 새우고 나면 어깨쭉지가 아프고 만화방에서 줄창 만화를 본다해도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한 일주일 이상은 못 버틸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아, 맞아요. 한 번은 친구들을 동원해서 이곳 저곳을 찾다보니 어느 지하실 만화방에서 먹고 자고 하는 남편을 찾아 낸 적이 있어요. 남편은 게을러서 활달한 운동량이 필요한 어떤 것도 안하는 성격인데 만화방에서 발견하는 순간 역시 큰 사고칠 사람은 아니구나 싶더군요.”
만화방에서 발견된 것은 의도적인 미끼일 뿐이다. 그 사람은 더 깊은 사연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만화방이라는 장소에 자신을 노출 시킴으로써 가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긴장을 해소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 범위는 단지 동네 만화방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으며 그동안 축적된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가장 저렴한 방법을 택했을 뿐이라는 것을 몸으로 강변했을 뿐이다. 이 사람에게 숨겨진 내면의 음모를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한다면 반복적인 가출 행위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며 사라진 날들 속에 은밀히 진행된 어떤 행위들 역시 은폐되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태도를 단순하게 보면 잘못된 습관에 불과하지만 고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현대인의 보편적인 자기 도피를 위한 행위로 규정한다면 뇌 속에서 기생하며 행위자의 의지를 무력화 시키는 새로운 질병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 됨으로써 사회 전체의 활력이 저해된다면 인류의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뇌의 행동제어 시스템에 간섭하는 신종 바이러스로 밝혀 진다면 전염성의 위험에 의해 인류문명은 곤두박질 처질 위기에 노출 될 수도 있다.
“신용카드 번호 좀 불러보세요.”
전염병정보국의 컴퓨터는 전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뒤질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보안 담당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방어벽을 쌓는 것은 일반인과 해커들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국가기관 특히 정보국의 컴퓨터로부터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어떤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은 기법이기도 하지만 운영체계를 설계할 때부터 정부기관의 접근은 정상적인 운영체계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특수코드가 입력되면 어떠한 어플리케이션으로도 침입을 감지해 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정보국의 컴퓨터가 전세계의 어떠한 컴퓨터에 접속되더라도 프리빌리지 최상단에 위치시킬 수 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하드디스크는 물론 데이터베이스 접근권한과 모든 입출을 관장하는 로그 정보까지 뒤질 수 있게 됨으로써 전 세계의 정보를 한눈에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 받은 컴퓨터는 카드사의 메인컴퓨터에 연결됐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화면에 나타난 카드 정보와 이용명세를 훑어보니 연체횟수 50번, 미결제액 5백만원, 신용불량등재자 등의 정보가 화면에 들어왔다. 월평균 모텔이용횟수 5회, 나이트클럽 3번, 일식집 4번, 백화점 쇼핑 10회 등도 눈에 띄었다.
“댁의 남편은 단순한 과소비형 인간일 뿐입니다.”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하시죠?”
“남편의 머리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를 염두에 두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여기 모니터에 나타난 자료에 의하면 댁의 남편은 카드청구액이 감당하기 어렵다 싶으면 잠적하는 것 같습니다. 평소 카드 연체 때문에 고민한 적이 많지요?”
“아뇨. 전혀 그런 일 없어요. 카드 연체라뇨. 그 사람은 게으르지만 깔끔한 성격이라서 남의 빚을 질 사람이 아니에요. 결혼해서 단 한번도 비싼 옷을 사 본 적이 없으니까요.”
“부인의 무관심이 나쁜 습관을 키운 것 같습니다. 처음 가출했을 때 철저하게 이유를 묻고 책임을 따졌어야 했어요. 함구한다는 이유만으로 귀찮아서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를 키운 것이죠.”
“혜안을 갖고 계실 것이라 믿었던 박사님 마저 저에게 책임을 돌리는군요. 분명히 말하건데 남편의 일은 신종 질병이 확실합니다.”
“카드연체를 모르셨다면 뻔한 월급에서 어떻게 갚아 나갔을까요?”
“맞아요. 시어머니가 대신 갚아 준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남편의 증상은 문제가 발생하면 피해 버리는 유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겪기 싫은 일이 생기면 눈을 감아 버리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문제가 사라진다고 믿는 마음 때문입니다. 남편의 경우도 자신만 사라지면 누군가가 문제를 대신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강합니다. 카드가 연체되더라도 그리 볶이지 않다가 두 달째가 되면 독촉 강도가 심해지죠. 그 걸 피해서 사라지면 누군가가 대신 카드 빚을 갚아줬던 기억 때문에 반복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어린애 같은 증상이네요.”
“그렇습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질병으로 풍토병처럼 토착화되는 추세입니다.”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큰 문제는 없는 것인가요?”
“이런 현상을 진지한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만 직접 상담을 하고 보니 중대한 질병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서는군요.”
“그렇죠? 제가 여기 오길 잘 한거죠?”
“댁의 남편은 지능형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습니다. 여기 카드내역을 살펴보면 아주머니께서 생각하듯이 단순히 만화만 보면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질펀하게 놀아납니다. 회사일로 바쁘다며 야근이나 철야를 하는 중이라고 명분 있는 얘기를 사전에 하겠지만 실상은 사냥감을 찾기 위해 물 좋은 나이트를 전전하고 사냥감이 포획되면 모텔에 들락거리는 것 같습니다. 세상사는 이치를 깨닫고 근검절약하고 오밀조밀하게 살아가는데는 낯선 반면 사물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앞일에 대한 우려를 전혀 하지 않고 순간의 쾌락에 몸을 맡기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위선적인 생활을 했었나요?”
“이것은 자생적으로 발생한 질병이 아닙니다. 자신이 책임져야할 의무를 대신 처리해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발생한 현실 도피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부인이든 부모형제든 이 질병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치료 방법은 없나요?”
“방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방만하게 살았던 결과를 자신이 고스란히 떠 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서 절망하여 자살하면 어떻하죠?”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요즘 한남대교에서 줄줄이 자살하는 사람들과 다른가요?”
“외형상으로 보면 비슷합니다만 자살이란 것은 극단적인 절망과 공허감이 만들어낸 행동인데 반해 남편의 경우에는 자신이 도피만 하면 누군가 나서서 문제점을 해결해 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자살까지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살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방치만으로 치료가 된다면 큰 질병은 아니군요?”
“사회적 병리현상에 의한 토착화되기 시작한 단순한 현상일 뿐이라고 믿고 싶습니다만 여기까지 찾아와 상담했으니 정밀한 신체 검사 통해 바이러스에 의해 뇌의 통제시스템이 붕괴된 것이 아닌가를 확인해야만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검사를 받죠.”
“전염병이란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되는 속도가 빠른 것을 말합니다. 본인이 아니더라도 부인을 검사하면 전염성 여부를 판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저도 그런 증상에 노출 됐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십 여번이나 반복된 남편의 행동에 대해 무관심하게 대응했다면 부인은 잠복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병은 수많은 절망감을 통해 숙성되고 결국에는 사회 현실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현상을 초래합니다.”
진료실의 벨을 눌렀다. 연구원들이 부인을 검사실로 데려간 후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 달간의 잠적 기간동안 이 여자의 남편은 무엇을 했을까? 신용카드의 화려한 내역을 보면 질펀한 생활을 했을 텐데 마지막 노출은 동네의 허름한 만화방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남자가 나이트클럽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곱게 빗질한 반 곱슬머리 아래는 약간 튀어 나온 이마가 시원하게 얼굴을 밝혔다. 위장된 모습으로 화려한 외모를 무기삼아 오늘 밤 살을 섞을 짝을 물색하기 위해 연신 눈자위가 돌아간다. 분홍색 투피스의 젊은 여자가 소리없이 자리에 앉는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눈빛만 쳐다본다. 어느새 음악이 바뀌면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가볍게 잡고 무대로 나선다. 은은한 가락에 몸을 싣고 비좁은 무대위를 빙빙 돈다. 살갑게 다가선 세포의 느낌을 위해 더욱 다가서며 호흡을 맞춰본다. 뜨거운 입맛춤이 시작되고 허리께를 안던 손은 어느새 엉덩이를 유영하듯 흐르고 있다. 단단한 육봉을 느낀 여자는 음악이 바뀌기 무섭게 나이트를 빠져 나간다. 언제나 연인들을 유혹하는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밝게 빛나는 모텔을 들어선다. 숨가쁘게 한 몸이 된 두 사람이 잠에 빠져든다. 날이 밝으면 다시 볼 필요 없는 남남이 되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를 으스러지게 끌어 안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 든다.
“박사님, 바이러스가 발견됐습니다.”
“어떤 종륜가?”
“신종입니다.”
“구조는?”
“예상했던 대로 세포에 기생하면 핵을 생산할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력이 있단 말인가?”
“보통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데기만 존재하는데, 이번에 발견된 바이러스는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핵을 창조하고 결국에는 인간의 뇌를 통제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기생충이 됐다는 말이잖나.”
“일정 개체수가 서로 꼬여 컨트롤 기능을 만들어 내는데 아직 여인의 몸 속에서 발견된 개체수로는 미성숙 단계입니다.”
“각 개체의 DNA 배열을 동일한가?”
“DNA 구조가 모두 다릅니다. 서로 다른 개체끼리 결합하여 완성된 DNA 구조를 창조하도록 된 블록 구조입니다.”
“뭐야? 그렇다면 감염된 인간은 형태만 유지할 뿐 뇌의 제어는 바이러스가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완전한 구조체를 이룰 수 있는 개체수로 성숙되면 인간의 몸은 껍데기 일 뿐 모든 의사결정은 새로운 생명체가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우주 창조의 과정이 아닐까요?”
“쓸데 없는 소리. 나약한 인간을 숙주로 삼아 새롭게 탄생된 바이러스에 불과하네.”
“치료 방법은 없을까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 만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 같군.”
“이미 감염된 사람들은 어떻하죠?”
“격리해야겠지.”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을까요?”
“글세, 숙주를 한 곳에 모아놓으면 일정 기간동안은 기승을 부리겠지만 숙주가 소멸하면 바이러스는 전파될 곳을 찾지 못하고 자멸하지 않겠나?”
“감염된 인간들을 어떻게 다 찾아내죠?”
“잠복기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꺼야. 하지만 모든 질병이 그렇듯이 반드시 치료할 방법도 발견되겠지.”
“이 아주머니를 격리할까요?”
“감염 경로는 어떻다고 생각하나? 신체 접촉을 통해선가?”
“아닙니다. 무형의 공간에서 창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겠군. 무생물 상태에서는 어디에서도 창조될 수 있지. 하지만 이미 성체로 자란 바이러스는 어떻게 전파될 것인가 하는 문젤세.”
“그건 성적 접촉을 통해서만 감염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성적 접촉을 통해 유전자가 전달되는 이치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큰 일이군.”
“성적 접촉을 통한 감염은 예방이 쉽지 않습니까?”
“요즘처럼 성적 개방이 보편화된 시대에 살면서 그런 소릴 하는가?”
새롭게 발견된 바이러스는 너무 일반화된 사회현상으로 비쳐지므로 이 여인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전세계에 전파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다행히 숙주인 상태에서 도 뇌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지 않은 성체를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또 한번의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질병에 감염되면 몸은 인간이되 정신은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인류의 멸종은 명확한 것이며 새롭게 세상을 지배하는 생명체는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너무 우연한 기회에 인류를 구해 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여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인은 손상되지 않은 나머지 뇌세포를 통해 완전하게 자리잡아 가던 바이러스를 공격하고 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새로 발견된 질병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누구도 인간이라면 가져야할 기본 품성에 대한 경계를 잊어서는 안된다. 너무 쉽게 무너저 내리는 인간의 의지를 부뜰어 매기 위해 무한한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서도 안된다. 자신에게 닥친 일은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만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을 갖게 된다. 여러분 주변에 나약한 심성으로 남에게 지나친 의존을 하거나 책임을 떠 맡기려는 자가 있다면 가까운 전염병정보국에 신고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끝.
베트남 북부 타이빈현의 신혼 부부에게서 시작된 조류독감은 태국으로 전파돼 방콕에서 서쪽으로 3시간쯤 차를 몰아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무대로 유명한 캍차나부리에서 2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수백명의 유사 환자가 생겼다.
아프리카의 풍토병으로만 알려진 웨스트 나일 뇌염은 미국 애틀랜타의 질병통제본부 전염병정보국 사무실 상황판을 온통 시뻘겋게 만들었다. 1999년 8월 뉴욕에서 처음 발병한 괴질이 전국 44개 주로 확산됐다는 표시였다. 현재 미국에선 매년 4000~5000명의 환자가 발생하며 치사율은 50% 이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 전염병인 에볼라는 1976년 아프리카 수단과 자이르의 시골 마을 주민과 의료진 397명을 몰살시키면서 출현했으나 거짓말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1995년 자이레에서 재차 발생해 244명의 사망자를 냈고, 1996년에는 가봉에서도 발병했으며 치사율 90%의 치명적 질병이다.
유럽은 광우병이 유행하고 미국․아르헨티나․일본 등지에선 O-157균 감염증도 확산되고 있다. 에이즈의 경우 지금껏 2000만 명 정도가 사망했고 약 4000만 명의 환자가 생존해 있다.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전염병이 세계 도처에 등장해 확산되고 결핵, 페스트, 말라리아 같은 오래된 전염병도 부활하고 내성 때문에 점차 항생제는 위력을 잃어가고 있다.
EIS(전염병정보국) 요원으로 세계 각국의 질병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활약한 경험을 갖고 있는 내게도 이번에 발견한 질병 앞에서는 속수 무책이었다.
이 질병의 증상은 본인에게는 전혀 무해하면서 타인에게는 치명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핵과 미토콘드리아를 갖고 있는 세균과 달리 DNA와 RNA로 구성된 핵산과 이를 둘러싼 단백질껍질로만 구성된 관계로 무생물 분류될 수 있지만 사람에게 감염되면 세포에 기생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증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간혹 새로운 유전자로 변형되면 돌연변이를 일으켜 치명적인 증상으로 주변인물에게 상처를 남긴다.
내가 이 질병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중년이 채 안돼 보이는 여자가 상담실을 찾아왔다. 남편이 이틀째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일로 전염병정보국에 와서는 안된다며 가까운 파출소에 가출 신고를 할 것을 권했지만 여자는 얼굴 표정이 순간적으로 파리해지며 경찰이 할 일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확신에 찬 어조로 분명하게 말하는 여자의 표정으로 볼 때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질병이 아니라고 단정지었던 짧은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커피포트에서 따뜻한 커피를 따라 잔을 건내자 여자는 다소 진정이 되는지 굳은 표정을 풀며 입김을 후후 불어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기 시작했다. 경찰을 찾지 않고 이 곳을 찾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 나는 의자를 고쳐 바짝 책상에 붙혀 앉고 여자의 얘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자상한 아빠, 다정다감한 남편이다가도 어느 날 소리 소문없이 잠적해선 몇 일만에 돌아와요.”
“아, 전력이 있군요?”
“들어와선 한마디 변명도 없이 바가지 욕을 다 감당해내죠.”
“왜 가출했는지 이유를 말 안해요?”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평소 하던 일에 매달려 살아요.
두어 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다간 또 소리 없이 사라지곤 하죠.”
“그럼 지금은 가출한 상탠가요?”
“네, 한 달만에 돌아와선 또 가출한지 이틀 됐어요.”
“예전에도 그 정도 터울로 돌아왔다면서요?”
“이번엔 달라요. 집에 들어온지 겨우 이틀 밖에 안된 상태에서 또 나갔으니까요.”
“부부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없어요. 아무런 이유가 없다니까요.”
“문제라는 것은 당사자들은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왜 나갔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아야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여기 온 이유도 그걸 몰라서 온거에요.”
“그런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서 전염병정보국에서는 해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도와 주세요.”
여자는 신경질 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얘기를 중간에 끊어 버리는 나의 대화 방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비록 이른 아침시간에는 정보국 업무가 한가하지만 수없이 쌓여있는 임상실험결과를 검토해야 하고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날 새로운 질병에 대한 경계와 숙주 차단을 위해 전국을 헤메야 하는 나로서는 사사로운 집안 일을 갖고 이 곳까지 찾은 여자를 빨리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현판을 보고 아셨겠지만 여기는 전염병을 감시하는 곳입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이곳에서 취급할 사안이 아닌 것 같군요.”
“제 얘길 조금만 더 들어보고 판단하시면 안되겠어요?”
진지하게 자신의 얘기를 들어 줄 것을 호소하는 여자를 위해 일어서려던 자세를 다시 고쳐 앉고 다음 얘기를 듣기로 했다.
“결혼한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십년째에요.”
“이런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죠?”
“스무번도 넘어요.”
“두어달에 한번씩 가출 했으니까 삼년 반전부터 그런 셈이군요?”
“맞아요. 삼년전 어느날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가 몇 일 만에 돌아온 적이 있어요.
세상이 복잡하고 사고도 많아서 혹시 사고난 것 아닌가 싶어 엄청 걱정했었어요.
가출 신고도 하고 언론사에도 찾아가서 사건사고를 일일이 캐 묻고 난리를 쳤었었는데 몇일 만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집에 들어왔어요.“
“가출 이유를 말하던가요?”
“아뇨, 집에서 난리를 쳤는지 굿을 했는지 모른척하고 태연스럽게 들어왔죠. 딴 년이랑 살림 차린 줄 알고 몇 일 밤을 달달 볶아 잠도 안 재우고 난리를 쳤지만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일상 생활을 하더군요.”
“그때 원인을 확실히 파악해 놨어야 하는건데 기회를 놓쳤군요?”
“말이 없어요. 그 일 이후에 더 자상하고 더 사랑하고 더 참고 살길래 잊어버렸죠.”
“그럼 두 번째 가출 한 것은 언젭니까?”
“두달이 됐을까? 토요일에 애가 아파서 병원엘 다녀오는 사이에 없어졌어요.”
“토요일이면 병원엘 같이 가지 그랬어요?”
“감기라서 동네 병원에 다녔거든요. 그래서 애만 데리고 갔던거죠.
잠시 마실 나갔나 싶어 신경도 안쓰고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났는지 뉘엿뉘엿 해가 질 때가 되도 나타나지 않는거에요. 더럭 겁이 났지만 행복한 시절이라 금방 돌아오겠지 하는 믿음이 더 강했죠.”
“그땐 몇 일 만에 돌아왔죠?”
“삼일만에 돌아왔어요. 새벽녘인데 땀 냄새로 찌들어서 가까이 할 수도 없었어요. 잠결에 들어온 사람이 하도 피곤해 보여서 안 좋은 일이 생겼나 걱정이 앞서는 통에 감히 입도 못 열고 있는데 목욕탕에 들어가더니 샤워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더니 회사 일이 급해서 출근해야겠다며 나가더군요. 저는 회사일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몇 일 밤 꼬박 새우고 온 줄 알았어요.”
“회사로 전화는 해 봤나요?”
“회사에서 남편이 가출했다면 가만있겠어요?”
“그렇군요.”
“아무튼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안쓰러워서 정오쯤 회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남편이 받더라고요. 가슴이 찡 한게 우리 그이가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느라 못들어왔던 것이구나 싶어 그동안 가슴에 멍든 응어리가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걸 느꼈었죠.”
“그 다음엔 언제 가출했죠?”
“추운 겨울이었어요. 몸이 찌뿌등한게 눈이 많이 왔나 보다 싶어 창 밖을 내다보니 거리가 온통 흰눈으로 덮였더군요. 몸이 피곤해서 눈을 잠시 다시 붙였나 싶었는데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어요. 서둘러 남편을 깨우고 회사에 늦어서 미안하다고 전화하라고 시키고 난리 법석을 떤 뒤에 등 떠 밀다 시피 출근 시켰어요. 회사까지 평소에는 한시간 정도 걸리는데 눈이 많이 온 날은 두시간도 넘게 걸리겠다 싶더군요. 조심해서 운전하라고 몇 번을 당부하고 들어왔는데 오후 늦게 회사에서 전화가 왔더군요.”
“또 두 달이 됐나보죠?”
“네, 출근하다 눈길에 사고 난 것 아닌가 싶어 뉴스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봤지만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은 없었어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놓곤 경찰서며 병원엘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찾아 헤멨지만 찾을 수 없더군요.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얼어 죽은 것은 아닐까? 온갖 망상을 다 하며 망연자실 하는데 시어머니 마저 눈 오는날 등 떠밀어서 회사 보내니까 사고난 것이라고 난리를 쳤어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눈비 가려가며 출근하는 것 아니잖아요.”
“아무튼 열흘쯤 난리를 쳤을까? 슬그머니 새벽에 기어 들어왔더군요. 추워서 오돌오돌 떠는 몸에선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양말을 한번도 안 갈아 신었는지 발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방안을 오염시키는데 코가 맹맹하고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죠. 그날도 들어서자 마자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더니 출근해야 한다며 빠져 나갔어요.”
“뭔가 결판을 내야 할 때가 아녔던가요?”
“꼭두 새벽에 들어와요. 곤히 잠든 시간에 나타나선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자기 할 일만 서둘러 하곤 빠져 나가죠. 그런 날 저녁땐 장난감이랑 먹거리를 잔뜩 사들고 와선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족들에게 너무 잘 하는거 있죠?”
“그 때도 가출 이유를 묻지 않았나요?”
“물었죠. 하지만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모든 일에 애정을 쏟으며 너무 잘하는 바람에 슬그머니 없었던 일로 덮어 버렸어요.”
“가출한 기간 동안 뭘 했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딴 여자가 생겨서 살림을 차린 걸까 하는 의심에서 부터 시작해서 교통 사고로 죽거나 길거리에서 쓰러저 자다 얼어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안해 본 상상이 없어요.”
“상상속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군요?”
“인물이 훤하긴 해도 여자를 밝히는 편은 아니에요. 저랑 잠자리에 들 때도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오히려 저였으니까요. 정상체위 외에는 모르는 쑥맥이거든요.”
“신용카드 이용명세를 확인해 본다든지 통장내역을 확인해 보지는 않았나요?”
“거기까진 안해 봤어요.”
“반복적으로 가출할 때 마다 파출소에 신고 하고 계시죠?”
“아뇨, 이젠 몇일 있다 들어오겠지 하는 마음에 가출 신고를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단련이 된 마당에 저희 전염병정보국을 찾은 이유를 모르겠군요. 제 생각엔 단순한 스트레스를 못 이기는 정도의 증상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병원의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열 번쯤 가출했을 땐가? 가족의 어른들과 상의해서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적이 있었는데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판단을 받았을 뿐이에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판단을 받았는데도 반복적으로 가출을 일삼는단 말이죠?”
“네, 친구들도 가출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남편이 사라지고 나면 여기저기 전화를 해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더군요.”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습니다. 분명 발견되지 않은 스트레스성 원인에 의해 반복적인 가출을 유도한다고 봐야겠죠.”
“모두 다 그런 말들을 해요. 그래서 더 힘들어요. 시어머니는 박봉에 시달리는 남편 사정도 모른 채 과소비를 하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 것이라며 난리를 치죠. 직장에선 제발 부부싸움 하지 말라며 은근히 책임을 저에게 돌리죠. 친구들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집을 나갔을 것 아니냐며 싸우지 좀 말라고 충고 하죠. 정말 원인 제공 한 적도 없고, 그런 오해를 받고 살기도 싫어요.”
“지금 가출 상태라고 하셨죠?”
“네.”
가정을 가진 중년의 남자가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어떤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번의 실행만으로도 가족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면 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리 없이 몇 일간 여행을 다녀올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행위가 반복적이라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우주인과 정기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순간 머리가 쭈삣 일어서며 더 많은 상황을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출한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전혀 모릅니까?”
“스무 번도 넘게 물어봤지만 한번도 대답한 적이 없어요. 언제 가출한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일상 생활에 푹 파뭍혀 살기 때문에 속이 문드러질 정도로 울화가 치밀어도 가출 한 동안의 행적을 밝혀 내질 못했어요.”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을 것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중년의 남자가 한달 동안 머물만한 곳이 없군요. 심야사우나를 들락거려도 하루 이틀, PC방에서 죽 때린다 해도 몇일 밤을 새우고 나면 어깨쭉지가 아프고 만화방에서 줄창 만화를 본다해도 신간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한 일주일 이상은 못 버틸텐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아, 맞아요. 한 번은 친구들을 동원해서 이곳 저곳을 찾다보니 어느 지하실 만화방에서 먹고 자고 하는 남편을 찾아 낸 적이 있어요. 남편은 게을러서 활달한 운동량이 필요한 어떤 것도 안하는 성격인데 만화방에서 발견하는 순간 역시 큰 사고칠 사람은 아니구나 싶더군요.”
만화방에서 발견된 것은 의도적인 미끼일 뿐이다. 그 사람은 더 깊은 사연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만화방이라는 장소에 자신을 노출 시킴으로써 가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긴장을 해소시켜 주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 범위는 단지 동네 만화방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었으며 그동안 축적된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가장 저렴한 방법을 택했을 뿐이라는 것을 몸으로 강변했을 뿐이다. 이 사람에게 숨겨진 내면의 음모를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한다면 반복적인 가출 행위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며 사라진 날들 속에 은밀히 진행된 어떤 행위들 역시 은폐되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태도를 단순하게 보면 잘못된 습관에 불과하지만 고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현대인의 보편적인 자기 도피를 위한 행위로 규정한다면 뇌 속에서 기생하며 행위자의 의지를 무력화 시키는 새로운 질병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 됨으로써 사회 전체의 활력이 저해된다면 인류의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뇌의 행동제어 시스템에 간섭하는 신종 바이러스로 밝혀 진다면 전염성의 위험에 의해 인류문명은 곤두박질 처질 위기에 노출 될 수도 있다.
“신용카드 번호 좀 불러보세요.”
전염병정보국의 컴퓨터는 전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뒤질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보안 담당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방어벽을 쌓는 것은 일반인과 해커들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국가기관 특히 정보국의 컴퓨터로부터 접근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어떤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은 기법이기도 하지만 운영체계를 설계할 때부터 정부기관의 접근은 정상적인 운영체계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특수코드가 입력되면 어떠한 어플리케이션으로도 침입을 감지해 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정보국의 컴퓨터가 전세계의 어떠한 컴퓨터에 접속되더라도 프리빌리지 최상단에 위치시킬 수 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하드디스크는 물론 데이터베이스 접근권한과 모든 입출을 관장하는 로그 정보까지 뒤질 수 있게 됨으로써 전 세계의 정보를 한눈에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 받은 컴퓨터는 카드사의 메인컴퓨터에 연결됐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화면에 나타난 카드 정보와 이용명세를 훑어보니 연체횟수 50번, 미결제액 5백만원, 신용불량등재자 등의 정보가 화면에 들어왔다. 월평균 모텔이용횟수 5회, 나이트클럽 3번, 일식집 4번, 백화점 쇼핑 10회 등도 눈에 띄었다.
“댁의 남편은 단순한 과소비형 인간일 뿐입니다.”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하시죠?”
“남편의 머리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를 염두에 두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여기 모니터에 나타난 자료에 의하면 댁의 남편은 카드청구액이 감당하기 어렵다 싶으면 잠적하는 것 같습니다. 평소 카드 연체 때문에 고민한 적이 많지요?”
“아뇨. 전혀 그런 일 없어요. 카드 연체라뇨. 그 사람은 게으르지만 깔끔한 성격이라서 남의 빚을 질 사람이 아니에요. 결혼해서 단 한번도 비싼 옷을 사 본 적이 없으니까요.”
“부인의 무관심이 나쁜 습관을 키운 것 같습니다. 처음 가출했을 때 철저하게 이유를 묻고 책임을 따졌어야 했어요. 함구한다는 이유만으로 귀찮아서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를 키운 것이죠.”
“혜안을 갖고 계실 것이라 믿었던 박사님 마저 저에게 책임을 돌리는군요. 분명히 말하건데 남편의 일은 신종 질병이 확실합니다.”
“카드연체를 모르셨다면 뻔한 월급에서 어떻게 갚아 나갔을까요?”
“맞아요. 시어머니가 대신 갚아 준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남편의 증상은 문제가 발생하면 피해 버리는 유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겪기 싫은 일이 생기면 눈을 감아 버리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문제가 사라진다고 믿는 마음 때문입니다. 남편의 경우도 자신만 사라지면 누군가가 문제를 대신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마음이 강합니다. 카드가 연체되더라도 그리 볶이지 않다가 두 달째가 되면 독촉 강도가 심해지죠. 그 걸 피해서 사라지면 누군가가 대신 카드 빚을 갚아줬던 기억 때문에 반복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어린애 같은 증상이네요.”
“그렇습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질병으로 풍토병처럼 토착화되는 추세입니다.”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큰 문제는 없는 것인가요?”
“이런 현상을 진지한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만 직접 상담을 하고 보니 중대한 질병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서는군요.”
“그렇죠? 제가 여기 오길 잘 한거죠?”
“댁의 남편은 지능형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습니다. 여기 카드내역을 살펴보면 아주머니께서 생각하듯이 단순히 만화만 보면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질펀하게 놀아납니다. 회사일로 바쁘다며 야근이나 철야를 하는 중이라고 명분 있는 얘기를 사전에 하겠지만 실상은 사냥감을 찾기 위해 물 좋은 나이트를 전전하고 사냥감이 포획되면 모텔에 들락거리는 것 같습니다. 세상사는 이치를 깨닫고 근검절약하고 오밀조밀하게 살아가는데는 낯선 반면 사물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앞일에 대한 우려를 전혀 하지 않고 순간의 쾌락에 몸을 맡기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위선적인 생활을 했었나요?”
“이것은 자생적으로 발생한 질병이 아닙니다. 자신이 책임져야할 의무를 대신 처리해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발생한 현실 도피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부인이든 부모형제든 이 질병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치료 방법은 없나요?”
“방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방만하게 살았던 결과를 자신이 고스란히 떠 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서 절망하여 자살하면 어떻하죠?”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요즘 한남대교에서 줄줄이 자살하는 사람들과 다른가요?”
“외형상으로 보면 비슷합니다만 자살이란 것은 극단적인 절망과 공허감이 만들어낸 행동인데 반해 남편의 경우에는 자신이 도피만 하면 누군가 나서서 문제점을 해결해 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자살까지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살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방치만으로 치료가 된다면 큰 질병은 아니군요?”
“사회적 병리현상에 의한 토착화되기 시작한 단순한 현상일 뿐이라고 믿고 싶습니다만 여기까지 찾아와 상담했으니 정밀한 신체 검사 통해 바이러스에 의해 뇌의 통제시스템이 붕괴된 것이 아닌가를 확인해야만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검사를 받죠.”
“전염병이란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되는 속도가 빠른 것을 말합니다. 본인이 아니더라도 부인을 검사하면 전염성 여부를 판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저도 그런 증상에 노출 됐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십 여번이나 반복된 남편의 행동에 대해 무관심하게 대응했다면 부인은 잠복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병은 수많은 절망감을 통해 숙성되고 결국에는 사회 현실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현상을 초래합니다.”
진료실의 벨을 눌렀다. 연구원들이 부인을 검사실로 데려간 후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 달간의 잠적 기간동안 이 여자의 남편은 무엇을 했을까? 신용카드의 화려한 내역을 보면 질펀한 생활을 했을 텐데 마지막 노출은 동네의 허름한 만화방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남자가 나이트클럽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곱게 빗질한 반 곱슬머리 아래는 약간 튀어 나온 이마가 시원하게 얼굴을 밝혔다. 위장된 모습으로 화려한 외모를 무기삼아 오늘 밤 살을 섞을 짝을 물색하기 위해 연신 눈자위가 돌아간다. 분홍색 투피스의 젊은 여자가 소리없이 자리에 앉는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눈빛만 쳐다본다. 어느새 음악이 바뀌면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가볍게 잡고 무대로 나선다. 은은한 가락에 몸을 싣고 비좁은 무대위를 빙빙 돈다. 살갑게 다가선 세포의 느낌을 위해 더욱 다가서며 호흡을 맞춰본다. 뜨거운 입맛춤이 시작되고 허리께를 안던 손은 어느새 엉덩이를 유영하듯 흐르고 있다. 단단한 육봉을 느낀 여자는 음악이 바뀌기 무섭게 나이트를 빠져 나간다. 언제나 연인들을 유혹하는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밝게 빛나는 모텔을 들어선다. 숨가쁘게 한 몸이 된 두 사람이 잠에 빠져든다. 날이 밝으면 다시 볼 필요 없는 남남이 되기 위해 두 사람은 서로를 으스러지게 끌어 안고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 든다.
“박사님, 바이러스가 발견됐습니다.”
“어떤 종륜가?”
“신종입니다.”
“구조는?”
“예상했던 대로 세포에 기생하면 핵을 생산할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력이 있단 말인가?”
“보통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데기만 존재하는데, 이번에 발견된 바이러스는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핵을 창조하고 결국에는 인간의 뇌를 통제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기생충이 됐다는 말이잖나.”
“일정 개체수가 서로 꼬여 컨트롤 기능을 만들어 내는데 아직 여인의 몸 속에서 발견된 개체수로는 미성숙 단계입니다.”
“각 개체의 DNA 배열을 동일한가?”
“DNA 구조가 모두 다릅니다. 서로 다른 개체끼리 결합하여 완성된 DNA 구조를 창조하도록 된 블록 구조입니다.”
“뭐야? 그렇다면 감염된 인간은 형태만 유지할 뿐 뇌의 제어는 바이러스가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완전한 구조체를 이룰 수 있는 개체수로 성숙되면 인간의 몸은 껍데기 일 뿐 모든 의사결정은 새로운 생명체가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우주 창조의 과정이 아닐까요?”
“쓸데 없는 소리. 나약한 인간을 숙주로 삼아 새롭게 탄생된 바이러스에 불과하네.”
“치료 방법은 없을까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 만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 같군.”
“이미 감염된 사람들은 어떻하죠?”
“격리해야겠지.”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을까요?”
“글세, 숙주를 한 곳에 모아놓으면 일정 기간동안은 기승을 부리겠지만 숙주가 소멸하면 바이러스는 전파될 곳을 찾지 못하고 자멸하지 않겠나?”
“감염된 인간들을 어떻게 다 찾아내죠?”
“잠복기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꺼야. 하지만 모든 질병이 그렇듯이 반드시 치료할 방법도 발견되겠지.”
“이 아주머니를 격리할까요?”
“감염 경로는 어떻다고 생각하나? 신체 접촉을 통해선가?”
“아닙니다. 무형의 공간에서 창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겠군. 무생물 상태에서는 어디에서도 창조될 수 있지. 하지만 이미 성체로 자란 바이러스는 어떻게 전파될 것인가 하는 문젤세.”
“그건 성적 접촉을 통해서만 감염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성적 접촉을 통해 유전자가 전달되는 이치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큰 일이군.”
“성적 접촉을 통한 감염은 예방이 쉽지 않습니까?”
“요즘처럼 성적 개방이 보편화된 시대에 살면서 그런 소릴 하는가?”
새롭게 발견된 바이러스는 너무 일반화된 사회현상으로 비쳐지므로 이 여인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전세계에 전파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다행히 숙주인 상태에서 도 뇌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지 않은 성체를 발견함으로써 인류는 또 한번의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질병에 감염되면 몸은 인간이되 정신은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인류의 멸종은 명확한 것이며 새롭게 세상을 지배하는 생명체는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너무 우연한 기회에 인류를 구해 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여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인은 손상되지 않은 나머지 뇌세포를 통해 완전하게 자리잡아 가던 바이러스를 공격하고 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새로 발견된 질병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누구도 인간이라면 가져야할 기본 품성에 대한 경계를 잊어서는 안된다. 너무 쉽게 무너저 내리는 인간의 의지를 부뜰어 매기 위해 무한한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서도 안된다. 자신에게 닥친 일은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만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을 갖게 된다. 여러분 주변에 나약한 심성으로 남에게 지나친 의존을 하거나 책임을 떠 맡기려는 자가 있다면 가까운 전염병정보국에 신고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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