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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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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80회 작성일 20-01-1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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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사이에 행복이란 말보다는 감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 눈빛만 보아도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서로가 기다려지고 보고 싶은 것이고, 두려움보다는 가슴을 열고 속삭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존재한다.

한해가 저물고 또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한해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지나간 한 해의 고통보다는 새로운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한다. 희망이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늘 새로운 길에 시작된다. 희망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느낄 때 봄을 맞이하는 새싹처럼 피어난다.

지선은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의 따스함을 느끼고 있다. 창문으로 보이는 골목길의 나무 가지에 싹이 움트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벼워 보인다. 봄이 오려나보다. 요즘 너무 한가롭다는 것을 지선은 느낀다. 생활비도 상민이 도와주고 있어 소품을 만들지 않고 있어 그녀는 시간의 여유가 많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또 다른 희망에 부푼다고 하지만 지선은 자신의 희망이 무엇인지 막연하다. 희망이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늘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 희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한 욕망을 가질 수 있을 때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선은 막연하게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남편에게 애정을 느낄 수도 없고 내일의 삶이 불안한 그녀에게 뚜렷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상민의 애정과 남편의 무관심 사이에 있는 지선은 고통스러운 시간인지 모른다. 다만 마음이나마 그녀가 의지 할 수 있는 상민이 있어 고통스러움을 잊을 수 있다.

햇살이 따스한 정오에 집안 청소를 하던 지선은 소파에 앉아 상민의 방을 바라본다. 대학의 수시입학에 합격한 상민은 강의를 받으러 캠퍼스로 가고 없었다. 들고 있던 청소기를 던진 지선은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는다. 양손으로 눈을 가린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고민에 빠져 있다.

취업을 하려고 다니던 남편이 드디어 직장을 구했다는 말에 반가워야할 지선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일주일 전이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온 남편을 보고 지선은 긴장이 되었다. 평상시와 다르게 희색이 떠오른 남편의 얼굴을 보고 지선은 의아하게 느꼈다. 송이를 안고 있는 지선에게 남편이 불쑥 무뚝뚝하게 말했다.

“포항에 선박 만드는 조선회사에 취직이 됐으니, 내려갈 준비해.”
“뭐라고요.......!? 집은 어떻게 하고요?”
“거기 직원 사택이 있으니 잘됐어, 집은 정리해서 은행부채를 갚아야지.”
“네.........!?”

남편의 갑작스런 말을 듣는 순간 지선은 멍하니 넋을 잃었었다. 물론 남편이 취업을 하기를 바랐던 그녀였다. 그러나 포항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상민의 곁을 떠난다는 것이다. 상민이 어떻게 받아 드릴지. 과연 상민을 떠날 수 있는지. 집을 정리하면 상민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어쨌든 복덕방에 집을 내놓기는 했으나, 혼란스러운 지선은 상민에게 아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쩌면 짧지 않은 시간동안 상민의 눈빛 속에 살아온 그녀였다. 그녀는 그동안 상민이 얼마나 안식처가 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상민의 여자가 된다는 것도 전혀 예기치 않은 우연이지만 그녀는 상민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더욱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다. 물론 감정에 휘말려 허물 수 없는 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애정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상민의 곁을 떠나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만큼 상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것을 지선은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런 지선의 마음을 모르는 상민은 날이 갈수록 깊은 애정을 표시한다. 포항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다정하게 대하는 상민이 두려워진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지선은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상민에게 말할 수 없다.

갈등에 쌓인 지선의 하루하루는 지옥 같다.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이 거실 유리창에 흘러내리고 있다. 요즘 소품을 만들지 않기에 은주엄마가 찾아오는 것도 뜸해졌다. 남편은 희망으로 가득하지만 생동감을 잃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집안일을 한다. 어떤 마음의 결정도 내릴 수 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핏기마저 사라졌다. 안방에서 잠들었던 송이가 깨어나서 거실로 기어 나온다.

송이를 안아서 올린 지선은 힘없이 소파에 앉는다. 송이가 상민을 닮았다고 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 올려진다. 현관의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상민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지선은 반가움과 두려움이 엇갈렸다. 송이를 안고 액정화면을 들여다본다. 상민이 아니고 낯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세요?”
“복덕방에서 왔습니다.”

공연히 지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관문을 열어주니 젊은 남녀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지선은 비로소 복덕방에 집을 내놓은 것을 의식했다. 복덕방 노인의 얼굴에는 지나간 세월만큼 주름이 깊어 보였다. 노인이 지선에게 직업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 내 노셨지요?”
“네........”

두 남녀의 시선이 현관문 안의 집안으로 향한다. 집을 내놓기는 했으나 지선은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간직하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심정이었다. 습관적으로 말투를 흘리는 노인은 당연한 것처럼 현관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젊은 남녀에게 손짓해서 안내한다.

“들어가 보세요. 거실 창문이 남향이고 북쪽의 주방에서 공원이 보여 좋습니다.”
“실례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두 젊은 남녀가 거실로 들어선다. 그들이 방과 세면장, 그리고 방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젊은 남녀에게 복덕방 노인은 묻지도 않는 말들로 설명을 한다.

“집도 깨끗하고 신혼부부가 살기에 아주 좋습니다. 요즘 이런 집을 구하기도 힘들지요.”

방마다 유심히 살피는 젊은 남녀는 무척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지선은 상민의 방을 살피는 그들에게 숨겨진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젊은 남녀는 들여다 본 방을 다시 보면서 세심하게 살폈다. 젊은 여자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깨끗하고 아담해서 좋지?.”
“나도 좋지만 자기 마음에 들면 되지, 뭐.”

젊은 남녀는 서로 마주보며 미소를 흘렸다. 지선은 마주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따뜻한 정감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몇 번인가 거듭해서 집안을 살펴보며 머뭇거리던 그들과 복덕방 노인이 갔다. 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지만 그래도 희망에 부풀어 남편과 집을 보러 다니던 기억을 떠올렸다.

막상 정들었던 집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지선은 서운함에 젖는다. 그녀는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자신의 손때가 묻은 집안을 서성거렸다. 삼십분 가량 지나고 전화벨이 울렸다. 특별하게 전화가 걸려올 곳이 없는 지선은 송이가 깰 것이 두려워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송이네 집입니다.”
“조금 전에 집을 보고 간 복덕방입니다.”
“아~! 네.”
“집을 보고 간 사람들이 집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군요.”

“네.”
“그런데........ 신혼살림을 차리기에 돈이 모자란다고 깎아 줬으면 하는데.”
“그건 저도 사용할 때가 있어 곤란해요.”
“요즘 부동산 시세가 들쑥날쑥해서 이사철에 얼른 작자가 있을 때 팔아야 합니다.”
“어쨌든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럼, 할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하지요.”

전화기를 내려놓는 지선은 긴장이 되었다. 어쩌면 대책 없으면서 집이 팔리지 않았으면 하는 미음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송이를 데리고 낯선 곳에 가서 남편과의 삭막한 생활을 상상한다.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 같은 하루하루를 생각하니 온 몸의 맥박이 멈추며 힘이 빠졌다. 그러나 십분도 안 돼서 계약을 하자는 부동산의 연락이 왔다.

평상시 남편과 자주 전화연락을 하지 않았던 지선이지만 남편에게 전화로 했다. 내용을 말했더니 남편은 얼른 계약을 하지 전화를 거느냐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송이를 안고 부동산으로 가는 지선은 어딘가 쫓겨나는 심정이었다. 부동산에서 젊은 남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격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에 한 달이내 집을 비워 달라고 했다. 남편을 대신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지선의 손이 떨렸다.

집으로 돌아온 지선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더욱 긴장이 되었다. 이제는 상민에게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상민을 기다리는 지선의 마음은 바늘방석에 앉은 심정이다. 스스로 침착하고 냉정해져야 한다면서도 지선은 다른 집의 초인종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란다. 드디어 차임벨 소리가 들렷다.

송이를 안고 일어선 지선은 액정화면을 들여다봤다. 상민이 틀림없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냉정해져야한다고 스스로를 다짐한 지선은 현관문 스위치를 누르고 소파에 앉는다. 환한 미소로 집안으로 들어온 상민이 평상시나 다름없이 지선의 옆에 와서 앉았다. 그녀는 상민에게 시선도 안주고 송이만을 내려다봤다.

“우리 송이 엄마하고 잘 놀았어!”
“업 빠! 어 빠........”

천진난만한 송이는 방긋거리며 상민에게 팔을 벌린다. 상민은 송이를 끌어안으며 흔들었다. ‘침착해야 돼. 난 지금 조카를 대하고 있을 뿐이야. 냉정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는 지선이지만 숨을 쉴 수가 없다. 지선은 상민의 훈훈한 체취가 다른 날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상민은 왠지 창백해 보이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어디 아파!?”
“아니.........”
“그런데 왜 힘들어 보여?”

상민이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지선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상민의 팔을 밀어냈다. 상민은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지선의 차가운 표정에 당황스러웠다. 외면하고 있지만 상민의 눈빛을 의식하는 지선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감정이 없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외삼촌이 포항에 있는 직장에 취직이 됐어. 집도 팔기로 계약했고.”
“포항........!?”

갑작스런 외숙모의 말에 상민은 온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심정이었다. 깊어가는 애정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던 상민은 그녀와 이별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상민은 너무 현실을 벗어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외삼촌의 취직을 축하해 주어야 마땅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는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상민은 눈앞이 캄캄했다.

창문으로 시선을 향한 지선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상민도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간 상민은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얼마 전부터 인가, 외숙모 지선의 얼굴에 왠지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보였던 이유를 상민은 알 수 있었다. 싸늘하게 변하는 그녀의 표정,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냉정하게 변할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상민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여자의 본능에 비해 남자가 너무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의 최초 애인이고 여자의 모든 것을 원하지만, 어리석은 허영심이고, 여자는 빈틈없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여자가 언제나 바라는 것은 남자의 마지막 애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각자의 생각에 빠진 상민과 지선은 침묵에 빠져 들었다.

지선의 진심을 알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상민은 방안을 맴돌다가 거실로 나갔다. 지선은 세탁물을 정리하고 있었고, 혼자 재롱을 부리고 있던 송이가 상민을 향해 바닥을 기어왔다. 송이를 안은 상민이 소파에 앉아 세탁물을 정리하는 지선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상민이 어떤 말로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지 머뭇거렸다. 그러나 세탁물 정리를 끝낸 지선이 상민의 가슴에 있는 송이를 슬그머니 안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상민은 스쳐가는 그녀에게서 찬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의식했다. 고양이는 아홉 개의 목숨을 지녔고 여자는 아홉 마리 고양이 목숨을 지녔다는 말을 떠올리는 상민은 고개를 저어 부정한다. 그동안 허물 수 없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은밀한 사랑에 깊이 빠졌던 시간이었다. 비록 주위의 시선이 두려웠으나 열정으로 가득했던 시간이 하루아침에 집안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썰렁해졌다.

지선의 태도 변화에 실망스러운 상민은 며칠 동안을 고민했다. 혼자서 각가지 생각을 하던 상민은 가슴이 저리고 아프지만, 사랑하는 여자이기에 외숙모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의 애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지선은 상민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감정을 들어낼 수 없어 침묵하는 상민과 지선의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술을 잘 마시지 않던 상민이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지선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괴로웠다. 그녀로서는 어떤 때보다도 힘겨운 한 주일이었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지선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편을 묵묵히 맞이했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귀가한 경호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아내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소파에 앉아 아내의 표정을 살피는 경호는 남편으로서의 관심을 보이고 싶었다. 그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송이를 슬그머니 들어서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디보자! 우리 송이 많이 컸네.”

지선은 평상시 보지 못하던 남편의 행동을 힐끔 바라봤다. 송이의 재롱을 바라보던 경호는 소파에 앉아 세탁물을 정리하고 있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면장에서 나온 상민은 외삼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상민의 방문을 바라보던 경호가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다.

“상민이한테 포항 내려간다고 말한 거야?”
“..........”

지선은 대답도 하지 않고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침묵이 흐르고 아내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경호는 짜증이 났다. 이맛살을 찌푸린 경호는 말을 하지 않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그가 직접 상민의 어머니인 큰 누나에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채를 값아 주던 누나에게 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경호는 상민의 방문을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

“상민아! 뭐하니?”
“네~!”

그렇지 않아도 거실의 동태에 민감하던 상민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상민은 외삼촌에게 등을 돌리고 앉은 지선을 의식하며 침체된 분위기를 느꼈다. 올려다보는 외삼촌의 날카로운 시선에 상민은 잠시 주춤거렸다.

“무슨 할 말이 있으세요?”
“외숙모가 말하지 않았니?”
“무슨 말인지........”
“내가 취직이 돼서 포항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아! 그 말 들었어요.”
“너는 어쩔 셈이냐?”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어요. 전세방을 얻어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 어머니가 다른 말 안하시더냐?”

“별다른 말씀은 없고. 취업이 되셨으니 잘 됐다고 하시더군요.”
“내가 계속 편리를 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해해 주니 고맙다.”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한 상민의 시선이 외삼촌의 가슴에 안긴 송이를 향한다. 그리고 송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빙긋이 웃는다. 경호는 떳떳하게 말하고 축하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상민에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그는 왠지 열등감을 느꼈다.

듣고 있는 지선은 어깨를 늘어트린 남편이 측은해 보였다. 어찌되었든 조카를 데리고 있었는데 도리어 미안하다거나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하는 남편의 말이 지선에게는 비굴하게 느껴졌다. 경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자재과 책임자로 발령 받아서, 난 요즘 바쁘다. 내일은 포항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가야 돼. 저녁에 식사라도 접대하려면 모레나 올 거야. 그리고 출근하기 전에 다음 주에는 이사를 가야 돼”
“아! 네..........”

경호는 자신의 직책을 자랑하고 싶어서 책임자라는 말을 강조했다. 무능한 실업자가 되어 아내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자부심이었다. 그의 말은 꼭 상민을 향해 말한 것은 아니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아내에게 하는 통보이기도 했다. 송이에게 시선을 두고 있지만 성민은 지선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지선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암울한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어서 지선은 암담하기만 했다. 포항으로 이사를 하는 것보다 지선은 더 고민스러운 문제가 발생했다. 지난달부터 있어야할 생리가 없었다. 생리를 거르는 경우는 없었기에 지선은 긴장을 해서 산부인과를 찾았었다. 진찰을 한 의사의 첫마디가 축하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과의 부부관계도 거의 없었던 지선은 밥맛이 없고 헛구역질을 하는 증세가 송이를 임신했을 때와 같았다. 임신 날짜를 짚어보니 상민의 아기가 분명했다. 그녀는 상민과의 관계를 하면서 무척 조심하고 신경을 썼었다. 남편에게 말할 수도 없고, 남편의 아기라고 거짓말을 해도 남편의 의심만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결국은 낙태를 시켜야하는데, 그녀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냥 아기를 낳고 싶다는 그녀의 감정은 그만큼 상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깊은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면서 지선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제 남편의 저녁식사를 차려 주었는지 까마득하였다. 식탁을 마주하고 앉은 경호와 지선, 그리고 상민은 마치 먹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처럼 묵묵히 식사를 했다. 식욕이 없어 국물만 몇 수저 뜨던 지선은 구토 증세를 느꼈다. 눈치를 살피던 지선은 얼른 세면장으로 가서 구역질을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도 지선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늦도록 거실을 배회했다. 자정을 알리는 벽시계 소리를 듣고 지선은 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이방인처럼 그녀는 남편이 잠든 침대위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잠이 든 줄 알았던 남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우리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살아. 내가 더 열심히 할게.”
“...........”
“나에게 불만이 많은 걸 알아. 지금까지 힘들었던 것들 잊어버리자고.”
“...........”

낯선 지역에서 암울한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불안과 임신에 대한 갈등으로 지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던지 듣고 싶은 경호는 아내의 몸을 끌어당겨 반듯이 눕히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지선은 남편이 아니고 낯선 남자의 손길 같아서 흠칫하였다. 모처럼만에 경호는 아내를 끌어안은 것이었다.
지선의 잠옷 앞가슴을 헤치고 경호의 손길이 들어갔다. 손아귀에 잡힌 젖가슴을 움켜쥐고 주무르는 경호는 아내가 잠자코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다.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살살 문지르는 경호는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지선은 젖꼭지의 돌기를 일으켜 세우려는 남편의 손길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남편에 대한 의무감으로 돌부처처럼 그녀는 누워있을 뿐이었다. 젖가슴을 주무르는 남편이 그녀의 잠옷을 벗기려고 했다. 지선은 슬그머니 남편의 손을 밀어내었다.

“나, 몸이 아파요. 그냥 주무세요.”
“어디가 아픈데?”
“그게........자궁에 염증이 생겼데요.”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 지선은 머뭇거리다가 엉뚱한 핑계를 내뱉었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한 답변이었다. 아내가 아프다는데 위로를 해야 하지만 오래간만에 부부관계를 하려던 경호는 자존심이 상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경호는 아내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발끈해진 경호는 혀를 차며 언성을 높였다.

“여자가 얼마나 몸을 간수하지 못했기에 그런데 염증이 생겨! 정말 더러워서 같이 못 자겠네.”
“뭐라고요.......!?”

남편의 말에 지선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더럽다니!? 물론 자신이 내뱉은 변명에도 문제가 있지만 지선은 남편의 모욕적인 언사에 분노를 느꼈다. 남편을 마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피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로 남편을 거부할 수도 없어 다시 등을 지고 누웠다.
파랗게 질린 아내의 표정을 보는 경호는 자신의 말이 너무 거칠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몸가짐을 청결하게 하라는 말이야.”
“..............”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경호는 솔직히 성관계에 대해 열등감과 두려움을 느껴 성욕도 없고, 아내와의 부부관계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하다가는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경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주눅이 든 목소리를 흘렸다.

“내 생각만 했나봐. 어쨌든 우리 열심히 살자고.”
“...........”

한참동안 아내를 바라보던 경호는 한 숨을 내쉬고 누웠다. 그리고 그는 아내의 목에 팔을 집어넣어 팔베개를 해주었다. 지선은 남편의 팔베개마저 뿌리칠 수 없었다. 목 밑으로 뻗친 남편의 팔이 신경이 쓰여 지선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벽시계의 시침 돌아가는 소리에 맞추어 그녀는 맥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결국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팔을 빼내고 나서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신경이 예민해진 지선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일찌감치 그녀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일어난 경호는 가방을 꺼내 포항에 다녀올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 새 양복을 꺼내달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선은 묵묵히 식사준비를 하다가 가방을 싸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남편이 서둘러 집을 나가고 지선은 멍하니 상민의 방문을 쳐다본다. 시계를 보니 상민이 강의를 받으러 나갈 시간인데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지선은 망설였다. 왠지 상민을 깨우는 것조차 그녀는 두려웠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몇 번 두드리니 상민이 까칠한 모습으로 나왔다. 지선은 그가 잠을 설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민마저 집을 나가고 지선은 해야 할일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오늘 저녁에는 남편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지선은 더욱 허전했다. 애정도 없으면서 남편이 없을 밤을 걱정하는 자신이 너무 이율배반적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이던 이사를 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지선은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넋을 놓고 옷장 안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결혼 초에 입었던 옷들을 보며 오랜 시간을 울타리 안에 갇혀 살았다는 생각과 아울러 어딘가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다.

요즘에는 입지 않고 걸어 놓았던 처녀시절의 외출복을 꺼내서 걸친 그녀는 송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대로변으로 나선 그녀는 무작정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택시 기사의 행선지를 묻는 말에 지선은 무의식적으로 한강 고수부지로 가자고 혼잣말처럼 대답을 한다. 지나간 세월들이 어디로 가는지, 흐르는 강물이라도 보고 싶은지 모른다.

한강변의 유원지에 도착한 지선은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아직은 차갑게 느끼는 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추위에 얼어붙었던 강물은 전부 녹아서 유유히 흐르고, 북으로 가는 철새들이 열심히 강물 위를 나르며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고수부지 주변이 푸른색으로 갈아입으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한줄기 미풍에도 섬세히 반응하는 나뭇잎 하나하나마다 여린 바람결에 허리 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에 지선은 자신의 나약함이 들어나 보였다. 살아 왔던 날의
사소한 일상과 자잘한 불만들이 누구나 겪는 고통이건만 지선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고 느끼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아마도 지쳐가는 시간에 나타난 상민의 애정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만큼 상민에게 느끼는 열정의 시간이 살아온 날들보다 깊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강변을 거닐면서 지선은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하지만 혼란스러움에 벗어날 수는 없었다. 칭얼대는 송이의 이마를 짚어본 지선은 걸었던 길을 되돌아 급히 걸었다. 강바람 때문인지 그녀가 짚어 본 송이의 이마가 뜨거웠다. 부랴부랴 택시를 집어 탄 지선은 동네의 소아과 병원으로 갔다. 다행히도 의사는 감기기운이 있으나 약을 복용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어느 어머니든지 자식이 자신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지선은 송이가 남편과의 부부사이에 낳은 자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온 지선은 오랫동안 쌓아 두었던 물건들을 끄집어내놓고 정리를 했다. 감정과 번민도 망각한 상태에서 허수아비처럼 지선은 잊고 있었던 물건들을 지나간 세월을 접듯이 차곡차곡 쌓았다.

평상시 보다 조금 늦게 상민이 축 늘어진 어깨로 귀가하였다. 상민을 의식하고 나서야 지선은 숨겨놓으려는 혼탁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말없이 지선의 곁을 스쳐가는 상민에게서 옅은 술 냄새가 풍겼다. 지선은 습관처럼 식탁에 상민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방으로 들어간 지선은 송이를 안고 상민이 식사를 끝낼 시간을 기다렸다.

상민이 식사를 끝낼 때쯤 지선은 주방으로 나왔다. 주방에서 나온 상민이 무슨 말이라도 할 것처럼 주춤거리는 모습을 의식하면서도 지선은 모른 체하였다. 설거지를 마친 지선은 안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서성거리던 상민은 침대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에 침묵 속에 있지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송이를 안고 있는 TV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지선은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골목 안에서 개짓는 소리에 지선은 눈을 떴다. 요즘 일찍 들어오는 남편이 귀가할 시간도 지나 있었다. 잠든 송이를 자리에 눕힌 지선은 습관처럼 일어나서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침대에 누우려던 지선은 무언가 할 일을 잊은 것만 같았다.

공연히 주방으로 가서 그릇들을 다시 정리하고는 거실에서 불빛이 스며드는 창문을 바라본다. 왠지 서러움이 북받친 그녀는 한기를 느껴 자신의 어깨를 두 팔로 감쌌다. 그녀는 삐걱거리며 방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불빛 속에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나온 상민이었다.

말없이 바라보던 상민이 지선에게 손을 뻗었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 냉정하려고 했던 지선의 가슴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름 위를 걷듯이 발걸음을 옮긴 그녀는 자석처럼 상민에게 딸려갔다. 상민은 자신의 손바닥에 손을 올려놓는 그녀를 당겨 포옹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던 지선은 사르르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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