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미안해...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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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613회 작성일 20-01-17 18:59본문
여보 미안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이 한마디 남기고 떠난지 5년이 흘렀다.
그때도 한창 대통령 선거 열풍이 일고 있었고, 김씨와 이씨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지금은 박씨가 대세라느니 말들을 하지만,
그녀의 성이 박씨였다.
당시 박씨가 경선에서 밀려 뒷전으로 물러난것처럼
그녀도 밀려서 떠나갔다.
프롤로그...
5년전, 2007년 가을
○○공사에 다니고 있던 나는 남부러울것 없었다.
나보다 20센티나 작아서 늘 꼬마라고 불렀던 그녀, 7살이나 많은 나에게 시집와서 이쁜 딸과 연년생으로 잘생긴 아들까지 낳아준, 그래서 막내가 군입대하고 나서 한달만 휴가를 달라고 하던 그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꼬박 삼일을 고민한 끝에 허락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달후,
눈발이 나리기 시작하던 초겨울에 돌아온 그녀는 꼬박 삼일을 잠만잤다.
그리고, 삼일동안 말이 없이 창밖만 바라 보았다.
도데체 한달 동안 무슨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토록 넋이 빠져 있는가?
궁금하고 갑갑해서 미칠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보면 말하지 않을 그녀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말들이 두려웠다.
그렇게 1주일을 보내고,
안색이 조금 괜찮아졌다 싶어 안도하고 야근을 들어간 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그녀는 나의 출근을 배웅하며 현관까지 나와서 골목길 끝까지 나를 배웅했다.
그리고 조용히 대문이 닫히고...
그녀는 그날저녁 8시뉴스에서 첫눈 소식이 방영되던 즈음에,
간단한 짐을 꾸려 그녀의 차를 몰고 떠났다.
3일쯤 지나서,
편지봉투 하나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편지봉투 안에는 작은 수첩이 들어있었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조심스레 수첩을 펴보았다.
맨 첫장 속지에 또렷하게 씌어진 붉은 사인펜 글씨...
"여보 미안해"
얼른 수첩을 덮었다.
안절부절 두시간을 그렇게 우왕좌왕 하다가
다시 수첩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뒷 커버를 열어 보았다.
맨 마지막장에 또다시 붉은 글씨...
"여보 미안해"
다시 수첩을 닫았다.
도데체 이 무슨.....
말문이 막히고 기가 찼다.
이번엔 용기를 내어 대충 중간쯤을 열어 보았다.
왼쪽면엔 "여보"
오른쪽엔 "미안해"
미칠것 같았다.
다른 곳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수첩을 마구 뒤적였다.
수첩에 적혀있는 글자라곤
"여보 미안해"
뿐이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후에 도데체 몇 글자나 씌였는지 세어 본 적이 있다.
거의 50장 정도 되었지 싶다.
하나같이 "여보 미안해"만 적혀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매번 눌러쓴 강도나 각도 필체가 조금씩 달랐다.
한번에 쓴것이 아니라 아마도 매일같이 적었거나, 최소한 수십차례에 걸쳐서 써나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 수첩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행간에 담긴 의미를...
그녀는 백마디 말보다 단 한문장으로 모든것을 표현했던 것을...
제 1장. 그녀의 이야기
그 사람을 만났다.
꿈에도 그리워 하던 그 사람..
25년전 부대정문에서 먼발치에서 보고 그렇게 끝이었던 그 사람..
그사람을 못잊어 5년을 방황하였던 나...
결국 그 사람을 찾을길 없고, 아니 찾을 용기가 없었던 나는 도망치다시피 이모부가 추천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일주일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친정에 들렀더니, 엄마가 내 물건이라며 작은 가방 하나를 내어 놓으신다.
신랑도 있고 해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드렁크에 넣어두었다.
몇일이 지난후 대충 정리가 되어 한가롭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한잔 하다가 문득 엄마가 건네준 가방이 생각났다.
장농속에 아무렇게나 쳐박혀 있던 가방을 보니 새삼스레 옛추억이 떠올랐다.
가방 속에는 학교때 사진이며, 친구들과 주고 받은 연하장이나 쪽지 같은거, 그리고 작은 수첩 몇개가 있었다.
이것 저것 뒤적이며 옛친구 생각을 하다가 절친했던 이씨 여인이 생각났다.
같은반 짝꿍이었던 이씨.
하지만, 한 남학생을 두고 삼각관계까지 갈뻔했던 친구..
결국 내가 한발짝 물러서서 친구의 우정은 깨어지지 않았지만, 졸업후 이상하게 그녀와 멀어졌다.
일년에 한두번 명절때면 오다가다 마주치기는 하였지만, 그 옛날처럼 그렇게 마음을 내 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끄때 그 남학생과 계속 사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보기좋게 차였고, 결국 남자를 양보한 나와 남자를 쟁취한 그녀의 사이는 자연히 멀어져갔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수첩을 뒤적이다 한켠에 한 남학생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문씨...
그 남학생은 우등생이었다.
우연히 이씨와 함께한 자리에서 알게되어 친하게 지냈다.
문씨 남학생은 셋이 같이 있을때는 일상적인 이야기만 했다.
어느 순간 나와 단들이 남게되었을때, 문씨는 내 손에 꼬깃꼬깃 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이씨몰래 나중에 보라고...
그 쪽지에는 나에 대한 구애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괜스레 붉어지고, 그 애를 생각하느라 시험도 망쳤다.
결국 대학에 떨어지고, 위로여행삼아 떠난 곳에서 이씨여인을 만났다.
1년전 전학간 이씨는 이미 도시여성이 다 되어 있었다.
그래도 옛정이 있은지라 고즈녁한 카페에서 생맥주 한잔에 팝송을 들으며 도란도란 지난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씨 남학생 이야기까지 흘렀다.
나는 문씨가 쪽지를 전해준 적이 있다는 말만 했다.
순간 이씨가 안색이 바뀌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씨는 문씨를 흉보기 시작했다.
듣기 민망한 나는 이씨에게 꾸짖듯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그 사람을 양보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평할수가 있니?"
"흥, 네가 양보했다고? 그사람이 나만 좋다고 따라다닌거 몰라?"
"응..그 그랬니? 난 그게 아닌줄 알았는데..."
"너, 꿈깨....아직도 꿈속에서 사냐? 그사람은 널 좋아한 적도 없었고, 우리가 셋이 같이 만날때도 늘 나만 보면서 이야기 했어. 그리고 졸업식날 밤 그사람이 나랑 같이 지낸거 알아 몰라?"
"응. 미안...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 후 3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나는 재수해서 다행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2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었다.
약간의 여유를 찾고, 서울 생활에도 익숙해지자 소문에 그 사람도 서울에서 대학다닌다는 얘길 들은적이 있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다행히 고교 동창중에 그사람과 같은 동네 사는 친구를 만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문씨는 일류대에 진학하였으나, 그때 마침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장이 되어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고, 동생이 이번에 대학진학을 하게되어 어쩔수 없이 군에 입대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이 흘러 크리스마스가 왔다.
과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재수한걸 모르는 그들은 나를 동갑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린 동생같아서 다 마다하고 그냥 아르바이트 하는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문씨동네 사는 동창이었다.
맞아 그때 내 연락처라면서 사무실 전화를 알려줬었지.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얘, 문씨 휴가 나왔댄다."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무슨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떨리는 목소리를 심호흡으로 가다듬으면서 그녀의 말에 마냥 "응 응"하면서 쥐꼬리 만한 목소리로 대답만 하였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물어볼 말들이 무수히 생각이 났다.
하지만, 잠시후 그녀의 전화가 다시 왔고, 이따 저녁때 명동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니 나더러 나오라고 전한다.
한동안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지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용실을 향했다.
미용실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놀라리만치 환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미용사 언니도 "무슨 좋은일이 있느냐"면서 비위를 맞춰준다.
머리도 잘 되었고, 기분이 좋아 팁을 얹어 주었다.
"언니 데이트 잘하고 오세요" 하면서 찡긋한다.
후후..나 지금 데이트 하러 나가는 건가봐....그것도 몰랐네,,
혹여나 약속시간에 늦으면 두사람이 다른데로 가기라도 할까봐 발걸음을 재촉하여 명동성당으로 갔다.
성탄트리가 밝혀진 아래에 두 사람이 서있다.
한사람은 카키색 군정복을 입은 군인...
아...
문씨...
이씨에게 빼았겼던 그 남학생..
내게 몰래 쪽지를 통해 사랑고백하였던 그남자가 낯선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커피숍에서 따끈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삐삐가 왔다면서 공중전화를 다녀온 동창이 급한 일이 생겨서 가야한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가스나, 눈치 빠르네..나중에 잘되면 선물하나 해 줘야 겠다.
둘만 남게되자 그사람은 갑자기 내게 팔장을 끼면서 좀 걷자고 했다.
그렇게 명동성당을 출발하여 남산 도서관 계단을 올라 타워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무척 힘든 길이었지만,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서 거기까지 갔는지 기억도 없다.
다만, 마주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그남자의 마음이 내내 내 가슴을 방망이질 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빙빙 돌아가는 타워 전망대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서울의 야경을 즐겼다.
내려오는 길은 반대쪽 국립극장 쪽으로 평탄한 길을 택해 수월하게 내려왔다.
나는 집이 방배동이었고, 그 남자는 의정부 친척집에 가기로 했다면서
우리는 신당동 쯤에서 반대방향으로 헤어졌다.
그 후 휴가기간동안은 다시만나지 못하고, 내가 자취하는 집으로 군사우편이 날아 들었다.
부대에서 애인사진 콘테스트를 해서 선발되면 구정때 특박을 준다고 하니 사진 한장만 보내달라고 한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손발이 많이 터졌는데, 화장품 하나만 부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고르고 골라 로션과 스킨을 포장하고, 있는 사진 없는 사진 다 뒤져서 잘 찍은 걸로 2장을 보냈다.
한장은 여름 엠티때 약간 누디한 차림의 사진이고, 한장은 요조숙녀처럼 정장을 입은 사진이었다.
결국 문일병은 섹시한 사진을 출품하여 1등을 하였고, 구정때 특박을 나왔다.
우리는 고향이 같았기 때문에 나는 그때 고향에 가 있었는데, 문일병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동네에 있는 그의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를 찾아왔다.
물론 우리 동네 친구가 나를 불러냈고....
그날은 그렇게 잠시 만났으며, 설 쉬고 이튿날 시내 역전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 다방에는 선을 보는 남녀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가까운 절로 데이트를 갔다.
부처님 앞에 합장하면서 그는 내게 속삭였다.
"우리, 부처님께 소원 하나씩 빌자.."
"응. 그래.."
"나는 너랑 결혼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
"나..난...그냥 지금 이대로만....."
내려오는 길에 나는 그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고,
약간 으스름한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그이는 나를 진하게 포옹하였다.
그리고, 난생처음 남자의 키스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차로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내 자취방으로 갔다.
제 2 장. 산딸기 3
자취방에 들어가니 연탄불은 꺼져서 방이 냉골이었다.
부엌을 뒤져서 번개탄을 붙여 놓고, 석유곤로에 라면을 끓였다.
라면 한 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연탄이 제대로 불이 붙었는지 아랫목이 미지근하게 온기가 올라온다.
더운물이 없으니 씻지도 못하고 엄동설한에 싸늘한 방안에서 군인아저씨와 단둘이 있자니 너무 어색하였다.
문일병이 근처에 만화방이 있는지 물었다.
마침 큰길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 만화가게가 있었다는걸 기억해내고 우리는 만화가게로 향했다.
나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보았고, 문일병은 박봉성의 기업만화를 보았다.
두시간 동안 20권가량 다보고 바꿔서 또 보았다.
이현세의 만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엄지와 박봉성의 만화 여주인공 진보배는 지금의 여자 아이돌 못지 않는 인기걸이었다.
문일병이 쥐포를 몇장 사와서 같이 씹으먹으면서 난로옆 소파에 눌러앉아 정신없이 만화를 보면서
문득 남자주인공 까치나 강타가 여자주인공 엄지나 보배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경험이 절실히 하고싶어졌다.
문일병도 마치 내가 엄지나 보배같이 이쁘고 착하고 싱그러운 엄친딸 같은 여자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순간 서로의 의중을 눈치채고 서로 마주보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눈빛만 보고 서로의 마음을 읽었을 때의 그 흐뭇한 기분..
만화 두편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느낄수 있었던 밤이었다.
날이새자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연탄불은 활활 피어 올랐고, 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문일병더러 발이라도 닦으라고 한 대야 퍼 주고 방으로 들어가 추리닝으로 갈아 입었다.
문일병이 방에 들어오고, 나도 씻으러 나갔다.
세수를 하고, 발을 닦고, 그리고...조용하게 바지를 내리고 뒷물을 했다.
당시엔 샤워시설이 변변치 않았고 보일러가 없던 시절이라 특히 겨울철에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였고, 집에서는 간단하게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뒷물을 하여 청결을 유지하였다.
나는 서둘러 아침장을 찾아가 몇가지 식재료를 사와서는 밥을 짖고 찌개를 끓이고 반찬을 장만하였다.
라디오에서 8시 뉴스의 광장을 할 즈음엔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자반에 된장찌개에 부침개까지 1식 삼찬의 조촐한 밥상이 차려졌다.
문일병은 밥 두공기를 뚝딱 해 치우더니 피곤한지 방구석에 개켜놓은 이불더미에 기대더니 이네 잠이든다.
등따시고 배부르니 잠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이제 문일병은 아예 큰 대자로 벌리고 더운지 웃도리 단추를 몇개 끌르고 단잠에 빠져있다.
나는 마치 새색시처럼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의 잠자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모습을 그렇게 자세하게 꼼곰히 뜯어본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그가 몸을 뒤척이다가 그의 팔이 내 무릎위에 놓이게 되었다.
몸이 맞닿게되자 움찔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동안 그의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얼굴과 팔뚝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또 다시 몸을 뒤척이더니 이젠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다리가 내 몸에 밀착해 버렸다.
아까 빠져 나오지 못한걸 후회하면서 또다시 어쩌지도 못하고 그냥 고스란히 그의 허벅지에서 전해지는 체온을 엉덩이로 느껴야만 했다.
그의 팔은 내 무릎에, 그의 다리는 내 엉덩이에 닿아있다.
시간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그와 숲속에서 키스를 나누더 모습을 떠 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살포시 감았다.
눈을 감으니 내 몸에 맞닿아 있는 그의 팔다리의 느낌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지는것 같다.
"아~"
스스로 함정에 바져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나 보다.
"어, 왜그래?"
갑자기 그가 되묻는다.
눈을 떠 그를 보니 입을 옴싹거리며 뭐라고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고 있나보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그의 몸에 갖혀서 그가 일어나기까지 꼬박 세시간을 벌을 서고 말았다.
나중엔 무릎자세로 앉은 다리에서 쥐가 나고, 바닥을 짚고 있는 팔도 저려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움직일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쭈욱...시간이 멈췄으면 싶었다.
그는 태연하게 일어나더니 안자고 있었냐고 물었다.
순간 내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였다.
"아니 여태 안자고....내 옆에 앉아 있었어?"
눈물만 글썽글썽...
"아이고 나랑 같이 자면 시집 못갈까봐 안자고 있었구나."
그냥 새초롬하게 흘겨 봄
"에고 미안해서 어쩌나, 그나저나 진짜 등따시고 배부르니까 잠도 잘잤다. 군대서는 온돌이 없이 마룻장에서 자는데, 난 이렇게 따끈따근한 구들장이 정말 그리웠어."
그는 날더러 잠좀 자라면서 이불을 펴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솔담배 한대 피고나서 문을 열고 툭 전지는 한마디.
"아까 보니까 요 앞에 동시상영하는 극장 있던데, 난 거기가서 이쁜여배우좀 구경하고 올테니 한숨 자 둬."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휭하니 나간다.
5분, 10분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서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도 진짜로 극장엘 갔나보다.
그가 안보이게되자 나도 은연중에 긴장이 풀리면서 한숨 푹 잘 잤다.
눈을 떠 보니 5시쯤 되었도,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오바코트를 걸치고 그가 말한 극장으로 갔다.
조금 전에 영화가 끝나고 막간타임이었나 보다.
아차 싶어서 혹시 그가 다른 길로 집에 온건 아닌가 싶어 헐레벌떡 집으로 와 봤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다.
다시 극장으로 가 표를 샀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그를 찾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막간에는 불을 밝혀 주기 때문에 자리를 잡는 척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살폈다.
맨 앞쪽 가운데 스크린의 정중앙되는 곳에 군복이 언뜻 보였다.
가보니 그는 두 다리를 쭉 펴고 등만 의자에 겨우 기댄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애써 참으면서 그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후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영화가 시작되자 그가 잠을깨어 엉거주춤 일어나서 차렸자세를 취한다.
군인은 역시 ....아직은 졸병이라 그런가 군기가 몸에 배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옆에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액국가가 끝나고 다시 자리에 앉을때 그는 모자를 자리에 벗어 놓더니 밖으로 나간다.
아마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거나 둘중의 하나 혹은 둘다겠거니 생각하며 대한뉴스를 보고있었다.
뉴스가 끝날즈음 팝콘 한봉지를 들고 그가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광고가 몇편 나오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는데...이제사 정신차리고 보니 제목이 엄청 빨간색이다.
"산딸기 3"
정윤희 인지 김미숙인지 원미경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인기가 많았던 섹시한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였다.
잠시후 문일병은 팝콘을 우걱우걱 집어 먹기 시작한다.
달콤한 팝콘 냄새가 퍼져서 나도 침이 골깍 넘어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힐끗 내 쪽을 바라보더니 팝콘 한 웅큼을 집어서 내 무릎위에 놓아준다.
하지만 어두운 극장안이라 내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그냥 옆자리에 왠 아가씨가 있으니 선심을 쓴 것이리라...
좋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꼬시려고 작업을 들어오면 어떻게 골려줄까 하는 행복한 상상도 잠깐 했다.
그래서 추운척 하며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얼굴이 보이지 않게 좀더 위장을 했다.
10분쯤 지나자 진한 장면이 나오기 시작하고, 극장안이 쥐죽은듯이 조용해지고, 좌우 벽면의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여배우의 숨소리와 남배우의 씩씩대는 소리, 그리고 쿵쿵거리는 효과음악만이 울려퍼지고 있다.
아!! 키스를 저렇게 하는구나..
어제 첫 키스를 했던 나는, 그제서야 애정표현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자세와 여자의 자세, 그리고 각도, 끌어 안는 강도 등...세심하게 빠져들었다.
영화는 막 절정에 다달아 키스에서 애무로, 그리고 애무에서 섹스자세로 들어가면서 여배우의 나신이 조금씩 들어난다.
여배우가 옷을 벗을때마다 극장안에서 한숨소리와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남자가 여자의 몸 위에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뒷장면이 비춰지고,
그리고 이어서 여자의 흥분한 얼굴 모습이 비춰진다.
여자는 고개를 뒤로 30도 꺽은채 눈을 게슴츠레하게 감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입을 헤 벌리고 색을쓰며 얼굴 전체가 남자의 움직이는 박자에 맞추어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다.
극장안의 남자들이 모두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마도 열심히 딸딸이를 쳐 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분위기에 빠져 들면서 나도 묘한 느낌이 아랫도리에 전해진다.
아, 남자의 자지가 내 보지에 저렇게 강하게 박혀 들면 어떤 느낌일까?
잠시 옆에 앉은 문일병의 존재를 망각할 정도로 영화에 빠져 들었다.
이윽고 장면이 바뀌어 평범한 화면이 나타나자 이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옆자리의 그이도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건넨다.
"팝콘좀 더 줄까요?"
나는 말은 못하고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극장 팝콘은 별로 맛이 없느것 같아요."
그는 계속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
"겨울에 빵빠레 먹는것도 괜찮은데..."
"아가씨, 열도 식힐겸 빵빠레 하나씩 먹고 올래요?"
어찌하나 볼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대뜸 일어나더니 과감하게 내 손을 잡고 끌어 낸다.
사람들 많은데서 어찌 하기도 뭣해서 그냥 연인인척 끌려 나갔다.
매점앞에서 빵빠레 두개를 집어들고 한쪽에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나에게 건넨다.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옆으로 손을 뻗어 빵빠레를 받았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빵빠레를 먹으면서 그는 게속 내 얼굴을 볼려고 하였지만, 난 계속 부끄러운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영화가 쫌 야하죠?"
끄덕끄덕
"이런 영화 싫으시면 나가서 차나 한잔 할까요?"
절래절래
"그럼 들어가서 영화 마저 봅시다. 본전은 뽑아야죠."
끄덕끄덕
우리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그렇게 그는 짧은 대사를, 나는 머리를 끄덕이거나 흔들거나..그렇게 1시간반을 보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이 한마디 남기고 떠난지 5년이 흘렀다.
그때도 한창 대통령 선거 열풍이 일고 있었고, 김씨와 이씨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지금은 박씨가 대세라느니 말들을 하지만,
그녀의 성이 박씨였다.
당시 박씨가 경선에서 밀려 뒷전으로 물러난것처럼
그녀도 밀려서 떠나갔다.
프롤로그...
5년전, 2007년 가을
○○공사에 다니고 있던 나는 남부러울것 없었다.
나보다 20센티나 작아서 늘 꼬마라고 불렀던 그녀, 7살이나 많은 나에게 시집와서 이쁜 딸과 연년생으로 잘생긴 아들까지 낳아준, 그래서 막내가 군입대하고 나서 한달만 휴가를 달라고 하던 그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꼬박 삼일을 고민한 끝에 허락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달후,
눈발이 나리기 시작하던 초겨울에 돌아온 그녀는 꼬박 삼일을 잠만잤다.
그리고, 삼일동안 말이 없이 창밖만 바라 보았다.
도데체 한달 동안 무슨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토록 넋이 빠져 있는가?
궁금하고 갑갑해서 미칠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보면 말하지 않을 그녀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올 말들이 두려웠다.
그렇게 1주일을 보내고,
안색이 조금 괜찮아졌다 싶어 안도하고 야근을 들어간 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그녀는 나의 출근을 배웅하며 현관까지 나와서 골목길 끝까지 나를 배웅했다.
그리고 조용히 대문이 닫히고...
그녀는 그날저녁 8시뉴스에서 첫눈 소식이 방영되던 즈음에,
간단한 짐을 꾸려 그녀의 차를 몰고 떠났다.
3일쯤 지나서,
편지봉투 하나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편지봉투 안에는 작은 수첩이 들어있었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조심스레 수첩을 펴보았다.
맨 첫장 속지에 또렷하게 씌어진 붉은 사인펜 글씨...
"여보 미안해"
얼른 수첩을 덮었다.
안절부절 두시간을 그렇게 우왕좌왕 하다가
다시 수첩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뒷 커버를 열어 보았다.
맨 마지막장에 또다시 붉은 글씨...
"여보 미안해"
다시 수첩을 닫았다.
도데체 이 무슨.....
말문이 막히고 기가 찼다.
이번엔 용기를 내어 대충 중간쯤을 열어 보았다.
왼쪽면엔 "여보"
오른쪽엔 "미안해"
미칠것 같았다.
다른 곳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수첩을 마구 뒤적였다.
수첩에 적혀있는 글자라곤
"여보 미안해"
뿐이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후에 도데체 몇 글자나 씌였는지 세어 본 적이 있다.
거의 50장 정도 되었지 싶다.
하나같이 "여보 미안해"만 적혀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매번 눌러쓴 강도나 각도 필체가 조금씩 달랐다.
한번에 쓴것이 아니라 아마도 매일같이 적었거나, 최소한 수십차례에 걸쳐서 써나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 수첩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행간에 담긴 의미를...
그녀는 백마디 말보다 단 한문장으로 모든것을 표현했던 것을...
제 1장. 그녀의 이야기
그 사람을 만났다.
꿈에도 그리워 하던 그 사람..
25년전 부대정문에서 먼발치에서 보고 그렇게 끝이었던 그 사람..
그사람을 못잊어 5년을 방황하였던 나...
결국 그 사람을 찾을길 없고, 아니 찾을 용기가 없었던 나는 도망치다시피 이모부가 추천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일주일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친정에 들렀더니, 엄마가 내 물건이라며 작은 가방 하나를 내어 놓으신다.
신랑도 있고 해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드렁크에 넣어두었다.
몇일이 지난후 대충 정리가 되어 한가롭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한잔 하다가 문득 엄마가 건네준 가방이 생각났다.
장농속에 아무렇게나 쳐박혀 있던 가방을 보니 새삼스레 옛추억이 떠올랐다.
가방 속에는 학교때 사진이며, 친구들과 주고 받은 연하장이나 쪽지 같은거, 그리고 작은 수첩 몇개가 있었다.
이것 저것 뒤적이며 옛친구 생각을 하다가 절친했던 이씨 여인이 생각났다.
같은반 짝꿍이었던 이씨.
하지만, 한 남학생을 두고 삼각관계까지 갈뻔했던 친구..
결국 내가 한발짝 물러서서 친구의 우정은 깨어지지 않았지만, 졸업후 이상하게 그녀와 멀어졌다.
일년에 한두번 명절때면 오다가다 마주치기는 하였지만, 그 옛날처럼 그렇게 마음을 내 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끄때 그 남학생과 계속 사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보기좋게 차였고, 결국 남자를 양보한 나와 남자를 쟁취한 그녀의 사이는 자연히 멀어져갔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수첩을 뒤적이다 한켠에 한 남학생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문씨...
그 남학생은 우등생이었다.
우연히 이씨와 함께한 자리에서 알게되어 친하게 지냈다.
문씨 남학생은 셋이 같이 있을때는 일상적인 이야기만 했다.
어느 순간 나와 단들이 남게되었을때, 문씨는 내 손에 꼬깃꼬깃 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이씨몰래 나중에 보라고...
그 쪽지에는 나에 대한 구애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괜스레 붉어지고, 그 애를 생각하느라 시험도 망쳤다.
결국 대학에 떨어지고, 위로여행삼아 떠난 곳에서 이씨여인을 만났다.
1년전 전학간 이씨는 이미 도시여성이 다 되어 있었다.
그래도 옛정이 있은지라 고즈녁한 카페에서 생맥주 한잔에 팝송을 들으며 도란도란 지난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씨 남학생 이야기까지 흘렀다.
나는 문씨가 쪽지를 전해준 적이 있다는 말만 했다.
순간 이씨가 안색이 바뀌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씨는 문씨를 흉보기 시작했다.
듣기 민망한 나는 이씨에게 꾸짖듯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그 사람을 양보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평할수가 있니?"
"흥, 네가 양보했다고? 그사람이 나만 좋다고 따라다닌거 몰라?"
"응..그 그랬니? 난 그게 아닌줄 알았는데..."
"너, 꿈깨....아직도 꿈속에서 사냐? 그사람은 널 좋아한 적도 없었고, 우리가 셋이 같이 만날때도 늘 나만 보면서 이야기 했어. 그리고 졸업식날 밤 그사람이 나랑 같이 지낸거 알아 몰라?"
"응. 미안...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 후 3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나는 재수해서 다행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2년을 마치고 3학년이 되었다.
약간의 여유를 찾고, 서울 생활에도 익숙해지자 소문에 그 사람도 서울에서 대학다닌다는 얘길 들은적이 있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다행히 고교 동창중에 그사람과 같은 동네 사는 친구를 만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문씨는 일류대에 진학하였으나, 그때 마침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장이 되어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고, 동생이 이번에 대학진학을 하게되어 어쩔수 없이 군에 입대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이 흘러 크리스마스가 왔다.
과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재수한걸 모르는 그들은 나를 동갑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린 동생같아서 다 마다하고 그냥 아르바이트 하는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문씨동네 사는 동창이었다.
맞아 그때 내 연락처라면서 사무실 전화를 알려줬었지.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얘, 문씨 휴가 나왔댄다."
순간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무슨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떨리는 목소리를 심호흡으로 가다듬으면서 그녀의 말에 마냥 "응 응"하면서 쥐꼬리 만한 목소리로 대답만 하였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물어볼 말들이 무수히 생각이 났다.
하지만, 잠시후 그녀의 전화가 다시 왔고, 이따 저녁때 명동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니 나더러 나오라고 전한다.
한동안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비워지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용실을 향했다.
미용실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놀라리만치 환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미용사 언니도 "무슨 좋은일이 있느냐"면서 비위를 맞춰준다.
머리도 잘 되었고, 기분이 좋아 팁을 얹어 주었다.
"언니 데이트 잘하고 오세요" 하면서 찡긋한다.
후후..나 지금 데이트 하러 나가는 건가봐....그것도 몰랐네,,
혹여나 약속시간에 늦으면 두사람이 다른데로 가기라도 할까봐 발걸음을 재촉하여 명동성당으로 갔다.
성탄트리가 밝혀진 아래에 두 사람이 서있다.
한사람은 카키색 군정복을 입은 군인...
아...
문씨...
이씨에게 빼았겼던 그 남학생..
내게 몰래 쪽지를 통해 사랑고백하였던 그남자가 낯선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커피숍에서 따끈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삐삐가 왔다면서 공중전화를 다녀온 동창이 급한 일이 생겨서 가야한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가스나, 눈치 빠르네..나중에 잘되면 선물하나 해 줘야 겠다.
둘만 남게되자 그사람은 갑자기 내게 팔장을 끼면서 좀 걷자고 했다.
그렇게 명동성당을 출발하여 남산 도서관 계단을 올라 타워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무척 힘든 길이었지만,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서 거기까지 갔는지 기억도 없다.
다만, 마주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그남자의 마음이 내내 내 가슴을 방망이질 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빙빙 돌아가는 타워 전망대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서울의 야경을 즐겼다.
내려오는 길은 반대쪽 국립극장 쪽으로 평탄한 길을 택해 수월하게 내려왔다.
나는 집이 방배동이었고, 그 남자는 의정부 친척집에 가기로 했다면서
우리는 신당동 쯤에서 반대방향으로 헤어졌다.
그 후 휴가기간동안은 다시만나지 못하고, 내가 자취하는 집으로 군사우편이 날아 들었다.
부대에서 애인사진 콘테스트를 해서 선발되면 구정때 특박을 준다고 하니 사진 한장만 보내달라고 한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손발이 많이 터졌는데, 화장품 하나만 부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고르고 골라 로션과 스킨을 포장하고, 있는 사진 없는 사진 다 뒤져서 잘 찍은 걸로 2장을 보냈다.
한장은 여름 엠티때 약간 누디한 차림의 사진이고, 한장은 요조숙녀처럼 정장을 입은 사진이었다.
결국 문일병은 섹시한 사진을 출품하여 1등을 하였고, 구정때 특박을 나왔다.
우리는 고향이 같았기 때문에 나는 그때 고향에 가 있었는데, 문일병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동네에 있는 그의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를 찾아왔다.
물론 우리 동네 친구가 나를 불러냈고....
그날은 그렇게 잠시 만났으며, 설 쉬고 이튿날 시내 역전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 다방에는 선을 보는 남녀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가까운 절로 데이트를 갔다.
부처님 앞에 합장하면서 그는 내게 속삭였다.
"우리, 부처님께 소원 하나씩 빌자.."
"응. 그래.."
"나는 너랑 결혼하게 해 달라고 빌었어."
"나..난...그냥 지금 이대로만....."
내려오는 길에 나는 그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고,
약간 으스름한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그이는 나를 진하게 포옹하였다.
그리고, 난생처음 남자의 키스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차로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내 자취방으로 갔다.
제 2 장. 산딸기 3
자취방에 들어가니 연탄불은 꺼져서 방이 냉골이었다.
부엌을 뒤져서 번개탄을 붙여 놓고, 석유곤로에 라면을 끓였다.
라면 한 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연탄이 제대로 불이 붙었는지 아랫목이 미지근하게 온기가 올라온다.
더운물이 없으니 씻지도 못하고 엄동설한에 싸늘한 방안에서 군인아저씨와 단둘이 있자니 너무 어색하였다.
문일병이 근처에 만화방이 있는지 물었다.
마침 큰길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 만화가게가 있었다는걸 기억해내고 우리는 만화가게로 향했다.
나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보았고, 문일병은 박봉성의 기업만화를 보았다.
두시간 동안 20권가량 다보고 바꿔서 또 보았다.
이현세의 만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엄지와 박봉성의 만화 여주인공 진보배는 지금의 여자 아이돌 못지 않는 인기걸이었다.
문일병이 쥐포를 몇장 사와서 같이 씹으먹으면서 난로옆 소파에 눌러앉아 정신없이 만화를 보면서
문득 남자주인공 까치나 강타가 여자주인공 엄지나 보배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경험이 절실히 하고싶어졌다.
문일병도 마치 내가 엄지나 보배같이 이쁘고 착하고 싱그러운 엄친딸 같은 여자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순간 서로의 의중을 눈치채고 서로 마주보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눈빛만 보고 서로의 마음을 읽었을 때의 그 흐뭇한 기분..
만화 두편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느낄수 있었던 밤이었다.
날이새자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연탄불은 활활 피어 올랐고, 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문일병더러 발이라도 닦으라고 한 대야 퍼 주고 방으로 들어가 추리닝으로 갈아 입었다.
문일병이 방에 들어오고, 나도 씻으러 나갔다.
세수를 하고, 발을 닦고, 그리고...조용하게 바지를 내리고 뒷물을 했다.
당시엔 샤워시설이 변변치 않았고 보일러가 없던 시절이라 특히 겨울철에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였고, 집에서는 간단하게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뒷물을 하여 청결을 유지하였다.
나는 서둘러 아침장을 찾아가 몇가지 식재료를 사와서는 밥을 짖고 찌개를 끓이고 반찬을 장만하였다.
라디오에서 8시 뉴스의 광장을 할 즈음엔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자반에 된장찌개에 부침개까지 1식 삼찬의 조촐한 밥상이 차려졌다.
문일병은 밥 두공기를 뚝딱 해 치우더니 피곤한지 방구석에 개켜놓은 이불더미에 기대더니 이네 잠이든다.
등따시고 배부르니 잠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이제 문일병은 아예 큰 대자로 벌리고 더운지 웃도리 단추를 몇개 끌르고 단잠에 빠져있다.
나는 마치 새색시처럼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의 잠자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모습을 그렇게 자세하게 꼼곰히 뜯어본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그가 몸을 뒤척이다가 그의 팔이 내 무릎위에 놓이게 되었다.
몸이 맞닿게되자 움찔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동안 그의 팔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얼굴과 팔뚝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또 다시 몸을 뒤척이더니 이젠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다리가 내 몸에 밀착해 버렸다.
아까 빠져 나오지 못한걸 후회하면서 또다시 어쩌지도 못하고 그냥 고스란히 그의 허벅지에서 전해지는 체온을 엉덩이로 느껴야만 했다.
그의 팔은 내 무릎에, 그의 다리는 내 엉덩이에 닿아있다.
시간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그와 숲속에서 키스를 나누더 모습을 떠 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살포시 감았다.
눈을 감으니 내 몸에 맞닿아 있는 그의 팔다리의 느낌이 더욱 생생하게 전해지는것 같다.
"아~"
스스로 함정에 바져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나 보다.
"어, 왜그래?"
갑자기 그가 되묻는다.
눈을 떠 그를 보니 입을 옴싹거리며 뭐라고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고 있나보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그의 몸에 갖혀서 그가 일어나기까지 꼬박 세시간을 벌을 서고 말았다.
나중엔 무릎자세로 앉은 다리에서 쥐가 나고, 바닥을 짚고 있는 팔도 저려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움직일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쭈욱...시간이 멈췄으면 싶었다.
그는 태연하게 일어나더니 안자고 있었냐고 물었다.
순간 내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였다.
"아니 여태 안자고....내 옆에 앉아 있었어?"
눈물만 글썽글썽...
"아이고 나랑 같이 자면 시집 못갈까봐 안자고 있었구나."
그냥 새초롬하게 흘겨 봄
"에고 미안해서 어쩌나, 그나저나 진짜 등따시고 배부르니까 잠도 잘잤다. 군대서는 온돌이 없이 마룻장에서 자는데, 난 이렇게 따끈따근한 구들장이 정말 그리웠어."
그는 날더러 잠좀 자라면서 이불을 펴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솔담배 한대 피고나서 문을 열고 툭 전지는 한마디.
"아까 보니까 요 앞에 동시상영하는 극장 있던데, 난 거기가서 이쁜여배우좀 구경하고 올테니 한숨 자 둬."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휭하니 나간다.
5분, 10분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서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도 진짜로 극장엘 갔나보다.
그가 안보이게되자 나도 은연중에 긴장이 풀리면서 한숨 푹 잘 잤다.
눈을 떠 보니 5시쯤 되었도, 사방이 어둑어둑해졌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오바코트를 걸치고 그가 말한 극장으로 갔다.
조금 전에 영화가 끝나고 막간타임이었나 보다.
아차 싶어서 혹시 그가 다른 길로 집에 온건 아닌가 싶어 헐레벌떡 집으로 와 봤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다.
다시 극장으로 가 표를 샀다.
그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그를 찾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막간에는 불을 밝혀 주기 때문에 자리를 잡는 척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살폈다.
맨 앞쪽 가운데 스크린의 정중앙되는 곳에 군복이 언뜻 보였다.
가보니 그는 두 다리를 쭉 펴고 등만 의자에 겨우 기댄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애써 참으면서 그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후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영화가 시작되자 그가 잠을깨어 엉거주춤 일어나서 차렸자세를 취한다.
군인은 역시 ....아직은 졸병이라 그런가 군기가 몸에 배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옆에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액국가가 끝나고 다시 자리에 앉을때 그는 모자를 자리에 벗어 놓더니 밖으로 나간다.
아마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거나 둘중의 하나 혹은 둘다겠거니 생각하며 대한뉴스를 보고있었다.
뉴스가 끝날즈음 팝콘 한봉지를 들고 그가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광고가 몇편 나오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는데...이제사 정신차리고 보니 제목이 엄청 빨간색이다.
"산딸기 3"
정윤희 인지 김미숙인지 원미경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인기가 많았던 섹시한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였다.
잠시후 문일병은 팝콘을 우걱우걱 집어 먹기 시작한다.
달콤한 팝콘 냄새가 퍼져서 나도 침이 골깍 넘어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힐끗 내 쪽을 바라보더니 팝콘 한 웅큼을 집어서 내 무릎위에 놓아준다.
하지만 어두운 극장안이라 내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그냥 옆자리에 왠 아가씨가 있으니 선심을 쓴 것이리라...
좋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꼬시려고 작업을 들어오면 어떻게 골려줄까 하는 행복한 상상도 잠깐 했다.
그래서 추운척 하며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얼굴이 보이지 않게 좀더 위장을 했다.
10분쯤 지나자 진한 장면이 나오기 시작하고, 극장안이 쥐죽은듯이 조용해지고, 좌우 벽면의 커다란 스피커에서는 여배우의 숨소리와 남배우의 씩씩대는 소리, 그리고 쿵쿵거리는 효과음악만이 울려퍼지고 있다.
아!! 키스를 저렇게 하는구나..
어제 첫 키스를 했던 나는, 그제서야 애정표현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자세와 여자의 자세, 그리고 각도, 끌어 안는 강도 등...세심하게 빠져들었다.
영화는 막 절정에 다달아 키스에서 애무로, 그리고 애무에서 섹스자세로 들어가면서 여배우의 나신이 조금씩 들어난다.
여배우가 옷을 벗을때마다 극장안에서 한숨소리와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남자가 여자의 몸 위에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뒷장면이 비춰지고,
그리고 이어서 여자의 흥분한 얼굴 모습이 비춰진다.
여자는 고개를 뒤로 30도 꺽은채 눈을 게슴츠레하게 감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입을 헤 벌리고 색을쓰며 얼굴 전체가 남자의 움직이는 박자에 맞추어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다.
극장안의 남자들이 모두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마도 열심히 딸딸이를 쳐 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분위기에 빠져 들면서 나도 묘한 느낌이 아랫도리에 전해진다.
아, 남자의 자지가 내 보지에 저렇게 강하게 박혀 들면 어떤 느낌일까?
잠시 옆에 앉은 문일병의 존재를 망각할 정도로 영화에 빠져 들었다.
이윽고 장면이 바뀌어 평범한 화면이 나타나자 이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옆자리의 그이도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건넨다.
"팝콘좀 더 줄까요?"
나는 말은 못하고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 극장 팝콘은 별로 맛이 없느것 같아요."
그는 계속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
"겨울에 빵빠레 먹는것도 괜찮은데..."
"아가씨, 열도 식힐겸 빵빠레 하나씩 먹고 올래요?"
어찌하나 볼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대뜸 일어나더니 과감하게 내 손을 잡고 끌어 낸다.
사람들 많은데서 어찌 하기도 뭣해서 그냥 연인인척 끌려 나갔다.
매점앞에서 빵빠레 두개를 집어들고 한쪽에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나에게 건넨다.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옆으로 손을 뻗어 빵빠레를 받았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빵빠레를 먹으면서 그는 게속 내 얼굴을 볼려고 하였지만, 난 계속 부끄러운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영화가 쫌 야하죠?"
끄덕끄덕
"이런 영화 싫으시면 나가서 차나 한잔 할까요?"
절래절래
"그럼 들어가서 영화 마저 봅시다. 본전은 뽑아야죠."
끄덕끄덕
우리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그렇게 그는 짧은 대사를, 나는 머리를 끄덕이거나 흔들거나..그렇게 1시간반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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