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랑 - 1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815회 작성일 20-01-17 19:15본문
1. 이별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니? 응?”
교문을 나서자 마자 한참을 기다린 듯 따라나서는 시후를 흘겨보며 정희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녀의 앞을 시후가 불쑥 가로 막았다.
“야! 이러지 말라고 했지? 누구 심장 떨어져 죽는 거 볼래?”
시후가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다.
“미안… 그렇지만 내 말 좀 진지하게 들어주면 안돼?”
표정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시후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됐어. 다음에 해. 오늘 정말 피곤해.”
“글쎄 내 말 들어보라니까! 이거 정말 중요한 거란 말야.”
“너한테 중요한 건진 모르지만 나에겐 아니라구!”
“이건 너한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거란 말야, 바보야!”
“암튼 됐고, 나 피곤하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 나 오늘 악어한테 걸려서 된통 당했다구. 그게 다 너 때문인 거 아니? 너가 자꾸 내 길을 막는 바람에 안 하던 지각까지 하고 남들 야자할 때 난 악어에게 불려가서......”
“문이 열리고 있어.”
“반성문 쓰느라… 뭐? 뭐가 열린다고?”
정희가 시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야!”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그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말도 없이 가고… 이젠 아주 제멋대로야. 흥!”
걸음을 재촉하는 정희의 발을 따라 여러 갈래의 그림자들이 서둘러 따라왔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희의 집. 주택가 입구에 있는 수퍼. 2층의 그 집은 정희가 태어난 집이기도 했고, 세상을 먼저 떠난 오빠와 지낸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공부 잘 했고?”
“그냥요. 아빠는요?”
“상가집에 가셨어.”
“그럼 오늘 안 오시겠군요.”
“나가시면서 그럴 것 같다고 하더구나.”
“엄마, 뭐 먹을 거 없어요?”
“출출하지? 올라가서 좀 씻어. 사과 깎아줄게.”
“사과는 밤에 먹으면 안 좋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뭐 해줄까?”
“컵라면!”
“그건 더 안 좋은 건데?”
“이잉~”
“에구, 우리 큰 애기! 그래, 일단 씻고 내려와.”
“네!”
이층 자신의 방에 가방과 교복을 대충 던져 놓고 집에서 입는 간편한 트레이닝복으로 입은 후 갈아입을 속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 본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자꾸만 내 자신이 미쳐가는 것 같아.’
거울 속 여자의 표정이 어둡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을 때 거울 속으로 불쑥 시후의 머리가 솟아 올랐다.
“꺄아악~~~”
“미, 미안… 씻고 있는 줄 몰랐어.”
“빨리 안 나가?”
“아, 알았어. 나갈게… 미안!”
“으……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엉? 너 그러다 나한테 죽는다! 팥 속에 묻어버릴 거야!!”
그러자 멀리서 시후의 기죽은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잘못했다니까! 너 어디 있나 찾아보다 그런 거야. 다신 안 그럴게. 그러니 제발 용서해줘. 응?”
“시끄러워! 나갈 때까지 너 밖에 꼼짝 말고 있어. 알았어?”
“어…… 알았…어…”
신경질적으로 샤워기 아래에서 거칠게 몸을 씻으며 정희는 씩씩거렸다.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응? 나도 이제 어엿한 숙녀라고! 숙녀! 그것도 순결한 숙녀라고! 그런데 감히 내 벗은 몸을 쳐다보려고 해? 그렇다고 니가 날 책임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엉?”
“그거야… 그렇지… 미안해……”
“암튼 다시 이런 실수하면 너 그냥 안 둘 거야. 이거 최후통첩이란 거만 명심해둬.”
“알았어. 그러니 용서해주구 좀 서둘러 나오면 안될까? 나도 시간이 좀… 없어서 말야…”
“흥! 시간이라면 쌓아놓고 사는 니가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엉?”
“어제까지는 그랬지. 그런데 상황이 좀 변했어……”
“뭔 소리야?”
“그럴 일이 있어. 그러니 좀 서둘러줘.”
“기다려. 나도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인이거든!”
“후…… 그래…”
힘없는 시후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았다. 왠지 그 느낌이 이상해 어느덧 정희의 손길이 빨라지고 있었다.
정희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설 때였다.
“정희야!”
“네, 엄마!”
이층을 향해 정희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컵라면 준비할까?”
“아뇨. 생각해보니 그냥 자는 것이 좋겠어요. 살찔 것 같거든요.”
“넌 좀 쪄야 해. 너무 말랐어!”
“아니에요. 여기서 더 찌면 인기 떨어져요.”
“여자는 좀 살이 포동해야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야.”
“그건 엄마시대 얘기구요. 지금은 아니에요.”
“허, 나중에 엄마 이야기가 뭔 뜻인지 알게 될 게다. 아무튼 그럼 쉬거라. 나도 곧 정리하고 올라가마.”
“네, 엄마! 저 피곤해서 금방 잘 것 같으니 깨우지 마세요.”
“알았다.”
책상 앞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며 정희는 뒤 쪽에 멀뚱히 서있는 시후에게 말했다.
“할 말 있다며?”
“……”
머리를 말리다 말고 고개를 돌려 시후를 봤다.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숙인 시후의 모습이 조금은 불안해 보였다.
“할 말 없어?”
다그치는 듯한 정희 말에 시후가 반응을 보였다.
“나…… 떠나게 됐어.”
갑작스런 그 말에 정희의 몸이 굳어졌다.
“그래?”
“응.”
“그렇게 됐구나. 잘 됐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언제 가는데?”
“오늘 자정.”
“그랬구나……”
“나도 오늘 알게 됐어. 그래서 미리 말을 못했어.”
“괜찮아. 미안해서 그런 거라면. 그리고 잘 된 일이잖아. 너도 언제까지 시간을 뭉개고 있을 수는 없잖아. 적당한 때가 되면 네 자리를 찾아가야지. 아무튼 잘 된 일인 것 같네. 축하해.”
“고마워. 그런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니?”
“그것이… 말야……”
정희가 수건을 책상 위에 내려 놓고 의자를 돌려 뒤를 향했다.
“말해.”
시후를 향한 정희의 시선이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봐. 무슨 일인지.”
“……”
정희의 직감은 늘 날카로웠다. 지금도 정희의 감각은 점차 날을 세우고 시후의 침묵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은…… 가기 전에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정희의 심장이 왠지 모르게 점차 두근거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 새겨들어줘.”
“듣고 있어. 말해.”
“서로 다른 누군가가 너에게 찾아올 거야.”
“서로 다른 누군가?”
“응.”
“누가?”
“그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 봤다. 10시 46분. 시후도 시계를 봤다.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나는 널 뺏으려 하고, 하나는 널 지키려 할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게 해주면 안돼?”
“시간이 지나가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다만 한가지.”
시후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너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게 돼. 그리고 그건 무척이나 중요하고… 심각한 거야. 그러니 네가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는……”
“그 때는?”
“날…… 기억해 줘!”
“뜬금 없이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아마도 때가 되면 하나씩 기억이 날 거야. 그러니까 만약 너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기억해 줘. 알았지?”
시후가 갑작스레 뒤로 돌아섰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의 뒷모습.
“야아~ 왜 그래? 무섭잖아!”
돌아선 그대로 시후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있어……”
두 번째 듣는 그의 말. 문이 열리고 있다는. 도대체 그것은 무슨 뜻일까?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나도 잘 몰라. 그렇지만 분명한 건……”
시후의 등 뒤에 하얀 옷들이 바람에 일렁이듯 갑작스런 춤을 췄다.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검은 선들이 옷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해 나갔다. 그것은 마치 현대무용수의 움직임처럼 현란했다. 정희의 눈동자가 그 선들을 쫓느라 한동안 분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선들의 움직임이 멈췄을 때, 정희는 자신도 모르는 낮은 신음성을 토해냈다.
“아……!”
정희의 눈이 다시금 모든 선들을 되짚어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점차 선들의 모든 것에 몰입한 그녀가 어느 순간 눈을 감고도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을 때쯤 놀랍게도 그 선들이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어!!”
잠시 후 시후가 다시 등을 돌렸다.
“이제 내 시간은 다 됐어.”
“어? 벌써? 12시에 간다며?”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어딜?”
“무얼 좀 찾아봐야 해. 시간이 부족하긴 하지만……”
“중요한 거야?”
“응. 제법.”
“내가 도와줄까?”
“아냐. 너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서둘러야 하기도 하고.”
“그럼 어서 가서 할 거 해. 시간도 별로 없으면서……”
“서둘러 다녀올게. 잘 하면 가기 전에 너 보러 올 거야. 그렇지만 만약 내가 다시 못 오게 되면 이게 마지막이니까… 인사는 하고 갈게.”
“어? 어……”
“고마워. 그리고… 나 너……”
어디선가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후가 마치 뒤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듯 뒤로 미끄러져갔다.
“시후야!”
“너…… 좋아했어……”
시후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그리고 정희의 얼굴도 차츰 굳어져 갔다.
시계가 12시를 향해 갈수록 정희의 마음은 자꾸만 불안해져 갔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이며 하릴없이 시계와 벽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시후가 남긴 말들을 소처럼 곱씹어 봤다.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말들이 왠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도 들었다.
“정희야……”
뒤에서 들려온 소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시후?”
뒤에 그는 없었다.
“어디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어디?”
“나…… 안보여?”
“응……”
“그렇구나… 갈 때가……”
“뭐라구?”
시후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어.”
시후가 안간힘을 다해 소리를 치는지 멀리서 힘을 다해 외치는 것 같았다.
“검은 노래를 뒤집어야 해!”
“그게 무슨 말이야? 검은 노래라니?”
“그건… 검… 래가… 를 여는…. 니까…”
“뭐?”
“나 이제…… 잘 있…… 녕!”
“야!”
더 이상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 순간 방안이 조금 더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느낌은 무언가 달랐다. 분명히 무언인가가.
“너… 정말… 간 거니?”
방안엔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후, 너 정말 간 거야? 응?”
이상한 느낌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허전함. 마음의 공간 일부가 사라진 듯한.
“시후야……”
정희는 그제서야 시후의 부존재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밀물처럼 아린 감정이 밀려들어와 마침내 발 밑을 적시고, 이어 점차 차올라 가슴을 넘어서더니 이윽고 눈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잘 가… 안녕……”
“이제 제발 그만 좀 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니니? 응?”
교문을 나서자 마자 한참을 기다린 듯 따라나서는 시후를 흘겨보며 정희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녀의 앞을 시후가 불쑥 가로 막았다.
“야! 이러지 말라고 했지? 누구 심장 떨어져 죽는 거 볼래?”
시후가 서둘러 옆으로 비켜섰다.
“미안… 그렇지만 내 말 좀 진지하게 들어주면 안돼?”
표정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시후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됐어. 다음에 해. 오늘 정말 피곤해.”
“글쎄 내 말 들어보라니까! 이거 정말 중요한 거란 말야.”
“너한테 중요한 건진 모르지만 나에겐 아니라구!”
“이건 너한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거란 말야, 바보야!”
“암튼 됐고, 나 피곤하니까 이제 그만 헤어지자. 나 오늘 악어한테 걸려서 된통 당했다구. 그게 다 너 때문인 거 아니? 너가 자꾸 내 길을 막는 바람에 안 하던 지각까지 하고 남들 야자할 때 난 악어에게 불려가서......”
“문이 열리고 있어.”
“반성문 쓰느라… 뭐? 뭐가 열린다고?”
정희가 시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야!”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그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말도 없이 가고… 이젠 아주 제멋대로야. 흥!”
걸음을 재촉하는 정희의 발을 따라 여러 갈래의 그림자들이 서둘러 따라왔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희의 집. 주택가 입구에 있는 수퍼. 2층의 그 집은 정희가 태어난 집이기도 했고, 세상을 먼저 떠난 오빠와 지낸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공부 잘 했고?”
“그냥요. 아빠는요?”
“상가집에 가셨어.”
“그럼 오늘 안 오시겠군요.”
“나가시면서 그럴 것 같다고 하더구나.”
“엄마, 뭐 먹을 거 없어요?”
“출출하지? 올라가서 좀 씻어. 사과 깎아줄게.”
“사과는 밤에 먹으면 안 좋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뭐 해줄까?”
“컵라면!”
“그건 더 안 좋은 건데?”
“이잉~”
“에구, 우리 큰 애기! 그래, 일단 씻고 내려와.”
“네!”
이층 자신의 방에 가방과 교복을 대충 던져 놓고 집에서 입는 간편한 트레이닝복으로 입은 후 갈아입을 속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옷을 모두 벗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 본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자꾸만 내 자신이 미쳐가는 것 같아.’
거울 속 여자의 표정이 어둡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을 때 거울 속으로 불쑥 시후의 머리가 솟아 올랐다.
“꺄아악~~~”
“미, 미안… 씻고 있는 줄 몰랐어.”
“빨리 안 나가?”
“아, 알았어. 나갈게… 미안!”
“으……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엉? 너 그러다 나한테 죽는다! 팥 속에 묻어버릴 거야!!”
그러자 멀리서 시후의 기죽은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잘못했다니까! 너 어디 있나 찾아보다 그런 거야. 다신 안 그럴게. 그러니 제발 용서해줘. 응?”
“시끄러워! 나갈 때까지 너 밖에 꼼짝 말고 있어. 알았어?”
“어…… 알았…어…”
신경질적으로 샤워기 아래에서 거칠게 몸을 씻으며 정희는 씩씩거렸다.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응? 나도 이제 어엿한 숙녀라고! 숙녀! 그것도 순결한 숙녀라고! 그런데 감히 내 벗은 몸을 쳐다보려고 해? 그렇다고 니가 날 책임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엉?”
“그거야… 그렇지… 미안해……”
“암튼 다시 이런 실수하면 너 그냥 안 둘 거야. 이거 최후통첩이란 거만 명심해둬.”
“알았어. 그러니 용서해주구 좀 서둘러 나오면 안될까? 나도 시간이 좀… 없어서 말야…”
“흥! 시간이라면 쌓아놓고 사는 니가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엉?”
“어제까지는 그랬지. 그런데 상황이 좀 변했어……”
“뭔 소리야?”
“그럴 일이 있어. 그러니 좀 서둘러줘.”
“기다려. 나도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인이거든!”
“후…… 그래…”
힘없는 시후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았다. 왠지 그 느낌이 이상해 어느덧 정희의 손길이 빨라지고 있었다.
정희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설 때였다.
“정희야!”
“네, 엄마!”
이층을 향해 정희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컵라면 준비할까?”
“아뇨. 생각해보니 그냥 자는 것이 좋겠어요. 살찔 것 같거든요.”
“넌 좀 쪄야 해. 너무 말랐어!”
“아니에요. 여기서 더 찌면 인기 떨어져요.”
“여자는 좀 살이 포동해야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야.”
“그건 엄마시대 얘기구요. 지금은 아니에요.”
“허, 나중에 엄마 이야기가 뭔 뜻인지 알게 될 게다. 아무튼 그럼 쉬거라. 나도 곧 정리하고 올라가마.”
“네, 엄마! 저 피곤해서 금방 잘 것 같으니 깨우지 마세요.”
“알았다.”
책상 앞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며 정희는 뒤 쪽에 멀뚱히 서있는 시후에게 말했다.
“할 말 있다며?”
“……”
머리를 말리다 말고 고개를 돌려 시후를 봤다.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숙인 시후의 모습이 조금은 불안해 보였다.
“할 말 없어?”
다그치는 듯한 정희 말에 시후가 반응을 보였다.
“나…… 떠나게 됐어.”
갑작스런 그 말에 정희의 몸이 굳어졌다.
“그래?”
“응.”
“그렇게 됐구나. 잘 됐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언제 가는데?”
“오늘 자정.”
“그랬구나……”
“나도 오늘 알게 됐어. 그래서 미리 말을 못했어.”
“괜찮아. 미안해서 그런 거라면. 그리고 잘 된 일이잖아. 너도 언제까지 시간을 뭉개고 있을 수는 없잖아. 적당한 때가 되면 네 자리를 찾아가야지. 아무튼 잘 된 일인 것 같네. 축하해.”
“고마워. 그런데……”
“왜? 무슨 문제라도 있니?”
“그것이… 말야……”
정희가 수건을 책상 위에 내려 놓고 의자를 돌려 뒤를 향했다.
“말해.”
시후를 향한 정희의 시선이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봐. 무슨 일인지.”
“……”
정희의 직감은 늘 날카로웠다. 지금도 정희의 감각은 점차 날을 세우고 시후의 침묵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은…… 가기 전에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정희의 심장이 왠지 모르게 점차 두근거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 새겨들어줘.”
“듣고 있어. 말해.”
“서로 다른 누군가가 너에게 찾아올 거야.”
“서로 다른 누군가?”
“응.”
“누가?”
“그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 봤다. 10시 46분. 시후도 시계를 봤다.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나는 널 뺏으려 하고, 하나는 널 지키려 할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게 해주면 안돼?”
“시간이 지나가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다만 한가지.”
시후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너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게 돼. 그리고 그건 무척이나 중요하고… 심각한 거야. 그러니 네가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는……”
“그 때는?”
“날…… 기억해 줘!”
“뜬금 없이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아마도 때가 되면 하나씩 기억이 날 거야. 그러니까 만약 너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를 기억해 줘. 알았지?”
시후가 갑작스레 뒤로 돌아섰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의 뒷모습.
“야아~ 왜 그래? 무섭잖아!”
돌아선 그대로 시후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있어……”
두 번째 듣는 그의 말. 문이 열리고 있다는. 도대체 그것은 무슨 뜻일까?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나도 잘 몰라. 그렇지만 분명한 건……”
시후의 등 뒤에 하얀 옷들이 바람에 일렁이듯 갑작스런 춤을 췄다.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검은 선들이 옷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해 나갔다. 그것은 마치 현대무용수의 움직임처럼 현란했다. 정희의 눈동자가 그 선들을 쫓느라 한동안 분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선들의 움직임이 멈췄을 때, 정희는 자신도 모르는 낮은 신음성을 토해냈다.
“아……!”
정희의 눈이 다시금 모든 선들을 되짚어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점차 선들의 모든 것에 몰입한 그녀가 어느 순간 눈을 감고도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을 때쯤 놀랍게도 그 선들이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어!!”
잠시 후 시후가 다시 등을 돌렸다.
“이제 내 시간은 다 됐어.”
“어? 벌써? 12시에 간다며?”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어딜?”
“무얼 좀 찾아봐야 해. 시간이 부족하긴 하지만……”
“중요한 거야?”
“응. 제법.”
“내가 도와줄까?”
“아냐. 너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서둘러야 하기도 하고.”
“그럼 어서 가서 할 거 해. 시간도 별로 없으면서……”
“서둘러 다녀올게. 잘 하면 가기 전에 너 보러 올 거야. 그렇지만 만약 내가 다시 못 오게 되면 이게 마지막이니까… 인사는 하고 갈게.”
“어? 어……”
“고마워. 그리고… 나 너……”
어디선가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후가 마치 뒤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듯 뒤로 미끄러져갔다.
“시후야!”
“너…… 좋아했어……”
시후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그리고 정희의 얼굴도 차츰 굳어져 갔다.
시계가 12시를 향해 갈수록 정희의 마음은 자꾸만 불안해져 갔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이며 하릴없이 시계와 벽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시후가 남긴 말들을 소처럼 곱씹어 봤다.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말들이 왠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도 들었다.
“정희야……”
뒤에서 들려온 소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시후?”
뒤에 그는 없었다.
“어디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어디?”
“나…… 안보여?”
“응……”
“그렇구나… 갈 때가……”
“뭐라구?”
시후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어.”
시후가 안간힘을 다해 소리를 치는지 멀리서 힘을 다해 외치는 것 같았다.
“검은 노래를 뒤집어야 해!”
“그게 무슨 말이야? 검은 노래라니?”
“그건… 검… 래가… 를 여는…. 니까…”
“뭐?”
“나 이제…… 잘 있…… 녕!”
“야!”
더 이상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한 순간 방안이 조금 더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느낌은 무언가 달랐다. 분명히 무언인가가.
“너… 정말… 간 거니?”
방안엔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후, 너 정말 간 거야? 응?”
이상한 느낌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허전함. 마음의 공간 일부가 사라진 듯한.
“시후야……”
정희는 그제서야 시후의 부존재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밀물처럼 아린 감정이 밀려들어와 마침내 발 밑을 적시고, 이어 점차 차올라 가슴을 넘어서더니 이윽고 눈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
“잘 가… 안녕……”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