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랑 -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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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89회 작성일 20-01-17 19:15본문
4. 악몽
“이러지 마, 제발……”
후미진 학교 담 벼락에 몸을 기대며 연아는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기태의 눈에는 탐욕의 불길이 가득하기만 했다. 야자시간에 찾아온 옆 반 효진을 따라 무심결에 따라 나선 길이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공포의 순간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기태 주변에는 언제나처럼 그의 똘마니들이 포위하듯 그녀를 감싸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듯 흥미로워 했다.
“걱정할 것 없어. 너도 곧 즐기게 될 거야. 후후……”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기태가 점점 느린 걸음으로 연아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마!”
“그거 알아? 막다른 골목에 몰린 먹이감은 오히려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를 포식자에게 목을 내민다는 것을. 그건……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이는 짜릿함과 같지. 또…… 극치의 황홀감을 동반하기도 하고.”
어느새 다가온 기태의 왼손이 연아의 가슴을 움켜 쥐었다.
“아! 하지마! 아프단 말야…”
“고통이 때론 희열이 되기도 하지.”
“놔, 안 그러면 소리칠 거야!”
기태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떠돌았다.
“해봐! 그랬다간 니 잘난 얼굴에…”
기태의 손에서 무언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튀어 나왔다. 흔히들 잭 나이프라고 불리는 그 것이 어둠 속에서 창백한 빛을 뿜어 댔다. 연아는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타가 학교 퀸이라 자부하는 연아는 도도하긴 했어도 강심장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 앞에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고 무엇 하나 그녀의 신경을 거스를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늘 당연한 듯한 선의를 대하던 연아는 오늘 기태의 짐승 같은 모습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진작부터 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손은 굳어진 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자신의 귀에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기태의 칼이 연아의 교복을 안에서부터 잘라내고 있었다. 연아는 겁에 질린 얼굴로 칼끝을 바라봤다.
“그만 둬!”
날카로운 소리에 기태도 그의 똘마니들도 심지어 연아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분노로 몸을 떠는 정희가 서 있었다.
“정희……”
기태가 그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기태는 정희 앞에서만큼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 자신도 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정희는 기태에게 무형의 심리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기태 너, 이런 사람이었어? 여자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게 남자가 할 짓이야? 그래도 난 네가…”
“시끄러워!”
기태의 소리에 정희가 움찔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기태의 이글거리는 눈빛.
“더 지껄이면… 너도 똑같이 해줄 테니까.”
정희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기태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행실이 어떻다는 것은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정희가 겪은 기태는 여자에 대해서만큼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의 눈빛은 이제까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제서야 정희는 그가 한 말이 실제로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가자!”
기태를 따라다니는 똘마니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뭐해? 가지니까.”
“그냥?”
“저 년 때문에 흥이 다 깨졌어. 어이, 연아! 우리 다음에 다시 오붓하게 시간을 갖자고. 좋지? 후후후……”
기태와 그의 똘마니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 동안 연아와 정희는 몸을 떨며 그 자리에 서 있있다. 잠시 후 몸에 힘이 풀린 듯 연아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더불어 칼에 찢어진 곳이 벌어져 그녀의 하얀 몸이 비쳐 보였다. 그제서야 정희는 정신을 차리고 연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옷핀을 꺼내 연아의 옷을 정리해주었다.
“고마워.”
“다음부턴 조심해. 너 효진이 따라 나왔지?”
“응.”
“저 놈들 패거리야. 요즘 여자애들이 쟤네들을 경계하니까 효진이가 쟤네들 대신 삐끼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
“그랬구나. 난 몰랐어. 그냥 할 말이 있다고 하길래 따라 나왔더니 흑……”
긴장이 풀리는지 연아가 눈물을 보였다.
“어서 가자.”
그러나 정희가 연아를 부축해 몇 걸음 내딛지 못해서 그들의 걸음은 누군가에 의해 가로 막혔다.
“아직 남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마저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
“누, 누구?”
고개를 들어 바라본 정희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학교 짱으로 불리는 3학년 조정욱이었다. 가슴 가득히 느껴지는 어둠의 기. 정희의 가슴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애들 중에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가 아직도 있었나? 하하……”
정욱의 눈이 정희를 보다가 연아에게로 옮겨가더니 아래 위로 훑어 봤다.
“기태가 제법 눈이 있군. 최고의 물건을 단박에 알아보고.”
연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만큼 하얗게 번쩍였다. 정희는 그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연아를 부축하며 느껴졌던 그것. 연아의 몸에서 느껴지는 어떤 것. 같은 여자임에도 자꾸만 다가서고 싶은 그것. 아까 기태가 원했던 것도 기실 연아의 그것이었고,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정욱이 원하는 것도 아마도 그것일 터였다.
정욱의 눈이 다시 정희를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아니 그것은 감출 수 없는 놀람이었다. 평소 학교에서 여러 번 지나쳤을 텐데도 알지 못했던 그것. 은은한 달빛 아래 빛나는 정희의 눈빛. 자신의 강한 눈빛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파고드는 투명함. 그것은 바로 천적의 눈빛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너 같은 인물이 있었음에도 몰랐다니…… 대단하구나. 어떻게 나마저도 속일 수 있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난 아무 것도 속인 것 없어요.”
“지금 그걸 믿으라고? 흐흐……”
정욱이 점차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정희는 잠시 망설이다 연아에게 속삭였다.
“어서 가. 뛰어서. 지금 가면 널 쫓아가진 않을 거야. 어서!”
“그럼, 넌?”
“난… 내가 알아서 할게. 어서 가. 어서!”
정희가 연아를 한쪽으로 밀쳤다. 정희의 힘에 몇 걸음 옆으로 밀려간 연아가 잠시 정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연아는 미친 듯이 교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것은 연아 자신도 모르게 지금은 학교보다 학교 밖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연아가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정욱은 아무런 움직임을 하지 않았다. 그저 힐끗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 다시 정희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지금 웃음도 울음도 아닌 묘하게 긴장된 얼굴이었다.
정욱과 정희가 거리가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정희는 굳어진 다리로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연아를 위해서도 자신은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정욱의 관심사는 지금 오직 정희였다. 연아가 옆에 있었다고 해도 오히려 그가 거추장스럽게 여길 판국이었고, 불행히도 그런 그의 사정을 정희는 모르고 있었다.
정욱이 바로 코앞에 서서 냄새를 맡듯 킁킁거렸다. 그러다 곧 굳어졌던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하하하…… 내가 운이 좋군. 후후후……”
그가 하는 말이 무엇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희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넌 아직 각성 전이군. 후후…… 어쩐지… 아니었다면 벌써 내가 널 알아봤을 거야. 그렇다면 이건 내게 행운인 셈이지. 널 내 것으로 하면 내겐 더 없는 큰 힘이 될 테니. 크흐흐……”
“내 몸에 손대면 소리지를 거야!”
그의 얼굴이 정희를 빤히 내려다 보다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러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지나갔다.
“그래, 해 봐. 과연 누가 올까? 이 늦은 시간에 남은 선생이 몇이나 있을 것 같아? 더구나 지금 야자감독은 최성렬쌤인걸 너도 알지 않나? 아직 각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기는 느낄 텐데 말야. 그렇지?”
순간 정희의 마음에 아득한 절망감이 들기 시작했다. 최성렬선생. 체육담당. 일명 악어. 정욱과 같은 어둠의 기가 넘치는 인물. 어쩌면 그자가 이 모든 어둠을 끌어 모은 주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자라면 정욱이 무슨 짓을 하던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도 그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아니 터질 듯한 젊음을 즐기자고. 너도 혼자 있을 땐 자위도 하고 했을 거잖아.”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비겁하게 여잘 힘으로 어떻게 하려고나 하는 놈이…...”
순간 정욱의 손이 날카롭게 정희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이 멍했다. 수많은 병아리들이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고 무중력의 우주에 떠 있는 듯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정희를 향해 정욱이 손을 뻗었고 이내 정희의 교복단추가 뜯겨져 나갔다. 이어 겉옷이 힘없이 벗겨져 땅에 내동댕이 쳐졌다. 간신이 정신을 차린 정희가 그를 힘껏 밀쳤다. 아니 밀치려 했다.
“그래, 적당한 반항은 남자를 더 타오르게 하지. 후후…… 너의 그런 앙칼진 모습이 더 나를 뜨겁게 하는군. 더 해봐! 결국엔 너 스스로 가랑이를 벌리고 제발 좀 넣어달라고 빌게 될 테니 말야.”
여유롭게 정희의 손길을 비켜낸 정욱이 더욱 비열한 웃음으로 다가섰다. 정희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도망갈 기회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몸은 감각을 잃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정희의 가슴 속으로 정욱의 손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곧장 브래지어를 향해 올라 올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학교 담장을 따라 도망가려 했다. 그런 정희의 노력은 그저 노력에 불과했다. 정희의 몸이 빠져나가는 순간 어느새 따라온 정욱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를 잡아 당겼고 옷은 힘없이 찢어져나갔다.
“악! 사람 살려… 읍!”
정욱의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고 더 이상의 큰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욱의 주먹이 정희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정욱이 손을 놓았음에도 정희는 꼼짝하지 못하고 숨을 허덕이며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다가오는 아득한 절망감으로 정희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르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런 그녀를 정욱은 득의의 미소로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교복 윗도리를 벗어 정희 뒤 쪽 바닥에 깐 후 멍하니 앉아 있는 정희 앞에 쪼그려 앉아 정희의 어깨를 잡아 뒤로 넘겼다. 더 이상의 반항은 무자비한 폭력만을 부를 것이 분명했다. 두려움에 떠는 정희의 눈이 감겨진 채 이젠 아무런 저항 없이 정욱이 이끄는 대로 뒤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오늘의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어둠이 내린 교정의 한 끝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순결을 잃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두려움이 가득히 몰려 왔지만 지금 정희가 바라는 것은 다만 이 일이 어서 지나가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정희의 치마가 걷어 올려지고 그녀의 허벅지가 달빛 아래 은은히 빛났다. 꼭 닫혀진 그녀의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스스로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한 그녀의 마음 때문인지 아무런 소리도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깊은 고요가 한 가득 밀려와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기다리는 정희를 감싸고 흘렀다.
‘시후야!’
왜 그랬을까? 갑작스럽게 그가 생각이 났다. 어떤 곳에서도 전혀 자신의 입장을 생각지 않고 불쑥 솟곤 해서 그녀를 놀래키곤 하던 그가. 이제 보니 그의 그런 능력이 이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위험에 처할 상황이면 늘 미리 알려주곤 했었던 시후였다. 오늘은 어디를 가지 마라. 어느 길로 가자. 어디는 들리면 안된다. 이건 꼭 해야 한다. 어쩐지 그 모든 그의 잔소리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됐다. 만약 지금도 그가 있었다면 아마도 연아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미리 알려주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부존재가 발생한 단 몇 십 시간 만에 자신에게 닥친 이 큰 위험이 더욱 그의 존재성을 부각시켜주는 듯 했다.
“처녀를 갖는다는 건 무한한 기쁨이지. 후후후……”
정욱의 혼잣말 같은 소리가 귓가에 흘러가고 바지가 내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 눈을 감은 정희의 몸 위로 정욱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한 느낌에 정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정희가 마주친 것은 육욕에 눈 먼 정욱이 아니라 처음 볼 때처럼 편안한 웃음의 그, 김주호 선생이었다.
“선생님!”
“또 보는구나.”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에……?”
“여기가 어딘데?”
황급히 주위를 돌아봤다. 주위에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아까의 그 어두운 학교 담장 한 쪽 구석이 아니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낯선 방이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후훗…… 여긴 내 방이란다.”
“선생님… 방이요?”
“음.”
“그럴리가… 전 조금 전에 학교에……”
김주호 선생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흘렀다.
“꿈을 꾼 모양이구나.”
“선생님… 그럼 전 여기 어떻게 오게 된 건가요?”
“학교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찾으러 갔다가 교문 앞에 쓰러져 있는 널 발견했단다. 그래서 집도 모르고 이미 시간도 늦고 해서 할 수 없이 여기로 데려왔지. 이제 정신 들었으면 집에 가봐야지? 어때, 일어날 수 있겠니?”
그때서야 황급히 자신의 몸을 돌아봤다. 몸에 특별한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옷을 살펴봤다. 어느 것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뜯겨졌던 단추도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제가 정말 교문 앞에 쓰러져 있었나요?”
“그렇다니까. 아마 빈혈이 있는 모양이구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겪는 흔한 일이니 신경 쓸 건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병원에 들려보렴. 마침 토요일이라 학교도 쉬니 오전에 진료받으면 될 거야.
김주호 선생이 주는 물을 한 컵 마신 후, 정희는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디를 봐도 정말 꿈을 꾼 듯 정욱에게 당하던 일의 흔적은 있지 않았다. 심지어 책가방까지도 가지런히 한 쪽에 놓여 있어 정말로 빈혈로 쓰러져 험한 꿈을 꾼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하하…… 교사로서 그건 당연한 거지. 자, 그럼 가볼까?”
김주호 선생과 함께 밖으로 나오며 다시 집을 돌아봤다. 학교 앞에서 정희의 집으로 오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면 갈라지는 골목 길에서 조금 더 올라온 곳에 있는 원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아침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이해가 됐다.
“정희는 어느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니?”
고등학생이라면 아마도 수없이 고민했을 내용이지만 그러나 대학이란 괴물은 도무지 만만하지 않은 괴물과도 같았다. 정희도 그런 고민을 수없이 하곤 했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은 서울에 있는 대학이면 다 좋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좋은 곳에 가고 싶어요.”
“하긴 그거야 당연한 거지. 그래, 성적은 어느 정도 나오니?”
“대부분 1등급이긴 한데 아직 수학이 좀 약해요.”
“그렇구나. 내가 국어담당이긴 한데 수학도 좀 한단다. 참, 집이 멀지 않지?”
“네. 횡단보도에서 아래쪽 골목으로 조금만 가면 돼요. 저기 수퍼 보이시죠? 저기가 저희 집이에요.”
“아, 그래? 나도 가끔 이용해야겠구나. 하하…… 참, 수학 공부하다가 막히면 내게 이야기 하렴. 내가 문과치고는 수학을 곧잘 했거든. 정희네 반도 문과반이지?”
“네.”
“그럼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 난 대부분 퇴근하면 집에 있으니 시간 나면 연락하고 오렴. 핸드폰 있지?”
“네…”
“이리 줘봐.”
핸드폰을 건네주자 김선생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곧 이어 피아노 소리의 수신음이 들렸다.
“필요할 때 전화하렴.”
“네…”
수퍼 앞까지 정희를 데려다 주고 김주호 선생이 돌아섰다. 느린 듯한 걸음에도 그는 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흔들림조차 없이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며 정희는 시후를 떠올리고 있었다. 시후도 저렇게 흔들림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곤 했었다.
‘넌 어디로 간거니……?’
“이러지 마, 제발……”
후미진 학교 담 벼락에 몸을 기대며 연아는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기태의 눈에는 탐욕의 불길이 가득하기만 했다. 야자시간에 찾아온 옆 반 효진을 따라 무심결에 따라 나선 길이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공포의 순간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기태 주변에는 언제나처럼 그의 똘마니들이 포위하듯 그녀를 감싸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듯 흥미로워 했다.
“걱정할 것 없어. 너도 곧 즐기게 될 거야. 후후……”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기태가 점점 느린 걸음으로 연아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마!”
“그거 알아? 막다른 골목에 몰린 먹이감은 오히려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를 포식자에게 목을 내민다는 것을. 그건……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이는 짜릿함과 같지. 또…… 극치의 황홀감을 동반하기도 하고.”
어느새 다가온 기태의 왼손이 연아의 가슴을 움켜 쥐었다.
“아! 하지마! 아프단 말야…”
“고통이 때론 희열이 되기도 하지.”
“놔, 안 그러면 소리칠 거야!”
기태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떠돌았다.
“해봐! 그랬다간 니 잘난 얼굴에…”
기태의 손에서 무언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튀어 나왔다. 흔히들 잭 나이프라고 불리는 그 것이 어둠 속에서 창백한 빛을 뿜어 댔다. 연아는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에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타가 학교 퀸이라 자부하는 연아는 도도하긴 했어도 강심장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 앞에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고 무엇 하나 그녀의 신경을 거스를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늘 당연한 듯한 선의를 대하던 연아는 오늘 기태의 짐승 같은 모습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진작부터 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손은 굳어진 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자신의 귀에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기태의 칼이 연아의 교복을 안에서부터 잘라내고 있었다. 연아는 겁에 질린 얼굴로 칼끝을 바라봤다.
“그만 둬!”
날카로운 소리에 기태도 그의 똘마니들도 심지어 연아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분노로 몸을 떠는 정희가 서 있었다.
“정희……”
기태가 그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기태는 정희 앞에서만큼은 어린아이 같았다. 그 자신도 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정희는 기태에게 무형의 심리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기태 너, 이런 사람이었어? 여자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게 남자가 할 짓이야? 그래도 난 네가…”
“시끄러워!”
기태의 소리에 정희가 움찔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기태의 이글거리는 눈빛.
“더 지껄이면… 너도 똑같이 해줄 테니까.”
정희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기태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의 행실이 어떻다는 것은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정희가 겪은 기태는 여자에 대해서만큼은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의 눈빛은 이제까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제서야 정희는 그가 한 말이 실제로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가자!”
기태를 따라다니는 똘마니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뭐해? 가지니까.”
“그냥?”
“저 년 때문에 흥이 다 깨졌어. 어이, 연아! 우리 다음에 다시 오붓하게 시간을 갖자고. 좋지? 후후후……”
기태와 그의 똘마니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 동안 연아와 정희는 몸을 떨며 그 자리에 서 있있다. 잠시 후 몸에 힘이 풀린 듯 연아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더불어 칼에 찢어진 곳이 벌어져 그녀의 하얀 몸이 비쳐 보였다. 그제서야 정희는 정신을 차리고 연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옷핀을 꺼내 연아의 옷을 정리해주었다.
“고마워.”
“다음부턴 조심해. 너 효진이 따라 나왔지?”
“응.”
“저 놈들 패거리야. 요즘 여자애들이 쟤네들을 경계하니까 효진이가 쟤네들 대신 삐끼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
“그랬구나. 난 몰랐어. 그냥 할 말이 있다고 하길래 따라 나왔더니 흑……”
긴장이 풀리는지 연아가 눈물을 보였다.
“어서 가자.”
그러나 정희가 연아를 부축해 몇 걸음 내딛지 못해서 그들의 걸음은 누군가에 의해 가로 막혔다.
“아직 남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마저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
“누, 누구?”
고개를 들어 바라본 정희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학교 짱으로 불리는 3학년 조정욱이었다. 가슴 가득히 느껴지는 어둠의 기. 정희의 가슴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애들 중에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애가 아직도 있었나? 하하……”
정욱의 눈이 정희를 보다가 연아에게로 옮겨가더니 아래 위로 훑어 봤다.
“기태가 제법 눈이 있군. 최고의 물건을 단박에 알아보고.”
연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만큼 하얗게 번쩍였다. 정희는 그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연아를 부축하며 느껴졌던 그것. 연아의 몸에서 느껴지는 어떤 것. 같은 여자임에도 자꾸만 다가서고 싶은 그것. 아까 기태가 원했던 것도 기실 연아의 그것이었고,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정욱이 원하는 것도 아마도 그것일 터였다.
정욱의 눈이 다시 정희를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아니 그것은 감출 수 없는 놀람이었다. 평소 학교에서 여러 번 지나쳤을 텐데도 알지 못했던 그것. 은은한 달빛 아래 빛나는 정희의 눈빛. 자신의 강한 눈빛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파고드는 투명함. 그것은 바로 천적의 눈빛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너 같은 인물이 있었음에도 몰랐다니…… 대단하구나. 어떻게 나마저도 속일 수 있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난 아무 것도 속인 것 없어요.”
“지금 그걸 믿으라고? 흐흐……”
정욱이 점차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정희는 잠시 망설이다 연아에게 속삭였다.
“어서 가. 뛰어서. 지금 가면 널 쫓아가진 않을 거야. 어서!”
“그럼, 넌?”
“난… 내가 알아서 할게. 어서 가. 어서!”
정희가 연아를 한쪽으로 밀쳤다. 정희의 힘에 몇 걸음 옆으로 밀려간 연아가 잠시 정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연아는 미친 듯이 교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것은 연아 자신도 모르게 지금은 학교보다 학교 밖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연아가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정욱은 아무런 움직임을 하지 않았다. 그저 힐끗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 다시 정희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지금 웃음도 울음도 아닌 묘하게 긴장된 얼굴이었다.
정욱과 정희가 거리가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정희는 굳어진 다리로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연아를 위해서도 자신은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정욱의 관심사는 지금 오직 정희였다. 연아가 옆에 있었다고 해도 오히려 그가 거추장스럽게 여길 판국이었고, 불행히도 그런 그의 사정을 정희는 모르고 있었다.
정욱이 바로 코앞에 서서 냄새를 맡듯 킁킁거렸다. 그러다 곧 굳어졌던 얼굴에 웃음을 떠올렸다.
“하하하…… 내가 운이 좋군. 후후후……”
그가 하는 말이 무엇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희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넌 아직 각성 전이군. 후후…… 어쩐지… 아니었다면 벌써 내가 널 알아봤을 거야. 그렇다면 이건 내게 행운인 셈이지. 널 내 것으로 하면 내겐 더 없는 큰 힘이 될 테니. 크흐흐……”
“내 몸에 손대면 소리지를 거야!”
그의 얼굴이 정희를 빤히 내려다 보다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러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지나갔다.
“그래, 해 봐. 과연 누가 올까? 이 늦은 시간에 남은 선생이 몇이나 있을 것 같아? 더구나 지금 야자감독은 최성렬쌤인걸 너도 알지 않나? 아직 각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기는 느낄 텐데 말야. 그렇지?”
순간 정희의 마음에 아득한 절망감이 들기 시작했다. 최성렬선생. 체육담당. 일명 악어. 정욱과 같은 어둠의 기가 넘치는 인물. 어쩌면 그자가 이 모든 어둠을 끌어 모은 주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 자라면 정욱이 무슨 짓을 하던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도 그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아니 터질 듯한 젊음을 즐기자고. 너도 혼자 있을 땐 자위도 하고 했을 거잖아.”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비겁하게 여잘 힘으로 어떻게 하려고나 하는 놈이…...”
순간 정욱의 손이 날카롭게 정희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이 멍했다. 수많은 병아리들이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고 무중력의 우주에 떠 있는 듯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정희를 향해 정욱이 손을 뻗었고 이내 정희의 교복단추가 뜯겨져 나갔다. 이어 겉옷이 힘없이 벗겨져 땅에 내동댕이 쳐졌다. 간신이 정신을 차린 정희가 그를 힘껏 밀쳤다. 아니 밀치려 했다.
“그래, 적당한 반항은 남자를 더 타오르게 하지. 후후…… 너의 그런 앙칼진 모습이 더 나를 뜨겁게 하는군. 더 해봐! 결국엔 너 스스로 가랑이를 벌리고 제발 좀 넣어달라고 빌게 될 테니 말야.”
여유롭게 정희의 손길을 비켜낸 정욱이 더욱 비열한 웃음으로 다가섰다. 정희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도망갈 기회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몸은 감각을 잃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정희의 가슴 속으로 정욱의 손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곧장 브래지어를 향해 올라 올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빠르게 몸을 뒤로 빼며 학교 담장을 따라 도망가려 했다. 그런 정희의 노력은 그저 노력에 불과했다. 정희의 몸이 빠져나가는 순간 어느새 따라온 정욱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를 잡아 당겼고 옷은 힘없이 찢어져나갔다.
“악! 사람 살려… 읍!”
정욱의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고 더 이상의 큰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욱의 주먹이 정희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정욱이 손을 놓았음에도 정희는 꼼짝하지 못하고 숨을 허덕이며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다가오는 아득한 절망감으로 정희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르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런 그녀를 정욱은 득의의 미소로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교복 윗도리를 벗어 정희 뒤 쪽 바닥에 깐 후 멍하니 앉아 있는 정희 앞에 쪼그려 앉아 정희의 어깨를 잡아 뒤로 넘겼다. 더 이상의 반항은 무자비한 폭력만을 부를 것이 분명했다. 두려움에 떠는 정희의 눈이 감겨진 채 이젠 아무런 저항 없이 정욱이 이끄는 대로 뒤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오늘의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어둠이 내린 교정의 한 끝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순결을 잃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두려움이 가득히 몰려 왔지만 지금 정희가 바라는 것은 다만 이 일이 어서 지나가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정희의 치마가 걷어 올려지고 그녀의 허벅지가 달빛 아래 은은히 빛났다. 꼭 닫혀진 그녀의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스스로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한 그녀의 마음 때문인지 아무런 소리도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깊은 고요가 한 가득 밀려와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기다리는 정희를 감싸고 흘렀다.
‘시후야!’
왜 그랬을까? 갑작스럽게 그가 생각이 났다. 어떤 곳에서도 전혀 자신의 입장을 생각지 않고 불쑥 솟곤 해서 그녀를 놀래키곤 하던 그가. 이제 보니 그의 그런 능력이 이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위험에 처할 상황이면 늘 미리 알려주곤 했었던 시후였다. 오늘은 어디를 가지 마라. 어느 길로 가자. 어디는 들리면 안된다. 이건 꼭 해야 한다. 어쩐지 그 모든 그의 잔소리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됐다. 만약 지금도 그가 있었다면 아마도 연아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미리 알려주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부존재가 발생한 단 몇 십 시간 만에 자신에게 닥친 이 큰 위험이 더욱 그의 존재성을 부각시켜주는 듯 했다.
“처녀를 갖는다는 건 무한한 기쁨이지. 후후후……”
정욱의 혼잣말 같은 소리가 귓가에 흘러가고 바지가 내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 눈을 감은 정희의 몸 위로 정욱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한 느낌에 정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정희가 마주친 것은 육욕에 눈 먼 정욱이 아니라 처음 볼 때처럼 편안한 웃음의 그, 김주호 선생이었다.
“선생님!”
“또 보는구나.”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에……?”
“여기가 어딘데?”
황급히 주위를 돌아봤다. 주위에 보이는 것은 놀랍게도 아까의 그 어두운 학교 담장 한 쪽 구석이 아니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낯선 방이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후훗…… 여긴 내 방이란다.”
“선생님… 방이요?”
“음.”
“그럴리가… 전 조금 전에 학교에……”
김주호 선생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흘렀다.
“꿈을 꾼 모양이구나.”
“선생님… 그럼 전 여기 어떻게 오게 된 건가요?”
“학교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찾으러 갔다가 교문 앞에 쓰러져 있는 널 발견했단다. 그래서 집도 모르고 이미 시간도 늦고 해서 할 수 없이 여기로 데려왔지. 이제 정신 들었으면 집에 가봐야지? 어때, 일어날 수 있겠니?”
그때서야 황급히 자신의 몸을 돌아봤다. 몸에 특별한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옷을 살펴봤다. 어느 것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뜯겨졌던 단추도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제가 정말 교문 앞에 쓰러져 있었나요?”
“그렇다니까. 아마 빈혈이 있는 모양이구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누구나 겪는 흔한 일이니 신경 쓸 건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병원에 들려보렴. 마침 토요일이라 학교도 쉬니 오전에 진료받으면 될 거야.
김주호 선생이 주는 물을 한 컵 마신 후, 정희는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디를 봐도 정말 꿈을 꾼 듯 정욱에게 당하던 일의 흔적은 있지 않았다. 심지어 책가방까지도 가지런히 한 쪽에 놓여 있어 정말로 빈혈로 쓰러져 험한 꿈을 꾼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하하…… 교사로서 그건 당연한 거지. 자, 그럼 가볼까?”
김주호 선생과 함께 밖으로 나오며 다시 집을 돌아봤다. 학교 앞에서 정희의 집으로 오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면 갈라지는 골목 길에서 조금 더 올라온 곳에 있는 원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아침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이해가 됐다.
“정희는 어느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니?”
고등학생이라면 아마도 수없이 고민했을 내용이지만 그러나 대학이란 괴물은 도무지 만만하지 않은 괴물과도 같았다. 정희도 그런 고민을 수없이 하곤 했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은 서울에 있는 대학이면 다 좋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좋은 곳에 가고 싶어요.”
“하긴 그거야 당연한 거지. 그래, 성적은 어느 정도 나오니?”
“대부분 1등급이긴 한데 아직 수학이 좀 약해요.”
“그렇구나. 내가 국어담당이긴 한데 수학도 좀 한단다. 참, 집이 멀지 않지?”
“네. 횡단보도에서 아래쪽 골목으로 조금만 가면 돼요. 저기 수퍼 보이시죠? 저기가 저희 집이에요.”
“아, 그래? 나도 가끔 이용해야겠구나. 하하…… 참, 수학 공부하다가 막히면 내게 이야기 하렴. 내가 문과치고는 수학을 곧잘 했거든. 정희네 반도 문과반이지?”
“네.”
“그럼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 난 대부분 퇴근하면 집에 있으니 시간 나면 연락하고 오렴. 핸드폰 있지?”
“네…”
“이리 줘봐.”
핸드폰을 건네주자 김선생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곧 이어 피아노 소리의 수신음이 들렸다.
“필요할 때 전화하렴.”
“네…”
수퍼 앞까지 정희를 데려다 주고 김주호 선생이 돌아섰다. 느린 듯한 걸음에도 그는 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가고 있었다. 흔들림조차 없이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며 정희는 시후를 떠올리고 있었다. 시후도 저렇게 흔들림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곤 했었다.
‘넌 어디로 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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