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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오솔길 옆 -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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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471회 작성일 20-01-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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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오솔길 옆

은성스님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잠 들지 않고 밤을 지새웠다. 목이 말라 부엌에 들러 바깥세상을 바라보자 어느새 어두웠던 세상은 파란 수채화 물감을 덧칠한 듯 파랗게 변해 있었다. 대접에 물을 받아 마시고는 방으로 돌아갔을 때 은성은 평소와 다름 없이 아침 기도를 위해 일어나 이불을 개고 있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한숨도 자질 못해서 어떡하지?”

평소와 다름 없는 은성의 인사에 나는 조금은 허탈했지만 안도감이 더 커서인지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준비 다 됐으면 기도하러 가요, 스님!”

“응!”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밝은 웃음을 보이며 우리는 나이 터울이 큰 남매처럼 웃으며 방을 정리하고 법당으로 갔다.



법당의 문을 열고 정좌로 고쳐 앉아 평소와 같이 마음을 비우려 했지만, 내 마음 속엔 어제 밤에 대한 공포와 분노, 그리고 남아 있는 또 다른 남자에 대한 적개심까지 수많은 마음들이 엉켜와서 어지러웠다. 나는 어린 시절 매미를 잡기 위해 돌아다니던 아이처럼 감정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붙잡아서 정리 하려 애썼다.

.

.

.

.

눈을 떴을 때 나는 얇은 이불이 덮은 채 법당에 누워있었다. 잠을 잤나 보다. 순간 어제의 공포가 갑작스레 떠올려지며 주변의 은성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스님!”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그 곳도 텅 빈 채로 어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개 자식들, 그 절름발이도 똑 같은 자식이었던 거야! 내가 다리 몽둥이를 잘라주겠다!’ 라고 생각하며 부수 듯이 문을 걷어 찼다.



그러나 내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을 뿐 어떠한 사건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더욱 초조해져 혹시 산 아래로 데려간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신발을 고쳐 신고는 부엌에서 도끼를 찾아 들고 산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안녕 폭포’ 옆 바위에 앉아있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한다.



한걸음 한걸음 가까워짐에 따라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다리 다친 남자와 은성임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들어올린다.



“상원아! 괜찮아! 그 도끼 내려놔도 돼!”

그녀의 목소리이다. 순간 팔에 힘이 풀린 나는 도끼를 땅에 버리고는 폭포 쪽으로 향한다. 은성보다 다리 다친 남자와 먼저 눈이 마쳤는데 좀 전에 내가 도끼를 치켜들어 올린 것을 봤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한마디라도 하면 이번에는 정말 강하게 그의 다리를 쳐 내리겠다고 마음 먹고 뛰어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며 침을 삼켰고, 그 울림이 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소리를 내며 그의 식도로 흘려 내려갔다.

“상원아! 안 돼! 이 분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남자는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마음 놓으세요, 스님!”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꿈적도 하지 않자 은성은 바위에서 일어나 도끼를 머리 위로 높이 든 내 손을 내리고 땅 위에 도끼가 떨구게 했다.



흙 바닥에 떨어진 도끼는 큰 소리 없이 ‘툭’ 하며 바닥에 놓여질 뿐이었다.

“어제 그 녀석이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남자는 다친 다리로 엎드려 앉아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안녕폭포 맞은 편에 앉았다.

“일단 어제 일은 제가 고개 숙여 사죄 드립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승려를 범하려 하다니……그 녀석이 아무리 썩어도 그렇게 썩은 녀석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그런 남자와 친구인 것이죠?” 내 질문에 그는 코를 어루만지고는 내가 아닌 내 뒤의 풍경을 잠시 바라보는 듯 했다.



남자는 은성에게 “절 밖이니 담배 한 모금 피워도 되겠습니까?” 하고 묻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 시간 온 힘을 다해 담배를 빨아들인 뒤 남자는 후우 하고 내뱉었다. 호흡이 길다고 느낄 만큼 남자는 두, 세 번 그렇게 오랜 시간 담배를 빨고 오랜 시간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녀석과 저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불알친구입니다.” 내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더니 남자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이 놀고, 먹고, 세상 누구보다 친한 어린 시절 친구였단 거죠.” 라고 덧붙여 말하며 웃어 보였다. “아마 중학교 가기 전까지는 맨날 그 녀석과 놀았을 겁니다. 아침부터 해 지기 전까지 우리는 떨어지지 않고 놀았죠. 그 뒤에 중학교를 서로 다른 곳에 입학했지만 시간이 날 때면 만나서 같이 놀곤 했죠. 근데 그 친구가 어느 날 전학을 간다고 하더군요.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다른 도시로 전출을 받아서……라고 기억 나는군요. 그렇게 헤어지고 50년이 넘도록 만나질 못했습니다. 그 녀석도 그 녀석 나름의 생활이 있었을 테고 저도 살려고 여러 일을 했지요.”



남자는 오래 전 이야기를 회상하며 말을 풀어나갔고, TV도 없는 이 곳에서 듣는 누군가의 과거 이야기라 나는 순식간에 이야기에 빠져 들었고, 은성은 평소처럼 조용히 들어줄 뿐이었다. “그러다가 자식 새끼 대학 보내고 나니까 마누라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뜨더군요. 병원에 처음 갔을 때 이미 대장암 말기라고 항암주사 하나 못 맞고는 금새 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거래 중 회사 몰래 이득을 취했다며 책상을 빼버리더군요. 단번에 많은 것을 잃으니 대꾸할 힘마저 없어져 하라는 대로 했죠. 평생 회사에 모든 거 걸고 살았는데 퇴직금마저 없이 쫓아내더군요. 결혼한 자식 둘은 서로 힘들다며 명절 때 만나면 제 문제로 싸우기만 하고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이 녀석 생각이 나서 큰 아들한테 부탁해서 친구 좀 찾아 달라했죠. 아들이 얼마 안 지나서 이 친구 번호와 주소를 알려주더군요. 살고 있는 집도 가깝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전화해서 찾아갔죠. 돈 좀 만지며 살았나 봅니다. 으리으리한 빌라에서 좋은 옷 입고 살고 있더군요. 근데 그 방 많은 집에 가족이 없었어요.” 은성과 나는 말없이 서로 눈이 스쳤지만 곧 다시 눈동자는 그를 향했다.



“여자에 미쳤었대요. 처음에는 사귀던 여자가 임신해서 결혼했다가 바람 피는 것을 몇 번 걸려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이혼 당하고 당시에 사귀던 술집 마담이랑 살림을 차리고는 그 술집 여자들을 건드렸다고 하더군요. 근데 녀석이 재산이 좀 되니까 마담이란 년이 모르는 척 몇 년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이혼 서류 놓고 사라지더니 그 놈 재산 절반 이상을 갖고는 자기보다 10살 어린 남자랑 살림을 차렸대나……뭐라나” 남자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말을 이었다.



“결국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면서 평생을 보내더니 그 많던 유산이며 재산 중에 남은 거라곤 그 빌라 하나라며 씁쓸하게 웃었소. 소주 마시면서 그 이야기를 하다가 듣는 내가 너무 답답한 마음에 주말에 등산이나 가자, 몸을 좀 움직이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하면서 등산 온 것이 어제였죠.” 그리고는 은성과 나를 한번씩 바라보고는 자기 친구 얘기에 자기가 괜히 미안해졌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단순히 몸과 마음에 새로운 힘을 주고자 했던 산행이 스님께 피해를 주는 결과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워낙 짧게 해서 그 남자가 좋은 이인지 나쁜 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미안해하는 그 마음은 거짓이 아니라 생각되었다. 한결 나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은성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모든 것에는 사유가 있다고 불법에서는 말합니다. 좋은 것이던 나쁜 것이던 그 기원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허나 기원이 그릇되다 하여서 사람이 모두 그릇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히 그 분도 이해하게 되실 겁니다.”



소름이 끼쳤다. 자신을 겁탈한 남자에게마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설파하는 은성의 모습이 내가 배우고 있는 종교의 윤리인가 싶은 생각이 머리를 마비시켰다. 어제 밤 내 품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과 너무 상반 되었다. 그 눈물은 어떤 생각에서 흐른 것인가? 그 답을 생각하기 위해 산 아래를 보는데 큰 절에서 젊고 건장한 승려님들이 풀을 헤치며 올라왔고, 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나와 은성에게 합장하고는 두 승려의 부축을 받으며 산을 내려갔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뒤 은성을 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 또한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날 해가 질 때 내가 생각한 답은 하나였다.



그녀는 거짓된 여자구나......

분명 그 강간범을 증오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짓을 말하는 그녀 또한 일반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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