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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천사 -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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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37회 작성일 20-01-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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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원보다 더 오랜 동안







“어디로 가시는 길이세요?”

“글쎄요. 그냥 바람 쐬러 나온 길이라 딱히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렇군요. 그럼 저도 좀 데려가 주실래요?”



여자의 투명한 눈이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그녀와 나는 탐색하듯 정적 속에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됐을까? 대성리역을 지나는 기차의 경적소리가 울린 직 후, 나는 애마에서 내려 그녀가 앉아있는 등받이 뒤 렉에 걸쳐진 가방에서 혹시나 싶어 가져온 여분의 재킷을 꺼내 여자에게 건네줬다.



“입어 보세요. 바람에 오래 노출되면 추워집니다.”



여자가 내가 준 재킷을 입었다. 조금 크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보기 싫지는 않았다. 바지는 스키니 진. 키가 커서 그런지 신발은 단화였다. 그 정도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선글라스 있으신가요?”



내 말에 여자가 어깨에 맨 작은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괜찮으시면 핸드백은 가방에 넣어두시면 어떨까요?”



여자가 선선히 핸드백에서 지갑만을 꺼내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 핸드백을 렉에 걸쳐진 가방에 넣었다.



다시 애마에 올라 출발했다. 여자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잡아왔다. 문득 다음엔 뒷좌석에 손잡이가 달린 것으로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누군가를 태우고 달린 경험이 거의 없었던 터라 내 허리가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45번 국도와 75번 국도를 연이어 달리다 남이섬을 얼마 앞두고 391번 지방도로 접어들었고 얼마 후 다시46번 국도로 갈아탔다. 북한강을 따라 달려가는 그 사이 나와 여자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는 듯 으르렁거리는 애마의 엔진음과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소리, 그리고 그림 같은 강변의 모습만이 우리의 침묵을 대신할 뿐이었다.









“이거 좀 답답해요.”



혹시 몰라 갖고는 다녔지만 새들백의 크기로 인해 그 속에 넣어두었던 여분의 헬멧은 어쩔 수 없이 작은 바이크용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춘천에 들어가자 마자 할리데이비슨 취급점에 들러 제대로 된 헬멧을 사서 여자에게 씌워줬다. 여자는 긴 머리를 묶어 간신히 머리를 집어 넣고는 무척이나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전을 위해서는 이걸 써야 해요. 몇 번 쓰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내 말에 여자는 더 이상의 토를 달지 않고 익숙해지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여자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말했다.



“어때요? 봐줄 만 한가요?”

“모델 포스로군요.”



내 말은 진심이었다. 팔도 다리도 긴 작은 얼굴의 슬림한 몸매. 그것은 일반인이 쉽게 가질 수 있는 비율이 아니었다. 이양의 그 늘씬함에는 시원함은 있었지만 이 여자처럼 가녀린 멋은 없었다. 아마도 아까의 그 불편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 주변의 남자들처럼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럼 갈까요?”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여자가 뒷좌석에 올라 앉았다.



“잠깐만요. 혹시 배고프지 않아요?”



시간 상으로 오전 11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인지 배도 고팠지만 내심은 다른 것에 있었다.



“고파요.”



담담히 말하는 여자의 태도가 그녀의 솔직함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럼 식사하고 출발하죠. 조금 손볼 것도 있구요.”

“그래요, 그럼. 점심은 제가 살게요.”

“좋죠. 그러시다면 메뉴 선택권을 드리죠.”

“닭갈비 어떠세요? 춘천은 그게 유명하다고 하던데요.”

“전 좋습니다.”



가게 직원에게 물어 적당한 닭갈비집을 수소문하고 점검과 더불어 몇 가지 개조를 부탁했다. 다행히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식사하는 내내 여자는 아까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밝은 모습이었다. 오물오물 식사하는 모습이 얼굴만큼 예뻤다. 어쩌면 그것도 미인에 대한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도 식사에 열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했을지 모른다.



“댁이 서울이시죠?”

“네.”

“그럼 돌아가실 때 저도 같이 가면 되겠군요.”

“계속 같이 가시겠다구요?”

“안되나요?”

“전 내일 저녁에나 돌아갈 건데요.”

“잘 됐군요. 저도 화요일에나 약속이 있거든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거 저 때문에 하신 거에요?”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팔걸이를 만져본다. 두툼하게 잘 자리잡은 등쿠션도.



“한 번 앉아보시죠.”



직원의 말에 어색하게 자리에 오르려 하자 직원이 서둘러 팔걸이를 젖혀준다.



“타실 땐 여기를 누르시고 이렇게 위로 올리시면 됩니다.”

“아……”



자리에 앉아 몸을 움직여 보는 여자가 직원에게 물어본다.



“몸이 큰 사람은 못 앉겠는데요.”

“걱정 마세요. 옆으로도 이렇게…… 폭 조절 가능한 겁니다.”

“아, 그렇네요. 좋은데요!”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든 아이처럼 여자가 웃었다. 그 웃음을 따라 나도 아이처럼 웃었다.



“어때요? 괜찮으신가요?”

“네. 아주 좋아요. 제 사이즈에 딱인데요.”

“아마 27정도 되시죠?”

“어? 어떻게 아세요?”

“아, 네 뭐… 아까 팔걸이 폭을 조절할 걸 생각해서 사이즈를 좀 눈 여겨….. 헤헤……”



직원이 뒤통수를 긁으며 웃는다. 여자도 피식 웃는다. 내 웃음만 씁쓰레하다.



“갈까요?”



내가 자리에 앉자 여자가 내 등뒤에서 귀엽게 머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숙이며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꼭 선물 받은 것 같아요.”



다시 그르렁거리는 애마의 소리와 함께 출발하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맞아요, 선물!)









46번 국도를 따라 달렸다. 그 길을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과거처럼 좁은 시골길이 아니긴 하지만 여전히 강원도의 시골풍경을 담고 있는 그 길이 얼마나 좋은지.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팔걸이에 손을 올려 놓고 주변을 살펴보는 여자의 얼굴도 풍경에 집중한다. 허리에서 사라진 여자의 손길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서 더 편안하게 라이딩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우린 바람을 맞으며 심장을 두둘기는 애마의 소리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어느새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다다랐다.



“어디로 갈까요?”



선택의 기회는 늘 우리 앞에 있고, 그 짧은 선택의 시간이 우리의 미래를 갈라 놓곤 한다. 지금 우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아니 이 여자의 선택은?



“어디가 좋은데요?”

“왼쪽은 진부령이고 바로 가면 미시령이에요. 미시령은 예전 길이 험해서 새 길을 놨죠. 덕분에 예전 같은 스릴은 없어요. 진부령은 고성으로 가기 때문에 길을 좀 많이 돌아야 하죠.”

“그럼 답 나왔군요. 미시령으로 가요.”

“그럴까요?”

“네. 새길 말고 옛길루요.”



여자를 돌아봤다. 그 옛길을 내려가자면 혼자서도 등골이 오싹할 판에 여자를 태우고 가자고?



“안전을 보장 못합니다.”

“그렇게 위험해요?”

“둘이서라면 더 위험하죠.”

“그럼 더 좋아요. 우리 모험 한 번 즐겨봐요.”

“그러다 사고 나면 책임지시게요?”

“못할 것도 없죠.”

“하하하……”



어이없는 내 웃음에 여자가 빙그레 웃는다.



“죽는 게 두려우세요?”



그 시간 이후 나는 때로 생각했다. 죽는 게 정말 두려운 걸까? 아니면 죽음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걸까?



가파르고 굴곡지고 앞 뒤에 붙은 차로 인해 끊임없이 느껴지는 위협 속에서 나는 진땀을 흘렸지만 내 뒤에 앉은 여자는 스스럼 없이 내 허리를 꼭 잡고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오래 전 들었던 어떤 노래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난 이내 그 노래에 대한 생각을 잊어야 했다. 거칠게 휘돌아가는 비탈진 S자의 커브를 멋지게 돌고 싶었으니까.









“저녁 먹기 전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시령을 내려오던 어떤 시간부터 여자의 표정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내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여자와 나는 그저 잠시 한 때 길이 같은 동행에 불과했다.



“제가 아는 곳이 있는 데 그곳이 어떨까요?”

“어딘데요?”

“영랑호 리조트요.”



예전 대학시절에 가 본적이 있는 곳이었다. 시설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골프장과 넓은 영랑호,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와 설악산의 풍경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좋은 곳이었단 기억이 났다.



“그러죠.”



곧 바로 영랑호 리조트에 도착해서 나는 방을 얻기 위해 프론트로 가서는 여자에게 말했다.



“어떤 방이 좋으세요?”



창 밖을 바라보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방을 따로 잡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여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머리로 머뭇거릴 때 여자가 다가와 프론트 직원에게 말했다.



“15층 정문을 바라보는 쪽으로 방이 있나요?”

“잠심만요… 네, 있습니다. 이 방은 온돌방입니다.”

“그 방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계산할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에요. 운전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제가 그 정도는 보답을 해야죠. 대신 저녁 사주실래요?”

“아, 네, 물론……”



그렇게 방을 얻어 키를 받아 들고는 여자가 앞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때까지도 나는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먼저 탄 그녀가 스위치를 누른 채 나를 불렀다.



“뭐하세요? 안 올라가세요?”

“네? 네……”



나는 왠지 주도권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대부분 상담자와의 이야기에 있어 이야기는 주로 상담자가 했지만 이야기의 방향은 내가 주도했었는데, 지금 나는 이야기도 그 방향도 모두 빼앗긴 느낌이었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를 따라 쭈뼛거리며 들어선 내가 처음 본 것은 거실 창 앞에 서서 저 먼 곳을 바라다보는 그녀의 뒤 모습이었다. 석상처럼 굳어진 모습으로 그 높은 자리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 보던 그녀의 그 모습은 마치 오래 된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 어때요?”



여자의 말에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좋은데요.”



속초에 오면 중앙시장 한 쪽에 자리한 88순대국밥집을 찾곤 했었는데, 오늘 그녀의 안내로 온 곳은 아바이 마을을 건너갈 수 있는 갯배를 타는 곳 앞에 있는 88생선구이집이었다. 우연치 않게 일치하는 88이란 단어가 서울올림픽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구식이었지만 그래도 연탄에 구워주는 생선구이가 일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 식당이지만 포구옆 허름한 식당이란 것이 더욱 친근감을 줬다.



“제법 유명한 곳이에요. 다른 생선구이집보다 질이나 양이 더 좋죠. 다른 곳은 이 메로라는 생선은 잘 안주거든요.



식사 후 우린 갯배를 타고 건너편을 건너 가을동화라는 드라마를 촬영했다던 해변을 걸었다. 남들이 보면 조금 어울리지 않는 연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택시를 타고 나온 터라 재킷을 벗은 그녀는 흰색 블라우스에 스키니진이 멋스러운 여인이었지만 나는 일견해도 그에 어울리지 않는 라이더의 차림새였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나도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그녀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걷게 되는 것을 보면.









“여기 카페 이름 무척 귀엽죠?”



해변이 바라보이는 창에 앉아 여자가 말했다. 처음 들어오면서 카페 이름을 보고 나도 조금 실소를 했었다. 카페 이름이 체리라니. 카페 체리. 귀엽기는 하지만 그리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뭘로 드시겠어요?”



메뉴판을 돌아봤다. 그러다 말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풋……”



그녀가 왜 웃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 있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세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다 말고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내 가슴을 덜컹이게 했다. 그 그림자를 배경으로 흐르는 카페이름 같지 않은 무거운 음악이 더욱 그 그림자를 짙게 했다.



……

알고 있니 끝내 우린 남이 될 수 없기에

가슴속에 내 남은 사랑 묻어두고 가는 걸



해질녘 노을 보며 함께 수놓은 꿈들은

스치는 바람처럼 다 부질없는 꿈이 였나



보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추억도

고이 접어 간직하려 해 이별 뒤에 그 약속까지



사랑하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영원보다 더 오랜 동안 사랑하겠노라고

……



노래가 끝나서야 다시 그녀 앞에 다가가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게 물었다.



“영원보다 더 오랜 동안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억이 났다. 내 등 뒤에서 그녀가 흥얼거리던 그 노래. 이승훈의 마지막 편지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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