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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천사 - 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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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11회 작성일 20-01-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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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룻밤의 꿈







벌써 밤이 깊었다. 분주한 서울의 밤은 여전히 그 분주함으로 밤을 잊은 듯 언제나처럼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제라는 시간을 분기점으로 변화에 흔들리고 있었다. 손에 들려진 언더락의 차가움이 어느새 물방울을 맺으며 겉으로 흘러 내려 생각에 붙들린 내게 지금의 이것이 현실이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고, 기억에 선명한 모든 것이 환상 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자꾸 허전해졌다.









“추워요.”



그녀의 그 말에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온도를 높여도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바닥의 온기는 나를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뒤에서 좀 안아줄래요?”



가슴이 떨려왔다. 숫총각도 아닌 내가 말이다. 온 몸이 경직되어와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그 말에 나는 따라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를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는. 굼벵이처럼 느리게 이불을 들추고 그 속을 기어가 돌아누운 그녀의 등뒤로 몸을 붙여갔을 때, 나는 호흡조차 하기 힘들어 한동안은 숨조차 멈추고 있었다. 내 손은 어정쩡하게 내 뒤로 제쳐져 있기까지 했다.



그녀의 한 손이 뒤로 와 내 어깨를 더듬더니 내 팔을 잡아 끌어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다. 그제서야 나는 다른 한 손도 그녀의 머리 밑으로 넣어 어깨를 밑에서부터 감싸주었다. 내 손이 지날 때 그녀도 머리를 들어 내 손이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안고도 내 몸은 그녀에게 완전히 붙어있지는 않았다.



“기왕 안아줄 거면 꽉 안아줘요.”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물러서 내 가슴에 밀착했다. 그 순간 나는 내 민망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책 없이 이미 커져버린 내 물건은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아무런 생각조차 없는 듯 했다. 엉덩이를 조금씩 뒤로 빼려 할 때 그녀가 말했다.



“괜찮아요. 건강해서 그런 거니까.”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 내 몸은 그대로 굳어진 채 멈춰야 했다. 그런 나를 향해 그녀의 몸이 더 깊이 밀려 들어왔다. 이젠 나로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그녀를 가득 안고 몸으로 그녀의 추위를 녹일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녀의 몸과 내 몸이 맞닿은 곳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이미 추위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마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고 심지어 내 몸까지 점차 그녀처럼 떨어가기 시작했다.



“만약에 말이에요.”



목이 가득 메어와 ‘네’라는 짧은 말도 쉽게 대답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우리 오늘 밤… 하고 나서… 새벽에 헤어지는 것하고… 안하고 저녁에 헤어지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걸 선택… 하시겠어요?”



충격적인 그 말에 잠시 나의 모든 것이 멈췄지만 잠시 후 다시 움직인 내 마음의 소리는 이랬다.



(오래도록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푸른 빛의 새벽이었고 그녀는 내 옆에 없었다. 깜짝 놀라 넓지도 않은 실내를 찾아 다녔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나 해서 창가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 봤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여명이 다가오며 사물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고개를 창에 붙이고 호수를 살펴봤다. 호수에는 물안개가 모락이며 솟구치고 있었고 벌써 몇몇 사람들이 호수 주변을 걷거나 뛰고 있었다. 그리고 얼핏 저 건너편, 익숙한 재킷이 눈에 뜨였다.



서둘러 그곳까지 나는 뛰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곧 있다가 사라지는 물안개처럼 그 자리의 그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아니 물가에 앉아 넋을 잃고 물안개 피어 오르는 호수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녀 등 뒤에 다가설 동안에도 그녀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그녀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천천히 호숫가 옆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별 말이 없었다. 그냥 가끔 손으로 눈 밑을 만졌고 가끔 하늘을 보며 눈을 깜빡였고 때로 땅을 보고 깊게 숨을 뱉곤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 두 걸음 뒤에서 경호하듯 뒤를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곳에선가 그녀가 멈춰 섰다.



“설악산 가실래요?”



그녀의 미소를 보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난 그저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리조트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설악산을 향했다. 시간은 아직 9시를 넘기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올 걸 그랬어요.”

“네?”



뒷좌석에 앉아 등을 편하게 기대고 있던 그녀가 몸을 숙여 내 귀에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벚꽃! 볼 수! 있었는데! 아쉽다구요!”

“아…… 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벚꽃 하면 남쪽지방을 많이들 생각하지만 여기 속초와 설악산 입구의 벚꽃도 만만치 않았는데. 시기적으로 조금 늦었다. 이미 꽃은 졌고 바닥에 그 흔적만 가득하다. 그 때 그녀가 무심코 말을 뱉다가 멈췄다.



“우리 다음에……”

“네? 뭐라구요?”

“아, 아니에요.”



미시령 방향을 거슬러 오르다 척산온천을 향해 좌회전을 해서 들어갔다. 이제부터 줄지어 선 벚꽃들이 그 꽃잎을 휘날리던 예전의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아쉬웠다. 꽃잎 화사한 날에 지나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 같은 애인을 뒤에 태우고 그림 같은 그 속을 질주해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남자의 로망이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내 애인이 아니거니와 꽃은 지고 없었다. 가슴에 남은 것은 인삼을 씹고 난 듯한 씁쓸함이다.



“터널은! 싫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 길을 아는 게다. 예전엔 목우재 삼거리를 넘어가는 이 길이 제법 험했다. 미시령의 축소판처럼. 그래서였는지 어느 날 터널이 생겼다. 옛길은 아예 차가 가지 못하게 막아놓고. 오토바이 최대 적 중의 하나가 터널이다. 답답함. 귀가 멍멍한 소리의 증폭. 배출되지 못한 자동차 매연. 피할 곳 없는 구속감까지.



줄을 쳐서 막아 놓은 길 옆을 살짝 비켜 풀섶으로 들어서 돌아들어간다. 이건 엄연한 두 바퀴의 자유로움의 권리다. 누군가 뒤에서 경적을 울린다. 배 아픈 누군가의 소리라 여기며 나는 무심히 지나간다. 넌 그 길로 빠르게 가면 되고 나는 여유롭게 맑은 공기 마시며 아름다운 경치 구경하며 가면 되고. 오케이?



정작 문제는 삼거리와 합류하는 곳에 있었다. 피해갈 곳 없는 양쪽 사이드. 혼자라면 그냥 뛰어 넘어 가려 하겠지만 그녀를 태우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애마를 세웠고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려서 먼저 걸어 가실래요?”

“어떻게 하시려구요?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이 놈 생각보다 무거워요. 들기보단 날아가는 게 더 낫죠.”

“어떻게 날아요?”

“다 방법이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그녀가 저 만치 가게 하고 새들 백에서 내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반으로 접혀져 있는 긴 이등변 삼각형의 나무토막. 바닥 면에는 우레탄이 덮여 있어 미끄러지지 않게 해준다. 거리와 높이를 머리 속에 그리며 적당한 위치를 선정한다. 그리고 뒤로가 애마에 올라 각도를 조절하고 rpm을 높였다가 순식간에 나무토막을 밟고 날아오른다. 하긴 기껏해야 2~3m나 될까 싶지만.



뒷바퀴로 가볍게 안착하고 나서 녀석을 세우고 돌아가 무기를 회수하는 동안 그녀가 아이처럼 박수를 쳐댔다. 신기한 돌고래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차들이 돌아본다. 내려진 차창에 보여진 얼굴에는 이렇게 써있는 것 같았다.



‘별 미친 놈!’



다시 그녀와 길을 따라 올라간다. 긴 벚나무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저기 설악산이 점차 다가온다. 꽃같이 향기로운 5월 설악의 아침을 깨우며 우리가 간다.









다시 또 굳어진 그녀의 얼굴에 나도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라 함께 구경하던 그녀가 잠깐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방금 전의 일. 순간 아이처럼 놀라 그녀를 찾아 이리 저리 시선을 돌리다 발견한 그녀는 까마득한 발 밑의 절벽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비탈진 바위 면에 서서 멀리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그녀가 입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내가 왔어! 내가 왔다구! 내가 왔단 말야아~~~!”



그 소리는 흡사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처럼 슬프게 메아리 쳤다.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그녀 옆에 다가가 뒤에서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손을 통해 감전이라도 된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진동이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더욱 뛰게 만들었다.









“원래 유명한 집치고 맛있는 집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 말 정말 맞는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대표적이죠.”

“거기가 어딘데요?”

“초당 순두부!”

“거긴 원조집이 있지 않던가요?”

“있죠. 그런데 명성만큼 맛있지는 않아요. 대신 정말 맛있는 집은 숨어 있죠.”

“그래요?”



우리는 속초를 떠나 주문진을 거쳐 강릉으로 내려왔다. 바닷가를 따라 내려 온 탓에 곧 바로 다다른 경포대에서 십리바위를 바라보던 그녀가 맛있는 점심을 사겠다며 그렇게 말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뒷좌석에서 지휘관처럼 지시하는 대로 애마를 몰고 가니 그녀의 말처럼 그녀가 소개한 그 집이 한쪽 구석에 숨어 있었다.



“여기가 원조는 아니지만 맛은 원조집보다 더 나아요.”



원조집을 지나쳐 강릉고등학교 정문 바로 전 사거리에서 직진해서 들어온 이 집은 정말 허름했다. 아마도 나 혼자 지나치는 길이었다면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테이블도 대여섯 개 정도였고 모두 좌식이었다. 부츠를 신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구조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두리번거리며 식당 안을 살펴봤다. 잘나가는 집마다 있는 유명인의 사인이라곤 없는 이곳은 한적한 시골마을의 그야 말로 시골식당 모습이었다.



“믿어 보세요.”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아마도 내가 집의 초라함으로 미리부터 선입견을 가질까 걱정 하는 모양이었다.



“기대해보죠.”

“넵!”



그녀의 소리에 나도 모르게 또 미소가 나왔다. 왜 그런지 모르게 그녀를 보거나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이렇게 자꾸 웃게 되는 이유가 뭘까?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곧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차려진 상은 초라하고 시골스러움의 전형이었지만 까맣고 진한 된장국과 구수한 두부의 향과 맛은 내가 먹어본 중의 단연 최고였다.



“어때요? 괜찮죠?”



입안 가득한 두부를 물고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왼손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와, 다행이다!”



그녀가 귀엽게 손뼉을 쳤다. 때로 당찬 듯하다가도 저렇게 아이스러운 그녀의 모습이 조금 부조화스럽기도 했다가 저것이 그녀다운 모습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구멍을 술술 넘어가는 두부처럼 그렇게 우리의 시간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물처럼 흘러갔다.









정동진을 지나 산을 넘어 옥계해수욕장 근처에 와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더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야간 라이딩을 겪어야 할 것이다. 나 혼자라면야……



“왜요?”

“길을 좀 가로질러 갈까 해서요.”

“이 길 좋은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도 우리나라의 등줄기를 따라가는 이 길이 좋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 다시 함께 밤을 보내야 한다면 그 땐 나도 더 이상 나 자신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말아요. 정말 멋있는 곳을 보여줄게요.”

“정말이죠?”

“믿어 보세요.”

“좋아요, 그럼! Let’s go!”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매봉산 옆을 가로질러 산을 올라갔다. 대부분의 사람은 잘 모르는 길일 테지만 이 길의 끝에는 동해시에서 시작해 인천 중구까지 이르는 42번 국도와 만난다. 그곳에서 새말까지 와서는 다시 6번 국도로 갈아타기까지의 사이에는 산골의 고즈넉함과 산과 강과 기차와 자동차가 함께 달리는 그림 같은 풍경과 스키장과 골프장이 가득한 놀이동산 같은 동네를 지나 싱거운 듯 중독성 있는 안흥찐빵을 맛볼 수 있는 곳을 지나며 점차 도시화 되어가는 지역적 변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변화의 매 마디마다 그녀는 놀라운 탄성을 지르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행의 시작점이던 팔당에 이르러 그녀가 말했다.



“서울의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정말 몰랐어요.”



팔당대교를 막 올라서 다리를 건너기 전, 나를 세운 그녀가 저기 물길 건너 이제 막 지려하는 노을을 보며 말했다. 그랬다. 정말 오랜만에 바라보는 서울의 노을이었다. 도시 속에 갇혀 살다 보니 노을을 바라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아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노을이란 것은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치부했다. 그러던 노을이 저렇게 아름답게 서울 하늘을 그림 같은 배경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곧 다가오는 그녀와 나의 짧은 동행의 끝을 장식하듯이.



“언제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내일이면 다시 볼 수 있을 텐데요.”

“아닐 거에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요?”

“내일은… 같이 볼 수 없을 거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무언가가 가슴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의 그녀의 눈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입가에 그려진 미소만이 전부였다.



(그래, 그냥 짧은 동행이었을 뿐이야.)



그것이 그나마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정말 고마웠어요.”

“별말씀을요.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그럼……”



그녀가 목례를 하고 점차 멀어져 갔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소리쳤다.



“저, 잠깐만요!”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름, 이름이 뭐에요?”



그녀가 웃었다.



“서희에요. 강서희!”

“난 진석이에요, 박진석!”



그녀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아마도 내 이름을 불러보는 듯 했다. 그리곤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그녀가 선릉역 아래로 사라지고 나서 난 내 머리를 두들겼다.



“바보! 전번!!”



그랬다. 인구 천만이 넘는 서울에서 이름으로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손에 든 잔을 단 번에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행운이 두 번 오기는 아마도 불가능한 것이겠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 흔하게 만나던 환자들처럼 나도 오늘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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