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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게임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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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422회 작성일 20-01-1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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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게임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집은 어릴 때 나름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나보다 10살이 많은 누나의 말을 들어보면 그랬다.



하긴, 어릴 때 먹고 싶은 걸 못 먹어서 졸라 본 적도 없었고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가지지 못해서 울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좋은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업이란 게 언제나 좋을 때가 있으면 안 좋을 때가 있는 법,

그런데 마침 심하게 좋지 않은 상황이 닥쳐왔다.



아버지와 20년 지기 친구가 아버지 회사에 같이 공동 사장으로 있었는데,

아버지 몰래 아버지 명의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 것도 모자라 회사 자금까지 빼돌려

해외로 도망가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성격이 매몰차지 못했고, 결국 그 책임을 홀로 다 지고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매각하고 집까지 모두 팔아버리고 우리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오게 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던 부산으로..



그때가 내 나이 7살이 되던 해였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나와 누나가 할아버지 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슬펐을 뿐이다.



주변에 당연히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나와는 다른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과는 쉽게 친해지기 힘들었다.

더욱이 내 성격은 내성적이었으니까..



거기에 서울말을 쓴다는 사실, 난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지 몰랐다.

하지만 내가 6년간 살아오고 들어온 말이 서울말이었으니 당연히 서울말을 쓸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그런 내가 못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내가 말을 하면 느끼하다고, 재수 없다고 하며 나를 때리곤 했다.

나는 잠자코 맞다가 그저 울기만 했고...



“야 니들 죽고 싶나? 왜 괴롭히는데? 니 죽는데이”

“어어..승희야..”

“닌 등신이가? 왜 맞고만 있는데, 남자새끼가 쪼다가?”

“아니..그게..”

“야! 박승희~ 네가 저 새끼 남친이라도 되나? 웃기네~ 아니면 진짜로 남친?? 얼레리꼴레리~~”

“저 새끼가 죽을라고~!!!”



또래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태권도 학원을 다니던 골목대장 승희,

승희가 갑자기 나타나 내 편을 들어줬고 승희는 여지없이 나와 자신을 놀리는 남자 녀석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바로 터지는 코피..어린 애들 싸움에서 코피가 나면 승부는 이미 끝이 난거다.



“으아아앙~!!!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코피가 터진 녀석이 울면서 뛰어가자 다른 녀석들도 일제히 겁을 먹고 도망을 갔고,

그 사이 승희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나라. 그러고 계속 있을꺼가?”

“어? 어어..고마워..”

“고맙긴..사내 자슥이..그래서 사내구실 제대로 하긋나? 앞으론 맞지만 말고 같이 싸워라? 알겠재?”

“어..어어..”

“나 간다~ 나중에 보자~”



승희, 그게 나와 승희와의 첫 만남이었다.

뭔가 웃기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승희는 나에게 백마 탄 왕자님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나타나 날 구해준 왕자님..아니 공주님인가..



그 날 이후, 승희와 난 절친이 되었다.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난 승희가 귀찮아 할 정도로 승희를 따라다녔고, 결국 나와 승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됐다.



물론 난 친구 그 이상이길 원했지만..

처음 봤던 그 날부터 우정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지만 소심한 내 성격 탓에 한 번도 난 승희에게 고백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멀리서 친구로서 바라볼 뿐..











그렇게 같이 지내온 시간이 13년, 이제 20살이 되는 나는 절반 이상의

세월을 함께 해 온 나와 가장 친하고 내가 가장하는 사람 승희에게 오늘 고백을 하려 한다.



오늘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 이제 오늘이 지나면 다시 고백할 기회가 없을 걸 잘 알기에..



내일이면 나는 대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승희는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위해 부산에 남기로 했기에..

오늘이 지나면 내가 고백할 수 있는 타이밍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내 마음이 거절당할 지라도 반드시 난 승희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져 온 거리..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승희야..”

“응?”



해맑은 표정의 그녀..막상 이름을 불렀는데 말문이 막힌다.

어젯밤 한 숨도 못자고 연습했는데..



널 좋아해..아니 널 사랑해..우리 사귈까..?

온통 연습했던 대사들이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고, 난 말 그대로 공황상태가 되어 버렸다.



“뭐야..할 말 없으면 나 간다. 진수와 민수랑 삼겹살에 소주 한 잔..크으~ 하기로 했거든..너도 같이 갈래?”

“저..”

“뭐야..왜 그렇게 뜸 들여? 배 아프냐??”

“나..나 너 좋아해!”

“어???”



어리둥절한 표정, 그녀의 표정은 정확히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하긴..다짜고짜 앞 뒤말 다 자르고 고백이라니..



내가 생각한 고백 중에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야..너 장난 너무 진지하게 치지 마. 원래 지금 나 웃어야 되는 거지? 근데 너무 진지해서 못 웃겠잖아..”

“나..장난 아니라고..장난 아냐..널 좋아해..널 사랑한다고..!!!”



그녀를 안았다. 내 품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영화를 보면..드라마를 보며 이렇게 하더라.

고백하면서 안고...그리고...



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을 맞췄다.



내 입술에 닿는 부드럽고 촉촉한 그녀의 입술, 그리고 달콤한 립글로스 향..



수 백 번 그녀와 키스를 하는 상상을 해봤지만, 상상 이상으로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향기로웠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녀에게 키스를 시도하려는 순간..

그녀가 나를 밀어냈다.



“장난은 요기까지..너 내일 서울 올라간다고 서운하고 섭섭한 건 알겠는데..이건 좀 장난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어..? 어어..”



나도 모르게 무턱대고 대답해버렸다. 난 장난이 아닌데..

난 지금 무지 심각하고 진지한데...내 맘은 그런 게 아닌데..



“저..나는..”

“그만...거기까지..우리 친구잖아. 그렇게 될 리가 없잖아. 삼겹살 먹으러 안 갈 거지? 나 먼저 간다. 서울 간다고 모른 척 하기 없기...알지? 한 번씩 내려오면 연락해~!”



해맑게 웃으며..나에게 손을 흔들며 그녀가 멀어져간다.

이게 아닌데...이건 내가 생각한 결말이 아닌데...



설령 그녀에게 고백을 해서 차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결말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이..그녀를 향한 내 사랑이 장난처럼 받아들여지고 거절당할 줄이야..



점점 멀어진 그녀가 이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나의 점이 되어가고 있었고,

내 생애 처음으로 여자에게 꺼낸 고백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너무나 시시하게..너무나 허탈하게...











고백 후의 충격..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난 서울에 가야할 준비를 해야 했고, 집에 티를 내지도 못하고

그 상처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 되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런 고백..





그 후유증을 뒤로 하고 어쨌든 서울에 갈 준비는 해야 했고 짐을 싸고 보니 캐리어 하나, 백팩 하나..이게 내가 가지고 가는 전부였다.



최대한 짐을 뺀다고 빼기도 했고, 캐리어가 크기도 했지만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짐치고는 꽤나 조촐하고 소박하다.



“짐 다 챙긴 거 맞나? 아침에 일나서 한 번 더 확인했재?”

“네 확인 했어요”

“그래. 뭐 빠진 거 있으면 다음번에 와서 또 챙기면 되재. 차 시간 늦겠다. 어여 출발해라”

“그래..얼른 출발해”

“응..누나..”



갑작스레 며칠 전 외할머니 건강이 안 좋아져서 어머니는 시골에 가 계셨고, 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 누나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 가는 나를 배웅해주었다.



“얼른 들어가세요. 날이 아직 차요”

“니나 얼른 출발해라. 시간 늦다”

“네 아버지..”



지금 가면 이제 여름방학쯤이나 볼 수 있겠지..

난 마지막으로 아버지랑 누나와 진한 포옹이나 한 번 하고 갈까 했지만...

그 정도의 낯부끄러운 애정행각을 하기엔 난 너무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그저 아버지와 악수 한 번을 하고 누나에게 손을 흔들며 13년 간 정들었던 집을 떠나 그렇게 서울로 향했다.



4시간을 좀 넘게 달려 도착한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지 버스 타고 오는 내내 잔다고 깨고 나서도 정신이 없었고, 겨우 정신을 차려서 지하철을 타고 난 어머니가 미리 계약해둔 오래 된 아파트로 향했다.



어머니는 누나가 심술을 부릴 정도로 나를 끔찍이 아꼈는데 그로 인해 이번에도 내가 원룸이나 하숙해도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우겨서 기필코 아파트를 계약했다.



물론 아파트가 8평밖에 되지 않고 굉장히 오래 되서 낡은 아파트였지만,

서울의 엄청난 집값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것만 해도 나에겐 굉장히 훌륭하고 좋은 집이었다.



한참을 지하철을 타고 와서 드디어 아파트 근처의 역에 도착했고,

난 지하철역에서 나와 휴대폰 지도를 보면서 아파트를 찾아갔다.

계약도 어머니가 해서 난 한 번도 직접 와 본적은 없고 사진으로 봐서 오늘이 처음 찾아가는 것이었다.



“아..여긴가..”



아파트를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고 해서 굉장히 낡은 아파트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겉에서 보기엔 굉장히 깔끔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난 밖에서 아파트를 천천히 한 번 구경을 하고는 짐을 가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3층에 내려 이제부터 내 집이 될 304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집..전에 살던 사람이 나가면서 청소도 해주고 갔는지 짐을 풀어놓자마자 바로 청소를 했는데 방은 전체적으로 꽤나 깨끗했다.



“자..이 정도면 청소도 됐고..아..청소 해놓고 나니까 출출하네..아~ 맞다. 점심을 안 먹었구나..”



청소 한다고 정신이 팔려서 모르고 있었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새 2시가 넘어 있었고, 왜 이렇게 배가 고픈가 생각을 해보니 아침을 7시에 먹고 아무 것도 안 먹었으니 배가 고픈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 근처 아는 데가 없는데...근처 마트도 좀 알아둘 겸 한 바퀴 두르고 와야겠다..”



난 대충 몸에 묻은 먼지만 털어내고 츄리닝 차림으로 휴대폰과 지갑을 챙겨들고 문을 잠그고 나왔다.



그때 우리 집 방향으로 걸어오는 한 여자..

여자는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다가 더 이상 오지 않고 305호에 멈춰 섰다.

그리곤 나를 한 번 흘깃 보고는 문을 열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아..305호 사는 사람이구나..눈 마주쳤으면 인사라도 하지..거 참..서울 인심 야박하다더니..무슨 범죄자 취급하듯이 흘깃 보고 가냐..”



뭔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거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않은 거고 출출한 배는 달래야했기에 난 츄리닝 바지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날씨..날은 너무나 화창했지만 아직 2월이라 바람이 무척이나 찼다.



“으..추워..”



갑작스런 찬바람에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왔고,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전국 어딜 가든지 다 있는 프렌차이즈 김밥 집으로 들어갔다.



일단 너무 춥기도 했고, 이 근처에 뭐가 있는지 아는 게 거의 없었기에 이럴 땐 아는 곳을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난 김밥 한 줄과 라면을 정말 빛의 속도로 해치우고는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보자..떡이라도 좀 돌려야 하나? 여기는 어떻게 하나 모르겠네...에이~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씩 마주치면 인사라도 할 텐데..떡은 돌리는 게 예의겠지?”



난 휴대폰으로 지도 검색을 해서 근처의 떡집을 찾은 후 그 곳으로 가서 우리 층 사람들에게 돌릴 떡을 사서 집으로 가져왔다.



301호부터 떡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집에 아무도 없는 곳도 있었고, 있어도 안 받는 곳도 있었다. 내 손에 남은 떡은 이제 3개..아직 돌리지 않은 곳은 나를 벌레 보듯이 하고 들어간 여자가 살고 있는 305호 하나였다.



“흐음..그냥 주지 말까? 뭔가 경계를 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서울 사람들은 경계를 많이 하니...”



그런 생각과 함께 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난 초인종을 눌렀다.



“그새 나갔나..”



안에선 전혀 인기척이 없었고, 한 번 더 눌러보고 없으면 그냥 가자는 생각에 난 마지막으로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러봤다. 하지만 여전히 조용한 반응..



“자는지..없는지...”



그때였다. 도어락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저 옆집인데요..”



문이 열린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하고,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여자가 나왔다.



“무슨..?”

“아..저 오늘 이사 왔는데 떡을 좀 돌리고 있어서..”

“아..괜찮아요..”



문이 닫히려고 한다. 그래도 사람 성의가 있는데..아까 첫 인상부터 영 거슬리는 게 오기가 생긴다.



“아니..저기요..아까도 사람이 인사하려는데 그냥 보고 가고 지금도 이거 받아주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받아주지도 않고...어어..!!”



여자의 머리에 있던 물기가 바닥으로 잔뜩 떨어진 탓일까..

문을 잡고 들어가다 난 그대로 미끄러졌고, 깜짝 놀라는 여자의 위로 몸을 덮친 체 그대로 쓰러졌다.



“저..저 괜찮으세요...?”



순간 쿵 거리는 소리가 났기에 여자가 크게 다치진 않았나 걱정이 되어 여자를 보는데 표정이 무척 화가 난 것 같다.



내 잘못으로 다친 건 알겠는데 저 정도로 화난 표정을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여자의 입에서 어이없는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벼..변태...!!!”

“아니...변태라뇨?! 내가 무슨...!!”



그리고 그 순간, 그제야 난 여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비로소 손에 느껴지는 물컹한 촉감...이 느낌은....!



아..여자의 가슴이었다. 왜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가슴을...



그 순간 들려오는 찰칵 거리는 소리, 여자가 사진을 찍었다.



순식간에 빼도 박도 못하는 파렴치한에 변태가 되어버린 상황..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린다. 내가 변태라니..내가...!!



“아니..저..어..아..일단..!”



그제야 난 황급히 여자의 가슴에서 손을 뗐고..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저..일단 무척 죄송하구요...그 사진은 일단 좀 지워주시고..”

“왜요? 증거를 왜 지워요? 내 가슴 만졌죠? 맞아요? 아니에요?”

“어..저..”

“예쓰 올 노? 맞아요, 아니에요?”

“네..맞습니다..”

“가만히 있는 여자의 가슴을 만지면 그게 변태에요? 아니에요?”

“아니..저 그건 만지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제가 그 실수로...”

“실수든 아니든 만졌어요? 아니에요?”

“하아...네 만졌습니다..만졌다구요...근데 그게 아니라..그건 어디까지나 실수..”

“실수면 사람 죽여도 용서 되요?”



순간 여자의 눈빛이 반짝인다.

설마 진짜 죽이려고?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요즘 싸이코패스가 많다고 하던데 이 여자도 그런 여자인 것인가?

그럼 나는 오늘 죽는 것인가?



순간 살아온 지난날들이 스쳐가기 시작한다.

아..아직 여자랑 제대로 된 연애도 한 번 못 해봤는데..



“아니..혼자 무슨 상상 하길래..웃었다가..울상 지었다가..저기요..!”

“네?!!아..네 잘못했습니다..!”



난 순간 여자의 손이 내 팔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살고 봐야지..



“뭐야....지금 그러면 용서해 줄 거 같아서 이러는 거에요?”

“아닙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뭐라는 거야..내가 언제 죽인대요?”

“네?? 죽인다는 거 아니었나요..”

“하아......말이 그렇다는 거지..돌겠네..이 변태남...”



여자가 골이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매만진다.



말이 그렇다고..? 그럼 난 죽는 것이 아닌가?

아...내가 또 오바했구나..



평소에도 오버한다는 소리를 잘 듣긴 했는데 또 나 혼자 상상의 나래에

빠져서 오버를 한 것이었다.



“아..됐고..긴 말하기 귀찮고..이제부터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나한테 와서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해야 해요..”

“네?? 아니 그런 법이..”

“싫으면 갈까요??”



여자의 휴대폰에 어느새 112가 눌러져 있다.



“아니..하하..말로 합시다..말로..”

“그러니 말로 하고 있잖아요. 난 단답형 좋아해요..좋아요? 싫어요?”

“마..막 이상한 거 시키는 거 아니죠..누굴 죽이라고 하던가..”

“아..돌겠네..변태남씨..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싫음 말든가!”



여자의 손이 통화 버튼으로 간다. 난 서둘러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막았다.



“아..알겠어요..하아..근데 저 학생이라 학교도 가야 하는데 수업 빼먹고 올 순 없잖아요..”

“나도 학생이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자주 부를 생각도 없거든요. 웃기셔..혼자 김칫국 마시고..”

“네에..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가면 되죠..”

“누구 맘대로요?”

“아니..이야기 다 끝났잖아요..”

“증거를 남겨야죠..각서..”

“하아..각서까지??”

“네에..”

“네..그럽시다..”

“계약은 3월1일부터 1년간”

“네네..편할 대로 하세요..”



결국 난 원치도 않는 각서를 억지로 쓰고, 휴대폰 연락처까지 주고 나서야 여자의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아..이게 무슨...”



머리가 지끈해 온다. 서울에 온 첫 날부터 이게 무슨 어이없는 일이란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닌 거 같은 이웃이 옆집에 살지를 않나...협박당해서 각서를 쓰지 않나..



어쩐지 처음부터 심하게 일이 꼬이는 느낌이다.

내일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있는 날인데..일찍 자야 되는데 골이 아프다.



“아아..내 인생..승희한테 거절당할 때부터 일이 꼬인 거야...나쁜 기집애!!!!”



순간 승희에게 고백을 거절당하고, 주변의 수많은 아이들이 입을 가리고 웃던 장면이 떠올랐고 난 이불을 발로 뻥뻥 걷어찼다.



“아오~~!!!!!열 받아~~”



어느새 새벽1시가 넘은 시간..이제는 정말 자야 했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내일을 위해서..

내일 술을 얼마나 마실지 모르니..최상의 컨디션이어야 했다.







“아흐음...왜 알람이 안 울리지...어...몇 시야..!!!! 알람 맞춰놨는데..아 몸이야...”



벌써 12시가 넘은 시간..몸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제 이사를 하면서 좀 무리를 했더니 아무래도 몸살이 난 것 같았다.

이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10시라서 한참이 넘긴 시간이었고, 어쩔 수 없이 난 학과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아파서 도저히 못 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짜증나...어째 어제 일이 꼬인다는 느낌이었어..몸까지 아프네..서럽다..혼자 살면서 아프면 제일 서러운데...”













입학식 아침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못 가고, 졸업식에 뭐다 이것저것 하고 온다고 MT도 못 갔기에 오늘만큼은 늦을 수 없었고 난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도착하니 너무 빨리 왔는지 한적한 강의실...

드문드문 몇 명이 앉아 있었지만 입학식 전 행사를 하나도 참여하지 못해서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 그저 난 구석에 앉아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하나 둘씩 강의실에 들어오는 사람들..

이미 벌써 친해진 건지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자리에 앉았고, 나처럼 아웃사이더같이 보이는 애들 몇 명만이 구석에 자리하고 앉아 있었다.



‘에휴...출발부터 이럼 안 되는데...’



하지만 어쩌랴..결국 참석 못 한 내가 잘못이지..



그렇게 시작 된 학과 행사..

뭐 입학실이라고 별로 대단할 건 없었고, 교수님들 보고 선배들 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저녁 6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예정된 수순인 술자리로 향했다.



술자리에서도 내 자리는 제일 끝에 구석진 테이블..

내 앞엔 나같이 아웃사이더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앉았고 우린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나눴다.



하지만 인사 후 이어지는 침묵...아...어색하다...

옆자리는 너무나 활기차고 즐거워 보이는데..



하지만 소심한 내 성격상 먼저 다가가서 말을 붙이기란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저 구경만 할 뿐..



“늦었습니다~!!!”

“어~ 우리 신입생 퀸카 지수~ 왜 이렇게 늦었어~~~”

“헤헤 선배 죄송해요. 급하게 알바 땜빵 좀 해달라고 부탁해서..대신 오늘 끝까지 달리겠습니다~!!”

“그래. 바로 그런 마인드지~!! 우리 지수 어서 앉아서 먹어”

“네 알겠습니다~!!”



지수...지수라고..!!

순간 난 내 앞에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다.



새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 도톰한 분홍빛 입술에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커다란 눈망울..

거기에 긴 생머리까지..심지어 가슴도...!



“저...여기 자리 없으면 여기 앉아도 될까?”

“어..? 어어..!!”



내 앞에 한 자리가 빈 건 운명 같은 것일까..지수가 내 앞에 앉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근데 처음 보는 거 같은데..이름이 뭐야?”

“어? 어..내 이름은 박지후..”

“지후? 나랑 한 글자 밖에 차이 안 나네 난 이지수.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어..그래..하하..”



생긋 웃는 지수, 어쩜 웃는 표정까지 저렇게 예쁠까..



“어~민지, 선배 옆에 앉으려고?”

“네...선배님”

“그래~ 우리 귀여운 민지가 따라주는 술 한 잔 또 받아야지”



민지..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지수의 뒤를 지나쳐 선배에게 다가가는 사람을 보고 난 온 몸이 굳어버렸다.



김민지, 우리 집 옆에 사는 그 김민지..?!!

같은 과였어...?!



순간 난 민지와 눈이 마주쳤고, 민지는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저 미소 속에 숨겨진 악마 같은 본성을 알고 있었기에 난 소름이 끼쳤다.



아..어떻게 그 많고 많은 학교와 학과 중에 같은 학교에 같은 학과라니..

아무래도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게 흘러갈 것 같은 그런 불길한 예감과 함께 나의 서울에서의 대학교 첫 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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