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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대신 닭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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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606회 작성일 20-01-1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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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하고 아랫도리에서 뭔가를 토해내자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퍼지며 아득한 육체적 쓰라림을 동반한 짜릿함이 머리에 교차되면서 내복 사이에 낑겨 용트름하는 그 놈을 멈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은밀히 숨겨 보던 책속의 사진은 너덜거릴 정도라서 머릿속에선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도 어떤 사진인지 훤히 그려진지 오래됐지만 오늘처럼 손도 안댄 채 온 몸을 강타한 적은 없었다.

창문을 조금만 열었다. 맞은 편 들여다 보이는 그 집엔 젊은 여자가 혼자 살고 있는 곳이라서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몸매 관리를 하는 건지 알몸으로 갖은 동작을 해대기 때문에 눈에 띄면 마음만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라서 커튼을 쳐도 오히려 내가 먼저 치고 만다.

찬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열기가 어느 정도는 식어버리면서 눈요기로 보던 책 속에서부터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빨갛게 달아 오르던 불꽃이 연기가 되어 입안을 돌아 목젖까지 휘돌아치더니 오무린 입술을 통해 길게 뿜어지고 조금 열린 창틈으로 소리없이 빨려나가 일 미터도 채 안되는 그 여자의 창가에 메달렸다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꼬리를 물며 날아가다 흩어져 버리는 담배연기 만큼이나 의미없는 생각으로 그 여자의 창가에 불이 밝혀지지 않은 것을 보고 아직 그 여자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때 였다.

창가에 불빛이 환해지며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커튼의 열린 틈을 반사적으로 닫았다. 걸친 옷가지를 훌훌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가고 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만 기다리면 타올을 머리에 동여맨체 촉촉하게 젖은 알몸으로 앙증맞게 전등불 아래 설 것이다. 불규칙하게 몸을 흔들며 달 밤의 체조가 이어질 것이고 한참을 그러다간 얇은 잠옷을 걸친 채 잠이 들 것이다. 그 여자의 다음 동작을 훤히 알기 때문에 나는 커튼을 마저 닫아 버리곤 약수터를 향해 집을 나섰다.

조금 걸으면 동산이 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약수터가 있다. 한 밤중의 약수터 주변에는 사람 수 만큼 차량이 늘어서 있다. 이 밤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몇 개씩 물통을 가져와선 밤이 새도록 약수터를 점령해 버린다.

“물 한바가지만 마십시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뻔히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물 바가지를 내밀었다. 꼬운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지 못해 바가지를 받아들던 그 사람은 물통을 밀치고 바가지를 수돗꼭지에 들이밀어 반쯤 담아 내게 건낸다.
“아저씨, 꼬와보여요?”
“그게 아니고, 나도 바쁜 사람인데 자꾸 끼어들면 언제 물 받냐구.”
“당신 전용 수돗꼭지도 아닌잖아. 물 한바가지 마시겠다는데 이게 뭐요?”

나는 건네 받은 물바가지를 확 뿌리고 늘어선 물통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돌발사태에 긴장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물통을 다시 주워들고 전열을 가다듬을 때쯤엔 나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졌다는 생각을 하며 줄행랑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여차하면 몇 놈 발길질로 윽박지르고 튀면 설마 쫒아오진 못하겠지 싶은 계산도 끝냈다.

“산에 오는 사람들 마시는 약수터에서 당신들 아애 물장사 하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고, 요즘 수돗물 못먹잖아요. 생수값이 여간 비싸야지.”
“그럼 딴 놈들은 수돗물 먹고 뒈지고 당신만 배터지게 약숫물 먹겠다는거야?”
“봐주쇼. 우린 장사하는게 아니고 음식점하는데 손님 줄라고 물 받아가는겁니다.”
“바가지 내밀면 딴 얼른 물 받아 주면되지 꼽게 째려보면 어쩔꺼요?”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나는 창가에서 다른 남자가 은밀히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전혀 조심성도 없이 속살을 마구 드러낸 그 여자에 대한 갈망이 원망으로 변해 버려 이렇게 뒷동산 약수터에서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가 진정되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어깨를 한번 으쓱한 후 슬그머니 약수터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잰장, 누군 살겠다고 약숫물 받아 쳐 먹는데, 나는 죽으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말았네.” 혼자 중얼거리며 산 아랫길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별들이 유난히 총총한 것이 눈에 많이 띄는 밤하늘이다.

“어딜 갔다와?”
아내는 문을 열며 삐걱 들어서는 나를 향해 졸린 눈으로 억지로 문지르며 물었다.
“약수터.”
“거긴 잘 안가잖아?”
“응, 심란해서.”
“밤도 늦었는데, 뭐가 심란해?”
“애들은?”
“다 자.”
“그럼, 오늘 한방 쓸까?”
“그래도 돼?”
“후딱 양치질 하고 올테니까 옷 벗고 먼저 누워 있어라.”

칫솔에다 치약을 듬뿍 묻혀 입 속에 넣고 우글우글하며 거품이 많이 나게 칫솔질을 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중절수술을 몇차례 경험하면서 마누라는 나를 마치 짐승 취급하며 경계하는 통에 각 방을 쓴지 많은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 어쩌다 감정이 동하여 합방이라도 했다 하면 여지없이 애가 자궁에 들어서는 바람에 몇 달씩 초죽음 상태로 보내는 고통을 잊지 못하는 마누라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이젠 각방을 쓰는 것을 받아 들였고 젊은 여자들이 홀딱 벗은 사진 책을 구해 스스로 나를 다스리는 방편을 쓴지 오래됐다.

“괜찮겠나?”
“쓸쓸해.”
“왜?”
“폐경이 오나봐.”
“잘됐네.”
“여자 몸은 끝나는건가?”
“젤이 있잖아. 폐경이면 임신 걱정도 없고.”
“호르몬 분비가 바뀌면서 몸이 팍 늙는다던데.”
“대처 방법이 있겠지.”
“너무 슬퍼.”
“그렇게 사는 거 잖아. 섹스 안해도 잘 살았잖아.”
“가끔은 했잖아. 이젠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구.”
“섹스하곤 무관한거야. 걱정하지마. 이젠 폐경도 됐다니 매일 해도 걱정 없겠구먼.”
“내가 폐경이 되도 딴 여자 생각 안할꺼지?”
“누구나 나이 들면 폐경이 되는데, 그 때 마다 자기 마누랄 버리는 사람이 어디있니?”
“하긴, 요즘은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을 버리더라.”
“꼭 섹스를 필수 조건으로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은 아니잖아.”

부담스러워 하는 마누라를 안아줬다. 보드랍고 탄력 넘치던 분홍색 피부는 어느 덧 하얗고 약간은 기름끼 없는 거친 피부로 바뀌어 있었다. 한 팔로 허리를 감으도 조금은 남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젠 두 팔로 허리를 끌어 안아야 포근하게 내 품에 안겨드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탱탱하던 젖가슴은 아이들이 줄창 빨아대더니 조금은 늘어졌고 움푹 패였던 뱃살도 어느새 남산만헤게 퉁퉁 부풀어 올라있다.

“나, 뚱뚱해졌지?”
“나잇살이라고 하잖아.”
“젊은 애들 보면 부러워 죽겠어.”
“그래? 걔들도 나이 먹으면 어쩔 수 없을걸.”
“딴데 눈 안 돌릴꺼지?”
“세월이 만들어준 흔적을 부정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야.”
“고마워.”

마누라가 가슴에 파고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속엔 흰머리도 섞여 있다. 함께 한 세월 속에 유난히 머리숫이 많았던 이 사람 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시간이었구나 싶어 부드럽게 그 머릿결을 쓸어주며 입술을 대 본다.

“아흑,,,,”
손이 부드럽게 흐르며 귓불이며 목덜미를 지나는 순간 내가 모르는 성감대가 만져졌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내를 보며 약간은 늘어진 젖가슴을 둥글게 모아 그 곳에 오똑 솟아있는 유두를 손 끝으로 문지르고 잇몸으로 잘근 깨물기도 했다.

“유방 수술 할까?”
“지금이 어때서?”
“늘어졌잖아. 보기 싫지?”
“나이 먹으면 늘어지는 건데 고쳐서 뭘 하려고.”
“쳐진 가슴 때문에 날 싫어 할까봐.”
“나이 먹으니까 보는 눈도 달라지더라. 빵빵한 가슴이랑 엉덩이가 좋아 보일 때도 있었는데 이젠 아니거든.”
“남자는 변하지 않는다던데?”
“여자랑 다를 것이 없어.”
“암튼, 나 이렇다고 딴 여자한테 신경 쓰면 끝장이다.”

대답 대신 남산만하게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쓰다 듬었다. 까칠한 털이 수북한 그곳엔 싱그러운 여자 냄새가 났었는데 이젠 거칠기까지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커튼에 가려진 건너편 여자는 어떤 냄새가 날까? 코 박고 그 여자의 아랫도리를 마구 핥아대고 혀 끝으로 마꾸 쑤셔대면 그 여자는 어떤 향기를 뿜어댈까?

“애액이 하나도 안나오지?”
“당신 몸을 음미할 때가 됐나봐. 서둘 필요 없으니까 애액이 나올 때까지 애무하면 되지.”

마누라의 몸을 급히 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손바닥으로 둔덕을 덮고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그 곳을 문질렀다. 항문과 질구의 중간 회음부를 손끝으로 압박하며 서툰 피아노를 치듯 천천히 공략하는 즐거움이 생겼다. 허벅지며 무릎이며 새로운 성감대를 찾아내면 그 뿐이다. 아내가 거친 호흡을 뱉어낼 때면 놓치지 않고 그 곳을 포인트로 정하리가 마음 먹고 정성스럽게 온 몸을 혀로 핥아 내려갔다.

“다리를 활짝 벌릴까?”
“그래? 벌려봐.”

힘든 자세를 피해버렸던 예전과 달리 뭔가 몸에 이상이 오긴 온 모양같았다. 터진 석류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그 곳의 조갯살이 들어났다. 클리톨리스를 문지르면 오히려 진저리를 치던 예전과 달리 오늘은 혀 끝으로 살살 핥아주니 오히려 거친 숨결을 지긋이 참아내는 것이 너무 자극적인 것에서 이제는 적당한 자극으로 감각이 무척이나 둔해졌구나 싶다. 애액이 좀처럼 흐르지 않는다. 빡빡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면 폐경이 아니라 폐경 할머니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섹스엔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가 않다. 불끈 달아오른 물건을 달래기 위해 팬티를 벗어 던졌다. 꺼덕이던 그 놈은 혀로 촉촉하게 길을 터진 틈을 타고 마누라의 몸 속에 깊이 박혀 버린다.

“아으윽~”
질퍽거림이 느껴졌다. 퍽퍽 치골을 때리는 기분도 느껴졌다. 쫄깃한 느낌이 느껴진다. 이 것은 무의식적인 조임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몸을 움찍거리는 노력이라는 것을 느겼다. 몸에 변화가 오면서 스스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다.

“안녕하세요?” 옆집 아가씨가 인사를 건네며 총총 걸음으로 큰 길가로 가고 있다.
“어디까지?” 창문을 열고 인사하는 아가씨를 향해 물었다.
“테헤란로요.”
“그래? 그럼 타.”
“어딘데요?”
“청담동.”
“어휴, 됐어요. 마을버스 타면 금방 지하철인걸요.”
“강만 건너면 금방이잖아.”
그 여자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조수석 문을 열고 내 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선 성수대교 방향의 큰길까지 나왔다. 차들이 많이 밀려있었지만 워낙 길이 많은 탓에 순조롭게 출근길은 진행되고 있었다.
“아저씬 청담동에서 뭘 하세요?”
“비디오 가게.”
“우와, 그럼 영화 엄청 보겠네.”
“못봐. 그냥 빌려주기만 해.”
“알바는 안써요?”
“쓰지. 그래서 낮엔 좀 한가한 편이구. 오전엔 알바가 없는 시간이라서 내가 하지.”
“월급은 얼마에요?”
“시급인데 학생들 알바니까 돈은 괜찮다고 하데.”
“전 바게트 다녀요.”
“몸매 관리를 많이 하나봐?”
“거긴요. 쭉쭉빵빵한 애들이 엄청 많아요. 안할 수가 없어요.”
“하긴, 강남에서 노는 애들이 보통 애들이 아니지.”
“빵 만들 땐 힘들어도 내가 만든걸 맛있게 먹는 사람들 보면 기분이 좋아요.”
“응, 제빵 기술자구나.”
“네, 큰 회사를 갈려고 했는데 경쟁이 심해서 개인 빵집에서 일해요.”
“빵 반죽하려면 고될텐데.”
“남자애들이 하고요. 전 재료 배합이랑 조금 복잡한 걸 하거든요.”
“다행이네.”
“아저씨, 제가 만든 빵 한번 드실래요?”
“됐어. 아침 밥 먹고 나왔는걸.”
“아뇨. 나중에 한번 드시라고요.”
“그래. 기회가 되면 한번 사먹으러 갈게.”
“그냥 드릴께요. 시식만 하면 되요.”
“좋지. 점심때 혼자 밥먹기 정말 고역인데 빵으로 때우면 되겠네.”
“어머, 혼자 식사하세요?”
“아무도 없잖아. 한 사람이라도 더 받으려다 보면 점심 건너뛰는 건 예삿 일이라구.”
“잘됐네요. 아저씨랑 차 같이 타는 대신 점심빵은 제가 댈께요.”
“됐어. 난 밥이 더 좋아. 빵은 매일 먹을 수 없잖아.”
“어때요? 굶는 것 보담 훨씬 좋지요.”

두 사람이 얘기하는 사이에 차는 어느새 가게 근처까지 와 있었다. 나는 그 아가씨를 큰 길가에 내려주고 가게 뒷 골목에 주차시킨 후 가게에 들어섰다. 밤샘일을 한 아르바이트 학생이 졸린 눈으로 나를 맞이한다. 돈을 정산하고 반납된 테이프를 되감다 보면 아침 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어차피 손님들은 오후나 되야 오기 때문에 한가한 오전에 허드렛일은 주인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리가 끝난 테이프들을 세션별로 분류하여 진열대에 꽂고 나니 허리가 찌르르 아프다. 굽혀진 허리를 뒤로 제끼며 몸을 풀곤 잊어 버리고 있었던 커피 한잔을 타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향을 음미하며 목줄길를 넘기는 일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과 같다.

“아저씨, 커피 마셔요?”
“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뻔하죠 뭐. 동네 비디오 가게란 것이 많은 것도 아닌데.”
“한참 일할 시간 아니야?”
“바쁜 시간이죠. 막 구운 빵이라서 갖고 왔어요.”
“어디, 정말 맛있네.”
“특별히 아저씨를 위해 구운 거에요.”
“날 위해?”
“밥이 좋다면서요. 빵 맛을 줄이고 밥 맛을 듬뿍 넣은 세계 최초의 빵, 빵빵...”
“우와, 그럼 이게 신발명품 빵이란 말이지?”
“그냥요. 아침에 고마워서 즉석에서 만들어 본거에요. 빵가게 주인도 엄청 좋아했어요.”
“신제품을 너무 쉽게 만든거 아냐?”
“아저씨 아이디어잖아요. 빵은 싫다. 밥이 좋다. 뭐 그런 소릴 무심히 듣기만 했지 해결방법을 갖고 관심을 가졌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빵인걸요.”
“아무튼 나만을 위해 빵을 개발했다니 감격이군.”
“맛있죠? 정말 맛있는거죠?”
“응, 근데 바쁘지 않으면 커피 한잔 타줄까?”
“오전엔 안 바빠요. 저녁 늦게까지 준비해서 밤새도록 숙성시킨 다음에 아침엔 오븐에다 굽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해도 되거든요.”
“그래서 맨날 늦게 오는거였구나?”
“오늘은 아저씨 때문에 빵 만들다 와서 좀 바빠요. 하지만 커피는 마시고 갈께요.”

나는 숨가쁘게 들이닥친 그 아가씨를 세워 놓고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아가씨는 진열대를 주욱 둘러보고 있었다. 커피가 모락모락 김을 뿜어낸다. 나도 덩달아 한잔 더 마실 요량으로 두 잔을 만들었다.

“마셔봐. 나도 커피 타는덴 일류거든.”
“이거 직접 탄거에요?”
“아니, 인스탄트야.”
“어쩐지. 이건 싸구려 맛이네요.”
“그래? 커피 맛이란게 다 똑 같은거 아냐?”
“아휴, 이건 벤딩커피구요. 맛을 내려면 신경써야 해요.”
“난 이게 좋던데.”
“시간나면 타는 방법을 가르쳐드릴께요.”

그러면서 눈여겨 봐뒀던 테이프를 한 개 꺼내선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왜? 저녁때 늦게 다니던데 비디오 볼 시간은 있어?”
“맨날 바쁜 건 아니잖아요. 심심할 땐 이걸루 시간 좀 떼우려고요.”
“하루 빌리는데 천원이야. 오늘은 그냥 빌려줄께. 매일은 안되는거 알지?”
“알았어요. 아저씨가 마침 하니까 빌려가는거구. 딴 땐 보지도 않아요.”
“그럼, 컴퓨터에 등록해야 하니까 이름하고 전화번호 불러봐.”
“어머, 그러고 보니 이름도 서로 모르고 있었네요.”
“옆집에 산다고 이름 다 아는 것은 아니잖아. 그냥 얼굴만 알고 지내도 되는데 뭘.”
“잘됐네요. 제 이름은 김선미구요 전화번호는 핸드폰 갈켜줘도 되죠?”

나는 컴퓨터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등록하고 테이프 제목을 입력하면서 검은 비닐에 테이프를 넣어 선미에게 건넸다.

“멜로 보다는 코메디 물을 좋아하나보네?”
“첨에는 요. 나중에 익숙해 지면 심각한 것도 빌려주세요.”
“알았어. 아주 심각한 것들도 구석에 수두룩하거든.”
“어머, 아저씨는 그걸 다 봤어요?”
“아니, 그냥 트리플엑스 급으로 분류된 걸 찾는 사람들이 많기는 한데 꺼내 놓기는 뭐해서.”
“나중에, 제가 보고 싶을 땐 눈치껏 빌려주실꺼죠?”
“여부가 있나. 늦겠다 어서 가봐.”

나는 선미가 종종 걸음으로 가게문을 빠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딸 애랑 선미랑 비슷한 나이같았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하면서도 어느 날 부턴가 부녀지간이 여간 서먹한 것이 아니었다. 사내녀석이었더라면 등도 두드려주고 격려도 하며 가끔은 부자지간에 숨어서 키득거리며 맞담배라도 펴 봤을텐데 딸애랑 한번 서먹해진 이후로는 어떻게 관계 개선을 해야할지 암담해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누라랑 딸애랑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까지 똑같을 순 없을텐데 뽀얗게 피부가 영글어 가면서부터 나를 피하는 태도를 볼 때 경계를 풀어줄 날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터에 선미가 불쑥 나타났으니 딸이라 생각하며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후 시간이 되어 근무교대를 하니 시간이 여간 남는게 아니다. 집에 가봤자 맞벌이 하는 마누라는 아직 없을테고 덩그라니 쇼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죽치고 볼 수도 없는 형편이 계속 되면서 나름대로 시간을 떼우는 방편으로 대학 도서실엘 다니고 있다. 아르바이트 학생의 신분증으로 카드리더기에 들이대기만 하면 아무런 제지없이 무상 출입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이젠 직원들이랑 얼굴도 많이 익힌 탓에 신분증 없이도 들락 거릴 정도가 됐다. 나는 마누라의 폐경을 생각하며 생리학관련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떼웠다. 진작부터 여자에 대해 자상한 관심을 가졌더라면 맥없이 마누라가 늙는 것만은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에 지금 부터라도 늙은 여자와 사는 방법을 익혀야 될 것 같았다. 부드럽게 여성을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방법이라든가 애액이 없는 상태에서 삽입하는 방법이라든가 눈에 띄는대로 모두 도움이 될 것만 같다. 칼라로 여자의 벗은 몸이 여기저기 삽화처리된 책을 힐긋 보며 웃음짓는 학생들틈에서 책을 읽는 것도 보통 정성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 앉는 시각. 나는 학교를 빠져나오며 헤드라이트를 켜고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여야 했다. 늦게까지 책을 본 탓에 어느정도 선미가 퇴근할 시간이 됐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메모리에 넣어둔 선미의 핸드폰 번호를 누를 땐 아주 오래전에 한번은 느꼈던 그러나 이제는 기억이 아련한 어떤 흥분 때문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기분이 이상해지며 머리에 온통 혼란스러움이 가득해졌다. 이왕에 꺼낸 핸드폰인데 밑지든 말든 눌러나 봐야겠다 싶어 전화를 받을 때 까지 한참동안 긴장하며 기다렸다.

“누구세요?”
“어, 아저씬데, 퇴근하는 중인가?”
“어머, 막 끝나서 버스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래? 나도 도서실에서 책 보다 늦었어. 근처에 있는데 그리갈까?”
“아뇨, 버스 금방 올꺼에요.”
“그래? 난 선미가 이쯤 끝나겠다 싶어 서둘러서 도서실을 나왔는데?”
“그럼 어쩌죠?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데요?”
“오분정도?”
“좋아요. 무역센터 건너편 한전 쪽에서 기다릴께요.”

기대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면서 잠시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 삼성동 사거리 방향으로 차를 돌리고 한참을 달리다 유턴을 하니 선미가 동동 발을 구르는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가 출퇴근 시켜주네.”
“아냐, 오늘은 우연히 그렇게 된거구. 낼 부턴 출근만 도와줄게.”
“그렇지 않아도 낯선 동네루 이사와서 심심했거든요.”
“연애할 나이 아닌가?”
“연애요? 전 아직 어려요. 서른 훨씬 넘어 시집갈 생각인걸요?”
“뭐? 지금 몇 살인데?”
“스물셋이요.”
“어, 우리 딸이랑 동갑이네.”
“어머, 따님이랑 친구해도 되요?”
“그거야 당사자들이 결정할 일이지, 내가 뭐라 할 수 있나?”
“뭐해요?”
“응 한해 재수해서 아직 사학년이야.”
“전 재수 안했는데.”
“그랬겠지. 벌써 제빵 기술자가 된 걸 보면 공부를 잘 했나봐?”
“고등학교때부터 관심분야 였어요. 대학교땐 실습 다니느라 바빴구요.”
“그래서 연애할 시간이 없었나봐?”
“전공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남자에겐 관심도 없어요.”
“차타고 다니면서 나랑 연애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징그러워요. 전 그냥 아빠 같다는 생각을 한 걸요.”

어차피 딸애한테 관심을 보여도 쳐다보지도 않는 상태에서 딸애랑 또래의 선미를 만난 것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베풀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오가면서 부녀의 정을 키울 수도 있으련만 어떤 이유에선지 서먹한 관계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을 바에는 선미에게 부녀의 정을 쏟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만 간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선미를 태우고 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 보인다. 좁은 길가엔 차들이 수없이 무단주차를 해대고 있을테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 옆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아는 동네 사람들을 숫하게 만나겠지만 무심히 앞만 보며 골목에 빨려들어선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으면 오늘 하루는 끝이다.

“아저씨, 고마웠어요.” 선미가 차에서 내리며 꾸벅 인사를 하곤 옆 집문을 열고 들어선다.
엉거주춤 차를 세웠던 상태에서 다시 후진하며 주차선에 차를 반듯하게 세워놓고 나는 다른 쪽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고 있다. 내 방문의 커튼을 조금만 열면 두 사람의 얼굴이 마주 보일텐데 선미가 그런 사실을 알면 까물어치듯 놀라겠다 싶어 커튼을 바짝 조여 놓은 채 방의 불을 밝혔다.

“오늘은 늦었네.”
“응, 도서실에 가서 폐경기의 여자는 어떻게 되나 공부좀 했어.”
“뭐래요?”
“그냥 다정하게 대하라는 군. 평소에 하던 행동과 달라질 것도 없고 누구나 겪는 일이라서 따로 신경쓸 필요도 없다고 써 있더라고.”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결리는데 그것 때문에 생긴 병 아냐?”
“복잡하게 생각하면 다 그런거고 편안하게 생각하면 별개의 문제일 뿐이야.”
“알았어. 당신이 끔찍하게 날 위해주고 있다는 걸 느끼겠네.”
“달라지지 말자구. 그나저나 순화는 언제까지 서먹하게 지낼껀가?”
“걔가 늦게 커서 그래. 원래 사춘기때 아빠랑 서먹해지는건데 요즘이 사춘긴가봐.”
“혹시 남자친구 생긴거 아냐?”
“그럴수도 있겠지 뭐.”
“엄마가 되갖고 딸한테 관심좀 가져봐.”
“어차피 지 인생인걸 뭐.”
“여간 신경 쓰이는게 아냐. 벌써 몇 년째 나랑 말도 안하잖아.”
“당신은 신경꺼. 여자끼리 해결할테니까.”

손발을 씻고 내 방에 들어왔다. 다른 때 같으면 홀딱 벗은 여자 사진을 제일 먼저 꺼낼텐데 어젯밤 마누라 일도 있고 오늘은 선미일도 있어서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탓에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바둑 게임에 빠져들었다간 낮 일을 생각하며 기분좋게 잠을 청하는데 딸애가 방문을 노크한다.

“아빠, 화났어요?”
“아니?”
“엄마가 아빠랑 얘기 좀 하라네.”
“아냐. 너랑 서먹하게 지낸지가 하도 오래돼서...”
“그런거야? 난 또.”
“순화야, 문제 있는 것은 아니지?”
“응, 그냥 그렇지 뭐.”
“대학 가기 전만 해도 아빠한테 업어달라고 떼쓰던 일이 생생한데 너랑 너무 서먹하다.”
“징그럽잖아.”
“내가?”
“남자가.”
“얌마, 내가 아빠지 그냥 남자냐?”
“몰라. 왠지 남자 냄새가 난단 말야.”
“허, 목욕을 잘 안해서 그런가?”
“아빨 사랑해. 그런데 가까이 하기엔 좀 꺼림칙하단 말야.”
“알았어. 니가 서운한 일이 있어서 그런줄 알고 너무 조심스럽더라.”
“서운했다면 미안해.”
“이리와봐. 머리 쓰다듬어 준지도 오래됐구나.”

나는 딸아이를 잡아끌어 가슴에 얼굴을 묻게 하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땐 머리만 감아도 아빠에게 달려와 착한애니까 머리쓰다듬어 달라고 떼를 쓰던 놈인데 이젠 억지로 잡아 당겨야 품에 안기는 나이가 되고 말았구나 싶어 서글픈 마음까지 들었다.

“그럼 가봐. 서운할 일 만들진 말고.”
“잘 살고 있어요. 내겐 아무 문제도 없구요.”

순화는 경쾌한 기분을 내 방을 빠져나갔다. 다시 잠자리에 들면서 선화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해 본다. 아빠를 남자라고 생각하면 가까이 할 수가 없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딸애를 가까이 하면 부작용만 더 심할 뿐이다. 차라리 선미를 선화라 생각하고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날이 밝자 출근길에 요란하게 시동을 걸었다. 크락숀을 누를 형편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선미가 눈치껏 출근시간에 내려오라는 신호로 공회전까지 하며 한참 머뭇거리다 조수석 문을 열며 마치 쏟아져 들어오는 듯이 선미가 뛰어 오지 않았더라면 부득이 차를 천천히 움직여 동네 어귀까지는 빈 차로 갔을지도 모른다.

“왜 늦었어?”
“비디오요. 그거 늦게까지 봤거든요.”
“재밌었어?”
“그럼요. 코메디 영환데 아저씨두 한번 봐요.”
“난 그럴시간이 없잖아. 종일 늘어진 테이프 되감는게 고작 내가 할 일인걸.”
“낮엔 시간 많잖아요. 영화를 본다든지 비디오 방을 간다든지, 아니면 보고 싶은 테이프를 집에 가져가서 봐도 되잖아요.”
“내가 볼 테이프가 어디있어. 한번이라도 더 손님한테 보여줘야지.”
“문화생활이라는게 있잖아요. 아저씬 돈 버는 기곈가요?”
“그렇네. 정말 돈 버는 기계였어.”
“아휴, 그렇게 자조하란 뜻이 아니구요. 좀 재미있게 살라는 말이에요.”
“재미라...”
“세상은 재밌잖아요.”
“그렇다고들 하더군.”
“어머, 남의 말 하듯 하네요.”
“몰라. 난 자식 키우는 뒷돈 데느라 세월을 다 보냈지. 딸애랑 어제 얘기해봤는데 선미처럼 밝지가 않아. 그냥 서먹서먹할 뿐이야.”
“그럼 제가 딸 역할을 하면 되잖아요.”
“딸애를 업어준 기억이 가물거려. 그 놈이 머리쓰다듬어 달라고 할땐 귀찮기까지 했는데 요즘은 머리카락은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거든.”
“아저씬 응석이 필요한거죠?”
“그런가봐. 어젠 억지로 머리를 쓰다듬었다니까.”
“큰 문제만 없다면 제 머릴 쓰다듬어 주세요.”
“큰 문제?”
“가령, 난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아저씬 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자로 본다든지...”

교대시간이 지나기 무섭게 수금한 돈을 들고 가게를 빠져나오던 나는 선미가 끝날 시간이 기다려져서 아직도 가게를 못 벗어나고 있다. 장르별로 정돈된 테이프 들 속에서 더 세분화할 필요는 없는지 꼼꼼히 매장을 살피는 동안 아르바이트 학생은 주인이 부산하게 뭔가를 하고 있는 통에 여간 불편해 하는 것이 아니다. 시계를 빨리 돌려 버리고 싶다. 선미가 전화할 이유가 없겠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부산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핸드폰에 쏠려 있었다. 어제처럼 우연인 듯 선미 빵집 앞을 서성거리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가능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이던 마음을 갖기는 너무 오랜 기억 속의 어느 날이었을까?

“아저씨, 어디에요?”
핸드폰을 들자마자 들려오는 선미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시간에 왠일이야?”
“오늘 일찍 퇴근하려구요.”
“그래? 난 아직도 가게야.”
“퇴근 안했어요?”
“응, 지금 막 하려던 참이야. 그리 갈까?”

선미를 만나러 가는 길이 이렇게 들뜰 수가 없었다. 마치 첫 데이트 약속을 한 것처럼 설레임으로 가득한 것이 오래간만에 가슴 속까지 떨리는 느낌이다.

“제가 순화라면 맛있는 저녁을 사 달랬을꺼에요.”
“만약 선미가 순화였다면 나는 너를 업어줬을꺼야.”
“오늘은 다른 날 보다 두시간 먼저 퇴근해서 뭘 할까 고민했는데 아빠 해 주세요.”
“뭘 먹으면 잘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음,,, 맛있는 불고기 사 주세요.”
“불고기라, 맛있는 집은 보통 외각에 있는데 드라이브도 할겸 그리갈까?”
“아이 좋아.”

선미는 어린 아이처럼 기분이 날아갈 듯한 표정을 보인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순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순화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무겁게 내려깔렸지만 꿩대신 닭이라고 선미와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창 밖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달리는 차 속에서 선미는 연신 콧노래를 부른다.

“아저씨, 전 아빠가 없어요. 그래서 아빠 같은 느낌이 들어요.”
“너만 괜찮다면 아빠라고 불러도 돼.”

“만약에요. 제가 아빠 딸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글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워했겠지.”
“순화는 왜 이렇게 좋은 아빠가 있는데 겉 돌까?”
“사춘기가 늦게 왔나봐. 학교 다니면서 부쩍 성숙해진 것 같단말야.”
“그럴수도 있어요. 아빤줄 알았는데 어느날 보니 남자로 보였을 것 같아요.”
“그럼 순화가 날 남자로 본 건가?”
“그러니까 맘 속으로 너무 좋아해서 겉으론 자꾸 피하고 쑥스러워 하는거예요.”
“그럴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선미는 내가 남자로 안보이니?”
“보여요. 하지만 아빠같다는 생각이 더 들거든요.”
“널 딸이라 생각하고 순화한테 못 전달한 부정을 쏟고 싶구나.”
“순화 머릴 쓰다듬어 주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럴 땐 제 머릴 대신 쓰다듬어 주세요.”

한참을 달려는 사이에 선미가 마치 순화를 대신하여 멋진 딸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평소 순화랑 같이 다니고 싶었던 한식집 넓은 뜰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을 메운 차들만 보면 경기가 나쁘다는 얘긴 돈없고 가난한 사람들만의 얘기일 뿐이다. 한끼니를 때우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대부분 사람들은 적어도 가난으로 부터는 멀지감치 떨어져 마치 강건너 불 구경하듯이 나쁜 경기 탓만 하는 몰지각한 서민들이 미워 죽을 지경일 것이다. 선미와 나는 칸 막이로 나눠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봄 나물이 밥상에 가득 올라오고 보리밥에 고추장을 넣어 썩썩 비벼 숟가락 위에 고기 한점 얹어 입에 넣을 땐 고단했던 날들에 대한 생각은 멀지감치 사라지고 입맛에 맞는 음식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정말 맛있어요.”
“그래? 풀 뿐인데?”
“집에서 먹는 거랑 분위기가 너무 달라요.”
“가끔 올까?”
“그럼 전 좋죠.”
“허구헌날 올 순 없고 선미랑 가끔은 오고 싶구나.”
“날이 조금만 더 따뜻해지면 봄 꽃이 길가에 활짝 펴서 멋질 것 같아요.”
“그래, 너랑 여길 오면서 생각해봤는데, 사람 사는 것이 뭔지 맨날 바쁘기만 했던 것 같아.”
“사람들이 오일제 근무니 뭐니 하면서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이유도 삶의 여유를 찾자는 뜻이겠죠?”
“오호, 선미가 그런 생각까지 했어?”
“저도 취미와 직업이 같아서 좋긴한데 맨날 야근하느라 좋은 걸 잊고 살았나와요.”
“그랬구나. 아저씨가 널 위해서라면 시간을 아끼지 않고 싶구나.”
“아저씨가 뭐예요. 아빠라고 하라니까.”
“그래, 아빠, 넌 내 딸이고.”
“아빠는 순화한테 맛있는 것만 사주고 싶었던거에요?”
“글세, 다른 것이 뭐 있었을까?”
“가령 영화를 함께 본 다든지, 여행을 다닌다든지 뭐 그런 것 말이에요.”
“많았었지. 지금은 소망이 자꾸 줄어서 같이 밥 먹는 걸로도 만족하게 됐어.”
“가끔은 제가 쏴도 되죠?”
“뭐? 니가 쏜다고?”
“그럼요. 돈 버는 딸이 아빠한테 쏠 수도 있잖아요.”
“하하, 그러렴. 난 부자 딸을 공짜로 얻은 셈이구나.”
“오늘 저녁식사는 제가 쏠께요.”

식사를 끝내자 선미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계산을 했다. 어린 아이에겐 한참 부담스러운 음식값이었을 텐데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미가 돈을 냈으니 아빠는 뭘 사줄까?”
“그냥 가요. 늦었잖아요.”
“아냐, 맥주 한잔 사줄까?”
“음주운전 하시게요?”
“음~, 대리운전 시키면 될꺼야.”

나는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는 길 목 쯤에 있는 카페에 차를 세웠다. 분위기가 평안하고 은은한 것이 가끔 머리가 무거울 때 찾던 나만의 카페였다.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맥주 세병과 기본 안주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눈 인사를 한다. 내 습관을 잘 알기 때문에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주는 것이 고맙다.

"분위기 어떠니?“
“좋아요. 아주 평안한 느낌이에요.”
“난 가끔 와서 생각을 정리하곤 하지.”
“전 이런덴 첨이지만 머리가 맑아질 것 같아요.”
선미는 어느정도 술이 들어가자 수다스러운 딸과 같이 정감있게 나를 바라봤다. 그런 선미의 손을 끌어 내 옆자리로 이동시키고 정성스럽게 머릿결을 쓰다듬어 본다.

“아빠, 정말 순화같아요?”
“응, 넌 순화야.”
“제가 선미인 채로 딸이란 생각하면 안돼요?”
“그냥 순화라 생각하고 선미를 대하면 편해서 그래.”
“전 싫어요. 그냥 순화는 잊고 저 선미를 딸로 생각해주세요.”
“알았어. 넌 내 딸이야.”

머릿결을 따라 내려오던 손이 선미의 어깨 위에 머물렀다. 선미의 몸이 움찔 놀라는 듯 했지만 손목에 약간 힘을 넣어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선미의 머리가 기대어 지도록 했다. 고운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금 더 힘을 넣어 그런 선미의 어깨 동선을 가만히 잡아들였다. 파르르 놀란 선미의 몸이 더 이상 힘을 넣지 않고 힘없이 내 어깨로 쓸어졌다.

“만약에 순화였다면 어땠을까요?”

선미의 질문에 나는 떨리는 손 끝으로 선미의 얼굴선을 따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아빠는 순화를 좋아했던거죠?”

그런 선미의 흐트러진 머릿결을 올려주며 가만히 그녀의 이마 위에 손을 얹고 살짝 눈을 가리며 입술을 그 위에 포갰다. 바짝 마른 입술이 달짝스럽게 부딪혔다. 마른 입술이 벌어지고 그 속으로 부드러운 혀를 넣어 촉촉하게 선미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양 손으로 선미의 얼굴을 붙잡고 아주 부드럽게 입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선미의 입술이 벌려지며 뜨겁고 촉촉한 부드러움이 나를 맞이했다. 말랑한 두 혀가 뱀처럼 뒤엉키며 숨결이 자꾸 거칠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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