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4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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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1,502회 작성일 20-01-17 15:31본문
수사요원들이 강민우의 호출기와 지갑 등을 압수하고 겉옷을 벗겼다. 그리고 희미한 전등불 밑에 강민우를 의자에 결박하였다. 수사요원들이 나가고 잠시 후 감찰실의 홍실장과 인상이 험악한 요원 한명이 들어왔다. 홍 실장도 그렇지만 악랄한 고문으로 유명한 김창기 요원이었다. 홍 실장이 강민우 앞에 버티고 섰다.
“협조를 잘하면 빨리 끝낼 것이다.”
“오민국 차장을 만나게 해주시오.”
“이곳에 들어오면 직위도 직책도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니오?”
“강민우! 당신 JRS 멤버이지?”
“난 그런 거 모르오.”
“처음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홍 실장이 김창기에게 눈짓을 했다. 김창기가 욕조 옆에 놓인 각목을 집어 들고 강민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느닷없이 강민우의 넓적다리를 내리쳤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강민우가 홍 실장을 노려보았다. 홍실장이 군화발로 강민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어서 떡메를 치듯이 김창기가 각목을 휘둘러 강민우의 가슴을 가격했다.
“으 윽~! 너희 놈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당신, 이미연을 만났지?”
“이미연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이진아를 데리고 있었지?”
“마, 말할 수 없다. 오 차장을 만나게 해주면 말하겠다.”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말해!”
홍실장이 강민우의 뺨을 후려쳤다. 이어서 김창기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강민우의 정수리와 어깨를 각목으로 내리쳤다. 강민우의 머리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 내렸다. 홍 실장이 강민우의 턱을 쳐들고 내려다보았다.
“당신, 혹시 위장 간첩 아냐?”
“하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홍 실장을 바라보는 강민우가 조소를 흘렸다. 그는 더 이상 그들과 대화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홍 실장은 강민우의 태도를 보고 스스로 분노하였다. 홍 실장의 고문을 견뎌내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아서 홍 실장이 강민우의 가슴과 무릎을 군화발로 짓이겼다.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여기서 걸어 나갈 생각이 없냐? 엉?”
“윽.........!”
강민우가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쓰러졌다. 분이 안 풀린 듯 홍 실장은 허리에ㅐ 손을 짚고 거만한 자세로 버티고 서서 내려다보았다. 김창기의 손에 쥔 각목이 사정없이 강민우의 몸을 내리쳤다. 김창기는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강민우를 두들겨 팼다. 빨래판처럼 두들겨 맞은 강민우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만해라. 그러다가 뒤지것다. 매질도 쉬엄쉬엄 해야지 안 그럼 송장 치른다. 우선 정신 좀 챙기게 물 좀 먹여봐라.”
구경하듯이 내려다보고 있던 홍 실장이 책상에 걸터앉았다. 김창기가 강민우를 일으켜 앉히고는 목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물주전자를 들어서 강제로 물을 먹였다. 정신을 잃었던 강민우가 사래가 들려 온몸을 흔들며 격하게 기침을 했다. 다시 김창기의 손에 들려진 각목이 강민우의 가슴을 강타했다. 상체를 구부린 강민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 아! 헉~!”
“말해 봐! 최진경, 아니 이진아를 어떻게 데리고 있었지? 이진아가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니. 니네들이 알아봐........ 너희 놈들.......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래도 이 새끼가!”
홍실장과 김창기가 강민우에게 달려들어 의자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강민우의 무릎을 꿇게 한 다음 팔을 무릎 밖에 두고 무릎과 팔 사이에 각목을 끼웠다.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각목으로 매달리게 한 뒤 강민우의 코에 물을 계속 들이부었다. 강민우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각목이 몸을 파고들었고 물은 폐로 넘어 갔다.
“크 악~! 이, 이놈들아........”
온 몸을 흔들며 격하게 기침을 한 강민우가 사지를 축 늘어트리고 기절을 했다. 거만하게 서 있든 홍 실장이 고갯짓을 하며 강민우 앞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김창기가 각목에 끼어 매달린 강민우를 끌어내려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양동이를 들어 욕조에 있는 물을 가득 담아서 강민우에게 끼얹었다.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강민우가 물동이 세례를 받자 머리를 흔들며 허우적거렸다.
“푸 허~!”
“네가 아는 데로만 말해! 버텨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잖아.”
아무래도 물이 코로 들어간 듯했다. 몇 번이고 자지러질 듯이 기침을 하던 강민우는 거칠고 지친 숨을 내쉬며 침을 흘렸다.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서 고개를 든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홍 실장을 노려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내쉰 홍 실장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강민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발짝 정도 거리를 둔 위치에서 상체를 숙여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라니까. 이러면 서로 힘들어 지잖아. 혹시 그 여자를 데리고 잤냐?”
“더러운 놈들~!”
노려보던 강민우가 홍 실장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 치민 홍 실장이 발길질을 날리자 강민우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얼굴이 벌개 진 홍실장이 무자비하게 강민우를 짓밟았다. 강민우는 숨넘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분노에 찬 얼굴로 씩씩거리는 홍 실장은 김창기가 두 손으로 담배를 내민 담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김창기가 내민 라이터 불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을 깊게 빨아 코로 뿜어냈다.
“에이 씨팔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다시 의자에 앉은 홍 실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는 담배를 낀 손가락을 흔들어 김창기에게 강민우를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그의 명령에 김창기가 의자와 함께 강민우를 일으켰다. 강민우는 부어서 거의 떠지지 않는 눈으로 고개를 힘겹게 까딱이면서도 중년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죽여 버릴 거다.’를 연발했다.
그때 유리창 너머에서 취조 과정을 살펴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수사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상운이었다. 다른 밀실에서 좌익운동권 학생을 심문하다가 지쳐 나왔다가 비명소리를 들은 것이다. 무심코 취조 관찰을 하는 방문을 열어서 들여다보고 나가려다가 다시 유리창 너머의 밀실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피로 범벅이 되어 고문을 받는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눈에 익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닌 강민우임을 알고 그는 깜짝 놀랐다. 한상운은 놀랍기도 하고 어찌해서 강민우가 끌려와 고문을 당하는지 의문이 앞섰다. 무엇보다도 강민우를 구출해 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안기부 별관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다.
방이동 NTIS 종합상황실. 전산요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부분 헤드셋을 쓰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요원, 서류철을 들고 책상사이를 빠져 바쁘게 걸어가는 요원, 커피 잔을 들고 여유롭게 귓속말을 주고받는 요원들, 각양각색의 요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와 통화중인 유서연은 짜증이 났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재혼한 남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어머니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돈이 필요하면 말하지.”
“너도 천신님께 돈을 헌납해. 그리고 건강식품이니 직원들에게 팔아 줬으면 좋겠어.”
“무슨 물건을 팔아달라는 말이야. 그거 다단계 판매, 사기야, 사기. 왜 그런 일을 해.”
“사기라니? 너 그런 말 하면 천벌 받는다. 이건 천신님에게 공덕을 쌓는 일이야.”
“공덕은 무슨 공덕! 엄마 미친 거 아냐?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바쁘니까, 전화 끊어.”
발끈 화를 낸 유서연은 집어던지듯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송나희가 다가와서 유서연의 등을 툭 쳤다.
“무슨 일인데 사무실에서 언성을 높이니?”
“글쎄, 울 엄마가 정신이 어떻게 됐나봐. 이상한 말을 하잖아.”
유서연은 헤드셋을 집어 들면서 퉁명스럽게 내 뱉었다. 그때 유서연의 책상위에 놓인 무선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헤드셋을 쓰려던 유서연이 재빨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가 다시 전화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대뜸 팩 쏘아 붙였다.
“아! 왜 자꾸 전화 해. 전화하지 말라니까.”
“차장님 비서실인데요.”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아니기에 유서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서실이라는 말에 유서연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네. 상황실 유서연입니다.”
“차장님한테 긴급전화가 왔는데, 거기 계시지 않나요?”
“아! 잠시 만요.”
전화기를 책상위에 내려놓고 일어선 유서연이 두리번거리며 송나희에게 물었다.
“차장님 여기 오셨어요?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왜?”
“차장님한테 긴급전화가 왔다고 하는데........”
송나희도 돌아서서 상황실 안을 살펴보았다. 때마침 상황실 안으로 들어서는 오민국 차장의 모습을 발견했다. 송나희가 책상 위에 놓인 무선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 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 들어선 오민국 차장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상황실 안을 살피고 있었다. 상황실 안에서는 각자 모니터 앞에서 근무에 열중하는 상황실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황실을 점검하고 국제테러 문제로 말썽이 되고 있는 리비아 사태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려고 외무부에 다녀 올 계획이다. 송나희가 오 차장에게 다가왔다.
“국장님! 전화 왔는데요.”
“어디서........?”
“모르겠어요. 비서실에서 긴급한 전화라고 해요.”
송나희가 오 차장에게 무선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의아스런 표정으로 오 차장이 눈동자를 껌벅이면서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 오민국입니다.”
“저, 한상운입니다.”
“오! 무슨 일이야?”
오 차장도 한상운이 JRS 멤버인 것을 알고 있었다. 광주에서 근무하던 한상운이 남산으로 발령받으면서 오 차장에게 인사차 들렸었다.
“강민우 요원이 남산 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강민우가! 무슨 일인지 알아봤나?”
“아뇨! 감찰실 요원에게 심하게 고문을 당하고 있기에 너무나 경황이 없어서.”
“알았어. 내가 갈게.”
오 차장의 옆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 있던 송나희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오 차장은 강민우가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GIS의 어떤 음모로 강민우가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전산상황실을 나온 오 차장은 자신의 국장실로 가서 전화기를 집어 들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교환원에게 청와대 비서실장을 연결해 달라고 하면서 돌아섰다. 그때 송나희가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래도 강민우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돌아서 있는 오 차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네. 우리 멤버요원이 남산 별관에 체포 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보려는데 전화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 네! 감사합니다.”
오 차장은 JRS 멤버인 대통령 비서실장의 도움을 요청하는 중이었다. 간략하게 급히 통화를 끝낸 오 차장이 돌아서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집어 들고 걸치던 오 차장이 국장실에 들어와 있는 송나희를 발견했다.
“왜.......!?”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외투를 걸치고 망설이던 오민국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차장이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차를 대기시키라고 주문을 하였다. 송나희가 국장실 문을 열고 오 차장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따라서 나섰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가서 섰다. 멈추어선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산 안기부 청사의 정보국장실에서 오민국 차장은 차문기 국장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오 차장의 한 발 뒤에는 송나희가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하고 서 있고, 차 국장의 옆에는 감찰실의 홍 실장이 경직된 자세로 서 있었다. 차 국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오 차장의 시선을 피했다.
“정보국 소관의 사건을 다루는 중이라서.......”
“무슨 일인지 몰라도 NTIS 소속 요원이니 나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상부지시라서 저도 곤란합니다.”
“상부지시라고.......!”
오 차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차문기 국장의 명패가 붙은 책상위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버튼을 눌러 청와대 비서실장을 연결해달라고 했다. 잠시 기다리던 오 차장이 깍듯한 말투로 통화를 하더니 차문기 국장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다. 전화기를 받아 통화를 한 차 국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차 국장이 홍 실장을 바라봤다.
“강민우 요원을 풀어주라는 청와대 지시야.”
“........네!”
홍 실장이 맥 빠진 표정으로 주춤하다가 국장실을 나갔다. 겸연쩍은 차문기 국장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차를 가져다 달라고 지시했다. 조금은 불쾌한 표정인 차 국장이 오 차장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상부의 지시라 저도 어쩔 수 없이. 차라도 한 잔 하면서 기다리시죠.”
차 국장이 소파를 가리키면서 오 차장에게 앉기를 권했다. 차 국장을 마주하고 오 차장과 송나희가 나란히 앉았다. 국장실 문이 열리고 여자 요원이 김이 서리는 찻잔을 들고 들어와 탁자위에 놓고 나갔다. 차 국장은 공연히 앉은 자리가 불편한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한잔 하시죠.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이 각각 장기에 대하여 생리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 소화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기에 요즘 오미자차를 마시는 중이죠. 들어 보십쇼.”
“.........”
오 차장은 고개만 조금 끄덕일 뿐 차를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 국장 못지않게 오 차장도 불쾌했다. 적어도 체포하려는 소속 요원의 책임자에게 알리는 것이 통속적인 관례였다. 차 국장 혼자서 오미자차를 훌쩍거리고 마셨다. 보이지 않는 암투 속에 침묵이 흘러갔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국장실 문이 열리고 홍 실장이 강민우를 데리고 들어왔다.
얼굴에 상처와 멍투성인 강민우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초췌한 몰골에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피가 묻어 흐트러진 복장은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병사 같았다. 국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송나희는 발딱 일어서 강민우를 바라봤다. 기어코 오 차장은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일어섰다.
강민우를 바라보는 송나희의 눈동자에는 습기가 배어 나왔다. 말없이 다가간 송나희는 강민우를 부축했다. 홍 실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나희가 민우를 부축하여 국장실을 나섰다. 뒤이어 오 차장도 국장실을 나왔다. 차 국장과 홍 실장은 멀거니 서서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부산 자갈치 시장의 변두리 남포동의 번화가는 언제나 북적거리는 인파들로 가득하다. 특히 어둠이 내려앉은 어물시장 골목은 더욱 복잡하게 흥청거린다. 시장 가운데는 줄지어 카바이트 등불을 밝힌 리어카와 좌판 장사꾼들의 목청이 높아간다. 시장 골목으로 들어선 험상궂은 사내들이 식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내들 중 한 명이 외친다.
“아주매! 쐬주하고 삼겹살 주소.”
“예. 쬐메만 기다리소.”
거들먹거리는 사내들은 식당 한가운데 있는 연탄불이 놓인 원형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식당 안에는 여기저기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일하는 아줌마를 부르는 손님들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렸다. 식당 아줌마가 돼지고기와 석쇠를 들고 와서 연탄 불 위에 올려놓았다. 사내들 옆에는 두 남자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고 있었다. 돼지고기를 굽기 시작한 사내들은 성급히 소주를 따라 마시기 시작하면서 이따금 옆자리에 있는 남자들을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소주 한잔을 들이 킨 사내들 중에 머리를 빡빡 깍은 사내와 옆자리에 있는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머리를 빡빡 깍은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옆자리의 사내에게 한마디 했다.
“와 보노? 와 눈깔을 꼰아 보노. 디질래.”
“머라카노!? 믄디 자식! 많이 처 묵고 가라.”
“요 봐라! 알라들이 쌔게 나오네.”
“도란나! 쳐 맞을래?”
사내들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남자 두 명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드잡이를 하던 남자 두 명과 사내 들이 음식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밖으로 나가서 주먹과 발길질을 하였다. 겁에 질린 음식점안의 손님들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음식점 아주머니는 카운터의 전화기로 가서 경찰서로 다이얼을 돌린다.
“어메! 또 싸움질들이 고마.”
사내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남자 한 명은 피투성이가 되어 시장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른 남자도 역시 여러 명의 사내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얼굴에 멍이 들고 입술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는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 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시장 골목을 달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남자 한 명을 쓰러트린 사내들이 도망가는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쓰러진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구경꾼 중에 누군가 혀를 찼다.
“쯔 쯧~! 무섭데이.......”
사내들이 의도적으로 시비를 건 것이다. 남포동 일대에는 두 개의 폭력조직이 지역다툼을 하고 있었다. 원래 남포동의 토박이 폭력조직인 제왕파와 영도파 끼리는 서로의 지역을 인정하고 큰 다툼이 없었다. 그런데 제왕파가 다른 폭력배들에게 넘어가고 털보파라는 신흥 폭력배 조직이 탄생되면서 두 폭력조직의 지역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영도파의 폭력배 조직원들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털보파의 폭력배들을 공격한 것이다.
시장 골목을 벗어난 대로변에는 룸살롱과 카페, 그리고 나이트클럽 등 다양한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초저녁인데도 세븐 클럽이라는 간판이 달린 나이트클럽의 입구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단장되어 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클럽 홀 안에는 적은 손님들이 있었다. 조명등을 받아 번쩍거리는 제복을 걸친 남자종업원과 여자종업원들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남자 종업원 한명이 위스키와 유리잔, 그리고 안주가 담긴 쟁반을 들고 홀 옆의 붉은 카펫이 깔린 통로를 걸어간다. 통로의 좌우로는 작은 룸으로 들어가는 문들이 굳게 닫혀있다. 통로 끝은 좌우의 또 다른 통로로 이어져 있다. 우측 통로로 접어든 남자종업원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와 부딪칠 것 같아 주춤거렸다. 남자는 세븐 클럽의 지배인이면서 영도파의 행동대장 돌주먹이었다.
“뭐꼬? 어디 가져가노?”
“사장님한테요.”
“됐다. 가져가지 말거래.”
“왜요? 형님!”
“애리, 그 가스나하고 있다 아니가.”
남자 종업원은 오던 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지배인은 통로 끝의 룸을 힐끗 쳐다보고 남자 종업원의 뒤를 따라 갔다. 통로 끝의 핑크색 샹들리에가 켜진 룸의 한쪽 벽에는 커튼이 드리워져있고 소파가 놓여있었다. 양복을 걸친 영도파의 보스인 일명 백구두 전석도가 소파에서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를 너풀거리며 여자는 앳되어 보이는 미모를 지녔다. 날씬한 몸매가 들어나게 착 달라붙은 원피스를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눈웃음을 쳤다.
“아 이! 사장님. 영업시간 다 됐잖아요.”
“와! 괘안타! 애리! 니, 참 얄궂게 깔쌈하다. 니도, 내 안 존나?”
“그래도 여기서는.......!”
“괘안타 안켔나. 니 함 안아보자. 내 마누라 하믄 뭐든지 해주꼬마.”
전석도는 여자를 밀어 소파위에 눕혔다. 그의 손길이 여자의 원피스 속을 더듬었다. 원피스가 걷어 올려지고 뽀얀 허벅지가 들어났다. 허벅지 속을 더듬던 전석도의 손이 여자의 원피스 앞가슴에 있는 지퍼를 잡아당겨 끌어내렸다. 원피스 앞자락이 벌어지고 연분홍의 브래지어가 들어났다. 흥분해 있는 전석도는 다급하게 브래지어를 잡아 당겨 벗기려했다. 눈을 흘기며 올려다 본 여자가 호크를 풀기 쉽게 등을 들어 올렸다.
“내일, 전쟁하러 간다면서요.”
“머, 니를 안으믄 힘이 더 난다 아니가.”
브래지어가 벗겨지고 탐스런 젖가슴이 들어났다. 젖가슴에 머리를 묻은 전석도가 젖꼭지를 입속으로 빨아 당겼다. 짜릿함을 느낀 여자는 전석도의 머리를 끌어안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여자는 쾌감에 젖기보다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녀는 나이트클럽의 여자 종업원으로 변신한 이진아였다.-------
“협조를 잘하면 빨리 끝낼 것이다.”
“오민국 차장을 만나게 해주시오.”
“이곳에 들어오면 직위도 직책도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니오?”
“강민우! 당신 JRS 멤버이지?”
“난 그런 거 모르오.”
“처음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홍 실장이 김창기에게 눈짓을 했다. 김창기가 욕조 옆에 놓인 각목을 집어 들고 강민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느닷없이 강민우의 넓적다리를 내리쳤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강민우가 홍 실장을 노려보았다. 홍실장이 군화발로 강민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어서 떡메를 치듯이 김창기가 각목을 휘둘러 강민우의 가슴을 가격했다.
“으 윽~! 너희 놈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당신, 이미연을 만났지?”
“이미연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이진아를 데리고 있었지?”
“마, 말할 수 없다. 오 차장을 만나게 해주면 말하겠다.”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말해!”
홍실장이 강민우의 뺨을 후려쳤다. 이어서 김창기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강민우의 정수리와 어깨를 각목으로 내리쳤다. 강민우의 머리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 내렸다. 홍 실장이 강민우의 턱을 쳐들고 내려다보았다.
“당신, 혹시 위장 간첩 아냐?”
“하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홍 실장을 바라보는 강민우가 조소를 흘렸다. 그는 더 이상 그들과 대화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홍 실장은 강민우의 태도를 보고 스스로 분노하였다. 홍 실장의 고문을 견뎌내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아서 홍 실장이 강민우의 가슴과 무릎을 군화발로 짓이겼다.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여기서 걸어 나갈 생각이 없냐? 엉?”
“윽.........!”
강민우가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묶인 채 옆으로 쓰러졌다. 분이 안 풀린 듯 홍 실장은 허리에ㅐ 손을 짚고 거만한 자세로 버티고 서서 내려다보았다. 김창기의 손에 쥔 각목이 사정없이 강민우의 몸을 내리쳤다. 김창기는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강민우를 두들겨 팼다. 빨래판처럼 두들겨 맞은 강민우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만해라. 그러다가 뒤지것다. 매질도 쉬엄쉬엄 해야지 안 그럼 송장 치른다. 우선 정신 좀 챙기게 물 좀 먹여봐라.”
구경하듯이 내려다보고 있던 홍 실장이 책상에 걸터앉았다. 김창기가 강민우를 일으켜 앉히고는 목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물주전자를 들어서 강제로 물을 먹였다. 정신을 잃었던 강민우가 사래가 들려 온몸을 흔들며 격하게 기침을 했다. 다시 김창기의 손에 들려진 각목이 강민우의 가슴을 강타했다. 상체를 구부린 강민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 아! 헉~!”
“말해 봐! 최진경, 아니 이진아를 어떻게 데리고 있었지? 이진아가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니. 니네들이 알아봐........ 너희 놈들.......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래도 이 새끼가!”
홍실장과 김창기가 강민우에게 달려들어 의자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강민우의 무릎을 꿇게 한 다음 팔을 무릎 밖에 두고 무릎과 팔 사이에 각목을 끼웠다. 두 개의 책상 사이에 각목으로 매달리게 한 뒤 강민우의 코에 물을 계속 들이부었다. 강민우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각목이 몸을 파고들었고 물은 폐로 넘어 갔다.
“크 악~! 이, 이놈들아........”
온 몸을 흔들며 격하게 기침을 한 강민우가 사지를 축 늘어트리고 기절을 했다. 거만하게 서 있든 홍 실장이 고갯짓을 하며 강민우 앞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김창기가 각목에 끼어 매달린 강민우를 끌어내려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양동이를 들어 욕조에 있는 물을 가득 담아서 강민우에게 끼얹었다.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강민우가 물동이 세례를 받자 머리를 흔들며 허우적거렸다.
“푸 허~!”
“네가 아는 데로만 말해! 버텨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잖아.”
아무래도 물이 코로 들어간 듯했다. 몇 번이고 자지러질 듯이 기침을 하던 강민우는 거칠고 지친 숨을 내쉬며 침을 흘렸다.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서 고개를 든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홍 실장을 노려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내쉰 홍 실장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강민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두 발짝 정도 거리를 둔 위치에서 상체를 숙여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라니까. 이러면 서로 힘들어 지잖아. 혹시 그 여자를 데리고 잤냐?”
“더러운 놈들~!”
노려보던 강민우가 홍 실장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 치민 홍 실장이 발길질을 날리자 강민우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얼굴이 벌개 진 홍실장이 무자비하게 강민우를 짓밟았다. 강민우는 숨넘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분노에 찬 얼굴로 씩씩거리는 홍 실장은 김창기가 두 손으로 담배를 내민 담배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김창기가 내민 라이터 불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을 깊게 빨아 코로 뿜어냈다.
“에이 씨팔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다시 의자에 앉은 홍 실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는 담배를 낀 손가락을 흔들어 김창기에게 강민우를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그의 명령에 김창기가 의자와 함께 강민우를 일으켰다. 강민우는 부어서 거의 떠지지 않는 눈으로 고개를 힘겹게 까딱이면서도 중년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죽여 버릴 거다.’를 연발했다.
그때 유리창 너머에서 취조 과정을 살펴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수사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상운이었다. 다른 밀실에서 좌익운동권 학생을 심문하다가 지쳐 나왔다가 비명소리를 들은 것이다. 무심코 취조 관찰을 하는 방문을 열어서 들여다보고 나가려다가 다시 유리창 너머의 밀실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피로 범벅이 되어 고문을 받는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눈에 익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닌 강민우임을 알고 그는 깜짝 놀랐다. 한상운은 놀랍기도 하고 어찌해서 강민우가 끌려와 고문을 당하는지 의문이 앞섰다. 무엇보다도 강민우를 구출해 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안기부 별관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다.
방이동 NTIS 종합상황실. 전산요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부분 헤드셋을 쓰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요원, 서류철을 들고 책상사이를 빠져 바쁘게 걸어가는 요원, 커피 잔을 들고 여유롭게 귓속말을 주고받는 요원들, 각양각색의 요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와 통화중인 유서연은 짜증이 났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재혼한 남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어머니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돈이 필요하면 말하지.”
“너도 천신님께 돈을 헌납해. 그리고 건강식품이니 직원들에게 팔아 줬으면 좋겠어.”
“무슨 물건을 팔아달라는 말이야. 그거 다단계 판매, 사기야, 사기. 왜 그런 일을 해.”
“사기라니? 너 그런 말 하면 천벌 받는다. 이건 천신님에게 공덕을 쌓는 일이야.”
“공덕은 무슨 공덕! 엄마 미친 거 아냐?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바쁘니까, 전화 끊어.”
발끈 화를 낸 유서연은 집어던지듯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송나희가 다가와서 유서연의 등을 툭 쳤다.
“무슨 일인데 사무실에서 언성을 높이니?”
“글쎄, 울 엄마가 정신이 어떻게 됐나봐. 이상한 말을 하잖아.”
유서연은 헤드셋을 집어 들면서 퉁명스럽게 내 뱉었다. 그때 유서연의 책상위에 놓인 무선전화기에서 벨이 울렸다. 헤드셋을 쓰려던 유서연이 재빨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가 다시 전화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대뜸 팩 쏘아 붙였다.
“아! 왜 자꾸 전화 해. 전화하지 말라니까.”
“차장님 비서실인데요.”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아니기에 유서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서실이라는 말에 유서연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네. 상황실 유서연입니다.”
“차장님한테 긴급전화가 왔는데, 거기 계시지 않나요?”
“아! 잠시 만요.”
전화기를 책상위에 내려놓고 일어선 유서연이 두리번거리며 송나희에게 물었다.
“차장님 여기 오셨어요?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왜?”
“차장님한테 긴급전화가 왔다고 하는데........”
송나희도 돌아서서 상황실 안을 살펴보았다. 때마침 상황실 안으로 들어서는 오민국 차장의 모습을 발견했다. 송나희가 책상 위에 놓인 무선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 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 들어선 오민국 차장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상황실 안을 살피고 있었다. 상황실 안에서는 각자 모니터 앞에서 근무에 열중하는 상황실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황실을 점검하고 국제테러 문제로 말썽이 되고 있는 리비아 사태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려고 외무부에 다녀 올 계획이다. 송나희가 오 차장에게 다가왔다.
“국장님! 전화 왔는데요.”
“어디서........?”
“모르겠어요. 비서실에서 긴급한 전화라고 해요.”
송나희가 오 차장에게 무선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의아스런 표정으로 오 차장이 눈동자를 껌벅이면서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 오민국입니다.”
“저, 한상운입니다.”
“오! 무슨 일이야?”
오 차장도 한상운이 JRS 멤버인 것을 알고 있었다. 광주에서 근무하던 한상운이 남산으로 발령받으면서 오 차장에게 인사차 들렸었다.
“강민우 요원이 남산 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강민우가! 무슨 일인지 알아봤나?”
“아뇨! 감찰실 요원에게 심하게 고문을 당하고 있기에 너무나 경황이 없어서.”
“알았어. 내가 갈게.”
오 차장의 옆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 있던 송나희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오 차장은 강민우가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GIS의 어떤 음모로 강민우가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전산상황실을 나온 오 차장은 자신의 국장실로 가서 전화기를 집어 들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교환원에게 청와대 비서실장을 연결해 달라고 하면서 돌아섰다. 그때 송나희가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래도 강민우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돌아서 있는 오 차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네. 우리 멤버요원이 남산 별관에 체포 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보려는데 전화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 네! 감사합니다.”
오 차장은 JRS 멤버인 대통령 비서실장의 도움을 요청하는 중이었다. 간략하게 급히 통화를 끝낸 오 차장이 돌아서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집어 들고 걸치던 오 차장이 국장실에 들어와 있는 송나희를 발견했다.
“왜.......!?”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외투를 걸치고 망설이던 오민국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차장이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차를 대기시키라고 주문을 하였다. 송나희가 국장실 문을 열고 오 차장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따라서 나섰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가서 섰다. 멈추어선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산 안기부 청사의 정보국장실에서 오민국 차장은 차문기 국장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오 차장의 한 발 뒤에는 송나희가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하고 서 있고, 차 국장의 옆에는 감찰실의 홍 실장이 경직된 자세로 서 있었다. 차 국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오 차장의 시선을 피했다.
“정보국 소관의 사건을 다루는 중이라서.......”
“무슨 일인지 몰라도 NTIS 소속 요원이니 나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상부지시라서 저도 곤란합니다.”
“상부지시라고.......!”
오 차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차문기 국장의 명패가 붙은 책상위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버튼을 눌러 청와대 비서실장을 연결해달라고 했다. 잠시 기다리던 오 차장이 깍듯한 말투로 통화를 하더니 차문기 국장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다. 전화기를 받아 통화를 한 차 국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차 국장이 홍 실장을 바라봤다.
“강민우 요원을 풀어주라는 청와대 지시야.”
“........네!”
홍 실장이 맥 빠진 표정으로 주춤하다가 국장실을 나갔다. 겸연쩍은 차문기 국장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차를 가져다 달라고 지시했다. 조금은 불쾌한 표정인 차 국장이 오 차장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상부의 지시라 저도 어쩔 수 없이. 차라도 한 잔 하면서 기다리시죠.”
차 국장이 소파를 가리키면서 오 차장에게 앉기를 권했다. 차 국장을 마주하고 오 차장과 송나희가 나란히 앉았다. 국장실 문이 열리고 여자 요원이 김이 서리는 찻잔을 들고 들어와 탁자위에 놓고 나갔다. 차 국장은 공연히 앉은 자리가 불편한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한잔 하시죠.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이 각각 장기에 대하여 생리적으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 소화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기에 요즘 오미자차를 마시는 중이죠. 들어 보십쇼.”
“.........”
오 차장은 고개만 조금 끄덕일 뿐 차를 마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 국장 못지않게 오 차장도 불쾌했다. 적어도 체포하려는 소속 요원의 책임자에게 알리는 것이 통속적인 관례였다. 차 국장 혼자서 오미자차를 훌쩍거리고 마셨다. 보이지 않는 암투 속에 침묵이 흘러갔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국장실 문이 열리고 홍 실장이 강민우를 데리고 들어왔다.
얼굴에 상처와 멍투성인 강민우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초췌한 몰골에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피가 묻어 흐트러진 복장은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병사 같았다. 국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송나희는 발딱 일어서 강민우를 바라봤다. 기어코 오 차장은 찻잔에 손도 대지 않고 일어섰다.
강민우를 바라보는 송나희의 눈동자에는 습기가 배어 나왔다. 말없이 다가간 송나희는 강민우를 부축했다. 홍 실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나희가 민우를 부축하여 국장실을 나섰다. 뒤이어 오 차장도 국장실을 나왔다. 차 국장과 홍 실장은 멀거니 서서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부산 자갈치 시장의 변두리 남포동의 번화가는 언제나 북적거리는 인파들로 가득하다. 특히 어둠이 내려앉은 어물시장 골목은 더욱 복잡하게 흥청거린다. 시장 가운데는 줄지어 카바이트 등불을 밝힌 리어카와 좌판 장사꾼들의 목청이 높아간다. 시장 골목으로 들어선 험상궂은 사내들이 식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내들 중 한 명이 외친다.
“아주매! 쐬주하고 삼겹살 주소.”
“예. 쬐메만 기다리소.”
거들먹거리는 사내들은 식당 한가운데 있는 연탄불이 놓인 원형 식탁을 둘러싸고 앉았다. 식당 안에는 여기저기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일하는 아줌마를 부르는 손님들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렸다. 식당 아줌마가 돼지고기와 석쇠를 들고 와서 연탄 불 위에 올려놓았다. 사내들 옆에는 두 남자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고 있었다. 돼지고기를 굽기 시작한 사내들은 성급히 소주를 따라 마시기 시작하면서 이따금 옆자리에 있는 남자들을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소주 한잔을 들이 킨 사내들 중에 머리를 빡빡 깍은 사내와 옆자리에 있는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머리를 빡빡 깍은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옆자리의 사내에게 한마디 했다.
“와 보노? 와 눈깔을 꼰아 보노. 디질래.”
“머라카노!? 믄디 자식! 많이 처 묵고 가라.”
“요 봐라! 알라들이 쌔게 나오네.”
“도란나! 쳐 맞을래?”
사내들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남자 두 명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드잡이를 하던 남자 두 명과 사내 들이 음식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밖으로 나가서 주먹과 발길질을 하였다. 겁에 질린 음식점안의 손님들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음식점 아주머니는 카운터의 전화기로 가서 경찰서로 다이얼을 돌린다.
“어메! 또 싸움질들이 고마.”
사내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남자 한 명은 피투성이가 되어 시장바닥에 나뒹굴었다. 다른 남자도 역시 여러 명의 사내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얼굴에 멍이 들고 입술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는 몰려들어 구경을 하는 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시장 골목을 달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남자 한 명을 쓰러트린 사내들이 도망가는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쓰러진 남자를 둘러싸고 있는 구경꾼 중에 누군가 혀를 찼다.
“쯔 쯧~! 무섭데이.......”
사내들이 의도적으로 시비를 건 것이다. 남포동 일대에는 두 개의 폭력조직이 지역다툼을 하고 있었다. 원래 남포동의 토박이 폭력조직인 제왕파와 영도파 끼리는 서로의 지역을 인정하고 큰 다툼이 없었다. 그런데 제왕파가 다른 폭력배들에게 넘어가고 털보파라는 신흥 폭력배 조직이 탄생되면서 두 폭력조직의 지역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영도파의 폭력배 조직원들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털보파의 폭력배들을 공격한 것이다.
시장 골목을 벗어난 대로변에는 룸살롱과 카페, 그리고 나이트클럽 등 다양한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초저녁인데도 세븐 클럽이라는 간판이 달린 나이트클럽의 입구에는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단장되어 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클럽 홀 안에는 적은 손님들이 있었다. 조명등을 받아 번쩍거리는 제복을 걸친 남자종업원과 여자종업원들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남자 종업원 한명이 위스키와 유리잔, 그리고 안주가 담긴 쟁반을 들고 홀 옆의 붉은 카펫이 깔린 통로를 걸어간다. 통로의 좌우로는 작은 룸으로 들어가는 문들이 굳게 닫혀있다. 통로 끝은 좌우의 또 다른 통로로 이어져 있다. 우측 통로로 접어든 남자종업원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와 부딪칠 것 같아 주춤거렸다. 남자는 세븐 클럽의 지배인이면서 영도파의 행동대장 돌주먹이었다.
“뭐꼬? 어디 가져가노?”
“사장님한테요.”
“됐다. 가져가지 말거래.”
“왜요? 형님!”
“애리, 그 가스나하고 있다 아니가.”
남자 종업원은 오던 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지배인은 통로 끝의 룸을 힐끗 쳐다보고 남자 종업원의 뒤를 따라 갔다. 통로 끝의 핑크색 샹들리에가 켜진 룸의 한쪽 벽에는 커튼이 드리워져있고 소파가 놓여있었다. 양복을 걸친 영도파의 보스인 일명 백구두 전석도가 소파에서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를 너풀거리며 여자는 앳되어 보이는 미모를 지녔다. 날씬한 몸매가 들어나게 착 달라붙은 원피스를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눈웃음을 쳤다.
“아 이! 사장님. 영업시간 다 됐잖아요.”
“와! 괘안타! 애리! 니, 참 얄궂게 깔쌈하다. 니도, 내 안 존나?”
“그래도 여기서는.......!”
“괘안타 안켔나. 니 함 안아보자. 내 마누라 하믄 뭐든지 해주꼬마.”
전석도는 여자를 밀어 소파위에 눕혔다. 그의 손길이 여자의 원피스 속을 더듬었다. 원피스가 걷어 올려지고 뽀얀 허벅지가 들어났다. 허벅지 속을 더듬던 전석도의 손이 여자의 원피스 앞가슴에 있는 지퍼를 잡아당겨 끌어내렸다. 원피스 앞자락이 벌어지고 연분홍의 브래지어가 들어났다. 흥분해 있는 전석도는 다급하게 브래지어를 잡아 당겨 벗기려했다. 눈을 흘기며 올려다 본 여자가 호크를 풀기 쉽게 등을 들어 올렸다.
“내일, 전쟁하러 간다면서요.”
“머, 니를 안으믄 힘이 더 난다 아니가.”
브래지어가 벗겨지고 탐스런 젖가슴이 들어났다. 젖가슴에 머리를 묻은 전석도가 젖꼭지를 입속으로 빨아 당겼다. 짜릿함을 느낀 여자는 전석도의 머리를 끌어안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여자는 쾌감에 젖기보다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녀는 나이트클럽의 여자 종업원으로 변신한 이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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