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삽입면허 -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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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45회 작성일 20-01-17 15:06본문
-4부-
“여보, 여보...... 그만 일어나야죠? 여보......”
밤새 기찬의 곁에서 떠날 수 없었던 지수는 다소의 불안감과 알 수 없는 희열이 교차된 묘한 표정으로 바쁘게 아침을 맞이한다.
“여보...... 출근준비 하라니까......”
“으응...... 으으으......”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게 몸을 일으킨 남편을 욕실로 밀어 넣고 잠시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어제의 일들이 차라리 꿈이라면 좋으련만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해 준 사내는 마주 보이는 저 문 뒤에서 아직도 단꿈에 빠져 있을 것이다.
간밤의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를 해 본다. 하루아침에 영위하던 모든 기반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무료하다 하리만치 굴곡 없이 살아 온 지난날들이었지만,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어 행복하다 여겨왔고, 그다지 부족한 것 없이 살아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절박함에 그렇게 이끌렸던 것일까? 위기의 가정을 그나마 건사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 본다. 일신의 안위라도 보장 받고 싶어 그 남자에게 매달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는 그 허망한 느낌은 무엇으로도 정리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누구보다도 정숙한 아내였고,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라고 자부해 왔었는데 지난 밤 나를 열락으로 몰아간 저 남자에게 매료되는 자신은 또 누구란 말인가?
욕실에서 나온 남편이 지수의 상념을 깨운다.
“여, 여보...... 그, 그 분은......”
“네, 아직 자는 모양이에요. 그냥 두고 당신이나 어서 출근 준비하세요. 식사는......”
“아, 아니야. 지금도 속이 울렁거려서...... 어쨌든 당신에게 면목이 없어서......”
“아니에요. 그럴수록 당신 밖에서 처신 잘 해야 돼요. 이 일이 그렇게 해서라도 잘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더 이상 당신이 나쁜 일에 개입하면...... 우리 가정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으음...... 그, 그래......”
아내의 속 모르는 소리에 사내가 면구스러워 할 즈음, 기찬도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고 부부는 기찬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어머! 소란스러워서 깨셨나 봐요.”
“아유, 이거...... 죄, 죄송합니다.”
“아! 하하...... 아니요. 이거 제가 늦잠을 잔 모양입니다. 음...... 아직 출근을 안 하셨군요?”
“네, 이제 막 준비하고 나가려던 참입니다. 저...... 서류문제는 그럼......”
사내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기찬의 대답을 기다리고, 기찬은 세면실로 들어서며 오전 중에 연락하겠다는 대꾸를 한다.
사내가 나간 뒤, 식탁을 사이에 두고 기찬과 지수가 마주앉아 있다.
“죄송해요. 어제 드시던 찬 그대로라서......”
“허허...... 간밤에 약속했잖아요? 남 대하듯이 하지 않겠다고...... 그래야 나도 누님을 지켜 드리는 보람이 있지.”
“네......”
아직도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불편한 듯 치맛단만 매만지는 지수를 가끔 바라보며 대강의 식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선다. 어제 들어설 때는 유심히 보지 못했던 자그마한 정원도 무척 단아하게 꾸며 두어 지수의 아기자기한 성격을 알게 해 준다.
“자, 그럼......”
지수의 손을 잡고 지긋이 힘을 실어 본다. 팔을 기찬에게 맡긴 채 새댁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지수는 스스로에게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안색이라도 숨기려는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지수를 뒤로 하고 기찬은 대문을 나선다.
이제 저 대문을 벗어나면 어젯밤 나를 열락으로 몰아갔던 사내는 떠나간다. 나를 자신의 여자라 칭했지만 나의 처신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남편은 부정과 연루되어 급전직하 보금자리마저 잃게 되고...... 그렇다면 회사에서의 입지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아직 어린 우리 딸은 어떻게 하고......
가끔 만나는 친구들도 젊은 애인 하나쯤은 액세서리 삼아 필요하다는 등 허풍을 쳐 대기도 한다지만 지금 지수의 입장은 벼랑 끝에 몰렸다는 위기감에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아니...... 보다 감정에 충실한 고백이라면 이 위기감으로 자신을 포장해서라도 저 사내를 붙잡으려는 자신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 잠깐만이요.”
대문을 나서려던 기찬은 지수의 다급한 목소리에 몸을 다시 들인다.
“으응? 왜......?”
“저...... 저는 이름도 모르잖아요.”
“아! 참...... 그랬던가? 전화기 이리 줘 봐.”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전화를 받아들고 기찬은 자신의 번호와 이름을 눌러 저장시키고 다시 내민다. 지수는 다시 확인을 하고는 그윽한 시선을 기찬에게 건넨다.
“기...... 찬...... 씨, 저에게 하신 약속은 꼭 지켜 주시는 거죠? 저와 우리 미림이는 무슨 경우라도 지켜 주신다는 거......”
“음...... 미림이?...... 허허...... 예쁜 이름이네, 그야 물론이지.”
“그리고...... 우리...... 비밀은 미림이나 남편이 알면 큰 일 나니까 혹시라도 조심하셔야 돼요.”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들어 가. 그나저나 택시를 타려면 어느 쪽으로 나가야 하나?”
“어머! 차...... 안 가지고 오셨나 봐요. 그럼 우선 제 차라도 타고 가시겠어요?”
“아냐. 오히려 불편해. 주차하기도 그렇고...... 그럼...... 큰 길까지 태워 주든지......”
“네, 그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차 열쇠를 가지러 가는지 현관으로 다시 들어가는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찬은 담배를 피워 문다. 아침의 청량한 공기에 작은 새들이 나무와 건물을 오가며 날아다닌다.
“아, 형님...... 저, 기찬이에요.”
“으응...... 그래, 무슨 일이야? 놀러 오지 않고......”
“네, 볼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가는 중입니다. 다른 일이 아니고...... 누가 나한테 집을 한 채 관리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찬은 애경이의 남편인 부동산 사무실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전세를 얻은 아파트에 대해 다시 전세를 놓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왔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 줄 수 없는 일이니 아는 이의 부탁이라고 둘러대고 있는 것이다.
“으응...... 그래, 그럼 알았다.”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다 보니 택시는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기찬은 전화를 끊은 뒤 어디론가 다시 다이얼을 누른다.
“음...... 김비서님? 접니다.”
“아! 네, 네...... 서류문제라면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아! 그것은 나중에 잠깐만 나가도 되는 일이고...... 잠깐 밖으로 나와서 전화 받을 수 있어요?”
“네, 잠시만......”
“......”
“네, 됐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 사장과 통정을 하고 있다는 파출부 이름은 뭐요? 이번 피해자 송미라의 올케 된다는......”
“네...... 최...... 강희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았소. 내가 지금 들어갈 건데...... 사장은 자리에 있습니까?”
“네, 네......”
회사 앞에 도착한 기찬은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본관 건물로 들어선다. 생각을 가다듬는지 일부러 계단을 통해 천천히 올라가던 기찬의 입가 주름이 올라가는 것이 결국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 오셨습니까? 저...... 뭐라고 소개를 해 드려야 할지......”
“네, 사실 대로 말씀하세요. 기관에서 나왔다고...... 사장도 조사 받을 것은 조사 받아야지.”
규모는 작더라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정도라면 제법 나름의 선들이 있을 텐데도 기찬은 무슨 생각에선지 자신의 위장된 신분을 그대로 써먹으려는 모양이다.
“아, 아...... 네...... 알았습니다.”
잠시 후 사장실로 안내되어 들어 간 기찬은 사장에게 신분증을 대충 보여주고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영문을 모르는 사장도 자리에서 응접세트 앞으로 옮겨 안고, 여직원이 차를 두고 나간 뒤 기찬으로부터 홍두깨 같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저......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요즘은 워낙 금연 건물들이 많아서......”
“네, 그러시죠. 헌데 기관에서 저희 회사에는 무슨 일로...... 저희는 세금도......”
기찬은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고 사장을 바라본다.
“그런 일로 온 게 아닙니다. 휴가 중이던 군인 하나가 사고를 쳐서 그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 이 회사 직원들과 연관이 된 사건이 있어서 추가조사 중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송미라양을 알고 계십니까?”
“송...... 누구라고요?”
사장은 미간을 찡그려 가며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재차 질문을 해 온다.
“송미라...... 사장님이 부하 직원을 시켜 강간을 하게 한 아가씨 말입니다. 파출부 최강희씨와의 통정사실을 시누이 송미라에게 들키자 그 입막음을 시키기 위해 강간교사를 한 거 아닙니까?”
기찬에게서 파출부 최강희의 이름이 나오자 사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내 기색을 회복하고 침착하게 테이블 앞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아, 아니...... 가, 강간교사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 저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어요. 단지 강희가 말하길 자기 시누이가 우리사이를 수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기에 단순히 알아보라고만......”
“발뺌해야 소용없어요. 이미 당신 부하직원들에게 관련 증언도 확보를 해 둔 상태에 있습니다. 저 문밖에 서있을 김비서라는 자와 총무부 기획실장이라는 자에게 윤간을 당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그 아가씨 강간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는 사실이에요. 참 나...... 강간이라니요? 제가 상처하고 혼자 살다보니...... 어찌 눈이 뒤집혀 체면 없이 우리 파출부 아줌마에게 못할 짓을 하고, 그런 저런 관계를 맺고는 있지만, 강간교사라니요? 이...... 이 자식들 대면을 하겠습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이러지 마시고 이 자식들 좀 불러들이게 해 주세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풀어 가 봅시다. 파출부 최강희씨는 언제부터 그 댁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게...... 지금 아마 육 개월 쯤 되었을 겁니다.”
“그럼 최초로 통정한 것은 언제요?”
“저...... 그게......”
“언제냐니까......”
“그게...... 오고 나서 한 일 주일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혼자 사는 여자로만 알았다니까요. 강희도 별 반발이 없이 응해왔고, 저는 그래서 당시에는 그 여자와 재혼을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니까요.”
“그래요? 좋습니다. 사장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거야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제가 그 여자 남편도 아닌 바에야......”
기찬은 은근히 사장을 혐의에서 풀어주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면서 말을 이어간다. 간통이라는 것은 부부가 아닌 제 삼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니 사장은 이로써 한숨을 돌리는 표정이다.
“어쨌든 송미라양 사건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니까 몇 가지 더 물어봅시다. 그렇다면 송미라양에게 직원을 붙인 것이 벌써 오래 전 일이고...... 그렇다면 그 무렵부터는 파출부 최강희가 유부녀라는 것을 아셨다는 얘기인데 그 뒤로도 그냥 데리고 계시니...... 이런 규모의 회사를 이끌어 가시는 명망 있는 분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으실 그런 행동은 도의적으로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저...... 그거야 자유롭게 성인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인데...... 좀 모른 척 해 주십시오. 제가 섭섭지 않게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거 좋습니다. 역시 사업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시원, 시원하십니다. 그럼 이 정도만 합시다. 참, 여담입니다만, 궁금해서 그러는데 하나 더 물어 봅시다. 사장님 연세도 지긋해 보이시는데 체력은 문제없으신지...... 그...... 최강희라는 여자하고는 보통 얼마 만에 한 번씩 관계를 맺습니까?”
자신의 제안을 기찬이 받아들이는 인상을 보이고 사설을 늘어놓자 사장도 긴장을 풀어버리는 모양이다.
“아! 하하하...... 그거요?...... 아 이거 참...... 마음 같아선 매일이라도 옆구리에 끼고 살고 싶지만,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기껏 해야 일주일에 한 번 꼴입니다. 하하하...... 뭐, 남자끼리 얘기지만...... 그렇다고 제가 볼 장 다 본 그 여자를 데리고 살 것도 아니고...... 조만간 정리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저, 정말 그 아가씨 일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건 그 놈들이 제 멋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헛소리들을 해 댄 모양인데...... 더 족치면 바른 소리를 할 겁니다. 이 자식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음...... 됐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고......”
기찬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지 주섬주섬 담배며 소지품들을 챙기고 있었다.
“아...... 벌써 가시게요? 오, 오해는 풀리셨는지......”
“허허...... 네, 물론입니다. 추가로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부하직원들이 그 아가씨를 강간했다는 것은 제 거짓말이었습니다. 공연히 애꿎은 직원들 나무라지 마십시오.”
“네?...... 아, 아니 왜 그런 거짓말을......”
“아! 네...... 그 군인을 체포해서 심문하다 보니까 그 아가씨가 변심을 해서 홧김에 그랬다는데...... 그 아가씨가 도대체 협조를 않고 횡설수설해 대서...... 배경사실을 알기 위해 그 아가씨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조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아가씨와 한 집에 사는 올케 되는 여자가 그 댁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밝혀진데다가, 사장님 회사의 직원들이 그 아가씨를 접촉했다는 흔적이 발견되다 보니까...... 사장님도 부득이해서 조사 대상에...... 그래서 유도심문을 한 번 해 봤습니다. 하하하......”
“아! 그랬군요? 저......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얼른 준비를 시킬 테니까......”
“아! 그러실까요?”
잠시 후, 김비서를 통해 봉투가 준비되고 사장은 기찬에게 더 이상 잡음이 없도록 신신당부를 한다.
“음...... 어쨌든, 그...... 최강희씨를 한 번 봐야 하겠는데...... 지금 사장님 댁으로 가면 볼 수 있을까요?”
“네, 그야 그렇지만......”
“허허...... 뭐, 사장님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송미라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서니까...... 다만, 이게 보기보다 가볍다면 그것은 좀......”
기찬은 봉투를 한 번 흔든 뒤 품 안에 갈무리하며 사장에게 윙크를 보낸다.
“아, 아...... 그, 그러시면 일간 한 번 더 연락을 주십시오. 제가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하면서......”
“음...... 그러지요. 그러면 여기 비서님에게 사장님 댁까지 운전을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아! 네, 그러십시오. 자...... 김비서가 어서 모시고 다녀 와.”
“자, 그러면 일간 다시 한 번 뵙겠습니다. 수고하시고......”
“네, 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사장은 사장대로 한시름 덜었다는 입장이지만, 앞으로 한 번 더 찾아오겠다는 기찬의 말 때문에 입맛이 썩 개운하지만은 않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저...... 저는 괘, 괜찮을까요?”
“으응? 아! 당신이나 기획실장은 별 탈 없을 거요. 내가 사장에게 꾸며댔다고 말했으니까...... 혹시 사장이 묻더라도 당신은 무조건 그런 사실 없다고만 하면 될 거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기찬은 김비서를 데리고 근처의 법무사 사무실에 들러 김비서의 집과 토지에 대한 이전을 접수시키고 곧바로 사장의 집으로 향한다. 이제 내일이면 그 집은 기찬의 소유로 등재가 될 것이다.
유독 김비서에게만 피해가 증폭되는 것 같아 기찬은 내심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미라를 만남으로 해서 시작된 의도하지 않았던 이 여정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는 기찬도 전혀 예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수의 가는 허리와 보드랍던 엉덩이가 눈에 아른거리고 그 향기가 머릿속을 맴 돈다. 김비서로서는 꿈에라도 짐작하지 못 할 일일 테니, 이제 아내를 공유하는 남자를 차로 모시고 사장의 집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봉투를 열어 액수를 확인하는 기찬의 입가가 슬그머니 벌어지고, 차는 어느덧 천호동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저...... 내리시지요. 다 왔습니다.”
“으음...... 자, 안내하세요.”
사장의 집 앞, 경비 카메라 밑에 얼굴을 들이밀고 인터폰을 누른다.
“누구세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미라의 올케 최강희일 것이다.
“네, 저...... 김비서입니다. 사장님 지시로 손님을 모시고 왔는데......”
“아! 네...... 전화연락 받았어요. 잠시만이요.”
곧 기계음과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김비서가 기찬을 바라본다.
“자...... 그럼 수고했습니다. 조사과정을 보여 드릴 순 없는 일이니까, 이만 돌아가시고...... 김비서, 당신 일은 내가 각별히 신경을 쓸 테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다만 보안에만 유념하시고...... 내가 다시 연락드리지요.”
“네, 네...... 제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김비서를 보내고 대문을 들어서니 현관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호! 이런...... 왜 이리 예쁜 아줌마들이 많은 거야? 그래서 얼굴값을 했다는 건가?”
혼자 중얼거리며 걸음을 현관으로 향하자 여자가 다급하게 인사를 해 온다.
“어, 어서 오세요. 저희 아가씨에게 혹시 무슨 사고라도 있는 거예요? 요즘 아무 내색도 없었는데......”
“아! 네......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네, 네......”
거실에 앉아 기다리니 차를 내 온다. 옷차림으로 보아 주방일이나 청소 따위를 하는 파출부의 복장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하늘거리는 물빛 원피스에 코를 자극하는 고운 향기가 단지 음식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도 적절치 않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화간이라...... 모든 일이...... 여기...... 이 여자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인가?”
아침, 저녁으로 집을 바꿔가며 두 남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 즉, 실직한 남편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불안감에서 확실한 보장을 얻을 수 있는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사실 드물 것이다. 이 여자를 탓할 일만은 아닐 것이나 지금 기찬의 머릿속에는 앞으로도 굴러들어 올 재물과 함께 최강희의 벗은 몸이 상상되고 있으니 그것은 기찬으로서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 드시죠.”
“네......”
"......"
“최강희씨?”
“네, 말씀하세요. 우리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사장에게도 그리 말을 해 두었으니, 미리 전해 들었다고 하더라도 꿈에도 자신의 일로 찾아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여기서 월급을 얼마나 받으시나요?”
“네?...... 월급...... 이요?”
“네, 한 달에 수입이 얼마나 되십니까?”
“아! 저희 남편이 현재 실직 중에 있어서 다른 수입은 없어요. 우리아가씨도 학생 신분인데다가...... 제가 한 달에 백 오십만 원 정도 받는 것이 우리 수입의 전부예요. 사장님이 알아서 조금 더 주실 때도 있긴 하지만요.”
강희는 기찬이 묻는 것을 조사의 일부로 생각했는지 스스럼없이 대꾸를 하고, 기찬은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녹음기능을 선택하고 테이블 앞에 올려놓는다.
“제가 조사할 것이 있어서 사장님과 대화를 한 내용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전화기에서는 사장이 송미라에 대한 기찬의 심문에 응하며 자신과의 통정사실 따위를 낱낱이 토설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그것을 들은 강희는 대번에 낯빛이 붉어지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기찬은 사장의 고백 이후 휴대폰을 조작해 소리를 꺼 버리고 다시 한 옆에 내려놓는다. 그의 패턴으로 보아 아마 지금도 녹음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자...... 들었다시피 당신으로 인해서 시누이가 못된 놈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어.”
“저, 저는......”
“아! 물론 당신이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최초에 사장이 당신에게 접근했을 때, 이미 당신은 당신의 안위를 생각해서 이중생활을 선택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일이지. 물론 그에 따른 모든 책임도 당신이 스스로 져야 할 일이고...... 당신 남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히려 자기 대신에 가정을 위해 수고하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을 것 아닌가?”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자...... 잘 들어. 나는 당신을 탓하자고 온 게 아니야.”
“네, 네?......”
“내게 협조를 하면 최강희 당신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도록 해 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당신 남편에게 알려서 사장은 물론 당신도 신세 망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사장의 생각을 녹음으로 들었는데도, 그럴 경우 사장이 당신을 거둬 줄 것이라는 미련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 네, 네...... 제가 어떻게 하면......”
“음...... 나는 지금 사장을 족치기 위해서 암중에 수사를 하고 있는 중이야. 앞으로 내가 수시로 지시를 할 테니까 당신은 그 때마다 사장이 눈치 차리지 못하도록 내 지시에 따르면 되고......”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강희는 살 길이라도 찾은 듯 크게 고갯짓을 하며 서둘러 기찬의 말에 응답을 한다.
“그리고 사장이 묻거든 별 이야기 없이 시누이에 대한 것만 몇 가지 묻고 갔다고 하면 될 거야.”
“네, 네......”
“당신 전화번호 말해 봐.”
막상 기찬은 사장을 압박하기 위해 다른 카드를 더 마련할 필요도 없는 입장이었으나, 강희에게 자신이 수사관처럼 보이기 위해서 불여튼튼 당부를 해 두는 것뿐이었다. 정작 강희를 만나고 보니 지수에 필적할 만한 미모의 여자여서 자연스레 음심이 발동하고, 이 기회를 통해서 두고두고 자신의 여자로 부리기 위한 포석을 하는 것이었다.
“당신...... 첩보영화 본 적 없나?”
“네, 네?......”
강희는 기찬의 질문에 아연 긴장을 한다. 어떤 어려운 과제를 주려고 저렇게 운을 띄우는지 내심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어려운 일이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푸훗...... 하하하......”
느닷없이 웃어 대는 기찬에게 당황한 강희는 움찔거리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매만진다.
“하하...... 그런 게 아니라...... 영화에 보면 많이 나오잖아? 첩보원과 그 정보원이 서로 신뢰를 쌓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장면 말이야.”
“네, 네?......”
기찬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된 강희는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모르지만, 궁지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내에게 잘 보여 상황을 모면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사장의 속셈을 알게 된 터, 사장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었고, 그 조차도 이 사내에게 언제 공격을 받아 몰락할지 모를 일이니 알아서 살 길을 만들어 가야 했다.
“자...... 들어가지?”
“네......”
앞서 사장의 안방으로 들어가는 기찬의 뒤를 따라 강희는 군 말없이 뒤를 따른다.
방 안에도 작은 샤워 시설이 딸려 있어 강희는 그리 들어서고 기찬은 장을 열어 본다. 역시 짐작대로 여자의 옷이 제법 걸려 있어 실소를 이끌어 낸다. 물론 처음에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점차 자신과는 다른 경제적 환경을 동경하고 그 시류에 몸을 맡김으로써 현실을 극복하기 보다는 차원 다른 곳에서 몽혼지경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 끝을 짐작한다면, 극단적 상황이 연출될 경우 얼마든지 기존의 연고를 끊어 버리고 준비해 둔 자신의 새 터전으로 옮겨 가 버리겠다는 은밀한 배수진일 수도 있으니, 경제적 원인의 간통이란 성적 유희를 즐기기 위한 간통보다 이미 막바지에 몰린 배우자에게는 더 한 고통일 수 있을 것이고, 회복불능의 치명적 파괴력을 갖고 있는 가증스런 일일 것이다.
멀티섹스. 이즈음 기찬은 멀티섹스라는 단어를 조합해 본다. 우연한 일로 자신의 주변에 느닷없이 늘어나기 시작한 여자들과의 관계를 그리 표현해 보는 것일 게다. 그녀들 각각의 공간을 그대로 유지해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게 하되 자신과의 관계 외에는 서로가 알 수 없도록 일종의 점조직처럼 꾸며 보자는 나름의 원대한 계획이 싹트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미라와 강희는 시누이와 올케의 관계니 그 주는 감흥이 더욱 남다른 일이었다.
“저...... 씻으셔야죠?”
“으응, 그래......”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쭈뼛거리는 강희의 곁을 지나치자 강한 향기가 코에 스며든다. 잠시 후의 열락을 기대하며 욕실로 들어선다.
“으흡...... 흐응......”
강희의 가지런한 치아가 조명에 빛을 발한다. 그 고운 빛 치아 사이로 선명한 빛깔의 유혹이 기찬을 끌어들인다. 달콤한 타액이 서로의 향기를 품은 채 넘나들고 수유를 한 적이 없는 그녀의 가슴은 미라의 가슴 못지않은 탄력으로 이 시간 새 주인을 맞아 그 형태를 시험받고 있는 터였다.
“하윽......”
기찬은 한참의 애무 끝에 손을 뻗어 샘을 찾는다. 미라를 위해서라도 이미 세상인심에 닳고 닳아 버린 이 여자를 기존의 테두리에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행여 미라의 오빠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라면, 그런 오빠를 바라보아야 하는 미라에게도 적지 않은 상처로 남을 것이고, 왜인지 모르게 미라가 상처받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악......”
샘 속 깊이 더듬어 들어가는 여행자가 몹시 낯설었는지 강희는 가녀린 허리를 틀어 자극을 줄여 보려는 모양이다. 이 여자를 굴복시켜야 한다. 단지 사회적 제약 하나만으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돌발행동을 예방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니 이미 남편에 대한 마음이 떠나 버렸을지도 모를 이 여자를 자신에게 철저히 길들여야 할 것이다.
“하아아앙...... 여...... 보.....”
하지만 기찬의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강희는 기찬이 샘 속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무너져 버린다. 그간 나이 많은 사장에게서 익숙해졌다면 기찬의 단단하고 날렵한 체격에 이미 매료되었을 것이고, 급기야는 힘찬 기찬의 분신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가득 채우는 포만감에 물을 터뜨리고 만다.
“으흑...... 죄...... 송해요.”
“후욱...... 후욱...... 괜찮아......”
“하악...... 하악......”
“푸훗...... 귀여워...... 그런대로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후후......”
가쁜 호흡에 기찬의 율동을 받아내느라 잔뜩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만 보자면 정말 사랑스런 여인이다. 미간에 생긴 주름에 입을 맞춰 주고, 다시 마주친 시선을 따라 입술을 들이마신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기찬의 팔을 두른 채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숨을 고르는 강희의 모습이 담배 연기 사이로 드러난다.
“좋았어?”
“푸훗...... 네...... 저...... 정말 오래간만에 느꼈어요.”
가파른 고개를 함께 넘은 자들만의 동반의식이 강희의 긴장을 풀어주었는지, 제법 웃어가며 기찬의 말을 받아낸다.
“그래, 이제 앞으로 자주 사랑해 줄 테니까...... 그 대신 내 지시에 잘 따라야 돼. 잘만 하면 앞으로 한 몫 잡게 해 줄 수도 있지만, 나마저 배신하고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이 일은 물론 다른 사건까지 덤터기를 씌워서 아예 이 사회에서 회복할 수 없도록 매장시켜 버릴 거니까......”
“어머! 세상에...... 아, 알았어요.”
“하하...... 그리고 이 수사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수사를 하는 과정에 내가 어떤 식으로 강희 앞에 나타날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나를 마주쳐도 놀라거나 절대
“여보, 여보...... 그만 일어나야죠? 여보......”
밤새 기찬의 곁에서 떠날 수 없었던 지수는 다소의 불안감과 알 수 없는 희열이 교차된 묘한 표정으로 바쁘게 아침을 맞이한다.
“여보...... 출근준비 하라니까......”
“으응...... 으으으......”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게 몸을 일으킨 남편을 욕실로 밀어 넣고 잠시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어제의 일들이 차라리 꿈이라면 좋으련만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해 준 사내는 마주 보이는 저 문 뒤에서 아직도 단꿈에 빠져 있을 것이다.
간밤의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애써 자위를 해 본다. 하루아침에 영위하던 모든 기반을 잃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무료하다 하리만치 굴곡 없이 살아 온 지난날들이었지만,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어 행복하다 여겨왔고, 그다지 부족한 것 없이 살아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절박함에 그렇게 이끌렸던 것일까? 위기의 가정을 그나마 건사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 본다. 일신의 안위라도 보장 받고 싶어 그 남자에게 매달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는 그 허망한 느낌은 무엇으로도 정리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누구보다도 정숙한 아내였고,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라고 자부해 왔었는데 지난 밤 나를 열락으로 몰아간 저 남자에게 매료되는 자신은 또 누구란 말인가?
욕실에서 나온 남편이 지수의 상념을 깨운다.
“여, 여보...... 그, 그 분은......”
“네, 아직 자는 모양이에요. 그냥 두고 당신이나 어서 출근 준비하세요. 식사는......”
“아, 아니야. 지금도 속이 울렁거려서...... 어쨌든 당신에게 면목이 없어서......”
“아니에요. 그럴수록 당신 밖에서 처신 잘 해야 돼요. 이 일이 그렇게 해서라도 잘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더 이상 당신이 나쁜 일에 개입하면...... 우리 가정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으음...... 그, 그래......”
아내의 속 모르는 소리에 사내가 면구스러워 할 즈음, 기찬도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고 부부는 기찬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어머! 소란스러워서 깨셨나 봐요.”
“아유, 이거...... 죄, 죄송합니다.”
“아! 하하...... 아니요. 이거 제가 늦잠을 잔 모양입니다. 음...... 아직 출근을 안 하셨군요?”
“네, 이제 막 준비하고 나가려던 참입니다. 저...... 서류문제는 그럼......”
사내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기찬의 대답을 기다리고, 기찬은 세면실로 들어서며 오전 중에 연락하겠다는 대꾸를 한다.
사내가 나간 뒤, 식탁을 사이에 두고 기찬과 지수가 마주앉아 있다.
“죄송해요. 어제 드시던 찬 그대로라서......”
“허허...... 간밤에 약속했잖아요? 남 대하듯이 하지 않겠다고...... 그래야 나도 누님을 지켜 드리는 보람이 있지.”
“네......”
아직도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불편한 듯 치맛단만 매만지는 지수를 가끔 바라보며 대강의 식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선다. 어제 들어설 때는 유심히 보지 못했던 자그마한 정원도 무척 단아하게 꾸며 두어 지수의 아기자기한 성격을 알게 해 준다.
“자, 그럼......”
지수의 손을 잡고 지긋이 힘을 실어 본다. 팔을 기찬에게 맡긴 채 새댁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지수는 스스로에게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안색이라도 숨기려는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지수를 뒤로 하고 기찬은 대문을 나선다.
이제 저 대문을 벗어나면 어젯밤 나를 열락으로 몰아갔던 사내는 떠나간다. 나를 자신의 여자라 칭했지만 나의 처신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남편은 부정과 연루되어 급전직하 보금자리마저 잃게 되고...... 그렇다면 회사에서의 입지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아직 어린 우리 딸은 어떻게 하고......
가끔 만나는 친구들도 젊은 애인 하나쯤은 액세서리 삼아 필요하다는 등 허풍을 쳐 대기도 한다지만 지금 지수의 입장은 벼랑 끝에 몰렸다는 위기감에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입장도 아니었다. 아니...... 보다 감정에 충실한 고백이라면 이 위기감으로 자신을 포장해서라도 저 사내를 붙잡으려는 자신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 잠깐만이요.”
대문을 나서려던 기찬은 지수의 다급한 목소리에 몸을 다시 들인다.
“으응? 왜......?”
“저...... 저는 이름도 모르잖아요.”
“아! 참...... 그랬던가? 전화기 이리 줘 봐.”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내주는 전화를 받아들고 기찬은 자신의 번호와 이름을 눌러 저장시키고 다시 내민다. 지수는 다시 확인을 하고는 그윽한 시선을 기찬에게 건넨다.
“기...... 찬...... 씨, 저에게 하신 약속은 꼭 지켜 주시는 거죠? 저와 우리 미림이는 무슨 경우라도 지켜 주신다는 거......”
“음...... 미림이?...... 허허...... 예쁜 이름이네, 그야 물론이지.”
“그리고...... 우리...... 비밀은 미림이나 남편이 알면 큰 일 나니까 혹시라도 조심하셔야 돼요.”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들어 가. 그나저나 택시를 타려면 어느 쪽으로 나가야 하나?”
“어머! 차...... 안 가지고 오셨나 봐요. 그럼 우선 제 차라도 타고 가시겠어요?”
“아냐. 오히려 불편해. 주차하기도 그렇고...... 그럼...... 큰 길까지 태워 주든지......”
“네, 그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차 열쇠를 가지러 가는지 현관으로 다시 들어가는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찬은 담배를 피워 문다. 아침의 청량한 공기에 작은 새들이 나무와 건물을 오가며 날아다닌다.
“아, 형님...... 저, 기찬이에요.”
“으응...... 그래, 무슨 일이야? 놀러 오지 않고......”
“네, 볼 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가는 중입니다. 다른 일이 아니고...... 누가 나한테 집을 한 채 관리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찬은 애경이의 남편인 부동산 사무실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전세를 얻은 아파트에 대해 다시 전세를 놓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왔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려 줄 수 없는 일이니 아는 이의 부탁이라고 둘러대고 있는 것이다.
“으응...... 그래, 그럼 알았다.”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다 보니 택시는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기찬은 전화를 끊은 뒤 어디론가 다시 다이얼을 누른다.
“음...... 김비서님? 접니다.”
“아! 네, 네...... 서류문제라면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아! 그것은 나중에 잠깐만 나가도 되는 일이고...... 잠깐 밖으로 나와서 전화 받을 수 있어요?”
“네, 잠시만......”
“......”
“네, 됐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 사장과 통정을 하고 있다는 파출부 이름은 뭐요? 이번 피해자 송미라의 올케 된다는......”
“네...... 최...... 강희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았소. 내가 지금 들어갈 건데...... 사장은 자리에 있습니까?”
“네, 네......”
회사 앞에 도착한 기찬은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본관 건물로 들어선다. 생각을 가다듬는지 일부러 계단을 통해 천천히 올라가던 기찬의 입가 주름이 올라가는 것이 결국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 오셨습니까? 저...... 뭐라고 소개를 해 드려야 할지......”
“네, 사실 대로 말씀하세요. 기관에서 나왔다고...... 사장도 조사 받을 것은 조사 받아야지.”
규모는 작더라도 기업체를 운영하는 정도라면 제법 나름의 선들이 있을 텐데도 기찬은 무슨 생각에선지 자신의 위장된 신분을 그대로 써먹으려는 모양이다.
“아, 아...... 네...... 알았습니다.”
잠시 후 사장실로 안내되어 들어 간 기찬은 사장에게 신분증을 대충 보여주고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영문을 모르는 사장도 자리에서 응접세트 앞으로 옮겨 안고, 여직원이 차를 두고 나간 뒤 기찬으로부터 홍두깨 같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저......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요즘은 워낙 금연 건물들이 많아서......”
“네, 그러시죠. 헌데 기관에서 저희 회사에는 무슨 일로...... 저희는 세금도......”
기찬은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고 사장을 바라본다.
“그런 일로 온 게 아닙니다. 휴가 중이던 군인 하나가 사고를 쳐서 그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 이 회사 직원들과 연관이 된 사건이 있어서 추가조사 중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송미라양을 알고 계십니까?”
“송...... 누구라고요?”
사장은 미간을 찡그려 가며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재차 질문을 해 온다.
“송미라...... 사장님이 부하 직원을 시켜 강간을 하게 한 아가씨 말입니다. 파출부 최강희씨와의 통정사실을 시누이 송미라에게 들키자 그 입막음을 시키기 위해 강간교사를 한 거 아닙니까?”
기찬에게서 파출부 최강희의 이름이 나오자 사장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내 기색을 회복하고 침착하게 테이블 앞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아, 아니...... 가, 강간교사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 저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어요. 단지 강희가 말하길 자기 시누이가 우리사이를 수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기에 단순히 알아보라고만......”
“발뺌해야 소용없어요. 이미 당신 부하직원들에게 관련 증언도 확보를 해 둔 상태에 있습니다. 저 문밖에 서있을 김비서라는 자와 총무부 기획실장이라는 자에게 윤간을 당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그 아가씨 강간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는 사실이에요. 참 나...... 강간이라니요? 제가 상처하고 혼자 살다보니...... 어찌 눈이 뒤집혀 체면 없이 우리 파출부 아줌마에게 못할 짓을 하고, 그런 저런 관계를 맺고는 있지만, 강간교사라니요? 이...... 이 자식들 대면을 하겠습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이러지 마시고 이 자식들 좀 불러들이게 해 주세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풀어 가 봅시다. 파출부 최강희씨는 언제부터 그 댁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요?”
“그게...... 지금 아마 육 개월 쯤 되었을 겁니다.”
“그럼 최초로 통정한 것은 언제요?”
“저...... 그게......”
“언제냐니까......”
“그게...... 오고 나서 한 일 주일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혼자 사는 여자로만 알았다니까요. 강희도 별 반발이 없이 응해왔고, 저는 그래서 당시에는 그 여자와 재혼을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니까요.”
“그래요? 좋습니다. 사장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거야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제가 그 여자 남편도 아닌 바에야......”
기찬은 은근히 사장을 혐의에서 풀어주는 것 같은 인상을 심어주면서 말을 이어간다. 간통이라는 것은 부부가 아닌 제 삼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니 사장은 이로써 한숨을 돌리는 표정이다.
“어쨌든 송미라양 사건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니까 몇 가지 더 물어봅시다. 그렇다면 송미라양에게 직원을 붙인 것이 벌써 오래 전 일이고...... 그렇다면 그 무렵부터는 파출부 최강희가 유부녀라는 것을 아셨다는 얘기인데 그 뒤로도 그냥 데리고 계시니...... 이런 규모의 회사를 이끌어 가시는 명망 있는 분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으실 그런 행동은 도의적으로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저...... 그거야 자유롭게 성인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인데...... 좀 모른 척 해 주십시오. 제가 섭섭지 않게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거 좋습니다. 역시 사업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시원, 시원하십니다. 그럼 이 정도만 합시다. 참, 여담입니다만, 궁금해서 그러는데 하나 더 물어 봅시다. 사장님 연세도 지긋해 보이시는데 체력은 문제없으신지...... 그...... 최강희라는 여자하고는 보통 얼마 만에 한 번씩 관계를 맺습니까?”
자신의 제안을 기찬이 받아들이는 인상을 보이고 사설을 늘어놓자 사장도 긴장을 풀어버리는 모양이다.
“아! 하하하...... 그거요?...... 아 이거 참...... 마음 같아선 매일이라도 옆구리에 끼고 살고 싶지만,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기껏 해야 일주일에 한 번 꼴입니다. 하하하...... 뭐, 남자끼리 얘기지만...... 그렇다고 제가 볼 장 다 본 그 여자를 데리고 살 것도 아니고...... 조만간 정리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저, 정말 그 아가씨 일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건 그 놈들이 제 멋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헛소리들을 해 댄 모양인데...... 더 족치면 바른 소리를 할 겁니다. 이 자식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음...... 됐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고......”
기찬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지 주섬주섬 담배며 소지품들을 챙기고 있었다.
“아...... 벌써 가시게요? 오, 오해는 풀리셨는지......”
“허허...... 네, 물론입니다. 추가로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부하직원들이 그 아가씨를 강간했다는 것은 제 거짓말이었습니다. 공연히 애꿎은 직원들 나무라지 마십시오.”
“네?...... 아, 아니 왜 그런 거짓말을......”
“아! 네...... 그 군인을 체포해서 심문하다 보니까 그 아가씨가 변심을 해서 홧김에 그랬다는데...... 그 아가씨가 도대체 협조를 않고 횡설수설해 대서...... 배경사실을 알기 위해 그 아가씨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조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아가씨와 한 집에 사는 올케 되는 여자가 그 댁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밝혀진데다가, 사장님 회사의 직원들이 그 아가씨를 접촉했다는 흔적이 발견되다 보니까...... 사장님도 부득이해서 조사 대상에...... 그래서 유도심문을 한 번 해 봤습니다. 하하하......”
“아! 그랬군요? 저......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얼른 준비를 시킬 테니까......”
“아! 그러실까요?”
잠시 후, 김비서를 통해 봉투가 준비되고 사장은 기찬에게 더 이상 잡음이 없도록 신신당부를 한다.
“음...... 어쨌든, 그...... 최강희씨를 한 번 봐야 하겠는데...... 지금 사장님 댁으로 가면 볼 수 있을까요?”
“네, 그야 그렇지만......”
“허허...... 뭐, 사장님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송미라에 대한 것을 알기 위해서니까...... 다만, 이게 보기보다 가볍다면 그것은 좀......”
기찬은 봉투를 한 번 흔든 뒤 품 안에 갈무리하며 사장에게 윙크를 보낸다.
“아, 아...... 그, 그러시면 일간 한 번 더 연락을 주십시오. 제가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하면서......”
“음...... 그러지요. 그러면 여기 비서님에게 사장님 댁까지 운전을 좀 부탁 드려도 될까요?”
“아! 네, 그러십시오. 자...... 김비서가 어서 모시고 다녀 와.”
“자, 그러면 일간 다시 한 번 뵙겠습니다. 수고하시고......”
“네, 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사장은 사장대로 한시름 덜었다는 입장이지만, 앞으로 한 번 더 찾아오겠다는 기찬의 말 때문에 입맛이 썩 개운하지만은 않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저...... 저는 괘, 괜찮을까요?”
“으응? 아! 당신이나 기획실장은 별 탈 없을 거요. 내가 사장에게 꾸며댔다고 말했으니까...... 혹시 사장이 묻더라도 당신은 무조건 그런 사실 없다고만 하면 될 거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기찬은 김비서를 데리고 근처의 법무사 사무실에 들러 김비서의 집과 토지에 대한 이전을 접수시키고 곧바로 사장의 집으로 향한다. 이제 내일이면 그 집은 기찬의 소유로 등재가 될 것이다.
유독 김비서에게만 피해가 증폭되는 것 같아 기찬은 내심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미라를 만남으로 해서 시작된 의도하지 않았던 이 여정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는 기찬도 전혀 예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수의 가는 허리와 보드랍던 엉덩이가 눈에 아른거리고 그 향기가 머릿속을 맴 돈다. 김비서로서는 꿈에라도 짐작하지 못 할 일일 테니, 이제 아내를 공유하는 남자를 차로 모시고 사장의 집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봉투를 열어 액수를 확인하는 기찬의 입가가 슬그머니 벌어지고, 차는 어느덧 천호동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저...... 내리시지요. 다 왔습니다.”
“으음...... 자, 안내하세요.”
사장의 집 앞, 경비 카메라 밑에 얼굴을 들이밀고 인터폰을 누른다.
“누구세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미라의 올케 최강희일 것이다.
“네, 저...... 김비서입니다. 사장님 지시로 손님을 모시고 왔는데......”
“아! 네...... 전화연락 받았어요. 잠시만이요.”
곧 기계음과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김비서가 기찬을 바라본다.
“자...... 그럼 수고했습니다. 조사과정을 보여 드릴 순 없는 일이니까, 이만 돌아가시고...... 김비서, 당신 일은 내가 각별히 신경을 쓸 테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다만 보안에만 유념하시고...... 내가 다시 연락드리지요.”
“네, 네...... 제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김비서를 보내고 대문을 들어서니 현관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호! 이런...... 왜 이리 예쁜 아줌마들이 많은 거야? 그래서 얼굴값을 했다는 건가?”
혼자 중얼거리며 걸음을 현관으로 향하자 여자가 다급하게 인사를 해 온다.
“어, 어서 오세요. 저희 아가씨에게 혹시 무슨 사고라도 있는 거예요? 요즘 아무 내색도 없었는데......”
“아! 네......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네, 네......”
거실에 앉아 기다리니 차를 내 온다. 옷차림으로 보아 주방일이나 청소 따위를 하는 파출부의 복장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하늘거리는 물빛 원피스에 코를 자극하는 고운 향기가 단지 음식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도 적절치 않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화간이라...... 모든 일이...... 여기...... 이 여자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인가?”
아침, 저녁으로 집을 바꿔가며 두 남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인 즉, 실직한 남편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불안감에서 확실한 보장을 얻을 수 있는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사실 드물 것이다. 이 여자를 탓할 일만은 아닐 것이나 지금 기찬의 머릿속에는 앞으로도 굴러들어 올 재물과 함께 최강희의 벗은 몸이 상상되고 있으니 그것은 기찬으로서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차...... 드시죠.”
“네......”
"......"
“최강희씨?”
“네, 말씀하세요. 우리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사장에게도 그리 말을 해 두었으니, 미리 전해 들었다고 하더라도 꿈에도 자신의 일로 찾아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여기서 월급을 얼마나 받으시나요?”
“네?...... 월급...... 이요?”
“네, 한 달에 수입이 얼마나 되십니까?”
“아! 저희 남편이 현재 실직 중에 있어서 다른 수입은 없어요. 우리아가씨도 학생 신분인데다가...... 제가 한 달에 백 오십만 원 정도 받는 것이 우리 수입의 전부예요. 사장님이 알아서 조금 더 주실 때도 있긴 하지만요.”
강희는 기찬이 묻는 것을 조사의 일부로 생각했는지 스스럼없이 대꾸를 하고, 기찬은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녹음기능을 선택하고 테이블 앞에 올려놓는다.
“제가 조사할 것이 있어서 사장님과 대화를 한 내용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전화기에서는 사장이 송미라에 대한 기찬의 심문에 응하며 자신과의 통정사실 따위를 낱낱이 토설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그것을 들은 강희는 대번에 낯빛이 붉어지며 고개를 들지 못한다. 기찬은 사장의 고백 이후 휴대폰을 조작해 소리를 꺼 버리고 다시 한 옆에 내려놓는다. 그의 패턴으로 보아 아마 지금도 녹음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자...... 들었다시피 당신으로 인해서 시누이가 못된 놈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어.”
“저, 저는......”
“아! 물론 당신이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최초에 사장이 당신에게 접근했을 때, 이미 당신은 당신의 안위를 생각해서 이중생활을 선택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는 일이지. 물론 그에 따른 모든 책임도 당신이 스스로 져야 할 일이고...... 당신 남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히려 자기 대신에 가정을 위해 수고하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을 것 아닌가?”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자...... 잘 들어. 나는 당신을 탓하자고 온 게 아니야.”
“네, 네?......”
“내게 협조를 하면 최강희 당신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도록 해 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당신 남편에게 알려서 사장은 물론 당신도 신세 망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미 사장의 생각을 녹음으로 들었는데도, 그럴 경우 사장이 당신을 거둬 줄 것이라는 미련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 네, 네...... 제가 어떻게 하면......”
“음...... 나는 지금 사장을 족치기 위해서 암중에 수사를 하고 있는 중이야. 앞으로 내가 수시로 지시를 할 테니까 당신은 그 때마다 사장이 눈치 차리지 못하도록 내 지시에 따르면 되고......”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강희는 살 길이라도 찾은 듯 크게 고갯짓을 하며 서둘러 기찬의 말에 응답을 한다.
“그리고 사장이 묻거든 별 이야기 없이 시누이에 대한 것만 몇 가지 묻고 갔다고 하면 될 거야.”
“네, 네......”
“당신 전화번호 말해 봐.”
막상 기찬은 사장을 압박하기 위해 다른 카드를 더 마련할 필요도 없는 입장이었으나, 강희에게 자신이 수사관처럼 보이기 위해서 불여튼튼 당부를 해 두는 것뿐이었다. 정작 강희를 만나고 보니 지수에 필적할 만한 미모의 여자여서 자연스레 음심이 발동하고, 이 기회를 통해서 두고두고 자신의 여자로 부리기 위한 포석을 하는 것이었다.
“당신...... 첩보영화 본 적 없나?”
“네, 네?......”
강희는 기찬의 질문에 아연 긴장을 한다. 어떤 어려운 과제를 주려고 저렇게 운을 띄우는지 내심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어려운 일이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푸훗...... 하하하......”
느닷없이 웃어 대는 기찬에게 당황한 강희는 움찔거리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매만진다.
“하하...... 그런 게 아니라...... 영화에 보면 많이 나오잖아? 첩보원과 그 정보원이 서로 신뢰를 쌓기 위해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장면 말이야.”
“네, 네?......”
기찬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된 강희는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모르지만, 궁지에 몰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내에게 잘 보여 상황을 모면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사장의 속셈을 알게 된 터, 사장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었고, 그 조차도 이 사내에게 언제 공격을 받아 몰락할지 모를 일이니 알아서 살 길을 만들어 가야 했다.
“자...... 들어가지?”
“네......”
앞서 사장의 안방으로 들어가는 기찬의 뒤를 따라 강희는 군 말없이 뒤를 따른다.
방 안에도 작은 샤워 시설이 딸려 있어 강희는 그리 들어서고 기찬은 장을 열어 본다. 역시 짐작대로 여자의 옷이 제법 걸려 있어 실소를 이끌어 낸다. 물론 처음에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점차 자신과는 다른 경제적 환경을 동경하고 그 시류에 몸을 맡김으로써 현실을 극복하기 보다는 차원 다른 곳에서 몽혼지경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 끝을 짐작한다면, 극단적 상황이 연출될 경우 얼마든지 기존의 연고를 끊어 버리고 준비해 둔 자신의 새 터전으로 옮겨 가 버리겠다는 은밀한 배수진일 수도 있으니, 경제적 원인의 간통이란 성적 유희를 즐기기 위한 간통보다 이미 막바지에 몰린 배우자에게는 더 한 고통일 수 있을 것이고, 회복불능의 치명적 파괴력을 갖고 있는 가증스런 일일 것이다.
멀티섹스. 이즈음 기찬은 멀티섹스라는 단어를 조합해 본다. 우연한 일로 자신의 주변에 느닷없이 늘어나기 시작한 여자들과의 관계를 그리 표현해 보는 것일 게다. 그녀들 각각의 공간을 그대로 유지해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게 하되 자신과의 관계 외에는 서로가 알 수 없도록 일종의 점조직처럼 꾸며 보자는 나름의 원대한 계획이 싹트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미라와 강희는 시누이와 올케의 관계니 그 주는 감흥이 더욱 남다른 일이었다.
“저...... 씻으셔야죠?”
“으응, 그래......”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쭈뼛거리는 강희의 곁을 지나치자 강한 향기가 코에 스며든다. 잠시 후의 열락을 기대하며 욕실로 들어선다.
“으흡...... 흐응......”
강희의 가지런한 치아가 조명에 빛을 발한다. 그 고운 빛 치아 사이로 선명한 빛깔의 유혹이 기찬을 끌어들인다. 달콤한 타액이 서로의 향기를 품은 채 넘나들고 수유를 한 적이 없는 그녀의 가슴은 미라의 가슴 못지않은 탄력으로 이 시간 새 주인을 맞아 그 형태를 시험받고 있는 터였다.
“하윽......”
기찬은 한참의 애무 끝에 손을 뻗어 샘을 찾는다. 미라를 위해서라도 이미 세상인심에 닳고 닳아 버린 이 여자를 기존의 테두리에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행여 미라의 오빠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라면, 그런 오빠를 바라보아야 하는 미라에게도 적지 않은 상처로 남을 것이고, 왜인지 모르게 미라가 상처받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악......”
샘 속 깊이 더듬어 들어가는 여행자가 몹시 낯설었는지 강희는 가녀린 허리를 틀어 자극을 줄여 보려는 모양이다. 이 여자를 굴복시켜야 한다. 단지 사회적 제약 하나만으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돌발행동을 예방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니 이미 남편에 대한 마음이 떠나 버렸을지도 모를 이 여자를 자신에게 철저히 길들여야 할 것이다.
“하아아앙...... 여...... 보.....”
하지만 기찬의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강희는 기찬이 샘 속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무너져 버린다. 그간 나이 많은 사장에게서 익숙해졌다면 기찬의 단단하고 날렵한 체격에 이미 매료되었을 것이고, 급기야는 힘찬 기찬의 분신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가득 채우는 포만감에 물을 터뜨리고 만다.
“으흑...... 죄...... 송해요.”
“후욱...... 후욱...... 괜찮아......”
“하악...... 하악......”
“푸훗...... 귀여워...... 그런대로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후후......”
가쁜 호흡에 기찬의 율동을 받아내느라 잔뜩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만 보자면 정말 사랑스런 여인이다. 미간에 생긴 주름에 입을 맞춰 주고, 다시 마주친 시선을 따라 입술을 들이마신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기찬의 팔을 두른 채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숨을 고르는 강희의 모습이 담배 연기 사이로 드러난다.
“좋았어?”
“푸훗...... 네...... 저...... 정말 오래간만에 느꼈어요.”
가파른 고개를 함께 넘은 자들만의 동반의식이 강희의 긴장을 풀어주었는지, 제법 웃어가며 기찬의 말을 받아낸다.
“그래, 이제 앞으로 자주 사랑해 줄 테니까...... 그 대신 내 지시에 잘 따라야 돼. 잘만 하면 앞으로 한 몫 잡게 해 줄 수도 있지만, 나마저 배신하고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이 일은 물론 다른 사건까지 덤터기를 씌워서 아예 이 사회에서 회복할 수 없도록 매장시켜 버릴 거니까......”
“어머! 세상에...... 아, 알았어요.”
“하하...... 그리고 이 수사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수사를 하는 과정에 내가 어떤 식으로 강희 앞에 나타날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나를 마주쳐도 놀라거나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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