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삽입면허 - 3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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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78회 작성일 20-01-17 15:13본문
-36부-
기찬은 담배를 피워 문 채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는 육체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그의 얼굴은 냉랭하기만 하였다. 이제 고작 삼십을 바라보는 젊은 나이였지만, 이 시간 기찬은 마치 오랜 풍파를 겪어내고 그 여정을 돌아보는 노인처럼 전혀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악,..... 하악......”
“끄으응......”
누운 채 금주를 허리로 쳐 올리고 있던 고 의원은 뭔가 성에 차지 않는 듯, 자세를 바꾸려는 모양이었다. 금주의 색스러운 신음에 이미 방안은 과열된 양상이었으니, 주무르던 젖가슴에서 슬며시 손을 떼어 낸 고 의원은 자신의 안대를 벗기고 미간을 찌푸려 가며 상대의 얼굴을 여겨보고 있었다.
“흐으응...... 하악......”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채 금주는 고 의원의 가슴을 짚고 앉아, 허리를 앞뒤로 진퇴시키며 용을 쓰고 있었다. 숙여진 머리로 인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커다란 안대로 가리고 있는 얼굴이 마스크를 쓴 채 벌인다는, 생면부지 낯모르는 사람끼리의 비밀 섹스파티가 연상되기도 해 더욱 불끈거리는 기운을 느끼게 되는 모양이었다.
이미 사진을 통해 보라의 얼굴을 알고 있었을 테니, 그깟 안대 밑에 가려져 있는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중요할 것은 아니었다. 실상 금주의 얼굴 모습으로 보자면 반듯한 이목구비에 시원시원한 크기로 서구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터였고, 그 미모가 안대 따위로 가려질 것은 아니었다.
손을 뻗어 금주를 끌어당기고, 자세를 바꾸어 그 하얀 배위로 육중한 몸을 실어 올린다. 금주의 입에서는 그 체중을 느끼는 것인지, 어느새 헛바람이 새어나오고, 금주의 다리를 접어 올려 잔뜩 벌어진 사타구니 사이로 다시 고 의원은 허리를 맞춰 들어간다.
“후욱......”
“으흥.......”
잔뜩 늘어진 고 의원의 배는 스치듯 물결치는 모습으로 금주의 배 위에서 출렁이고, 몹시 흥분한 그의 고개는 뒤로 넘어가는 듯 힘을 모아 금주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이제 격랑에 몸을 실어 그녀의 몸속 깊은 곳으로 분신을 보내려는지 두 눈은 잔뜩 충혈을 이루고 있었고, 호흡은 막바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흐윽...... 마지막 순간은 함께 가야지.”
고 의원은 손을 뻗어 금주의 안대를 잡아챈다. 이제 사정하는 순간 그 눈동자를 마주치고 마지막 열락을 함께 느끼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앞으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자신의 배 밑에 깔아 버릴 수 있다는 일종의 시위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자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었을 것이었다.
안대를 벗겨내자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고, 금주 역시 상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흐윽......!”
“아, 아니......!”
하지만, 이미 치고 올라오는 전율은 고 의원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초를 자극하고 있었고, 앞으로 내달리고자 하는 그 욕망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속도를 재촉하고 있었다. 뻔히 내려다보이는 제 며느리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그 젖가슴을 터지도록 주물러 대며 허리를 놀리는 고 의원의 밑에서 금주는 눈을 찢어지도록 크게 뜨고 잔뜩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가린 채, 시아버지 고 의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버님......!”
“아, 아가......! 그냥 그대로 있어라. 그, 금방......”
“하악...... 세상에......”
“후욱...... 후욱...... 으윽...... 울컥...... 울컥......”
기찬의 술수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지만, 고 의원으로서는 이 순간의 쾌감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 며느리의 뱃속에 씨를 남겨 놓고서도 아쉬움은 남는 법, 그 여세를 몰아 금주의 입술을 더듬어 빨아 댄다.
이미 살을 섞고 함께 허우적거리던 여자가 보라가 아니라 제 며느리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금단의 열매는 고 의원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고 있었으니, 주어진 상황을 혼란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금주 역시 거칠게 몰려오는 흥분에 몸을 가눌 수 없는 입장이었고 이미 몸을 섞어버린 뒤였으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쩌지 못하고, 제 시아버지에게 입술을 열어주고 만다.
“흐읍...... 쭈우웁......”
기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고, 옆방에 다가가 카드 키를 센서에 읽히고 있었다.
-딸칵......
경쾌한 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찬의 콧속으로 후끈하고 알싸한 기운이 들어찬다.
“많이 즐기셨습니까?”
기찬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후희도 즐기지 못한 채, 후다닥 떨어져 몸을 가리고, 진노한 듯 중저음으로 고 의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너...... 이, 이 놈...... 이게 무슨 짓이냐?”
“후후후! 고 의원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 특이한 취향을 이제는 더 이상 맞춰드리기가 힘겨워 최상의 선물을 해 드렸는데 저를 나무라시다니요? 누님은 어떠셨습니까?”
“세, 세상에...... 기찬 씨......”
기찬은 천천히 의자를 끌어와 거꾸로 돌려둔 채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엉덩이를 붙인다.
“지금껏 고 의원님은 저를 압박하고 협박해서 많은 것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앞으로는 진정으로 저를 좀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네놈이 이런 짓을 꾸미고도 온전할 성 싶더냐? 내 아들 놈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내 며느리도 정계에서는 나름 여걸이라고 평을 받는 터, 이깟 일로 네놈의 농간에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놈.......”
고 의원은 뭔가 있다는 느낌에 제 며느리로부터 지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하하, 고 의원님께서 그래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제 부탁 한 마디에 모르는 사내와 잠자리를 가질 정도라면 이미 고 의원님의 며느리는 제 여자가 돼 있다는 당연한 일을 왜 모르십니까?”
“이, 이......”
“지금 이 장면도 고스란히 녹화가 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고 의원과 금주는 즉시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지만, 어느 곳에서도 흔적은 찾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늦은 몸짓으로 몸을 가려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금주는 천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하, 누님은 아무 걱정 마세요. 설마 고 의원님이 필름을 공개하라고 하시겠어요?”
“이, 이놈이......”
“정치적으로 다른 부탁은 않겠습니다. 물론 필름도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고요. 다만, 더 이상 제게서 입금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물론 소소한 지원조차도 제가 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술값이야 얼마든지 지원해 드릴 테니까 방배동은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
“그리고, 금주 누님이 이미 저와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됐지만, 고 의원님 스스로도 이제는 며느님과 보통 관계를 넘어서신 입장이니, 더 이상 저와 제 형수의 일로 협박은 안 하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비로소 금주는 오늘의 사단이 왜 벌어진 것인지 알겠다는 듯, 제 시아버지 고 의원을 흘끔거리고 있었고, 고 의원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그 눈빛은 이 상황을 승복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입니다. 고 의원님의 솜씨야 제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니 저도 나름의 방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지금 모처에서 녹화되고 있는 이 필름은 곧 여러 곳에 저장이 될 것이고, 제가 수시로 점검해 주지 않는다면 일정 시간 후에 세상으로 공개가 될 것입니다. 저나 제 가족들에게 해코지를 하신다면 그것은 함께 죽자는 뜻이 될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놈입니다. 아까울 것도 없고요.”
“으흠...... 흠......”
고의원은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무마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자, 그리고 금주 누님은 고 의원님의 며느리이기도 하지만, 제게는 떨어질 수 없는 사업의 파트너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오늘 일로 인해서 금주 누님을 구박하신다거나 핍박하신다면 결국 아드님과 이혼하고 제게로 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더 이상 며느님과 야릇한 관계를 이어나가시려고 해도 안 된다는 말씀도 아울러 드리겠습니다.”
“......”
“일이 그쯤 되니 당분간 금주 누님은 제가 보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의원님 생각은 어떠신지......”
“크으음......”
“말씀을 해 주시죠?”
“으음, 자네 뜻대로 하게.”
순간, 금주는 기찬과 눈이 마주친다.
“자, 그럼...... 누님, 가시지요. 고 위원장님께는 의원님께서 잘 말씀드려 주실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어디 며칠 간 심부름이라도 보내셨다고 하신다면 적당할 것 같군요.”
이제 줄 끊어진 연 신세로 전락해 버린 금주는 더 이상 기댈 곳이라곤 기찬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이미 시아버지와 살까지 섞어버린 사이가 되었지만, 명색이 제 시아버지이니 천 조각으로 몸을 둘러 가린 채 엉거주춤 기찬을 따라 나선다.
“기, 기찬 씨......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난 이제 어쩌라고......”
기찬은 몸을 돌려 금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다.
“누님, 나를 못 믿어? 이건 다 고 의원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하지만, 누님이 나를 믿고 의지한다면, 그렇게만 해 준다면 누님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리고 고 씨 일가에 남아 있어봐야 무슨 영화를 보겠어? 매일 뼛골 빠지게 영감 뒷수발이나 들다가 말 테니...... 누님 남편 고 위원장?...... 그 사람은 아무 비전도 없는 인물이야.”
“......”
“그,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차차 생각해 봅시다. 일단은 고 위원장도 정치 생명을 끊어 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쯤 되면 누님 차라리 이혼하고 내게로 오슈. 그건 어떻겠어?”
“칫...... 그럼 당연히 이혼해야지. 이렇게 하고 어떻게 살겠어? 난, 아까 자기가 이렇게 하고 그냥 가 버릴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 잘 생각했어. 그럼 내가 자리를 잡아 줄 때까지는 불편하더라도 당분간 지수 누님 가구 전시장에 가 있어요. 어차피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니까 별로 어려울 것도 없지 않겠어?”
“지, 지수한테?......”
“왜 싫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마음 쓸 것 없어요. 고 위원장도 바로 조치해 버릴 거니까, 그리고 거처도 곧 마련해 줄게......”
“그, 그래...... 알았어.”
당분간은 지수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니, 금주로서는 지수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자연스레 서열이 설정되고 말았으니 기찬은 별 무리 없이 지수의 부탁을 들어주는 셈이 돼 버린다.
결국 이혼하는 것도 금주가 될 것이고, 친구들의 시선에 그 모습은 지수에게 기득권이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니 그녀들의 합종연횡도 지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자, 누님...... 이제 그 찝찝한 몸을 얼른 씻어야지?”
“아! 참...... 그럼 같이 나가는 거지? 혼자 어디 가면 안 돼요. 나 데리고 가야 돼.”
금주는 이제 자신의 몸을 의탁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길 잃을 것을 우려하는 어린아이처럼 기찬에게 거듭 당부를 남기며 욕실로 들어선다.
모니터로 비추이는 고 의원도 이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비대한 몸집을 움직여 욕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파트, 한적한 모습으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기찬의 곁에서 애경이 과일을 깎고 있고, 틈틈이 기찬의 입으로 과일 조각을 밀어 넣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나애경, 기찬이 붙여준 녀석 때문에 결국 부동산 사장에게 이혼을 당하고, 기찬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고즈넉한 모습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파트 때문이었다.
조사장의 딸, 유정을 앞세워 애경과 가까이 지내도록 하고, 자연스레 제 아버지와 연결을 시켜주니 그것은 기찬의 의도대로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응, 유정아...... 오빠다.”
“네, 오빠...... 어디예요?”
“어딘 어디...... 잠실, 네 새 엄마 집이지.”
“피...... 새 엄마는 무슨...... 우리 아빠가 결혼한 것도 아닌데......”
“하하하...... 그래, 맞다. 맞아...... 제대로 말하자면 둘 다 내 마누라니까 네 형님 집이라고 해야 되겠지?”
“두 사람 혹시 지금...... 설마 대낮부터 일 벌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호호호......”
이젠 유정도 제법 기찬과 죽이 맞아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윤정의 아파트에서 기찬과 함께 세 사람이 살을 맞부딪치고 나서는 한층 어른이 된 듯 그 색을 즐기는 경지가 남달라진 탓일 게다.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 친구 은서 말이야. 지난번에 내가 부탁한 일이 있었잖아.”
“으응, 오빠...... 그럼 이제 터뜨려도 되는 거야?”
“그래, 고 의원 영감도 족쇄를 채워 뒀으니까 이젠 그 자식 놈을 엮어 버려야지. 지금 전화해서 신고를 하라고 해.”
“으응, 바로 전화할게요.”
“그래...... 나중에 보자.”
기찬은 아파트 이중계약으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되었던 차윤정의 집에서 하숙생처럼 기거하다가 금주 남편, 고 위원장의 도움으로 떼인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돈은 결국 고 위원장의 통장으로 송금됐었고, 그 돈을 굳이 기찬은 받아내지 않고, 고 위원장에게 써도 좋다는 뜻을 보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각서도 없었으니 보기에 따라서는 고 위원장이 자신의 지위를 빌미로 기찬의 돈을 가로챈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 돈을 송금한 측에서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 삼아 고 위원장을 고소한다면 뚜렷이 남아있는 송금기록은 그에게 족쇄가 되고 말 것이니 결국 사실 조사 차원에서 기찬에게 참고인 조사가 있다면, 기찬은 그것을 당연히 모른 체 잡아떼고 말 것이다.
이미 방배동 사업장은 업계에 잘 알려진 터였으니 더 이상 고 씨 부자의 도움이 없어도 위축될 일은 없었고,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버린 상태였다. 그들이 발을 끊는다고 가정한다면 나름의 매출은 다소 줄어들지 몰라도 그들 부자에게 빠져나가던 수입이 고스란히 통장으로 쌓이게 될 터이니 아쉬워 할 일도 아니었고, 게다가 고 의원 입장에서는 함부로 기찬의 곁을 떠날 수도 없는 입장이니 스스로 발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고 의원의 아들, 금주의 남편에게도 방배동으로부터 축객령을 내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여파는 그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으니 파렴치범으로 전락해 버린 그는 가뜩이나 정치적 기반도 없는 터에 정치일선에서는 꼬리를 내리게 되는 중차대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대서특필! 연일 신문은 난리를 치고 있었다. 사상 유래가 없는 금융사기사건은 날로 그 피해금액이 부풀어 올라 벼랑을 굴러가는 눈덩이가 다름 아니었다.
미라는 오늘의 기찬이 있도록 인연을 이끌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그녀의 오빠, 송만호는 사채시장에서 진작 모습을 감추었고, 그곳에서 수수료를 받아 챙기던 사채업자 조상환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구속되었지만, 기찬과의 거래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터였으니 노숙자의 명의로 개설되어 있던 기찬의 통장에는 이미 단 돈 일 원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총책을 맡고 있던 한기주는 사무실을 해체하면서 그동안 일조를 해왔던 노숙자들에게 나름의 기반을 마련해 주고 뒤를 단속했었다. 그 외의 인사들도 모두 위장된 가공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들을 추적해 봐야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영문 모르는 노숙자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네, 사장님......”
“아! 한 실장.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네, 종로통을 돌고 있습니다.”
“음...... 지금 당신도 신문을 봐서 알겠지만, 연일 들끓고 있는데 이 일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아.”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나야 실무를 맡은 것도 아니어서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없겠지만, 한 실장은 입장이 많이 다르지 않겠어? 여자들이야 화장만 지워도 못 알아보겠지만......”
“네, 저도 그게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신분이야 위장된 것을 사용했으니까 문제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몽타주라도 만들어진다면 큰일이니 그전에 성형수술을 받는 게 어떻겠어?”
“서, 성형수술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기회에 당신 집사람 은진 씨도 휴가를 줄 테니까 함께 외국으로 나가서 성형을 하고 들어와. 그 경비는 모두 내가 지출할 테니까 여행 삼아 다녀오고, 자네가 알아서 통장에서 인출을 하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집사람까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아! 이쪽 일은 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은진 씨도 고생 많았으니 이 기회에 여행을 하면 좋지 않겠어? 게다가 당신 수술일정 잡히면 간병할 사람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 그렇겠군요. 하하하......”
“그래, 귀국하는 대로 연락을 하고...... 그나마 같이 안 나갔다가 남편 얼굴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겠어? 하하하......”
“네, 알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기찬의 곁에서 금주는 차를 끓이고, 지수는 홀 안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구 전시장에서 기거를 하고 있는 금주는 이제 지수와도 잘 지내고 있는지 많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 그러면 기찬 씨도 얼굴이 조금은 알려졌을 텐데, 자기는 괜찮은 거예요? 그 조상환이라는 사람은 자기를 기억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하하하, 그것도 걱정 없어. 이미 참고인 조사를 모두 마쳤다고 하더군. 나에 대한 조사가 있을 거라면 벌써 나도 외국으로 나갔겠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조상환이 이끌어가던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사실은 피해자거든. 그 경리 아가씨 말고는 모두가 속아서 온 사람들이었지.”
“그, 그래서요?”
“송만호 씨를 시켜서 이미 모두 적당한 돈을 건네주고 입막음을 시켜뒀어. 전부 패가망신하기 일보직전에 큰돈들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났는데, 스스로 그 돈을 토해낼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일이지. 조상환이가 내 존재에 대해서 불긴 불었다지만, 그 사무실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모두가, 특히 그 경리를 맡아보던 아가씨조차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을 하는데, 경찰이 누구 말을 믿겠어? 조상환이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이중 통장을 써서 돈을 빼돌리고는 헛소리를 한다고 받아들여질 테니 다 소용없는 노릇이지. 하하하......”
“어머! 어머머......”
“사람을 시켜 알아봤더니 이제는 제 놈도 포기를 했는지 유치장에서 그저 멍청하게 시간만 보낸다는구먼.”
때 마침 걸려오는 전화가 있었고, 지긋이 내려다보는 전화기에는 고 의원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제 고 의원도 기찬에게 연락을 취할 때는 보좌관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니 세월이 무상할 따름이었다.
마치 짐작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기찬은 무심하게 통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필시 자신의 아들, 고 위원장의 구속문제 때문일 것이었다.
“아! 고 의원님...... 무슨 일이십니까?”
“강 사장...... 자네, 나 좀 만나세.”
“네, 그러시죠. 어디서 뵈었으면 좋겠습니까?”
“시선을 피하기에는 방배동이 좋지 않겠나?”
“네, 알았습니다. 지금 곧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찬은 담배를 피워 문 채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는 육체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그의 얼굴은 냉랭하기만 하였다. 이제 고작 삼십을 바라보는 젊은 나이였지만, 이 시간 기찬은 마치 오랜 풍파를 겪어내고 그 여정을 돌아보는 노인처럼 전혀 의중을 짐작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악,..... 하악......”
“끄으응......”
누운 채 금주를 허리로 쳐 올리고 있던 고 의원은 뭔가 성에 차지 않는 듯, 자세를 바꾸려는 모양이었다. 금주의 색스러운 신음에 이미 방안은 과열된 양상이었으니, 주무르던 젖가슴에서 슬며시 손을 떼어 낸 고 의원은 자신의 안대를 벗기고 미간을 찌푸려 가며 상대의 얼굴을 여겨보고 있었다.
“흐으응...... 하악......”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채 금주는 고 의원의 가슴을 짚고 앉아, 허리를 앞뒤로 진퇴시키며 용을 쓰고 있었다. 숙여진 머리로 인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커다란 안대로 가리고 있는 얼굴이 마스크를 쓴 채 벌인다는, 생면부지 낯모르는 사람끼리의 비밀 섹스파티가 연상되기도 해 더욱 불끈거리는 기운을 느끼게 되는 모양이었다.
이미 사진을 통해 보라의 얼굴을 알고 있었을 테니, 그깟 안대 밑에 가려져 있는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중요할 것은 아니었다. 실상 금주의 얼굴 모습으로 보자면 반듯한 이목구비에 시원시원한 크기로 서구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터였고, 그 미모가 안대 따위로 가려질 것은 아니었다.
손을 뻗어 금주를 끌어당기고, 자세를 바꾸어 그 하얀 배위로 육중한 몸을 실어 올린다. 금주의 입에서는 그 체중을 느끼는 것인지, 어느새 헛바람이 새어나오고, 금주의 다리를 접어 올려 잔뜩 벌어진 사타구니 사이로 다시 고 의원은 허리를 맞춰 들어간다.
“후욱......”
“으흥.......”
잔뜩 늘어진 고 의원의 배는 스치듯 물결치는 모습으로 금주의 배 위에서 출렁이고, 몹시 흥분한 그의 고개는 뒤로 넘어가는 듯 힘을 모아 금주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이제 격랑에 몸을 실어 그녀의 몸속 깊은 곳으로 분신을 보내려는지 두 눈은 잔뜩 충혈을 이루고 있었고, 호흡은 막바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흐윽...... 마지막 순간은 함께 가야지.”
고 의원은 손을 뻗어 금주의 안대를 잡아챈다. 이제 사정하는 순간 그 눈동자를 마주치고 마지막 열락을 함께 느끼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해 앞으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자신의 배 밑에 깔아 버릴 수 있다는 일종의 시위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자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싶었을 것이었다.
안대를 벗겨내자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고, 금주 역시 상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흐윽......!”
“아, 아니......!”
하지만, 이미 치고 올라오는 전율은 고 의원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초를 자극하고 있었고, 앞으로 내달리고자 하는 그 욕망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속도를 재촉하고 있었다. 뻔히 내려다보이는 제 며느리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그 젖가슴을 터지도록 주물러 대며 허리를 놀리는 고 의원의 밑에서 금주는 눈을 찢어지도록 크게 뜨고 잔뜩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가린 채, 시아버지 고 의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버님......!”
“아, 아가......! 그냥 그대로 있어라. 그, 금방......”
“하악...... 세상에......”
“후욱...... 후욱...... 으윽...... 울컥...... 울컥......”
기찬의 술수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지만, 고 의원으로서는 이 순간의 쾌감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 며느리의 뱃속에 씨를 남겨 놓고서도 아쉬움은 남는 법, 그 여세를 몰아 금주의 입술을 더듬어 빨아 댄다.
이미 살을 섞고 함께 허우적거리던 여자가 보라가 아니라 제 며느리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금단의 열매는 고 의원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고 있었으니, 주어진 상황을 혼란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금주 역시 거칠게 몰려오는 흥분에 몸을 가눌 수 없는 입장이었고 이미 몸을 섞어버린 뒤였으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쩌지 못하고, 제 시아버지에게 입술을 열어주고 만다.
“흐읍...... 쭈우웁......”
기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고, 옆방에 다가가 카드 키를 센서에 읽히고 있었다.
-딸칵......
경쾌한 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찬의 콧속으로 후끈하고 알싸한 기운이 들어찬다.
“많이 즐기셨습니까?”
기찬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후희도 즐기지 못한 채, 후다닥 떨어져 몸을 가리고, 진노한 듯 중저음으로 고 의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너...... 이, 이 놈...... 이게 무슨 짓이냐?”
“후후후! 고 의원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 특이한 취향을 이제는 더 이상 맞춰드리기가 힘겨워 최상의 선물을 해 드렸는데 저를 나무라시다니요? 누님은 어떠셨습니까?”
“세, 세상에...... 기찬 씨......”
기찬은 천천히 의자를 끌어와 거꾸로 돌려둔 채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엉덩이를 붙인다.
“지금껏 고 의원님은 저를 압박하고 협박해서 많은 것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앞으로는 진정으로 저를 좀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네놈이 이런 짓을 꾸미고도 온전할 성 싶더냐? 내 아들 놈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내 며느리도 정계에서는 나름 여걸이라고 평을 받는 터, 이깟 일로 네놈의 농간에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놈.......”
고 의원은 뭔가 있다는 느낌에 제 며느리로부터 지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하하, 고 의원님께서 그래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제 부탁 한 마디에 모르는 사내와 잠자리를 가질 정도라면 이미 고 의원님의 며느리는 제 여자가 돼 있다는 당연한 일을 왜 모르십니까?”
“이, 이......”
“지금 이 장면도 고스란히 녹화가 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고 의원과 금주는 즉시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지만, 어느 곳에서도 흔적은 찾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늦은 몸짓으로 몸을 가려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금주는 천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하, 누님은 아무 걱정 마세요. 설마 고 의원님이 필름을 공개하라고 하시겠어요?”
“이, 이놈이......”
“정치적으로 다른 부탁은 않겠습니다. 물론 필름도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고요. 다만, 더 이상 제게서 입금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물론 소소한 지원조차도 제가 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술값이야 얼마든지 지원해 드릴 테니까 방배동은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
“그리고, 금주 누님이 이미 저와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됐지만, 고 의원님 스스로도 이제는 며느님과 보통 관계를 넘어서신 입장이니, 더 이상 저와 제 형수의 일로 협박은 안 하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비로소 금주는 오늘의 사단이 왜 벌어진 것인지 알겠다는 듯, 제 시아버지 고 의원을 흘끔거리고 있었고, 고 의원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그 눈빛은 이 상황을 승복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입니다. 고 의원님의 솜씨야 제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니 저도 나름의 방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지금 모처에서 녹화되고 있는 이 필름은 곧 여러 곳에 저장이 될 것이고, 제가 수시로 점검해 주지 않는다면 일정 시간 후에 세상으로 공개가 될 것입니다. 저나 제 가족들에게 해코지를 하신다면 그것은 함께 죽자는 뜻이 될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놈입니다. 아까울 것도 없고요.”
“으흠...... 흠......”
고의원은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무마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자, 그리고 금주 누님은 고 의원님의 며느리이기도 하지만, 제게는 떨어질 수 없는 사업의 파트너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오늘 일로 인해서 금주 누님을 구박하신다거나 핍박하신다면 결국 아드님과 이혼하고 제게로 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더 이상 며느님과 야릇한 관계를 이어나가시려고 해도 안 된다는 말씀도 아울러 드리겠습니다.”
“......”
“일이 그쯤 되니 당분간 금주 누님은 제가 보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의원님 생각은 어떠신지......”
“크으음......”
“말씀을 해 주시죠?”
“으음, 자네 뜻대로 하게.”
순간, 금주는 기찬과 눈이 마주친다.
“자, 그럼...... 누님, 가시지요. 고 위원장님께는 의원님께서 잘 말씀드려 주실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어디 며칠 간 심부름이라도 보내셨다고 하신다면 적당할 것 같군요.”
이제 줄 끊어진 연 신세로 전락해 버린 금주는 더 이상 기댈 곳이라곤 기찬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이미 시아버지와 살까지 섞어버린 사이가 되었지만, 명색이 제 시아버지이니 천 조각으로 몸을 둘러 가린 채 엉거주춤 기찬을 따라 나선다.
“기, 기찬 씨......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난 이제 어쩌라고......”
기찬은 몸을 돌려 금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다.
“누님, 나를 못 믿어? 이건 다 고 의원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하지만, 누님이 나를 믿고 의지한다면, 그렇게만 해 준다면 누님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리고 고 씨 일가에 남아 있어봐야 무슨 영화를 보겠어? 매일 뼛골 빠지게 영감 뒷수발이나 들다가 말 테니...... 누님 남편 고 위원장?...... 그 사람은 아무 비전도 없는 인물이야.”
“......”
“그,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차차 생각해 봅시다. 일단은 고 위원장도 정치 생명을 끊어 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쯤 되면 누님 차라리 이혼하고 내게로 오슈. 그건 어떻겠어?”
“칫...... 그럼 당연히 이혼해야지. 이렇게 하고 어떻게 살겠어? 난, 아까 자기가 이렇게 하고 그냥 가 버릴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 잘 생각했어. 그럼 내가 자리를 잡아 줄 때까지는 불편하더라도 당분간 지수 누님 가구 전시장에 가 있어요. 어차피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니까 별로 어려울 것도 없지 않겠어?”
“지, 지수한테?......”
“왜 싫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마음 쓸 것 없어요. 고 위원장도 바로 조치해 버릴 거니까, 그리고 거처도 곧 마련해 줄게......”
“그, 그래...... 알았어.”
당분간은 지수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니, 금주로서는 지수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자연스레 서열이 설정되고 말았으니 기찬은 별 무리 없이 지수의 부탁을 들어주는 셈이 돼 버린다.
결국 이혼하는 것도 금주가 될 것이고, 친구들의 시선에 그 모습은 지수에게 기득권이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니 그녀들의 합종연횡도 지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자, 누님...... 이제 그 찝찝한 몸을 얼른 씻어야지?”
“아! 참...... 그럼 같이 나가는 거지? 혼자 어디 가면 안 돼요. 나 데리고 가야 돼.”
금주는 이제 자신의 몸을 의탁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길 잃을 것을 우려하는 어린아이처럼 기찬에게 거듭 당부를 남기며 욕실로 들어선다.
모니터로 비추이는 고 의원도 이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비대한 몸집을 움직여 욕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파트, 한적한 모습으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기찬의 곁에서 애경이 과일을 깎고 있고, 틈틈이 기찬의 입으로 과일 조각을 밀어 넣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나애경, 기찬이 붙여준 녀석 때문에 결국 부동산 사장에게 이혼을 당하고, 기찬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고즈넉한 모습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파트 때문이었다.
조사장의 딸, 유정을 앞세워 애경과 가까이 지내도록 하고, 자연스레 제 아버지와 연결을 시켜주니 그것은 기찬의 의도대로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응, 유정아...... 오빠다.”
“네, 오빠...... 어디예요?”
“어딘 어디...... 잠실, 네 새 엄마 집이지.”
“피...... 새 엄마는 무슨...... 우리 아빠가 결혼한 것도 아닌데......”
“하하하...... 그래, 맞다. 맞아...... 제대로 말하자면 둘 다 내 마누라니까 네 형님 집이라고 해야 되겠지?”
“두 사람 혹시 지금...... 설마 대낮부터 일 벌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호호호......”
이젠 유정도 제법 기찬과 죽이 맞아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윤정의 아파트에서 기찬과 함께 세 사람이 살을 맞부딪치고 나서는 한층 어른이 된 듯 그 색을 즐기는 경지가 남달라진 탓일 게다.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 친구 은서 말이야. 지난번에 내가 부탁한 일이 있었잖아.”
“으응, 오빠...... 그럼 이제 터뜨려도 되는 거야?”
“그래, 고 의원 영감도 족쇄를 채워 뒀으니까 이젠 그 자식 놈을 엮어 버려야지. 지금 전화해서 신고를 하라고 해.”
“으응, 바로 전화할게요.”
“그래...... 나중에 보자.”
기찬은 아파트 이중계약으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되었던 차윤정의 집에서 하숙생처럼 기거하다가 금주 남편, 고 위원장의 도움으로 떼인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돈은 결국 고 위원장의 통장으로 송금됐었고, 그 돈을 굳이 기찬은 받아내지 않고, 고 위원장에게 써도 좋다는 뜻을 보였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각서도 없었으니 보기에 따라서는 고 위원장이 자신의 지위를 빌미로 기찬의 돈을 가로챈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 돈을 송금한 측에서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 삼아 고 위원장을 고소한다면 뚜렷이 남아있는 송금기록은 그에게 족쇄가 되고 말 것이니 결국 사실 조사 차원에서 기찬에게 참고인 조사가 있다면, 기찬은 그것을 당연히 모른 체 잡아떼고 말 것이다.
이미 방배동 사업장은 업계에 잘 알려진 터였으니 더 이상 고 씨 부자의 도움이 없어도 위축될 일은 없었고,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버린 상태였다. 그들이 발을 끊는다고 가정한다면 나름의 매출은 다소 줄어들지 몰라도 그들 부자에게 빠져나가던 수입이 고스란히 통장으로 쌓이게 될 터이니 아쉬워 할 일도 아니었고, 게다가 고 의원 입장에서는 함부로 기찬의 곁을 떠날 수도 없는 입장이니 스스로 발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고 의원의 아들, 금주의 남편에게도 방배동으로부터 축객령을 내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여파는 그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으니 파렴치범으로 전락해 버린 그는 가뜩이나 정치적 기반도 없는 터에 정치일선에서는 꼬리를 내리게 되는 중차대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대서특필! 연일 신문은 난리를 치고 있었다. 사상 유래가 없는 금융사기사건은 날로 그 피해금액이 부풀어 올라 벼랑을 굴러가는 눈덩이가 다름 아니었다.
미라는 오늘의 기찬이 있도록 인연을 이끌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그녀의 오빠, 송만호는 사채시장에서 진작 모습을 감추었고, 그곳에서 수수료를 받아 챙기던 사채업자 조상환은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구속되었지만, 기찬과의 거래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터였으니 노숙자의 명의로 개설되어 있던 기찬의 통장에는 이미 단 돈 일 원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총책을 맡고 있던 한기주는 사무실을 해체하면서 그동안 일조를 해왔던 노숙자들에게 나름의 기반을 마련해 주고 뒤를 단속했었다. 그 외의 인사들도 모두 위장된 가공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그들을 추적해 봐야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영문 모르는 노숙자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네, 사장님......”
“아! 한 실장. 지금 어디에 있는가?”
“네, 종로통을 돌고 있습니다.”
“음...... 지금 당신도 신문을 봐서 알겠지만, 연일 들끓고 있는데 이 일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아.”
“네, 그럴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나야 실무를 맡은 것도 아니어서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없겠지만, 한 실장은 입장이 많이 다르지 않겠어? 여자들이야 화장만 지워도 못 알아보겠지만......”
“네, 저도 그게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신분이야 위장된 것을 사용했으니까 문제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몽타주라도 만들어진다면 큰일이니 그전에 성형수술을 받는 게 어떻겠어?”
“서, 성형수술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기회에 당신 집사람 은진 씨도 휴가를 줄 테니까 함께 외국으로 나가서 성형을 하고 들어와. 그 경비는 모두 내가 지출할 테니까 여행 삼아 다녀오고, 자네가 알아서 통장에서 인출을 하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집사람까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아! 이쪽 일은 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은진 씨도 고생 많았으니 이 기회에 여행을 하면 좋지 않겠어? 게다가 당신 수술일정 잡히면 간병할 사람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 그렇겠군요. 하하하......”
“그래, 귀국하는 대로 연락을 하고...... 그나마 같이 안 나갔다가 남편 얼굴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겠어? 하하하......”
“네, 알았습니다.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기찬의 곁에서 금주는 차를 끓이고, 지수는 홀 안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구 전시장에서 기거를 하고 있는 금주는 이제 지수와도 잘 지내고 있는지 많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 그러면 기찬 씨도 얼굴이 조금은 알려졌을 텐데, 자기는 괜찮은 거예요? 그 조상환이라는 사람은 자기를 기억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하하하, 그것도 걱정 없어. 이미 참고인 조사를 모두 마쳤다고 하더군. 나에 대한 조사가 있을 거라면 벌써 나도 외국으로 나갔겠지.”
“그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조상환이 이끌어가던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사실은 피해자거든. 그 경리 아가씨 말고는 모두가 속아서 온 사람들이었지.”
“그, 그래서요?”
“송만호 씨를 시켜서 이미 모두 적당한 돈을 건네주고 입막음을 시켜뒀어. 전부 패가망신하기 일보직전에 큰돈들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났는데, 스스로 그 돈을 토해낼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일이지. 조상환이가 내 존재에 대해서 불긴 불었다지만, 그 사무실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 모두가, 특히 그 경리를 맡아보던 아가씨조차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을 하는데, 경찰이 누구 말을 믿겠어? 조상환이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이중 통장을 써서 돈을 빼돌리고는 헛소리를 한다고 받아들여질 테니 다 소용없는 노릇이지. 하하하......”
“어머! 어머머......”
“사람을 시켜 알아봤더니 이제는 제 놈도 포기를 했는지 유치장에서 그저 멍청하게 시간만 보낸다는구먼.”
때 마침 걸려오는 전화가 있었고, 지긋이 내려다보는 전화기에는 고 의원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제 고 의원도 기찬에게 연락을 취할 때는 보좌관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니 세월이 무상할 따름이었다.
마치 짐작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기찬은 무심하게 통화를 이어간다. 그것은 필시 자신의 아들, 고 위원장의 구속문제 때문일 것이었다.
“아! 고 의원님...... 무슨 일이십니까?”
“강 사장...... 자네, 나 좀 만나세.”
“네, 그러시죠. 어디서 뵈었으면 좋겠습니까?”
“시선을 피하기에는 방배동이 좋지 않겠나?”
“네, 알았습니다. 지금 곧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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