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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같은 산행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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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796회 작성일 20-01-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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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사내를 만난건 이젠 죽었다고 생각하고 거의 삶을 포기할 때쯤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저체온증은 그녀를 빈사직전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사실 삶에 대한 생각따위는 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그녀가 눈이 허벅지까지 쌓인 어느 이름모를 나무밑둥에서 쓰러진채로 사내를 처음 올려다 봤을때 그 커다란 형체가 환상인지 진짜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지,그래서 사내가 자신을 발견한 것인지,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그가 자신을 보았는지,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쫓듯 민감한 사내의 후각이나 청각에 의해 자신이 처음부터 추적당했던 것인지,그 사실여부 역시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여하튼 억센 힘에 의해 몸이 들려 사내의 어깨에 얹혔을때 가물가물했던 마지막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조그맣고 침침한,낯선 움막 안이었다.



성관계는 모든 행동에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점이다. 여러 가지 베일로 자신을 감추면서도 또한 도처에서 얼굴을 내민다. 성관계는 전쟁의 원인도 되고, 평화의 목적도 되며,해학의 무진장한 원천도 되고, 모든 풍자의 열쇠도 되지만 그것은 자살의 기초도 되고,타락의 목표도 되며,비밀에 쌓여진 모든 눈짓의 의미가 된다. -쇼펜하우어-



그녀가 아웃웨어로 입었던 고어텍스 원단의 값비싼 덕다운 파카는 벗겨져 움막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 파카는 뒤에 달린 후드조차 안감 속에 마이크로 로프트를 넣어서 보온효과를 증폭시킨 옷으로, 눈처럼 흰 바탕면에 청색으로 감각적인 도형을 집어넣어 매우 캐주얼한 느낌을 준 것이었다. 그녀는 그 파카를 보자마자 이건 내꺼야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 옷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직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어서 어쨌든간에 그녀의 첫느낌이 그녀를 살린 셈이 되었다. 그녀가 오버트라우져로 선택했던 덧바지 역시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말덴사의 태그를 부착한 두터운 플리스 원단으로 만들어진,탁월한 방풍효과를 가진 등산용 팬츠였다.

그녀가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 방안에 자그마한 쇠화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숯이 잔뜩 넣어져 빨갛게 달궈진 화로 안에 검게 그을은 놋쇠 주전자가 들어앉아 연기같은 김을 올리고 있었다. 바닥엔 처음 보는 가죽같은 것이 깔려 있었는데 따뜻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사내가 진흙이나 슬레이트 따위로 구들을 놓은 모양이었다. 창문은 없었고 천정은 매우 낮았는데 사람이 허리를 펴고 앉으면 머리가 거의 닿을 정도였다. 마치 일제시대때 썼던 것같은 남포등이 벽에 걸려 심지를 태우고 있어서,흐릿하고 노란 불빛이 움막 안에 정적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을 보자 사내는 사기그릇을 하나 꺼내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수저로 무언가를 타 넣더니만 그녀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녀가 얼떨결에 그릇을 받자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발치에 앉아 그녀의 양말을 휙 벗겨버렸다. 그 양말은 폴리프로필렌과 천연울의 혼성모직물을 사용하여 쿠션과 착용감을 높인,전형적인 산악용 양말이어서 두텁지만 목이 짧아 쉽게 벗겨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깜짝 놀랐을 때 사내는 마치 손깍지를 끼듯이 그녀의 발가락과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깍지끼어 맛사지를 시작했다. 그녀는 거절하려 했지만 추호의 주저도 없는 사내의 확고한 움직임에 그만 거절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내가 그녀의 발을 감싸서 빠르게 마찰을 시작하자 그녀는 자신의 발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사발에 입을 대고 그 안의 것을 마셨다. 따뜻하고 뭐라 말할 수도 없이 감미로운 액체가 목으로 넘어갔는데 잠시후 그녀는 그것이 설탕물이란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직 힘이 없긴 했지만 이제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맑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가 발 마사지를 막 끝마쳤다. "고마워요,아저씨." 그녀가 배시시 웃었을때 사내가 말했다. "옷벗어,이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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