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해치우다 - 1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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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1,129회 작성일 20-01-17 12:52본문
그녀들을 해치우다진심으로 막막해서 사라의 이사짐으로 추정되는 이사를 한동안 지켜봤다. 담배를 길게 피우면서 본 결과, 의외로 윗집으로 사라가 이사오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핑크색의 침대를 제외하면 별로 여자의 물건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 없었던데다, 대형 액자 판넬이 몇개나 올라갔는데, 사라의 것도 있었지만, 다른 연예인들의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기 아래서 이사짐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는 기획사의 사장의 이사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대째 담배를 피우다가 그냥 들어왔던 것이다.
섭섭한 마음도 좀 들긴 했지만, 서운한 마음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에 올라탄 승객의 심정이 되었다. 정리가 필요했다. 가만히 최근의 일들을 생각했다. 제일 컸던 일은 역시 이진섭이라는 사람의 등장이었다. 믿지 않을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사람. 그의 말 그대로라면 난 올겨울 헤어졌었던 세인이를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지만, 세인이와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고, 3년이 있다가 죽어버린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의 전생이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도 생각해 봤었다. 언젠가 가즈오의 나라라는 김진명의 소설에서 익었던 내용이었는데, 거기서는 어떤 사람을 납치해서 최면으로 그의 기억을 모두 읽은다음,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에서 지운 후 풀어주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난 한번도 이진섭의 입에서 나온 일들, 그러니까 중학교 때 수학선생님의 은밀한 모습을 봤다던가, 내가 교회 헌금함에서 돈을 훔친적이 있다던가 하는 것을 내 사적기록인 일기에도 써본 적이 없다. 일기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부끄러운 일을 솔직히 적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일을 겪은 적은 없었다. 사건 그 자체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어서, 해결방안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진섭은 자신의 과거가 나의 현재였기 때문에, 내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정확한 것은 이진섭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그의 전생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그의 존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이진섭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진섭은 자신의 오랜 꾸민, 특히나 다시 태어나 두번째 삶을 살면서 내내 꿈꿔왔던 일인 그의 낙원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다.
인간은 원래 하나의 꿈에 사로잡히면, 그 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어진다. 거기에다 이진섭은 오랫동안 사교단체의 후계자로 커왔다. 종교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이진섭이 나의 인생을 몽땅 살아온 것이 진짜라면, 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는데에 특출할 것이 틀림없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난 도덕적으로 살아왔지만, 필요하다면, 도덕이나 인의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한동안 생각을 집중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이런 상황을 벗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난 이미 이진섭이라는 거대한 정치망 그물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테리우스의 말처럼 도망치려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난 모든 상황에서 이진섭을 의식하고 있었다. 설령 이사를 온다고 해도 내 생활과는 별 상관이 없을 윗집의 이사에서조차 난 이진섭이 혹시나 나를 어떻게 할 목적으로-심지어 난 그 목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그 이사를 사주하고 있지 않은가를 의심했다.
사태는 심각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삼십분을 다른 것을 의식하지 못한채로 몰아에 빠져 내가 내린 결론은 의심할 때까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의식하지 않는다고 결심을 해도 결국 의식하고 말 것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겠지만 가시를 잔뜩 세우고, 일단은 촉수에 닿는 모든 것에 움추르며 산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짜장면을 반 정도 먹었지만, 배가 고팠다. 미친 척하고 다시 똑같은 중국집에, 똑같은 주문을 했다. 사장은 혹시나 배달이 되지 않았나를 물었는데, 난 그냥 맛있어서 그런 거라면서 다시 짜장면을 주문하고는 tv를 켰다.
람보 2가 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형수님이 오기 전 난 분명 평화방송을 보고 있었었다. 채널을 돌린 적이 없었는데, 왜 람보2가..채널을 확인했더니, 영화 케이블 채널이었다. tv를 보고 끈 건, 분명히 나였었다. 깜짝 놀라서 시계를 확인했다. 혹시나 진짜로 기억이 지워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을까? tv를 보고 끌 때 혹시나 내가 잘못 눌러서 그렇게 된건가를 수백번도 더 고민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난 tv를 늘 보는 것만 보기 때문에 채널기억을 시켜놓았고, 두자리 숫자인 영화케이블채널의 번호를 직접 누르지 않고는 내 tv에서 직접적으로 그 채널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 들었지만, 의심을 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밀검사로 우리 집을 검사해주기로 한 업체에도 이진섭의 입김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들었지만, 무작위로 내가 선택한 그곳이 어떻게 이신섭이 영향을 끼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후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진섭의 그물은 거둬들여질 것이고, 난 곧 물을 잃은 정어리나 고등어가 되어서 숨을 헐떡이게 될 것이다.
정신을 차리려고 세수를 했다. 찬물을 뒤집어쓰자 달아올랐던 머리가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며칠동안 하지 않았던 청소를 좀 할까 했는데, 막상 몸을 움직일려니 내키지 않아서 그냥 내처 누워 tv를 보면서 짜장면을 기다렸다. 초인종이 울려서, 짜장면인가 하고 나갔더니, 미연이였다. 미연이가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늘 밤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던 놈인데, 형수님의 말도 궁금해지고 해서 일단 문을 열었다.
체향이 강렬했다. 향수를 뒤집어 쓴 것이 아닐텐데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존재감이 강해서, 눈을 비비고 미연이를 다시 봤을 정도였다. 미연이는 문을 열고 나를 보자마자 한 방울 눈물을 여배우처럼 흘렸다. 실제로 한쪽 눈으로만 우는 사람을 처음봐서 무척 당황했다.
"아저씨, 왜 그랬어요?"
"응?"
"왜 그랬냐고요. 내가 묻는 거 어떤 건지 알잖아요?"
"......."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대체 왜 그랬어요?"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참 없구나라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게 죄는 짓는 것이 아니다. 난 늘 후회흘 하면서도, 후회를 하고나서야 그걸 깨닫는다. 울고 있는 미연이를 일단 들어오게 했다. 볼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파트 문을 열어놓고 자기 엄마와 섹스를 했다고 울고 있는 딸을 마주대할 자신이 없었다. 열린 문이 두려웠다. 미연이는 소파에 앉아서도 계속 왜 그랬냐고만을 묻고 또 물었고, 난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진짜로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를 수없이 말하는 동안, 내가 쓰레기 같이 느껴져서 숨이 막혔다. 물이라도 줄까해서 주방으로 가는데, 뭔가가 번쩍했다.
창밖으로 강렬한 빛이 보였다. 차갑지 않은 온기가 느껴지는 밝음이었다. 귀에 우렁우렁한 동굴에서 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빛을 똑바로 보고 싶었지만 너무 밝아 그럴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점점 또렷하게 내용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동굴에서 나는 듯한 목소리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받아들이라."
섭섭한 마음도 좀 들긴 했지만, 서운한 마음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에 올라탄 승객의 심정이 되었다. 정리가 필요했다. 가만히 최근의 일들을 생각했다. 제일 컸던 일은 역시 이진섭이라는 사람의 등장이었다. 믿지 않을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사람. 그의 말 그대로라면 난 올겨울 헤어졌었던 세인이를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지만, 세인이와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고, 3년이 있다가 죽어버린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의 전생이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도 생각해 봤었다. 언젠가 가즈오의 나라라는 김진명의 소설에서 익었던 내용이었는데, 거기서는 어떤 사람을 납치해서 최면으로 그의 기억을 모두 읽은다음,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에서 지운 후 풀어주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난 한번도 이진섭의 입에서 나온 일들, 그러니까 중학교 때 수학선생님의 은밀한 모습을 봤다던가, 내가 교회 헌금함에서 돈을 훔친적이 있다던가 하는 것을 내 사적기록인 일기에도 써본 적이 없다. 일기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부끄러운 일을 솔직히 적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렇게 황당한 일을 겪은 적은 없었다. 사건 그 자체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어서, 해결방안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진섭은 자신의 과거가 나의 현재였기 때문에, 내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정확한 것은 이진섭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그의 전생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그의 존재가 어떻게 될 것인지 이진섭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진섭은 자신의 오랜 꾸민, 특히나 다시 태어나 두번째 삶을 살면서 내내 꿈꿔왔던 일인 그의 낙원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다.
인간은 원래 하나의 꿈에 사로잡히면, 그 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어진다. 거기에다 이진섭은 오랫동안 사교단체의 후계자로 커왔다. 종교와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이진섭이 나의 인생을 몽땅 살아온 것이 진짜라면, 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는데에 특출할 것이 틀림없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난 도덕적으로 살아왔지만, 필요하다면, 도덕이나 인의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한동안 생각을 집중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이런 상황을 벗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난 이미 이진섭이라는 거대한 정치망 그물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테리우스의 말처럼 도망치려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난 모든 상황에서 이진섭을 의식하고 있었다. 설령 이사를 온다고 해도 내 생활과는 별 상관이 없을 윗집의 이사에서조차 난 이진섭이 혹시나 나를 어떻게 할 목적으로-심지어 난 그 목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그 이사를 사주하고 있지 않은가를 의심했다.
사태는 심각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삼십분을 다른 것을 의식하지 못한채로 몰아에 빠져 내가 내린 결론은 의심할 때까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의식하지 않는다고 결심을 해도 결국 의식하고 말 것이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겠지만 가시를 잔뜩 세우고, 일단은 촉수에 닿는 모든 것에 움추르며 산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짜장면을 반 정도 먹었지만, 배가 고팠다. 미친 척하고 다시 똑같은 중국집에, 똑같은 주문을 했다. 사장은 혹시나 배달이 되지 않았나를 물었는데, 난 그냥 맛있어서 그런 거라면서 다시 짜장면을 주문하고는 tv를 켰다.
람보 2가 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형수님이 오기 전 난 분명 평화방송을 보고 있었었다. 채널을 돌린 적이 없었는데, 왜 람보2가..채널을 확인했더니, 영화 케이블 채널이었다. tv를 보고 끈 건, 분명히 나였었다. 깜짝 놀라서 시계를 확인했다. 혹시나 진짜로 기억이 지워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을까? tv를 보고 끌 때 혹시나 내가 잘못 눌러서 그렇게 된건가를 수백번도 더 고민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난 tv를 늘 보는 것만 보기 때문에 채널기억을 시켜놓았고, 두자리 숫자인 영화케이블채널의 번호를 직접 누르지 않고는 내 tv에서 직접적으로 그 채널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 들었지만, 의심을 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정밀검사로 우리 집을 검사해주기로 한 업체에도 이진섭의 입김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들었지만, 무작위로 내가 선택한 그곳이 어떻게 이신섭이 영향을 끼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후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진섭의 그물은 거둬들여질 것이고, 난 곧 물을 잃은 정어리나 고등어가 되어서 숨을 헐떡이게 될 것이다.
정신을 차리려고 세수를 했다. 찬물을 뒤집어쓰자 달아올랐던 머리가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며칠동안 하지 않았던 청소를 좀 할까 했는데, 막상 몸을 움직일려니 내키지 않아서 그냥 내처 누워 tv를 보면서 짜장면을 기다렸다. 초인종이 울려서, 짜장면인가 하고 나갔더니, 미연이였다. 미연이가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늘 밤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던 놈인데, 형수님의 말도 궁금해지고 해서 일단 문을 열었다.
체향이 강렬했다. 향수를 뒤집어 쓴 것이 아닐텐데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존재감이 강해서, 눈을 비비고 미연이를 다시 봤을 정도였다. 미연이는 문을 열고 나를 보자마자 한 방울 눈물을 여배우처럼 흘렸다. 실제로 한쪽 눈으로만 우는 사람을 처음봐서 무척 당황했다.
"아저씨, 왜 그랬어요?"
"응?"
"왜 그랬냐고요. 내가 묻는 거 어떤 건지 알잖아요?"
"......."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대체 왜 그랬어요?"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참 없구나라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게 죄는 짓는 것이 아니다. 난 늘 후회흘 하면서도, 후회를 하고나서야 그걸 깨닫는다. 울고 있는 미연이를 일단 들어오게 했다. 볼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파트 문을 열어놓고 자기 엄마와 섹스를 했다고 울고 있는 딸을 마주대할 자신이 없었다. 열린 문이 두려웠다. 미연이는 소파에 앉아서도 계속 왜 그랬냐고만을 묻고 또 물었고, 난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진짜로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를 수없이 말하는 동안, 내가 쓰레기 같이 느껴져서 숨이 막혔다. 물이라도 줄까해서 주방으로 가는데, 뭔가가 번쩍했다.
창밖으로 강렬한 빛이 보였다. 차갑지 않은 온기가 느껴지는 밝음이었다. 귀에 우렁우렁한 동굴에서 나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빛을 똑바로 보고 싶었지만 너무 밝아 그럴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점점 또렷하게 내용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동굴에서 나는 듯한 목소리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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