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을 해치우다 - 2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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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468회 작성일 20-01-17 12:52본문
그녀들을 해치우다내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새로운 글씨체를 연습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워드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편지를 보낼까도 생각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가상의 여학생 a양은 손글씨가 예쁜 얼굴이 선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여자글씨를 좀 쓰는 편이었지만, 이창동 선생을 관찰하는 내내 연습을 계속해서 그럴듯한 글씨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 한 일은 a양의 이미지랑 맞는 여학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창동 선생이 오해를 할 수 있고, 그럼에도 빠질만한 외모와 품성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이창동 선생이 들이댔을 때에 어느 정도는 받아줄 수 있는 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과적으로 한 여학생을 낙점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오지은, 나와 같은 2학년이었고, 이른바 착한 여자로 인기가 꽤 있었다. 얼굴이 그렇게 예쁘진 않았지만, 차분하고 여성스러운데다 나직한 목소리의 조용조용한 언행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꽤 됐다. 내가 만든 a양은 오지은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오지은을 따왔지만, 자세히 살피면 오지은이 아니라는 걸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오해가 없기도 하고, 이창동 선생을 궁지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내내 책을 읽으면서, 이창동 선생을 관찰하며 그의 일상과 오지은을 따온 a양을 어떤 식으로 마주치게 할 건가를 고민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오정희나 은희경의 소설을 손으로 베껴쓰곤 했기 때문에, 내 독특한 삶의 방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귀찮았던 나는 기왕에 빌린 가게를 그냥 썪혀둘수는 없다는 핑계로 가게에다 내 개인 공부방을 차려서, 그곳에서 방과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한권 두권 사모은 책들을 모두 옮겨놓고, 테이블들을 모두 치우고 침대까지 가져다 놓아서 혼자서 사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난 다음 달로 기숙사를 나와서 가게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나온 것은 이창동 선생을 향한 복수를 계획하기에 가게가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학교 앞 꼬치집이 살림집으로 변모하자 학생들의 관심은 폭발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우리학교 학생이 아닌 여고나 여중의 학생들이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시멘트 바닥을 장판으로 바꾸고, 소파를 가져다 놓은데다, 눈에 보이는 곳마다 책이 가득한 꼬치집이 뭔가 있어보였는지, 몇 번을 왔던 학생들도 다시 문을 두드리고는 책을 빌려가곤 했다. 방과후면 내 살림집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지만, 드나드는 학생들을 상대로 별다른 경제활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측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난 집 앞에 하나의 작은 간판을 달았다.
"섬"
섬은 독특한 공간이었다. 주인이 있건 없건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주인은 다른 사람들이 있건 없건 마음대로 행동했다. 난 여고생들이 떡볶이를 해먹으면서 한쪽에서 떠들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한쪽 곁에 누워 잠을 잤으며, 때때로 잘 곳이 없는 가출소년들에게 소파를 제공하기도 했다.
단지 몇가지의 원칙은 있었다. 먹을 것은 들고 와서 먹는다. 냉장고를 건드렸을 때는 반드시 채워둔다. 책은 읽고나면 반드시 있던 자리에 꽂아둔다. 청소를 한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는다. 섬에 와 있을 땐, 주위 사람들을 상관치 않는다 같은 거였는데, 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적게는 하루, 많게는 이삼주일이라도 언제든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에, 원칙들은 거의 제대로 지켜지는 편이었다.
섬은 독특한 공간이었지만, 그런 공간이 지속적으로 있다보니 늘 섬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때때로 자기돈으로 책을 사와서 꽂아두거나, 내가 먹을 밥같은 것을 차려두거나 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는데, 난 그럴 때마다 거절하는 법이 없이 받아들였고, 난 점점 기인 비슷한 위치를 가지게 됐다.
이창동 선생에게 맞은 지도 두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난 슬슬 새로운 가게를 하나 시작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엄마 이름으로 가게를 내고, 아주머니를 고용하는 것도 새로 구해서 전혀 다른 가게를 만들 것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양지원이 들어왔다. 지원이는 나와 같이 맞은 여학생이었는데, 내가 섬을 열자마자 내내 섬을 찾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뭐 해?"
"응, 그냥. 왜 왔냐?"
"내가 일 있어 오나. 그냥 왔지. 야자 안갈거야?"
"응."
"공부엔 진짜 관심이 없네. 또 소설 베껴 쓰는 거야? 이번엔 뭐?"
"김형경의 세월. 좋아하는 책이라서."
"그게 연습이 돼? 작가가 될거니?"
"아니. 글씨 연습을 하는 거야. 좀 더 예쁜 글씨체를 가지고 싶어서."
"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나저나 여긴 진짜 좋아. 진짜 현실과 떨어진 섬같은 곳인 것 같아. 시간이 따로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랄까."
"어제 어떤 여자애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던데."
"누구?"
모르겠어. 자주 오는 사람은 아니라서."
"진짜 신기해. 모른 사람이 자기 집에 이렇게 막 드나들어도 아무렇지 않아? 저번에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옷도 갈아입더라. 완전 놀랐어."
"사각인데 뭐. 내가 뭐 보여준거나 있나. 나도 양식이 있으니까 사람이 있을 때는 속옷을 갈아입거나 하진 않지. 그리고 이런 곳 하나 있어도 좋잖아. 학교 도서관보다 더 읽을만한 건 많을 걸."
"뭘 좀 먹을래? 내가 라면이라도 끓일까?"
"쫄면 먹을래?"
"해줄거야?"
"응, 2000원이다. 대신에 양은 곱배기로 해줄게."
공짜는 없었다. 난 뭐든 어떤 것을 제공할 땐 늘 돈을 받았다. 심지어는 책을 빌려가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받았고, 책을 분실하거나 훼손한 경우에는 새책을 사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지원이는 순순히 돈을 내밀었고, 난 쫄면을 삶기 시작했다. 분식점의 건물을 바꾼 경우라서 어떤 요리든 재료만 있으면 가능했고, 난 가끔 이런 식으로 먹을 걸 팔았다. 쫄면을 만들어 삶은 계란까지 실로 잘라서 반쪽을 올려놓고 지원이에게 가져다 주고 난 냄비채로 먹으려고 지원이가 앉아있던 테이블 반대편에 앉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정빈이라는 중학교 3학년 남자애였는데, 나를 심하게 동경하는 아이였다. 손에 뭘 들고 온 걸 보니, 또 자기 집에다 이야기해서 뭘 싸온 모양이었다. 정빈이는 이렇게 늘 고기를 재오거나 반찬을 만들어오거나 했다. 나와 지원이를 보자 꾸벅 인사를 하면서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냉장고에 넣어두며 말했다.
"형, 여기 이거 고기 재운 건데요. 드세요."
"고맙다."
"아뇨. 혹시 혜란이 왔다 갔어요? 여기 있겠다고 했었는데."
"아니. 오늘은 못봤는데. 오겠지 뭐."
"오면 이것 좀 전해주세요."
"알았다."
"그럼, 저 있다가 열시 쯤에 올게요."
"어."
정빈이가 나가자 지원이가 쫄면을 먹으면서 물었다.
"혜란이가 누구야?"
"정빈이가 사귀는 애. 여중 2학년."
"걔도 여기 오는 거야?"
"정빈이 때문에 오는 거지 뭐. 너도 한 두 번쯤 봤을 걸."
"그나저나 용케 학교에서 섬을 봐주네."
"너랑 나 때문이지. 폭행을 당했잖아. 난 진단서도 가지고 있고, 공소시효고 뭐고, 학교 입장에선 외부에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거든. 난 심지어 맞은 사진이나 비디오 자료도 가지고 있거든."
"문제를 삼을 거야?"
"아니, 그냥 내 행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가지고 있는 여권같은 거지. 자유에 입국하기 위한 프리패스 같은 거랄까?"
"진짜 멋있다. 좋아해도 되나?"
"응, 내가 널 좋아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으면."
"괜찮아. 날 좋아하게 될 테니까."
마치 남자와 비슷한 대화를 하고는 지원이는 돌아가버렸고, 난 설거지를 하고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뭔가 심심한 기분이 들어서 노래를 들을까 싶어서 cd장을 하나씩 꺼내다가 셀린디온의 cd를 꺼내 미니오디오에 거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늘 있는 일이어서 난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술냄새가 확 나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한눈에 양아치로 보이는 고등학생이 담배를 꼬나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은 녀석은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꽉쥐고는 개수대에 물고 있던 담배를 버리더니 잇새로 말했다.
"니가 그 이경민이냐?"
"넌 누군데?"
"어디서? 나 3학년이야. 니가 그 이경민 맞아?"
"선배님이시네. 어. 그래도 여긴 술먹은 사람을 출입금지니까 나가서 이야기 하던지."
"나 다 때려부수러 왔거든. 하나만 물어보자. 전민정알지?"
"누군데? 기억이 안나네. 어떻게 생겼는데요? 예쁘면 기억을 하겠지만."
"여기 매일 온다고 들었는데, 모른다고?"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돼요? 내가 알만큼 유명한 선밴가?"
"광현고 지현상이다."
"안들어본 이름이네. 광현고면...찬경 선배랑 친구에요? 찬경 선배 친구면 하나쯤 조언을 해주고요. 여자를 잡으려면 투정을 부려서는 아무것도 안되요. 술깨고 내일 와요. 여자를 꼬시는 방법을 알려줄테니까. 그 여자가 누구든."
되게 쉽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cd 케이스에서 cd를 꺼내는데, 배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짜고짜 그 망할 새끼가 내 배를 주먹으로 때린 것이었다.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망할 새끼. 배를 움켜쥔 내 옆구리를 걷어차서 쓰러트린 그 지현상이라는 미친새끼는 미친 것처럼 나를 밟아대더니, 책장 하나를 엎었다. 큰 소리가 나고, 옆의 슈퍼 주인이 섬의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씨발이라고 크게 욕을 하는 지현상의 기세에 눌려, 나가버렸다. 그리고 3분 정도를 정신없이 맞고 있는데, 우리 가게의 문을 다시 누군가 열고 들어오길래 봤더니 경찰이었다. 슈퍼의 주인이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난 경찰서로 끌려갔고, 내 신병을 인도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람이 왔는데, 그는 그날 당직을 서고 있었던 이창동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오지은, 나와 같은 2학년이었고, 이른바 착한 여자로 인기가 꽤 있었다. 얼굴이 그렇게 예쁘진 않았지만, 차분하고 여성스러운데다 나직한 목소리의 조용조용한 언행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꽤 됐다. 내가 만든 a양은 오지은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오지은을 따왔지만, 자세히 살피면 오지은이 아니라는 걸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오해가 없기도 하고, 이창동 선생을 궁지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내내 책을 읽으면서, 이창동 선생을 관찰하며 그의 일상과 오지은을 따온 a양을 어떤 식으로 마주치게 할 건가를 고민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오정희나 은희경의 소설을 손으로 베껴쓰곤 했기 때문에, 내 독특한 삶의 방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귀찮았던 나는 기왕에 빌린 가게를 그냥 썪혀둘수는 없다는 핑계로 가게에다 내 개인 공부방을 차려서, 그곳에서 방과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한권 두권 사모은 책들을 모두 옮겨놓고, 테이블들을 모두 치우고 침대까지 가져다 놓아서 혼자서 사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난 다음 달로 기숙사를 나와서 가게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나온 것은 이창동 선생을 향한 복수를 계획하기에 가게가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학교 앞 꼬치집이 살림집으로 변모하자 학생들의 관심은 폭발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우리학교 학생이 아닌 여고나 여중의 학생들이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시멘트 바닥을 장판으로 바꾸고, 소파를 가져다 놓은데다, 눈에 보이는 곳마다 책이 가득한 꼬치집이 뭔가 있어보였는지, 몇 번을 왔던 학생들도 다시 문을 두드리고는 책을 빌려가곤 했다. 방과후면 내 살림집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지만, 드나드는 학생들을 상대로 별다른 경제활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측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난 집 앞에 하나의 작은 간판을 달았다.
"섬"
섬은 독특한 공간이었다. 주인이 있건 없건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주인은 다른 사람들이 있건 없건 마음대로 행동했다. 난 여고생들이 떡볶이를 해먹으면서 한쪽에서 떠들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한쪽 곁에 누워 잠을 잤으며, 때때로 잘 곳이 없는 가출소년들에게 소파를 제공하기도 했다.
단지 몇가지의 원칙은 있었다. 먹을 것은 들고 와서 먹는다. 냉장고를 건드렸을 때는 반드시 채워둔다. 책은 읽고나면 반드시 있던 자리에 꽂아둔다. 청소를 한다.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는다. 섬에 와 있을 땐, 주위 사람들을 상관치 않는다 같은 거였는데, 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적게는 하루, 많게는 이삼주일이라도 언제든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에, 원칙들은 거의 제대로 지켜지는 편이었다.
섬은 독특한 공간이었지만, 그런 공간이 지속적으로 있다보니 늘 섬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때때로 자기돈으로 책을 사와서 꽂아두거나, 내가 먹을 밥같은 것을 차려두거나 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는데, 난 그럴 때마다 거절하는 법이 없이 받아들였고, 난 점점 기인 비슷한 위치를 가지게 됐다.
이창동 선생에게 맞은 지도 두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난 슬슬 새로운 가게를 하나 시작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엄마 이름으로 가게를 내고, 아주머니를 고용하는 것도 새로 구해서 전혀 다른 가게를 만들 것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양지원이 들어왔다. 지원이는 나와 같이 맞은 여학생이었는데, 내가 섬을 열자마자 내내 섬을 찾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뭐 해?"
"응, 그냥. 왜 왔냐?"
"내가 일 있어 오나. 그냥 왔지. 야자 안갈거야?"
"응."
"공부엔 진짜 관심이 없네. 또 소설 베껴 쓰는 거야? 이번엔 뭐?"
"김형경의 세월. 좋아하는 책이라서."
"그게 연습이 돼? 작가가 될거니?"
"아니. 글씨 연습을 하는 거야. 좀 더 예쁜 글씨체를 가지고 싶어서."
"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나저나 여긴 진짜 좋아. 진짜 현실과 떨어진 섬같은 곳인 것 같아. 시간이 따로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랄까."
"어제 어떤 여자애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던데."
"누구?"
모르겠어. 자주 오는 사람은 아니라서."
"진짜 신기해. 모른 사람이 자기 집에 이렇게 막 드나들어도 아무렇지 않아? 저번에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옷도 갈아입더라. 완전 놀랐어."
"사각인데 뭐. 내가 뭐 보여준거나 있나. 나도 양식이 있으니까 사람이 있을 때는 속옷을 갈아입거나 하진 않지. 그리고 이런 곳 하나 있어도 좋잖아. 학교 도서관보다 더 읽을만한 건 많을 걸."
"뭘 좀 먹을래? 내가 라면이라도 끓일까?"
"쫄면 먹을래?"
"해줄거야?"
"응, 2000원이다. 대신에 양은 곱배기로 해줄게."
공짜는 없었다. 난 뭐든 어떤 것을 제공할 땐 늘 돈을 받았다. 심지어는 책을 빌려가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받았고, 책을 분실하거나 훼손한 경우에는 새책을 사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지원이는 순순히 돈을 내밀었고, 난 쫄면을 삶기 시작했다. 분식점의 건물을 바꾼 경우라서 어떤 요리든 재료만 있으면 가능했고, 난 가끔 이런 식으로 먹을 걸 팔았다. 쫄면을 만들어 삶은 계란까지 실로 잘라서 반쪽을 올려놓고 지원이에게 가져다 주고 난 냄비채로 먹으려고 지원이가 앉아있던 테이블 반대편에 앉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정빈이라는 중학교 3학년 남자애였는데, 나를 심하게 동경하는 아이였다. 손에 뭘 들고 온 걸 보니, 또 자기 집에다 이야기해서 뭘 싸온 모양이었다. 정빈이는 이렇게 늘 고기를 재오거나 반찬을 만들어오거나 했다. 나와 지원이를 보자 꾸벅 인사를 하면서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냉장고에 넣어두며 말했다.
"형, 여기 이거 고기 재운 건데요. 드세요."
"고맙다."
"아뇨. 혹시 혜란이 왔다 갔어요? 여기 있겠다고 했었는데."
"아니. 오늘은 못봤는데. 오겠지 뭐."
"오면 이것 좀 전해주세요."
"알았다."
"그럼, 저 있다가 열시 쯤에 올게요."
"어."
정빈이가 나가자 지원이가 쫄면을 먹으면서 물었다.
"혜란이가 누구야?"
"정빈이가 사귀는 애. 여중 2학년."
"걔도 여기 오는 거야?"
"정빈이 때문에 오는 거지 뭐. 너도 한 두 번쯤 봤을 걸."
"그나저나 용케 학교에서 섬을 봐주네."
"너랑 나 때문이지. 폭행을 당했잖아. 난 진단서도 가지고 있고, 공소시효고 뭐고, 학교 입장에선 외부에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거든. 난 심지어 맞은 사진이나 비디오 자료도 가지고 있거든."
"문제를 삼을 거야?"
"아니, 그냥 내 행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가지고 있는 여권같은 거지. 자유에 입국하기 위한 프리패스 같은 거랄까?"
"진짜 멋있다. 좋아해도 되나?"
"응, 내가 널 좋아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으면."
"괜찮아. 날 좋아하게 될 테니까."
마치 남자와 비슷한 대화를 하고는 지원이는 돌아가버렸고, 난 설거지를 하고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뭔가 심심한 기분이 들어서 노래를 들을까 싶어서 cd장을 하나씩 꺼내다가 셀린디온의 cd를 꺼내 미니오디오에 거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늘 있는 일이어서 난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술냄새가 확 나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한눈에 양아치로 보이는 고등학생이 담배를 꼬나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은 녀석은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꽉쥐고는 개수대에 물고 있던 담배를 버리더니 잇새로 말했다.
"니가 그 이경민이냐?"
"넌 누군데?"
"어디서? 나 3학년이야. 니가 그 이경민 맞아?"
"선배님이시네. 어. 그래도 여긴 술먹은 사람을 출입금지니까 나가서 이야기 하던지."
"나 다 때려부수러 왔거든. 하나만 물어보자. 전민정알지?"
"누군데? 기억이 안나네. 어떻게 생겼는데요? 예쁘면 기억을 하겠지만."
"여기 매일 온다고 들었는데, 모른다고?"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돼요? 내가 알만큼 유명한 선밴가?"
"광현고 지현상이다."
"안들어본 이름이네. 광현고면...찬경 선배랑 친구에요? 찬경 선배 친구면 하나쯤 조언을 해주고요. 여자를 잡으려면 투정을 부려서는 아무것도 안되요. 술깨고 내일 와요. 여자를 꼬시는 방법을 알려줄테니까. 그 여자가 누구든."
되게 쉽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cd 케이스에서 cd를 꺼내는데, 배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짜고짜 그 망할 새끼가 내 배를 주먹으로 때린 것이었다.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망할 새끼. 배를 움켜쥔 내 옆구리를 걷어차서 쓰러트린 그 지현상이라는 미친새끼는 미친 것처럼 나를 밟아대더니, 책장 하나를 엎었다. 큰 소리가 나고, 옆의 슈퍼 주인이 섬의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씨발이라고 크게 욕을 하는 지현상의 기세에 눌려, 나가버렸다. 그리고 3분 정도를 정신없이 맞고 있는데, 우리 가게의 문을 다시 누군가 열고 들어오길래 봤더니 경찰이었다. 슈퍼의 주인이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난 경찰서로 끌려갔고, 내 신병을 인도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람이 왔는데, 그는 그날 당직을 서고 있었던 이창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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