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3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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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839회 작성일 20-01-17 15:30본문
트렁크 팬티를 걸쳐 입은 강민우는 이진아의 하얀 잠옷을 들고 망설였다. 그리고 팬티 차림으로 누워있는 그녀의 머리위로 부터 잠옷을 끼어 넣었다. 어린아이의 옷을 입히듯이 팔을 차례대로 끼워놓고 잠옷을 밑으로 잡아 다녀 입혔다. 잠옷을 입힐 동안 말똥말똥 올려다보고만 있던 이진아가 발딱 일어나 앉았다.
“가기 싫어! 그냥, 나 여기서 자면 안 돼?”
“새벽에는 추울 것 같아서. 진아, 편한 데로 해.”
강민우는 자신의 가슴 속을 파고들며 열기로 달아오르던 그녀를 생각했다. 발랄하고 청순했던 그녀의 표정에서 성적인 매력마저 느꼈다. 이제 강민우에게 그녀는 오직 여자로서 존재한다. 그는 가족도 없는 그녀를 영원히 보호해야하는 남자일 뿐이다. 물론 강민우가 그녀의 부모를 찾아 주려고 노력도 해봤었다.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몇 번 참여도 해봤으나 아직까지 이진아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강민우는 평생 가족 없이 살아야할 이진아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가 언제까지나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이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강민우는 단하나의 가족이고 남자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 남자의 여자가 되는 의식이라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느껴 보지 못한 혼돈의 회오리였다. 모세 혈관들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모든 감정이 몰입되는 희열이었다. 여자의 성욕은 혈관 내에서 생긴 하나의 규율이다. 강민우는 그녀가 몰랐던 신체의 규율까지도 일깨워 준 남자였다. 그녀가 강민우의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은 순결함을 되찾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었다. 멍에가 되어 끈질기게 그녀의 인생을 어둠속에 가두어버린 과거, 분노조차 메말라 버린 상처는 그녀의 뼛속깊이 새겨져 있었다.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그 상처를 벗어나지 않고는 살아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 상처를 벗겨내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자신을 보살펴 준 남자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공연히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아서 강민우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캠퍼스생활을 시작하면서 고민했던 해답이었다.
평생 이 순간을 간직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강민우와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은 것 같았다. 등을 돌렸던 이진아는 몸을 돌려 강민우를 향해 누웠다. 그리고 와락 강민우의 귀를 잡아 당겼다. 얼떨결에 얼굴이 잇닿은 강민우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슬이 맺혀 반짝거렸다. 그녀의 뜨거운 혀가 강민우의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아쉬운 듯이 혀와 혀가 엉키었다.
강민우는 입술을 헤집고 들어오는 그녀의 혀를 받아들이며 다시 뜨거워지는 그녀의 체취를 느낀다. 입안에 생명수 같은 타액이 고이기 시작하고, 그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서로의 영혼을 들이마셨다. 습기어린 그녀의 눈동자는 꿈을 꾸듯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남녀 간의 육체의 접촉은 말보다 민감하고 빠른 감정의 표현이다.
“오빠, 안아 줘.”
가슴으로 울고 있는 그녀는 파닥거리는 은어처럼 강민우의 가슴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어 뜨겁고 아득한 불길 속에 서로의 고통을 불태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잇는 남자가 수수께끼라고 했다. 자신이 던진 수수께끼의 해답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치 강물처럼 달빛이 흐르는 밤에 그들은 다시 한 몸이 되어 미지의 어둠속을 달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고고하게 흐르던 달빛이 사라지고 아침 햇살에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뒤척이던 강민우는 눈부신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같이 침대에 누워서 자던 이진아는 보이지 않고 왠지 썰렁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방으로 가서 잠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어나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세면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것 같이 느꼈다. 진 씨 할머니가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자니 입맛이 없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거실을 나서려다가 이진아가 궁금했다. 촉촉한 눈빛으로 가슴을 파고들던 그녀가 보고 싶었다. 발길을 돌려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서는 싸늘한 한기만 흘러 나왔다. 방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책상은 잘 정돈 되어 있고 눈에 띠던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책꽂이가 반은 비어 있었다. 불길한 생각에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부리나케 거실로 나가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승용차도 보이지 않았다.
강민우는 독립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던 그녀의 표정과 습기 어린 눈동자가 떠올랐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불안감. 갑자기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현기증을 느끼면서 주방으로 향해 간다.
“할머니! 할머니!?”
“응, 식사 다했나.”
주방 옆의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진 씨 할머니가 돋보기안경을 쓰고 나왔다.
“진아 일찍 나갔나요?”
“아니 항상 나갈 때는 말하고 가는데, 방에서 자고 있는 거 아녀?”
“아닌데요. 없어요.”
“그럼 말도 없이 나갔남?”
진 씨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강민우는 우선 호출기로 이진아에게 연락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혹시 진아에게 연락이 오면 저한테 전화하라고 하세요.”
“응, 그려. 급한 일이 있어서 일찍 나갔나?”
온 몸의 피가 빠져 나가는 허탈감에 젖은 강민우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집을 나왔다. 승용차를 몰고 마을을 빠져 나오는데 개들이 얼쩡거리는 것 조차 짜증이 났다.
민우는 방이동 사무실에 도착했으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가 사무실을 배회하는 모습을 보고 문경환도 왠지 불안하였다.
“실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렇게 보이나?”
문경환은 그렇다고 하려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NTIS 요원으로 추천해준 강 실장의 마음을 거슬리게 할 수는 없었다. 혹시 말을 잘못했다가 안기부 요원이 감각이 없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이따금 강 실장은 중요한 업무를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 지는 경우도 있었다. 문경환으로서는 지켜 볼 도리밖에 없었다. 한 동안 호출기로 문자를 발송하며 서성이던 강민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강민우가 사무실을 나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진아에게 호출기로 여러 번 문자를 넣었으나 여전히 응답이 없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커피라도 마시려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 내에는 NTIS 요원과 군복을 착용한 군대 계통의 정보원이 있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창가로 다가섰다. 그는 다시 이진아에게 문자를 발송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그렇게 삼십 여분을 커피 잔을 비우고도 서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는 완공된 인공 호수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송나희가 들어섰다. 등을 지고 있는 강민우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를 발견하고 지그시 바라보던 송나희는 커피를 뽑아들고 강민우에게 다가섰다.
“무슨 생각하세요?”
“아~! 그냥........”
강민우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벌써 이른 여름이 시작되었는지 바라보이는 잔디위에는 잠자리 때가 높이 날고 있었다. 오 국장의 부탁이 떠오른 송나희는 침묵하고 있는 강민우를 곁눈질로 살폈다. 꼭 오 국장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왠지 우울해 보이는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데 무척 근심스러워 보여요.”
“글쎄, 내가 그렇게 보였나.”
강민우는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관심을 받기도 싫고 오직 머릿속에는 이진아만 떠올려져졌다. 막상 호출기에 대한 응답이 오지 않으니 그녀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문득 이진아가 다니고 있는 대학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들고 있던 종이컵을 꾸겨 휴지통에 넣었다.
“미안해. 가볼 곳이 있어서.”
“.........!”
강민우는 송나희를 힐끔 쳐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왔다. 평상시에도 진중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강민우의 오늘 모습은 왠지 달라보였다. 그렇다고 직장 건물 내이기에 집착해서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송나희는 멍하니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진아가 다니는 KH대학에 도착한 강민우는 승용차에 내리자마자 학생과부터 찾아갔다. 푸른 숲과 잔디로 둘러싸인 캠퍼스 내의 풍경은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여유로웠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학생들이 한가롭게 거닐거나 잔디위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특히 여학생들은 보얀 살결을 들어내는 핫팬티나 미니스커트를 걸치고도 부끄러움 없이 발랄한 표정들이었다.
학생과로 들어간 강민우는 공연히 마음이 급했다. 업무에 열중하느라 시선을 주지 않는 담당 여직원의 탁자를 두드렸다, 깜짝 놀란 여직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올려다보았다. 그는 신분증부터 불쑥 내밀어 보였다.
“학생을 찾습니다.”
“어느 학생을 찾으시는데요?”
“체육과의 이진아라고.”
“뭘 알고 싶으세요. 직접 체육과로 가보시지요.”
“오늘 안 나온 것 같아서.”
“기다리세요.”
불쾌했는지 담당 여직원은 툭 쏘아 붙였다. 돌아선 여직원은 캐비닛을 열고 학생 명부를 뒤적거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강민우는 조바심이 났다. 한동안 캐비닛을 열고 닫으며 서류를 뒤적이던 여직원이 강민우를 향해 돌아섰다.
“이진아 학생을 왜 찾으시는데요?”
“제 동생입니다.”
“그런데 모르셨어요? 이틀 전에 휴학계를 냈는데요.”
“휴학계를 냈다고요.......!?”
“오라버니 되신다면서 모르셨어요?”
“다시 확인 해 주세요.”
“여기 보세요. 본인 자필로 낸 휴학계를.”
여직원이 도리어 짜증을 냈다. 강민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벌거숭이가 된 것 같이 허전하고, 추위를 느꼈다. 멍하니 여직원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뒤돌아섰다. 허탈함에 젖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모든 것이 이진아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 차를 몰고 방이동으로 왔는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강민우의 허리에 찬 호출기음이 울렸다. 기다리던 이진아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빠, 미안해. 기다리지 마. 연락할게]
기다렸기에 반갑기는 해도 실망스러웠다. 몇 번을 봐도 똑같은 문자였다. 문자로 봐서는 답장이 오지 않을 테지만 강민우는 잠간만이라도 만나자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방향 감각을 잃고 사무실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공원부지로 조성된 넓은 공터를 무작정 걷고 있었다.
걸었던 길을 되돌아 걸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 으스스 떨리고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목걸이에 달린 어머니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돌봐주느라 힘도 들었지만 막상 이진아가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어머니와 여동생이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당시보다 더한 외로움이 엄습했다.
얼마 전에 강민우는 왕릉 안기부에서 작성한 ‘광주 상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보고서를 봤었다. 그 당시 사망한 학생들의 인적사항과 알몸이 되어 처참하게 군화 발에 짓밟힌 여학생들의 명단이 있었다. 명단에는 이진아와 일치하는 학교명, 나이가 있었고 이름만 이진화로 나와 있었다. 이름을 잘못 작성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여학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광주사태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강민우에게도 치유할 수 없는 기억이지만, 여자의 몸으로 치욕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진아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광주사태로 인연이 되어 이진아를 만났고, 씻어내지 못할 고통으로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던 그녀였다. 이진아가 곁을 떠난 이유는 어쩌면 가슴에 못 박힌 과거를 스스로 청산하기 위한 것이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무모하고 여자의 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진아가 또 다른 위험에 처하기 전에 놈들을 처치하고 어머니 묘지 앞에 반지를 받쳐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진아가 사라진 지금 순간은 강민우는 황량한 사막을 걷는 마음이었다. 그에게는 참을 수없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맑게 개였던 날씨마저 흐릿해지고 소나기라도 내릴 듯이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공원 부지를 맴 돌던 강민우는 호수건너 대로를 건너갔다. 대로를 경계로 풍남동이었고 직원들과 자주 식사를 하던 음식점이 있었다.
풍남동으로 건너간 강민우는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점 주인인 시골 할머니 같은 손맛에 요원들이 단골로 찾는 음식점이었다. 강민우는 구석진 탁자 앞에 가서 앉았다. 종업원이 물 컵과 물병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이어서 언제나 친근한 인상으로 맞이하는 할머니가 그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웬일로 혼자 온 거여?”
“그냥 술 한 잔 마시려고요.”
“혼자서 술을!?”
“네. 날씨도 우중충하고 그래서요. 소주 한 병 주세요.”
“안주는 뭐로 줄까?”
“그냥 간단한 걸로 주세요.”
“딸이라도 있으면 사위 삼을 텐디.”
“하하~!”
할머니에게 자주 듣는 말에 강민우는 억지웃음을 흘렸다. 가게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강민우는 불쑥 일어나서 전화기 앞으로 다가섰다. 혹시나 군산의 불곰에게서 곽춘호에 대한 연락이라도 오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에서였다. 수화기를 집어 들고 사무실의 다이얼을 돌렸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던 문경환은 책상위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어 있었다. 전화기 벨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깬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다급하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느 날은 하루 한통화도 걸려오지 않는 전화 벨소리기 때문이다.
“네, 감찰실입니다.”
“나야! 별일 없어.”
“네. 실장님.”
문경환은 단번에 강민우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강 실장을 앞에 마주한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음, 무슨 일 있으면 41X-XXXX로 연락해.”
“아~! 네. 느티나무 집에 계신 겁니까?”
“음.”
간단한 통화로 전화가 끊겼다. 문경환은 실장이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음식점에 있는지 상상한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지나간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저녁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출근할 때부터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고 우울한 강 실장에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았다.
퇴근하기도 이른 시각이라 문경환은 서성거렸다. 이따금 예기치 않은 지시가 떨어질 경우도 있다. 하루 종일 있어도 해야 할 업무가 없는 날들이 있지만 돌연한 상황에 대비해야한다. 문경환은 아직도 감찰실의 업무에 대한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NTIS 요원들이 감찰실에 대해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이어서 문이 열렸다. 그리고 홍성식 팀장이 얼굴을 디밀고 두리번거렸다.
“강 실장님! 출장 가셨습니까?”
“아뇨! 느티나무 집에 계시다는 데요.”
“느티나무........!? 손님하고 계신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홍 팀장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사무실을 비우기는 아직은 이른 시간이지만 문경환은 강 실장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지 망설였다. 그러나 강 실장의 전화로 봐서는 무슨 연락인가 기다리는 것 같기에 포기를 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십 여분이 지났을까, 또다시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뜻밖에도 송나희 전산실장이 짙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두리번거린다.
“강 실장님, 어디 가셨어요?”
“아! 지금, 느티나무 집에 계신 것으로 아는데요.”
“누구하고 가셨어요?”
“모르겠는데요.”
주춤거리던 송 실장이 문이 닫고 나갔다. 똑같은 대답을 두 번씩 한 문경환은 멍하니 출입문을 보고 서 있었다. 오늘따라 강 실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보기 드문 상황이었다. 언젠가는 엘리트 요원이 되리라고 벼르고 있는 문경환은 새로운 작전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NTIS는 국내외 정보기관간의 정보 교환, 전산망을 통한 북한의 동태와 등 일상적인 업무 외에는 특별한 작전이 없었다. 국내에서는 국회가 개원되었고,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은 신설 야당이 군사정권을 비판하며 맹공격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소련이 대통령제 신설로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이 된 국제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문경환으로부터 강 실장이 느티나무 식당에 있다는 말을 들은 홍성식은 식당으로 찾아갔다. 식당 안에는 강실장 혼자서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곱창볶음이 자글거리는 식탁 앞에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는 강민우의 모습에 홍성식은 의아심을 갖고 다가갔다.
"형님! 웬일로 혼자서 술을......."
"아! 아우 왔나. 자네도 한 잔하게. 할머니! 여기 술잔하고 소주 한병 더 주십시오."
"혼자 술 한 병 마셨습니까?"
"하하~! 술 한 병쯤이야. 그냥 마시자고. 몇 병이면 어때."
"형님 혼자 술 마시는 걸 처음 봐서."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고. 내가 이상한가?"
"외로우신 거 아네요?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세요."
"결혼!? 나 하나도 주체 못하면서 무슨 결혼."
"왜 그런 말씀을........?"
"난 아직 멀었네! 아우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그렇지 않아도 생각중입니다."
종업원이 소주병과 술잔을 가져다 놓았다. 강민우가 홍성식 앞에 잔을 놓고 술을 따라 주었다. 술잔을 받은 홍성식이 자신의 생각에 결심이라도 한 듯이 단 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래.......!? 좋은 여자가 생긴 모양이군."
"형님! 유서연 어때요?"
"좋은 여자지. 둘이 사귀나?"
"저는 그럴 셈인데, 당최 씨알이 먹혀야지요."
"왜! 미스유가 별로 자네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나?"
"서연이는 형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인데요."
"나를.......!?"
"네."
홍성식이 서로의 빈잔에 술을 채웠다. 강민우가 술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주인 할머니가 다가와서 넓적한 철판 밑에 있는 불을 줄이고 남은 야채를 더 넣고 들깨가루랑 마늘 다진 것을 넣어 다시 곱창을 볶았다. 주인 할머니가 가고 그들은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며 연거푸 소주 두 잔을 마셨다. 강민우는 뒤늦게 홍성식의 말이 생각난 듯이 쓴 웃음을 지었다.
"미스 유가 나를!? 코미디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예요."
"여자들은 가끔 말이야. 엉뚱한 말로 상대방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
"그런가요?"
"그럼! 그건 자네한테 관심이 있어 빗대서 하는 말일거야."
"서연이가 고의로 하는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행복하게 살게. 불행한 과거를 만들면 안 돼."
"고맙습니다."
강민우는 점점취기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폭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흑사회 놈들에게 당한 이진아가 또다시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나 않을는지 조바심이 일어났다. 음식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진아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이고 피에 굶주린 야수들같이 보였다.------
“가기 싫어! 그냥, 나 여기서 자면 안 돼?”
“새벽에는 추울 것 같아서. 진아, 편한 데로 해.”
강민우는 자신의 가슴 속을 파고들며 열기로 달아오르던 그녀를 생각했다. 발랄하고 청순했던 그녀의 표정에서 성적인 매력마저 느꼈다. 이제 강민우에게 그녀는 오직 여자로서 존재한다. 그는 가족도 없는 그녀를 영원히 보호해야하는 남자일 뿐이다. 물론 강민우가 그녀의 부모를 찾아 주려고 노력도 해봤었다.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몇 번 참여도 해봤으나 아직까지 이진아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강민우는 평생 가족 없이 살아야할 이진아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가 언제까지나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이진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강민우는 단하나의 가족이고 남자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 남자의 여자가 되는 의식이라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아직까지 느껴 보지 못한 혼돈의 회오리였다. 모세 혈관들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모든 감정이 몰입되는 희열이었다. 여자의 성욕은 혈관 내에서 생긴 하나의 규율이다. 강민우는 그녀가 몰랐던 신체의 규율까지도 일깨워 준 남자였다. 그녀가 강민우의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은 순결함을 되찾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었다. 멍에가 되어 끈질기게 그녀의 인생을 어둠속에 가두어버린 과거, 분노조차 메말라 버린 상처는 그녀의 뼛속깊이 새겨져 있었다.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그 상처를 벗어나지 않고는 살아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 상처를 벗겨내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자신을 보살펴 준 남자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공연히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아서 강민우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캠퍼스생활을 시작하면서 고민했던 해답이었다.
평생 이 순간을 간직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강민우와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은 것 같았다. 등을 돌렸던 이진아는 몸을 돌려 강민우를 향해 누웠다. 그리고 와락 강민우의 귀를 잡아 당겼다. 얼떨결에 얼굴이 잇닿은 강민우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슬이 맺혀 반짝거렸다. 그녀의 뜨거운 혀가 강민우의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아쉬운 듯이 혀와 혀가 엉키었다.
강민우는 입술을 헤집고 들어오는 그녀의 혀를 받아들이며 다시 뜨거워지는 그녀의 체취를 느낀다. 입안에 생명수 같은 타액이 고이기 시작하고, 그들은 목마른 사슴처럼 서로의 영혼을 들이마셨다. 습기어린 그녀의 눈동자는 꿈을 꾸듯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남녀 간의 육체의 접촉은 말보다 민감하고 빠른 감정의 표현이다.
“오빠, 안아 줘.”
가슴으로 울고 있는 그녀는 파닥거리는 은어처럼 강민우의 가슴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어 뜨겁고 아득한 불길 속에 서로의 고통을 불태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잇는 남자가 수수께끼라고 했다. 자신이 던진 수수께끼의 해답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치 강물처럼 달빛이 흐르는 밤에 그들은 다시 한 몸이 되어 미지의 어둠속을 달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고고하게 흐르던 달빛이 사라지고 아침 햇살에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뒤척이던 강민우는 눈부신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같이 침대에 누워서 자던 이진아는 보이지 않고 왠지 썰렁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방으로 가서 잠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어나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세면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것 같이 느꼈다. 진 씨 할머니가 차려놓은 식탁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자니 입맛이 없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거실을 나서려다가 이진아가 궁금했다. 촉촉한 눈빛으로 가슴을 파고들던 그녀가 보고 싶었다. 발길을 돌려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방안에서는 싸늘한 한기만 흘러 나왔다. 방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책상은 잘 정돈 되어 있고 눈에 띠던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책꽂이가 반은 비어 있었다. 불길한 생각에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부리나케 거실로 나가 정원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승용차도 보이지 않았다.
강민우는 독립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던 그녀의 표정과 습기 어린 눈동자가 떠올랐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불안감. 갑자기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현기증을 느끼면서 주방으로 향해 간다.
“할머니! 할머니!?”
“응, 식사 다했나.”
주방 옆의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진 씨 할머니가 돋보기안경을 쓰고 나왔다.
“진아 일찍 나갔나요?”
“아니 항상 나갈 때는 말하고 가는데, 방에서 자고 있는 거 아녀?”
“아닌데요. 없어요.”
“그럼 말도 없이 나갔남?”
진 씨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강민우는 우선 호출기로 이진아에게 연락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에는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혹시 진아에게 연락이 오면 저한테 전화하라고 하세요.”
“응, 그려. 급한 일이 있어서 일찍 나갔나?”
온 몸의 피가 빠져 나가는 허탈감에 젖은 강민우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집을 나왔다. 승용차를 몰고 마을을 빠져 나오는데 개들이 얼쩡거리는 것 조차 짜증이 났다.
민우는 방이동 사무실에 도착했으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가 사무실을 배회하는 모습을 보고 문경환도 왠지 불안하였다.
“실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렇게 보이나?”
문경환은 그렇다고 하려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NTIS 요원으로 추천해준 강 실장의 마음을 거슬리게 할 수는 없었다. 혹시 말을 잘못했다가 안기부 요원이 감각이 없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이따금 강 실장은 중요한 업무를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 지는 경우도 있었다. 문경환으로서는 지켜 볼 도리밖에 없었다. 한 동안 호출기로 문자를 발송하며 서성이던 강민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강민우가 사무실을 나온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진아에게 호출기로 여러 번 문자를 넣었으나 여전히 응답이 없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커피라도 마시려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 내에는 NTIS 요원과 군복을 착용한 군대 계통의 정보원이 있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창가로 다가섰다. 그는 다시 이진아에게 문자를 발송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그렇게 삼십 여분을 커피 잔을 비우고도 서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는 완공된 인공 호수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송나희가 들어섰다. 등을 지고 있는 강민우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를 발견하고 지그시 바라보던 송나희는 커피를 뽑아들고 강민우에게 다가섰다.
“무슨 생각하세요?”
“아~! 그냥........”
강민우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벌써 이른 여름이 시작되었는지 바라보이는 잔디위에는 잠자리 때가 높이 날고 있었다. 오 국장의 부탁이 떠오른 송나희는 침묵하고 있는 강민우를 곁눈질로 살폈다. 꼭 오 국장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왠지 우울해 보이는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아니.”
“그런데 무척 근심스러워 보여요.”
“글쎄, 내가 그렇게 보였나.”
강민우는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관심을 받기도 싫고 오직 머릿속에는 이진아만 떠올려져졌다. 막상 호출기에 대한 응답이 오지 않으니 그녀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문득 이진아가 다니고 있는 대학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들고 있던 종이컵을 꾸겨 휴지통에 넣었다.
“미안해. 가볼 곳이 있어서.”
“.........!”
강민우는 송나희를 힐끔 쳐다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왔다. 평상시에도 진중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강민우의 오늘 모습은 왠지 달라보였다. 그렇다고 직장 건물 내이기에 집착해서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송나희는 멍하니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진아가 다니는 KH대학에 도착한 강민우는 승용차에 내리자마자 학생과부터 찾아갔다. 푸른 숲과 잔디로 둘러싸인 캠퍼스 내의 풍경은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여유로웠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학생들이 한가롭게 거닐거나 잔디위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특히 여학생들은 보얀 살결을 들어내는 핫팬티나 미니스커트를 걸치고도 부끄러움 없이 발랄한 표정들이었다.
학생과로 들어간 강민우는 공연히 마음이 급했다. 업무에 열중하느라 시선을 주지 않는 담당 여직원의 탁자를 두드렸다, 깜짝 놀란 여직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올려다보았다. 그는 신분증부터 불쑥 내밀어 보였다.
“학생을 찾습니다.”
“어느 학생을 찾으시는데요?”
“체육과의 이진아라고.”
“뭘 알고 싶으세요. 직접 체육과로 가보시지요.”
“오늘 안 나온 것 같아서.”
“기다리세요.”
불쾌했는지 담당 여직원은 툭 쏘아 붙였다. 돌아선 여직원은 캐비닛을 열고 학생 명부를 뒤적거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강민우는 조바심이 났다. 한동안 캐비닛을 열고 닫으며 서류를 뒤적이던 여직원이 강민우를 향해 돌아섰다.
“이진아 학생을 왜 찾으시는데요?”
“제 동생입니다.”
“그런데 모르셨어요? 이틀 전에 휴학계를 냈는데요.”
“휴학계를 냈다고요.......!?”
“오라버니 되신다면서 모르셨어요?”
“다시 확인 해 주세요.”
“여기 보세요. 본인 자필로 낸 휴학계를.”
여직원이 도리어 짜증을 냈다. 강민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벌거숭이가 된 것 같이 허전하고, 추위를 느꼈다. 멍하니 여직원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뒤돌아섰다. 허탈함에 젖어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모든 것이 이진아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 차를 몰고 방이동으로 왔는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강민우의 허리에 찬 호출기음이 울렸다. 기다리던 이진아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빠, 미안해. 기다리지 마. 연락할게]
기다렸기에 반갑기는 해도 실망스러웠다. 몇 번을 봐도 똑같은 문자였다. 문자로 봐서는 답장이 오지 않을 테지만 강민우는 잠간만이라도 만나자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방향 감각을 잃고 사무실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공원부지로 조성된 넓은 공터를 무작정 걷고 있었다.
걸었던 길을 되돌아 걸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갑자기 한기가 들어 으스스 떨리고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목걸이에 달린 어머니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돌봐주느라 힘도 들었지만 막상 이진아가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어머니와 여동생이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당시보다 더한 외로움이 엄습했다.
얼마 전에 강민우는 왕릉 안기부에서 작성한 ‘광주 상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보고서를 봤었다. 그 당시 사망한 학생들의 인적사항과 알몸이 되어 처참하게 군화 발에 짓밟힌 여학생들의 명단이 있었다. 명단에는 이진아와 일치하는 학교명, 나이가 있었고 이름만 이진화로 나와 있었다. 이름을 잘못 작성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여학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광주사태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강민우에게도 치유할 수 없는 기억이지만, 여자의 몸으로 치욕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진아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광주사태로 인연이 되어 이진아를 만났고, 씻어내지 못할 고통으로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던 그녀였다. 이진아가 곁을 떠난 이유는 어쩌면 가슴에 못 박힌 과거를 스스로 청산하기 위한 것이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무모하고 여자의 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진아가 또 다른 위험에 처하기 전에 놈들을 처치하고 어머니 묘지 앞에 반지를 받쳐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진아가 사라진 지금 순간은 강민우는 황량한 사막을 걷는 마음이었다. 그에게는 참을 수없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맑게 개였던 날씨마저 흐릿해지고 소나기라도 내릴 듯이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공원 부지를 맴 돌던 강민우는 호수건너 대로를 건너갔다. 대로를 경계로 풍남동이었고 직원들과 자주 식사를 하던 음식점이 있었다.
풍남동으로 건너간 강민우는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점 주인인 시골 할머니 같은 손맛에 요원들이 단골로 찾는 음식점이었다. 강민우는 구석진 탁자 앞에 가서 앉았다. 종업원이 물 컵과 물병을 탁자위에 올려놓고 이어서 언제나 친근한 인상으로 맞이하는 할머니가 그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웬일로 혼자 온 거여?”
“그냥 술 한 잔 마시려고요.”
“혼자서 술을!?”
“네. 날씨도 우중충하고 그래서요. 소주 한 병 주세요.”
“안주는 뭐로 줄까?”
“그냥 간단한 걸로 주세요.”
“딸이라도 있으면 사위 삼을 텐디.”
“하하~!”
할머니에게 자주 듣는 말에 강민우는 억지웃음을 흘렸다. 가게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강민우는 불쑥 일어나서 전화기 앞으로 다가섰다. 혹시나 군산의 불곰에게서 곽춘호에 대한 연락이라도 오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에서였다. 수화기를 집어 들고 사무실의 다이얼을 돌렸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던 문경환은 책상위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어 있었다. 전화기 벨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깬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다급하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느 날은 하루 한통화도 걸려오지 않는 전화 벨소리기 때문이다.
“네, 감찰실입니다.”
“나야! 별일 없어.”
“네. 실장님.”
문경환은 단번에 강민우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치 강 실장을 앞에 마주한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음, 무슨 일 있으면 41X-XXXX로 연락해.”
“아~! 네. 느티나무 집에 계신 겁니까?”
“음.”
간단한 통화로 전화가 끊겼다. 문경환은 실장이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음식점에 있는지 상상한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지나간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고 저녁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출근할 때부터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고 우울한 강 실장에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았다.
퇴근하기도 이른 시각이라 문경환은 서성거렸다. 이따금 예기치 않은 지시가 떨어질 경우도 있다. 하루 종일 있어도 해야 할 업무가 없는 날들이 있지만 돌연한 상황에 대비해야한다. 문경환은 아직도 감찰실의 업무에 대한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NTIS 요원들이 감찰실에 대해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이어서 문이 열렸다. 그리고 홍성식 팀장이 얼굴을 디밀고 두리번거렸다.
“강 실장님! 출장 가셨습니까?”
“아뇨! 느티나무 집에 계시다는 데요.”
“느티나무........!? 손님하고 계신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홍 팀장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사무실을 비우기는 아직은 이른 시간이지만 문경환은 강 실장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지 망설였다. 그러나 강 실장의 전화로 봐서는 무슨 연락인가 기다리는 것 같기에 포기를 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십 여분이 지났을까, 또다시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뜻밖에도 송나희 전산실장이 짙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두리번거린다.
“강 실장님, 어디 가셨어요?”
“아! 지금, 느티나무 집에 계신 것으로 아는데요.”
“누구하고 가셨어요?”
“모르겠는데요.”
주춤거리던 송 실장이 문이 닫고 나갔다. 똑같은 대답을 두 번씩 한 문경환은 멍하니 출입문을 보고 서 있었다. 오늘따라 강 실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보기 드문 상황이었다. 언젠가는 엘리트 요원이 되리라고 벼르고 있는 문경환은 새로운 작전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NTIS는 국내외 정보기관간의 정보 교환, 전산망을 통한 북한의 동태와 등 일상적인 업무 외에는 특별한 작전이 없었다. 국내에서는 국회가 개원되었고,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은 신설 야당이 군사정권을 비판하며 맹공격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소련이 대통령제 신설로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이 된 국제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문경환으로부터 강 실장이 느티나무 식당에 있다는 말을 들은 홍성식은 식당으로 찾아갔다. 식당 안에는 강실장 혼자서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곱창볶음이 자글거리는 식탁 앞에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는 강민우의 모습에 홍성식은 의아심을 갖고 다가갔다.
"형님! 웬일로 혼자서 술을......."
"아! 아우 왔나. 자네도 한 잔하게. 할머니! 여기 술잔하고 소주 한병 더 주십시오."
"혼자 술 한 병 마셨습니까?"
"하하~! 술 한 병쯤이야. 그냥 마시자고. 몇 병이면 어때."
"형님 혼자 술 마시는 걸 처음 봐서."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고. 내가 이상한가?"
"외로우신 거 아네요?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세요."
"결혼!? 나 하나도 주체 못하면서 무슨 결혼."
"왜 그런 말씀을........?"
"난 아직 멀었네! 아우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그렇지 않아도 생각중입니다."
종업원이 소주병과 술잔을 가져다 놓았다. 강민우가 홍성식 앞에 잔을 놓고 술을 따라 주었다. 술잔을 받은 홍성식이 자신의 생각에 결심이라도 한 듯이 단 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래.......!? 좋은 여자가 생긴 모양이군."
"형님! 유서연 어때요?"
"좋은 여자지. 둘이 사귀나?"
"저는 그럴 셈인데, 당최 씨알이 먹혀야지요."
"왜! 미스유가 별로 자네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나?"
"서연이는 형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인데요."
"나를.......!?"
"네."
홍성식이 서로의 빈잔에 술을 채웠다. 강민우가 술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주인 할머니가 다가와서 넓적한 철판 밑에 있는 불을 줄이고 남은 야채를 더 넣고 들깨가루랑 마늘 다진 것을 넣어 다시 곱창을 볶았다. 주인 할머니가 가고 그들은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며 연거푸 소주 두 잔을 마셨다. 강민우는 뒤늦게 홍성식의 말이 생각난 듯이 쓴 웃음을 지었다.
"미스 유가 나를!? 코미디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예요."
"여자들은 가끔 말이야. 엉뚱한 말로 상대방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
"그런가요?"
"그럼! 그건 자네한테 관심이 있어 빗대서 하는 말일거야."
"서연이가 고의로 하는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행복하게 살게. 불행한 과거를 만들면 안 돼."
"고맙습니다."
강민우는 점점취기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폭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흑사회 놈들에게 당한 이진아가 또다시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나 않을는지 조바심이 일어났다. 음식점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진아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이고 피에 굶주린 야수들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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