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와 해바라기 - 9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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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802회 작성일 20-01-17 00:51본문
1-5. 꿈속의 씨앗
"야!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
아침부터 성원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침을 준비하고 가볍게 청소까지 끝내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는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쌀을 씻고, 미역을 씻어 불리고 밑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그리고 청소기를 돌려 현관과 부엌을 청소했다. 매일 꼬박꼬박 했기에 청소는 금방 끝이 났다. 시간이 흘러 국이 끓고, 마침내 전기 밥솥이 비명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하자 성원은 쌍둥이가 자고 있을 방에 대고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외쳤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빨리 안 일어나면 나 혼자 먹고 치워버릴 거야!"
그러나 그의 협박에도 성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성원은 밥과 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위에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번쩍이는 은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셋팅을 한 다음에 성은의 방문을 째려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저 굼벵이."
성원은 성은의 방문에 다가가 쿵쿵 두드렸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지, 하고 중얼거린 성원은 벌컥, 문을 열었다. 성은 특유의 향기가 방안에서 몰려와 성원의 코를 간지럽혔다. 창문을 닫아놓고 잠을 잤음에도 눅눅하다거나 퀴퀴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성원은 매번 그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으나 곧 그 생각은 침대에서 애벌레처럼 이불을 칭칭 감고 누운 쌍둥이를 보자 사라졌다. 얼굴까지 깊게 덮어버려 머리카락 몇가닥만이 뭉쳐서 삐져나온 모습은 돌돌말린 김밥에 시금치 몇줄이 튀어나온 것과 비슷해 보였다. 성원은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 몇신줄 알아. 빨리 안 일어나?"
"웅... 일어났어..."
"웃기고 있네. 학교 안 갈거야? 당장 일어나."
"조금만... 5분만 더 잘게. 응..."
성은은 잠꼬대하듯 칭얼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이불 밖으로 얼굴조차 내밀지 않은 채였다.
"5분이 50분이 되는 거 한두번이야? 안돼. 빨리 일어나서 밥먹고 씻어."
"알았다니깐..."
"말만 하지 말고 일어나란 말이야. 이 잠팅아."
성원은 그렇게 말하면 성은이 돌돌 말고 있는 이불을 잡아 당겼다. 성은의 잠을 깨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불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성은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이불을 떨어뜨리지 않으려애썼다.
"아이~ 나 좀 내버려둬. 알아서 학교 간다니깐."
"네가 잘도 그러겠다."
"이씨. 네가 엄마야? 왜 자꾸 귀찮게 굴어."
그제서야 성은은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밀고 말했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데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이 미역처럼 그녀의 뺨과 입술에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한테 너 잘 챙기라고 부탁 받은 사람이거든?"
성은은 마지막까지 힘을 주어 버텨보았지만 성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잠시 실랑이가 지나가고 분홍색 이불이 성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순식간에 허물을 벗게 되자 밀려오는 한기에 성은은 몸을 움츠렸다.
"추워. 이불 도로 내놔."
"안돼. 그럼 다시 잠들거 뻔하잖아."
"안그럴게. 응? 성원아~ 잠깐만 누워있다가 나갈거야. 응?"
성은은 애교를 부리며 애원했지만 성원의 표정은 냉정했다. 씨알도 안 먹힐 수작 부리지마,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은은 그쯤 되자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밥 안먹으면 되잖아. 그럼 더 자도 될거야."
"안돼. 내가 그 꼴 못봐."
"나쁜놈."
결국 성은은 포기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며 성원에게 양손을 뻗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일으켰다. 성은은 관성 그대로 몸을 맡겨 성원에게 안겼고 성원은 성은을 안은 채 질질 끌어다가 식탁에 앉혔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아주 익숙한 호흡이었다. 성은이 얌전히 앉자, 옳지 착하지, 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숟가락을 들어 손에 쥐어주었다.
"너 오늘 1교시라며?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거야."
"이 교수는 항상 수업을 끝나고 출석 부른단 말이야. 그러니 더 자도 괜찮은데. 이씨."
성은은 그렇게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러나 성원은 그녀의 맞은 편에 앉고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성은도 몇마디 더 투덜거리다가 조금 난폭하게 국을 떠 넣었다. 짜증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국 몇 숟가락을 더 들더니 눈을 반짝 뜨고 밥을 우겨넣기 시작했다. 성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웃었다.
"밥만 들어가면 정신 차릴거면서."
"시끄러."
시간이 지날수록 성은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것저것 마구 집어서 입에 넣었고 성원은 그녀를 보며 다시 웃었다. "이 게으름뱅이. 밥 먹을 때는 누구보다 부지런하네." 성은은 놀리는 손을 멈추지 않고 오물거리면서 성원의 말에 대꾸했다.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듯 그녀의 말은 정확하고 빨랐다.
"나는 게으른 게 아니라 시간 계산이 정확한 거거든? 나는 너와는 달라서 시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쓴다구.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목숨걸 필요는 없잖아. 도대체 조금 늦게 가도 괜찮은데 이렇게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어. 또 하루에 한번 청소하나 일주일에 한번 하나 똑같은 걸 왜 매일같이 청소하는지도 모르겠고. 아침마다 네가 돌려대는 청소기 소리에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잖아. 너 청소 중독이야?"
성원은 콧방귀를 끼었다.
"아~ 그래서 매일같이 깨끗이 청소해둔 거실 바닥에 뒹굴면서 잡지를 보는구나. 네가 한번 뒹굴때마다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쌓이는 줄 알아? 그대로 두면 귀신이라도 나올텐데 내가 그걸 어떻게 참냐. 그리고 밥 새로 안 해주면 맛 없다고 징징거리는 게 누군데?"
"그거야 네가 평소에 해주니까 버릇돼서 그런거 아냐. 나도 너 때문에 고민이 많다구. 나중에 너랑 떨어져서 살면 청소도, 밥도 내가 해야 하는데 도무지 이 밥맛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단 말이야. 깨끗한 거실 바닥도, 반짝이는 이 숟가락과 그릇들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숟가락을 들어 까딱까딱 흔들었다. 정말 숟가락은 그녀의 침으로 살짝 번들거려 더 반짝였다.
"너나 나나 한배에서 나왔는데 노력하면 안될 게 뭐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밥 먹고 씻어. 학교 지각하기 싫으면."
"그러지 말고. 성원아 아예 나랑 평생 같이 살자. 어때? 내가 빨래 정도는 할테니까. 나랑 살면서 밥하고 청소좀 해줘. 응?"
성은은 눈을 빛내며 말했고 성원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다 큰 처녀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나중에 네 신랑될 사람한테 맞아죽기 싫다, 나는. 그리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 네가 하냐?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칫."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며 식사를 마쳤을 때는 8시였다. 성원은 가볍게 설거지를 시작했고 그동안 성은은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성원의 설거지 놀림은 아주 익숙했고 정확했다. 그는 5분만에 설거지를 끝내고 방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그가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나왔을 때, 성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녀는 길다란 샤워 타올만을 몸에 두른 채였다.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하얀색 타올 밑으로 고스란히 드러났고 가슴 위로 반듯한 쇄골과 둥그런 어깨가 형광등에 반짝 빛났다.
"야. 옷좀 제대로 입고 나와. 다 큰 여자가 꼴이 뭐야?"
"왜에~ 내가 너무 섹시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성원에게 달라붙었다. "징그러워, 저리가." 성원은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욱 달라붙으며 귓속말로, 나 이 안에 속옷 안 입었다, 하고 웃었다. 히히, 하는 웃음소리가 거실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성원은 그녀의 웃음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얀 타올 안에 숨겨져 있을 그녀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아침잠을 깨우다가 본 성은의 속옷 차림이 떠올랐다. 적당한 크기에 예쁜 모양의 가슴과 잘록한 허리, 도톰한 둔부, 매끈한 피부.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너 지금 내 몸 상상하고 있지?" 어느새 귀신같이 알아챈 성은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 그런거 아니야."
"그런데 왜 말을 더듬으실까~? 응?"
성은은 그렇게 말하며 더욱 성원에게 밀착했고 참지 못한 성원은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장난 그만치고 빨리 옷입고 나와."
"씨! 왜때려?"
"맞을 짓을 하잖아. 내가 누나와 사는지 어린애를 하나 데리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머리를 손으로 만지며 성은은 방으로 사라졌고 그제서야 성원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방금 느꼈던 성은의 몸의 감촉이 떠오르자 부르르 몸을 한차례 떨고는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학교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성은은 하품을 크게 했다. 성원은 그녀의 크게 벌어진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고 성은은 입을 다물면서 느껴지는 짠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성원이 그 모습에 낄낄거리며 웃었다. 성은은 그를 한번 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점심에 피자나 먹자."
"갑자기 왠 피자?"
"그냥. 학교 밥 먹는 것도 지겹고 한번쯤 외식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덩어리들하고 먹으면 되잖아?"
"그 덩어리들 나한테서 떨어져 나간지 오래야. 내가 하도 쌀쌀맞게 대했더니 알게모르게 욕하면서 조금씩 멀어지더라구. 그래서 요즘은 동기들하고 밥먹는데 그것도 좀 지겨워졌어."
"오호라. 천하의 진성은양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만."
"시끄럽고. 먹을거야 말거야?"
성은의 사나운 말에 성원은 잠시 은영을 떠올렸다. 매일 자신과 점심을 먹는 은영인데, 자신이 성은과 점심을 해결하게 되면 은영은 혼자 먹게 될 것이다. 성원은 그렇게 내버려두기가 싫었다. 그렇다면 은영도 같이 피자를 먹으러 가야하는 것일까.
"내 친구도 같이 먹어도 된다면. 좋아."
"친구? 네가 친구가 있어?"
성은은 과도하게 놀라며 물었다. 그러나 성원은 그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같은 과야."
"우와. 드디어 내 동생이 친구가 생겼구나. 좋아. 이참에 네 친구 얼굴좀 보자. 대체 뭐가 부족해서 음침하고 재수없는 너와 어울리는지 나도 궁금한데."
"자기 쌍둥이를 꼭 그렇게 말해야하나."
"사실이잖아?" 하며 성은은 배시시 웃었다. 버스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정문에서 조금 더 걸은 다음 각자의 건물로 헤어졌다. 성은은 자신이 전화할테니 수업 끝나면 꼼짝말고 기다리라고 말했고 성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원이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은영은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은영의 옆에 앉아 책을 꺼냈다.
"안녕. 오늘은 조금 늦었네."
은영이 웃으면서 성원을 반겼다. 성원도 마주 웃었다.
"응. 애 하나 돌보고 오느라."
"애? 그건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하고 성원은 짧게 웃었다. 은영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생각 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참, 너 얘기 들었니? 강정수 교수님 교수실에 성적 붙었대."
"정말? 벌써 성적이 나왔나?"
"응. 그 교수님이 원래 성격이 좀 칼 같아서 매번 시험보고 나서 일주일도 안 지나서 성적이 나온다나봐."
때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강정수 교수는 고전문학의 이해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성원은 그의 강직한 얼굴을 떠올렸다. 군 장교처럼 굳은 얼굴과 앙다문 입술. 성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교수라면 그럴만 했다.
"그분도 참, FM으로 사는구나. 그럼 수업 끝나고 확인하러 가보자."
좋아, 하고 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은 금방 끝이 났다. 성원과 은영은 곧장 일어나 성적을 확인하러 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앞에 누군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안녕. 사자 커플."
"안녕~ 둘이 사이좋게 어딜 가는거야?"
"수업 끝나자마자 데이트야? 한창이구나 너희들!"
"그러게. 봄이라고 꽃이 피었구나."
윤호와 수정이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호들갑을 떨었고 성원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자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그들은 "사자 커플"이라는 호칭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는 호칭뿐만 아니라 이미 커플로 인정한 듯이 말하고는 했다. 은영은 윤호의 너스레가 재밌는지 꺄르르 웃더니, 말했다.
"지금 성적 확인하러 갈려구. 너희들은 어쩐 일이야?"
"아, 우리는 대장님의 전언이 있어서 말이야."
대장님이란, 우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윤호는 가끔 익살스럽게 그를 대장님 - 물론 그것은 존경의 의미가 담긴 호칭은 아니었고 오히려 비꼼의 표현이었다 - 이라고 부르곤 했다. 윤호는 은영과 성원을 번갈아 쳐다본 다음에 목을 큼큼, 가다듬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낮은 배음으로 말을 시작했다.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금수는 들으라. 금주 금요일 밤 술시(戌時)가 시작되는 때에 조촐한 모임이 이 앞의 주막에서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절대 빠지지 말고 참석하기를 바란다. 짐이 특별히 나라 최고의 미녀와(윤호는 손을 들어 수정을 가리켰다.) 향응을 준비했으니 분명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힘들게 과거를 치른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자리이므로, 짐의 성의를 보아서 그대들의 귀한 면을 비추었으면 하노라. 이상."
윤호는 그렇게 말하며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고 수정은 그런 윤호를 보며 오오- 하고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 정말 내시같아, 하고 말하며 수정은 웃었다. 은영도 그런 그들이 하는 모양이 재밌는지 웃었다. 성원은 은영이 웃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금요일이면 이틀 뒤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핸드폰을 열어 달력을 보니 수요일에 노랗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시간이 참 빠르네. 성원은 핸드폰을 집어 넣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갈거야?"
그는 반사적으로 은영에게 물었다. 그런 모습에 윤호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아참, 그렇지. 은영이 가면 성원은 자동으로 딸려오는 거였지. 은영아 올거지? 이번에는 저번보다 훨씬 재밌을 거야! 아주 늦게까지 마시고 놀 거거든. 우리는 모두 너희들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윤호의 모습에 다시 한번 은영은 웃었다. "그래. 갈게." 은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성원이 바로 말을 붙였다. "저번에 갔던 애슐리로 가면 되지?"
"응. 저번처럼 늦지 않게만 오면 돼."
"알았어. 그럼 그때 봐."
"오케이. 그럼 데이트 잘 하구, 이따가 보자. 안녕~"
윤호와 수정은 그렇게 말하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그들은 원래 목적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정수 교수의 교수실은 옆 문학관의 3층에 있었다. 재빠르게 건물에서 벗어나 문학관의 복도에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그들에게 엄습했다. 그곳의 복도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썰렁했다. 문학관은 대부분 교수실이나 대학원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학부생들은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는 곳이었다. 성원은 어쩐지 음침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그 때, 그의 옆에서 걷던 은영이 불쑥 팔짱을 끼어왔다. 성원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 잘 하라잖아. 이러면 정말 커플처럼 보이겠지?"
은영은 무엇이 즐거운지 연신 벙글거렸다. 성원은 은영의 웃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너까지 그들 장단에 맞추다간 끝도 없어."
"뭐 어떠니? 그만큼 우리가 잘 어울린다는 뜻이잖아. 난 좋아."
성원은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그녀의 은근한 가슴이 그의 팔뚝에 중량감을 주었고 성원은 그것이 못내 신경쓰였으나 그녀를 물리치고 싶지는 않아 그대로 걸었다. 은영은 아무말 없이 걷는 성원을 보며 다시 한번 배시시 웃었다.
-어디야?
"지금 캠퍼스 중앙 광장."
-그래? 나도 그 근처인데. 조금만 기다려.
"알았어."
성원은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옆에 앉은 은영이 성원의 뺨에 차가운 커피를 댔다. 앗 차거, 하고 소리를 지른 성원은 은영을 한차례 쏘아보고는 커피를 받아 단번에 마셔버렸다. 은영이 그런 그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흥, 시험 공부 제대로 안 하더니 점수가 그게 뭐니?"
"난 최선을 다했어. 수업 자체가 나와 맞지 않는거야 이건."
"거짓말. 내가 그렇게 졸라도 맨날 책이나 읽고 따로 공부 하지도 않았잖아."
"몰라. 이미 지난 일이야."
성원은 시큰둥하게 말했고 은영은 귀엽게 인상을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원은 눈을 감고 햇빛을 만끽했다. "고집불통. 안되겠어. 나하고 약속 한가지 해." 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성원의 손을 잡아 올렸다.
"또 무슨 약속?" 성원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대꾸했다.
"다음 기말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시키는 대로 공부하기로."
"이번에도 네 말 따라서 했잖아. 집에 가려는 거 억지로 붙잡아다가 시킨 게 누구였는데."
"집에 가지만 않았지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잖아. 이번에는 내가 아예 확실하게 과외해줄 테니까. 응?"
은영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성원은 그녀의 작은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그대로 그들은 도장까지 찍었다. "좋아. 하지만 성적이 잘 나올거라고 기대하지는 마. 이 수업은 나하고 절대 맞지 않으니까." 성원은 손가락을 건채로 말했다. 그러나 은영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건 노력해봐야 아는거야."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은이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성은은 성원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 앞 5미터쯤에 도달한 그녀는 돌연 멈칫하고 서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바로 쌍둥이 동생의 옆에 앉아 웃고 있는 꽃처럼 예쁜 여자아이였다. 성은은 성원이 말한 친구가 여자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을 했다.
"어, 왔어?"
그런 그녀를 알아챈 성원이 인사를 하자 성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성원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더 일찍 도착했네."
"으, 응. 수업이 조금 일찍 끝났거든."
"그보다 배가 고파서 헐레벌떡 달려온 거겠지."
"안녕하세요."
그의 옆에서 은영도 인사를 했다. 시험 점수를 확인하고 쌍둥이 누나와 점심으로 피자를 먹자고 하자 흔쾌히 승낙한 은영이었다. 그래서 은영은 지금 성원의 앞에 서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성원의 쌍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얘 쌍둥이 누나 진성은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같은 과 친구, 이은영이라고 해요."
그녀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큰 키에 늘씬한 몸,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성은과 작고 아담한 체구에 귀엽고 예쁜 외모를 가진 은영은 서양과 동양의 대비였고 만개한 꽃과 수줍은 꽃망울이었다. 은영과 성은은 웃으며 서로를 잠시 탐색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은영은 곧 성원과 성은이 이란성이지만 많이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선한 눈매나 반듯하게 솟은 코가 특히 비슷했다.
"정말 성원이하고 닮았네요. 특히 눈이 비슷해요."
"아 그래요?"
"네. 쌍둥이라고 얼굴에 써 놓은 것 같아요."
"쟤랑 어디가 닮았다고 그래. 기분나빠."
성원이 투덜거리자 은영은 그의 팔뚝을 꼬집으며 나무랐다.
"누나한테 무슨 말버릇이 그러니?"
"아야! 아파. 운좋게 나보다 두시간 일찍 나와서 누나라고 우기는거지, 사실은 애나 다름 없다고. 그리고 너 요즘 점점 나를 막 대하는 것 같지 않아? 때리고 꼬집고. 예전에는 미안하다는 말도 했는데 그런 것도 없고 말이야."
"흥, 네가 하는 행동을 봐.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그들은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성은은 그들이 하는 모양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빨리 피자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은영씨도 피자 괜찮죠?" 성원은 평소와 다르게 서두르는 성은을 바라보았으나 성은은 그대로 휙 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은영과 성원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앞서서 성큼성큼 걷는 성은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너희들 친해 보이더라."
"응?"
"은영이하고 너, 친해 보인다고."
"말했잖아. 친구 데려간다고. 그럼 친구가 친해서 친구지 안친하면 친구냐?"
"하긴..."
그렇게 끄덕이며 성은은 팝콘을 몇개 집어 입속에 넣었다. 오물오물. 그 옆에서 성원은 맥주를 홀짝 들이켰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입가심으로 케이블에서 해주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 Sunrise)"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피자도 챙겨주고, 피클도 집어서 먹여주고. 누가 보면 애인사이인 줄 알거야."
무심하게 화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성은이 흘려가는 어투로 말했다. 성원은 슬쩍 성은을 바라본다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런가? 요즘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네. 과에서 우리 별명이 사자 커플이래."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점심 피자를 먹던 때를 떠올렸다. 그들은 다같이 학교 앞의 작은 피자 전문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피자 한판을 시킨 그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은영과 성은은 나이가 같으니 말을 놓았고 성원은 그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구박을 당하며 어렵게 피자를 먹었다. 얘가 얼마나 음침한 줄 아니, 하고 성은이 물으면, 그럼 아주 삐딱하고 재수없는데다가 말은 얼마나 안듣는데, 하고 은영이 되받아쳤다. 그들은 죽이 잘 맞아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러나 성원은 성은이 평소보다 표정이 밝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왜 그런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끼어들 틈이 없었던 그는 그저 은영이 건네주는 피자를 먹는데에만 열중해야했다. 은영은 그의 옆에서 웃고 떠들면서 피자를 집어 주고 간간히 피클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욱 대담한 그녀의 행동에 당황을 했지만 그는 은영이 하는대로 덥석 받아 먹었다. 성은이 지켜보고 있는데 거절했다가는 민망해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자신도 은영의 그런 행동이 싫지 않기도 했다. 은영이 피클을 입어 넣어주고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볼때, 참 예쁘다고 여러번 생각이 들었었다. 그 외에도 은영은 자신에게 음료수를 챙겨주거나 휴지로 입가를 닦아 주는 등, 여러가지 신경을 썼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성원은 은영이 성은이 있는 것을 이용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영리한 여자야. 성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좋겠어. 예쁜 여자가 옆에 꼭 붙어 다니고." 하고 성은은 비이냥거렸다. 성원은 상념에서 벗어나 성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성은은 기분이 나빠보였다.
"뭐. 편한 친구야. 그런데 너 아까부터 표정이 좀 안좋은데.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몰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팝콘을 집어 입에 마구 집어넣었다. 그리고 빨대를 빼버리고 콜라를 단번에 마신 다음에 TV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가 밤의 다뉴브 강가를 걸으며 부랑자 시인에게 돈을 주고 시를 받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성원은 성은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성은을 따라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Daydream Delusion" 부랑자 시인의 시가 낭독되었다.
"정말 짜증나!"
잠시 후 성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신경질적인 어투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성원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성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성은을 쳐다보았다.
"왜그래?"
성은은 표정을 풀지 않고 쏘았다.
"너는 어쩜 애가 그렇게 가볍니?"
"뭐야, 갑자기? 영화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황당한 표정이 된 성원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성은은 여전히 씩씩거리는 표정이었다. 무엇이 분한지 손가락 끝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유진이가 그렇게 되고, 다시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어느새 여자랑 헬렐레 거리고 있고. 너는 지조가 없는거니?"
"뭐?"
성원은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성은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은은 개의치 않는 다는 듯 말을 이었다.
"평생 혼자 살 거라며. 혼자가 편하고 혼자가 좋다며. 그렇게 말한 게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너는 유진이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야! 갑자기 왜 유진이 얘기를 꺼내는건데?"
"몰라서 묻니? 너, 유진이를 배신하는거야!"
성은은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사실, 누구보다 성원이 하루빨리 유진을 잊길 바랐던 건 자신 아니었던가? 그러나 막상 성원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보자 괜히 심통이 난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냈다.
"야! 진성은! 너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 취소해."
"아니, 나는 취소 안해. 나는 네가 그럴 줄은 몰랐어. 적어도 다른 여자가 생기면 나한테 바로 알려줄 거라 생각했단 말이야. 지금 내가 얼마나 배신감 느끼는 줄 아니? 그리고 그건 유진이도 마찬가지 일거야."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 벌떡 일어나 쿵쿵 거리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쾅- 하고 그녀의 문이 세게 닫히면서 울렸다. 성원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해 아무말도 못했다. 홀짝거리던 맥주를 내려 놓고 한참 생각하던 그는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키고는 벌러덩 거실에 누웠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 계집애가, 하고 성원은 중얼거렸다. TV에서는 셀린느와 제시가 쓸데없는 잡담을 쉬지도 않고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사소한 말에도 깔깔 거리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성원의 귀를 괴롭혔다. 성원은 벌떡 일어나 리모콘을 들어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그는 성은의 방문을 한 번 노려본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순식간에 짙은 침묵이 집에 내리닥쳤다.
"어! 왔어? 빨리 이리 와봐. 이번에 새로 구상한 이야기야. 어제 밤새도록 썼다구."
"나참, 아침부터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기분 좋게 풍겼다.
"자, 이거. 어제 쓴 건데. 역시 네 평가가 필요해."
성원은 그녀에게 한번 웃어주고 그녀가 건네는 노트를 건네 받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옆에서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같은 눈빛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때? 응?"
"기다려. 이제 막 읽기 시작했잖아."
"빨리이~ 빨리 읽고 평가를 해줘. 난 이 시간이 제일 떨린단 말이야!"
그녀는 성원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아양을
"야! 빨리 일어나서 밥 먹어."
아침부터 성원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침을 준비하고 가볍게 청소까지 끝내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는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쌀을 씻고, 미역을 씻어 불리고 밑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그리고 청소기를 돌려 현관과 부엌을 청소했다. 매일 꼬박꼬박 했기에 청소는 금방 끝이 났다. 시간이 흘러 국이 끓고, 마침내 전기 밥솥이 비명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하자 성원은 쌍둥이가 자고 있을 방에 대고 큰 소리로 다시 한번 외쳤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빨리 안 일어나면 나 혼자 먹고 치워버릴 거야!"
그러나 그의 협박에도 성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성원은 밥과 국을 그릇에 담아 식탁위에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번쩍이는 은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셋팅을 한 다음에 성은의 방문을 째려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저 굼벵이."
성원은 성은의 방문에 다가가 쿵쿵 두드렸다. 그러나 방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지, 하고 중얼거린 성원은 벌컥, 문을 열었다. 성은 특유의 향기가 방안에서 몰려와 성원의 코를 간지럽혔다. 창문을 닫아놓고 잠을 잤음에도 눅눅하다거나 퀴퀴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성원은 매번 그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으나 곧 그 생각은 침대에서 애벌레처럼 이불을 칭칭 감고 누운 쌍둥이를 보자 사라졌다. 얼굴까지 깊게 덮어버려 머리카락 몇가닥만이 뭉쳐서 삐져나온 모습은 돌돌말린 김밥에 시금치 몇줄이 튀어나온 것과 비슷해 보였다. 성원은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 몇신줄 알아. 빨리 안 일어나?"
"웅... 일어났어..."
"웃기고 있네. 학교 안 갈거야? 당장 일어나."
"조금만... 5분만 더 잘게. 응..."
성은은 잠꼬대하듯 칭얼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이불 밖으로 얼굴조차 내밀지 않은 채였다.
"5분이 50분이 되는 거 한두번이야? 안돼. 빨리 일어나서 밥먹고 씻어."
"알았다니깐..."
"말만 하지 말고 일어나란 말이야. 이 잠팅아."
성원은 그렇게 말하면 성은이 돌돌 말고 있는 이불을 잡아 당겼다. 성은의 잠을 깨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불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성은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이불을 떨어뜨리지 않으려애썼다.
"아이~ 나 좀 내버려둬. 알아서 학교 간다니깐."
"네가 잘도 그러겠다."
"이씨. 네가 엄마야? 왜 자꾸 귀찮게 굴어."
그제서야 성은은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밀고 말했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데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이 미역처럼 그녀의 뺨과 입술에 달라붙어 있었다.
"엄마한테 너 잘 챙기라고 부탁 받은 사람이거든?"
성은은 마지막까지 힘을 주어 버텨보았지만 성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잠시 실랑이가 지나가고 분홍색 이불이 성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순식간에 허물을 벗게 되자 밀려오는 한기에 성은은 몸을 움츠렸다.
"추워. 이불 도로 내놔."
"안돼. 그럼 다시 잠들거 뻔하잖아."
"안그럴게. 응? 성원아~ 잠깐만 누워있다가 나갈거야. 응?"
성은은 애교를 부리며 애원했지만 성원의 표정은 냉정했다. 씨알도 안 먹힐 수작 부리지마,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은은 그쯤 되자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밥 안먹으면 되잖아. 그럼 더 자도 될거야."
"안돼. 내가 그 꼴 못봐."
"나쁜놈."
결국 성은은 포기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며 성원에게 양손을 뻗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일으켰다. 성은은 관성 그대로 몸을 맡겨 성원에게 안겼고 성원은 성은을 안은 채 질질 끌어다가 식탁에 앉혔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아주 익숙한 호흡이었다. 성은이 얌전히 앉자, 옳지 착하지, 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숟가락을 들어 손에 쥐어주었다.
"너 오늘 1교시라며?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거야."
"이 교수는 항상 수업을 끝나고 출석 부른단 말이야. 그러니 더 자도 괜찮은데. 이씨."
성은은 그렇게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러나 성원은 그녀의 맞은 편에 앉고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성은도 몇마디 더 투덜거리다가 조금 난폭하게 국을 떠 넣었다. 짜증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국 몇 숟가락을 더 들더니 눈을 반짝 뜨고 밥을 우겨넣기 시작했다. 성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웃었다.
"밥만 들어가면 정신 차릴거면서."
"시끄러."
시간이 지날수록 성은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것저것 마구 집어서 입에 넣었고 성원은 그녀를 보며 다시 웃었다. "이 게으름뱅이. 밥 먹을 때는 누구보다 부지런하네." 성은은 놀리는 손을 멈추지 않고 오물거리면서 성원의 말에 대꾸했다.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듯 그녀의 말은 정확하고 빨랐다.
"나는 게으른 게 아니라 시간 계산이 정확한 거거든? 나는 너와는 달라서 시간을 아주 효율적으로 쓴다구.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목숨걸 필요는 없잖아. 도대체 조금 늦게 가도 괜찮은데 이렇게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어. 또 하루에 한번 청소하나 일주일에 한번 하나 똑같은 걸 왜 매일같이 청소하는지도 모르겠고. 아침마다 네가 돌려대는 청소기 소리에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잖아. 너 청소 중독이야?"
성원은 콧방귀를 끼었다.
"아~ 그래서 매일같이 깨끗이 청소해둔 거실 바닥에 뒹굴면서 잡지를 보는구나. 네가 한번 뒹굴때마다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쌓이는 줄 알아? 그대로 두면 귀신이라도 나올텐데 내가 그걸 어떻게 참냐. 그리고 밥 새로 안 해주면 맛 없다고 징징거리는 게 누군데?"
"그거야 네가 평소에 해주니까 버릇돼서 그런거 아냐. 나도 너 때문에 고민이 많다구. 나중에 너랑 떨어져서 살면 청소도, 밥도 내가 해야 하는데 도무지 이 밥맛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단 말이야. 깨끗한 거실 바닥도, 반짝이는 이 숟가락과 그릇들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숟가락을 들어 까딱까딱 흔들었다. 정말 숟가락은 그녀의 침으로 살짝 번들거려 더 반짝였다.
"너나 나나 한배에서 나왔는데 노력하면 안될 게 뭐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밥 먹고 씻어. 학교 지각하기 싫으면."
"그러지 말고. 성원아 아예 나랑 평생 같이 살자. 어때? 내가 빨래 정도는 할테니까. 나랑 살면서 밥하고 청소좀 해줘. 응?"
성은은 눈을 빛내며 말했고 성원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다 큰 처녀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나중에 네 신랑될 사람한테 맞아죽기 싫다, 나는. 그리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 네가 하냐?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칫."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며 식사를 마쳤을 때는 8시였다. 성원은 가볍게 설거지를 시작했고 그동안 성은은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성원의 설거지 놀림은 아주 익숙했고 정확했다. 그는 5분만에 설거지를 끝내고 방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그가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치고 거실에 나왔을 때, 성은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녀는 길다란 샤워 타올만을 몸에 두른 채였다.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하얀색 타올 밑으로 고스란히 드러났고 가슴 위로 반듯한 쇄골과 둥그런 어깨가 형광등에 반짝 빛났다.
"야. 옷좀 제대로 입고 나와. 다 큰 여자가 꼴이 뭐야?"
"왜에~ 내가 너무 섹시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성원에게 달라붙었다. "징그러워, 저리가." 성원은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욱 달라붙으며 귓속말로, 나 이 안에 속옷 안 입었다, 하고 웃었다. 히히, 하는 웃음소리가 거실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성원은 그녀의 웃음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얀 타올 안에 숨겨져 있을 그녀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아침잠을 깨우다가 본 성은의 속옷 차림이 떠올랐다. 적당한 크기에 예쁜 모양의 가슴과 잘록한 허리, 도톰한 둔부, 매끈한 피부.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너 지금 내 몸 상상하고 있지?" 어느새 귀신같이 알아챈 성은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 그런거 아니야."
"그런데 왜 말을 더듬으실까~? 응?"
성은은 그렇게 말하며 더욱 성원에게 밀착했고 참지 못한 성원은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장난 그만치고 빨리 옷입고 나와."
"씨! 왜때려?"
"맞을 짓을 하잖아. 내가 누나와 사는지 어린애를 하나 데리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머리를 손으로 만지며 성은은 방으로 사라졌고 그제서야 성원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방금 느꼈던 성은의 몸의 감촉이 떠오르자 부르르 몸을 한차례 떨고는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학교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성은은 하품을 크게 했다. 성원은 그녀의 크게 벌어진 입 속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고 성은은 입을 다물면서 느껴지는 짠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성원이 그 모습에 낄낄거리며 웃었다. 성은은 그를 한번 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점심에 피자나 먹자."
"갑자기 왠 피자?"
"그냥. 학교 밥 먹는 것도 지겹고 한번쯤 외식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덩어리들하고 먹으면 되잖아?"
"그 덩어리들 나한테서 떨어져 나간지 오래야. 내가 하도 쌀쌀맞게 대했더니 알게모르게 욕하면서 조금씩 멀어지더라구. 그래서 요즘은 동기들하고 밥먹는데 그것도 좀 지겨워졌어."
"오호라. 천하의 진성은양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만."
"시끄럽고. 먹을거야 말거야?"
성은의 사나운 말에 성원은 잠시 은영을 떠올렸다. 매일 자신과 점심을 먹는 은영인데, 자신이 성은과 점심을 해결하게 되면 은영은 혼자 먹게 될 것이다. 성원은 그렇게 내버려두기가 싫었다. 그렇다면 은영도 같이 피자를 먹으러 가야하는 것일까.
"내 친구도 같이 먹어도 된다면. 좋아."
"친구? 네가 친구가 있어?"
성은은 과도하게 놀라며 물었다. 그러나 성원은 그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같은 과야."
"우와. 드디어 내 동생이 친구가 생겼구나. 좋아. 이참에 네 친구 얼굴좀 보자. 대체 뭐가 부족해서 음침하고 재수없는 너와 어울리는지 나도 궁금한데."
"자기 쌍둥이를 꼭 그렇게 말해야하나."
"사실이잖아?" 하며 성은은 배시시 웃었다. 버스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정문에서 조금 더 걸은 다음 각자의 건물로 헤어졌다. 성은은 자신이 전화할테니 수업 끝나면 꼼짝말고 기다리라고 말했고 성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원이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은영은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은영의 옆에 앉아 책을 꺼냈다.
"안녕. 오늘은 조금 늦었네."
은영이 웃으면서 성원을 반겼다. 성원도 마주 웃었다.
"응. 애 하나 돌보고 오느라."
"애? 그건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하고 성원은 짧게 웃었다. 은영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생각 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참, 너 얘기 들었니? 강정수 교수님 교수실에 성적 붙었대."
"정말? 벌써 성적이 나왔나?"
"응. 그 교수님이 원래 성격이 좀 칼 같아서 매번 시험보고 나서 일주일도 안 지나서 성적이 나온다나봐."
때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강정수 교수는 고전문학의 이해를 가르치는 교수였다. 성원은 그의 강직한 얼굴을 떠올렸다. 군 장교처럼 굳은 얼굴과 앙다문 입술. 성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교수라면 그럴만 했다.
"그분도 참, FM으로 사는구나. 그럼 수업 끝나고 확인하러 가보자."
좋아, 하고 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은 금방 끝이 났다. 성원과 은영은 곧장 일어나 성적을 확인하러 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앞에 누군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안녕. 사자 커플."
"안녕~ 둘이 사이좋게 어딜 가는거야?"
"수업 끝나자마자 데이트야? 한창이구나 너희들!"
"그러게. 봄이라고 꽃이 피었구나."
윤호와 수정이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호들갑을 떨었고 성원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자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그들은 "사자 커플"이라는 호칭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는 호칭뿐만 아니라 이미 커플로 인정한 듯이 말하고는 했다. 은영은 윤호의 너스레가 재밌는지 꺄르르 웃더니, 말했다.
"지금 성적 확인하러 갈려구. 너희들은 어쩐 일이야?"
"아, 우리는 대장님의 전언이 있어서 말이야."
대장님이란, 우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윤호는 가끔 익살스럽게 그를 대장님 - 물론 그것은 존경의 의미가 담긴 호칭은 아니었고 오히려 비꼼의 표현이었다 - 이라고 부르곤 했다. 윤호는 은영과 성원을 번갈아 쳐다본 다음에 목을 큼큼, 가다듬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낮은 배음으로 말을 시작했다.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금수는 들으라. 금주 금요일 밤 술시(戌時)가 시작되는 때에 조촐한 모임이 이 앞의 주막에서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절대 빠지지 말고 참석하기를 바란다. 짐이 특별히 나라 최고의 미녀와(윤호는 손을 들어 수정을 가리켰다.) 향응을 준비했으니 분명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힘들게 과거를 치른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자리이므로, 짐의 성의를 보아서 그대들의 귀한 면을 비추었으면 하노라. 이상."
윤호는 그렇게 말하며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고 수정은 그런 윤호를 보며 오오- 하고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 정말 내시같아, 하고 말하며 수정은 웃었다. 은영도 그런 그들이 하는 모양이 재밌는지 웃었다. 성원은 은영이 웃는 모양을 바라보다가 금요일이면 이틀 뒤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핸드폰을 열어 달력을 보니 수요일에 노랗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시간이 참 빠르네. 성원은 핸드폰을 집어 넣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갈거야?"
그는 반사적으로 은영에게 물었다. 그런 모습에 윤호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아참, 그렇지. 은영이 가면 성원은 자동으로 딸려오는 거였지. 은영아 올거지? 이번에는 저번보다 훨씬 재밌을 거야! 아주 늦게까지 마시고 놀 거거든. 우리는 모두 너희들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윤호의 모습에 다시 한번 은영은 웃었다. "그래. 갈게." 은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성원이 바로 말을 붙였다. "저번에 갔던 애슐리로 가면 되지?"
"응. 저번처럼 늦지 않게만 오면 돼."
"알았어. 그럼 그때 봐."
"오케이. 그럼 데이트 잘 하구, 이따가 보자. 안녕~"
윤호와 수정은 그렇게 말하며 사라졌다. 그제서야 그들은 원래 목적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정수 교수의 교수실은 옆 문학관의 3층에 있었다. 재빠르게 건물에서 벗어나 문학관의 복도에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그들에게 엄습했다. 그곳의 복도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썰렁했다. 문학관은 대부분 교수실이나 대학원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학부생들은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는 곳이었다. 성원은 어쩐지 음침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그 때, 그의 옆에서 걷던 은영이 불쑥 팔짱을 끼어왔다. 성원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 잘 하라잖아. 이러면 정말 커플처럼 보이겠지?"
은영은 무엇이 즐거운지 연신 벙글거렸다. 성원은 은영의 웃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너까지 그들 장단에 맞추다간 끝도 없어."
"뭐 어떠니? 그만큼 우리가 잘 어울린다는 뜻이잖아. 난 좋아."
성원은 적당한 대꾸를 찾지 못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그녀의 은근한 가슴이 그의 팔뚝에 중량감을 주었고 성원은 그것이 못내 신경쓰였으나 그녀를 물리치고 싶지는 않아 그대로 걸었다. 은영은 아무말 없이 걷는 성원을 보며 다시 한번 배시시 웃었다.
-어디야?
"지금 캠퍼스 중앙 광장."
-그래? 나도 그 근처인데. 조금만 기다려.
"알았어."
성원은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옆에 앉은 은영이 성원의 뺨에 차가운 커피를 댔다. 앗 차거, 하고 소리를 지른 성원은 은영을 한차례 쏘아보고는 커피를 받아 단번에 마셔버렸다. 은영이 그런 그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흥, 시험 공부 제대로 안 하더니 점수가 그게 뭐니?"
"난 최선을 다했어. 수업 자체가 나와 맞지 않는거야 이건."
"거짓말. 내가 그렇게 졸라도 맨날 책이나 읽고 따로 공부 하지도 않았잖아."
"몰라. 이미 지난 일이야."
성원은 시큰둥하게 말했고 은영은 귀엽게 인상을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원은 눈을 감고 햇빛을 만끽했다. "고집불통. 안되겠어. 나하고 약속 한가지 해." 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성원의 손을 잡아 올렸다.
"또 무슨 약속?" 성원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대꾸했다.
"다음 기말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시키는 대로 공부하기로."
"이번에도 네 말 따라서 했잖아. 집에 가려는 거 억지로 붙잡아다가 시킨 게 누구였는데."
"집에 가지만 않았지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잖아. 이번에는 내가 아예 확실하게 과외해줄 테니까. 응?"
은영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성원은 그녀의 작은 새끼손가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그대로 그들은 도장까지 찍었다. "좋아. 하지만 성적이 잘 나올거라고 기대하지는 마. 이 수업은 나하고 절대 맞지 않으니까." 성원은 손가락을 건채로 말했다. 그러나 은영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건 노력해봐야 아는거야."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은이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성은은 성원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 앞 5미터쯤에 도달한 그녀는 돌연 멈칫하고 서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바로 쌍둥이 동생의 옆에 앉아 웃고 있는 꽃처럼 예쁜 여자아이였다. 성은은 성원이 말한 친구가 여자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을 했다.
"어, 왔어?"
그런 그녀를 알아챈 성원이 인사를 하자 성은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성원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더 일찍 도착했네."
"으, 응. 수업이 조금 일찍 끝났거든."
"그보다 배가 고파서 헐레벌떡 달려온 거겠지."
"안녕하세요."
그의 옆에서 은영도 인사를 했다. 시험 점수를 확인하고 쌍둥이 누나와 점심으로 피자를 먹자고 하자 흔쾌히 승낙한 은영이었다. 그래서 은영은 지금 성원의 앞에 서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성원의 쌍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얘 쌍둥이 누나 진성은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같은 과 친구, 이은영이라고 해요."
그녀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큰 키에 늘씬한 몸,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성은과 작고 아담한 체구에 귀엽고 예쁜 외모를 가진 은영은 서양과 동양의 대비였고 만개한 꽃과 수줍은 꽃망울이었다. 은영과 성은은 웃으며 서로를 잠시 탐색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은영은 곧 성원과 성은이 이란성이지만 많이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선한 눈매나 반듯하게 솟은 코가 특히 비슷했다.
"정말 성원이하고 닮았네요. 특히 눈이 비슷해요."
"아 그래요?"
"네. 쌍둥이라고 얼굴에 써 놓은 것 같아요."
"쟤랑 어디가 닮았다고 그래. 기분나빠."
성원이 투덜거리자 은영은 그의 팔뚝을 꼬집으며 나무랐다.
"누나한테 무슨 말버릇이 그러니?"
"아야! 아파. 운좋게 나보다 두시간 일찍 나와서 누나라고 우기는거지, 사실은 애나 다름 없다고. 그리고 너 요즘 점점 나를 막 대하는 것 같지 않아? 때리고 꼬집고. 예전에는 미안하다는 말도 했는데 그런 것도 없고 말이야."
"흥, 네가 하는 행동을 봐.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그들은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성은은 그들이 하는 모양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빨리 피자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은영씨도 피자 괜찮죠?" 성원은 평소와 다르게 서두르는 성은을 바라보았으나 성은은 그대로 휙 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은영과 성원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앞서서 성큼성큼 걷는 성은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너희들 친해 보이더라."
"응?"
"은영이하고 너, 친해 보인다고."
"말했잖아. 친구 데려간다고. 그럼 친구가 친해서 친구지 안친하면 친구냐?"
"하긴..."
그렇게 끄덕이며 성은은 팝콘을 몇개 집어 입속에 넣었다. 오물오물. 그 옆에서 성원은 맥주를 홀짝 들이켰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입가심으로 케이블에서 해주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 Sunrise)"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피자도 챙겨주고, 피클도 집어서 먹여주고. 누가 보면 애인사이인 줄 알거야."
무심하게 화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성은이 흘려가는 어투로 말했다. 성원은 슬쩍 성은을 바라본다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런가? 요즘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네. 과에서 우리 별명이 사자 커플이래."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점심 피자를 먹던 때를 떠올렸다. 그들은 다같이 학교 앞의 작은 피자 전문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피자 한판을 시킨 그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은영과 성은은 나이가 같으니 말을 놓았고 성원은 그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구박을 당하며 어렵게 피자를 먹었다. 얘가 얼마나 음침한 줄 아니, 하고 성은이 물으면, 그럼 아주 삐딱하고 재수없는데다가 말은 얼마나 안듣는데, 하고 은영이 되받아쳤다. 그들은 죽이 잘 맞아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러나 성원은 성은이 평소보다 표정이 밝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왜 그런지 물어보려고 했으나 끼어들 틈이 없었던 그는 그저 은영이 건네주는 피자를 먹는데에만 열중해야했다. 은영은 그의 옆에서 웃고 떠들면서 피자를 집어 주고 간간히 피클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욱 대담한 그녀의 행동에 당황을 했지만 그는 은영이 하는대로 덥석 받아 먹었다. 성은이 지켜보고 있는데 거절했다가는 민망해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자신도 은영의 그런 행동이 싫지 않기도 했다. 은영이 피클을 입어 넣어주고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볼때, 참 예쁘다고 여러번 생각이 들었었다. 그 외에도 은영은 자신에게 음료수를 챙겨주거나 휴지로 입가를 닦아 주는 등, 여러가지 신경을 썼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성원은 은영이 성은이 있는 것을 이용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영리한 여자야. 성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좋겠어. 예쁜 여자가 옆에 꼭 붙어 다니고." 하고 성은은 비이냥거렸다. 성원은 상념에서 벗어나 성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성은은 기분이 나빠보였다.
"뭐. 편한 친구야. 그런데 너 아까부터 표정이 좀 안좋은데.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몰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팝콘을 집어 입에 마구 집어넣었다. 그리고 빨대를 빼버리고 콜라를 단번에 마신 다음에 TV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가 밤의 다뉴브 강가를 걸으며 부랑자 시인에게 돈을 주고 시를 받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성원은 성은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성은을 따라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Daydream Delusion" 부랑자 시인의 시가 낭독되었다.
"정말 짜증나!"
잠시 후 성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신경질적인 어투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성원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성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성은을 쳐다보았다.
"왜그래?"
성은은 표정을 풀지 않고 쏘았다.
"너는 어쩜 애가 그렇게 가볍니?"
"뭐야, 갑자기? 영화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황당한 표정이 된 성원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성은은 여전히 씩씩거리는 표정이었다. 무엇이 분한지 손가락 끝이 얕게 떨리고 있었다.
"유진이가 그렇게 되고, 다시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어느새 여자랑 헬렐레 거리고 있고. 너는 지조가 없는거니?"
"뭐?"
성원은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성은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은은 개의치 않는 다는 듯 말을 이었다.
"평생 혼자 살 거라며. 혼자가 편하고 혼자가 좋다며. 그렇게 말한 게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너는 유진이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야! 갑자기 왜 유진이 얘기를 꺼내는건데?"
"몰라서 묻니? 너, 유진이를 배신하는거야!"
성은은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사실, 누구보다 성원이 하루빨리 유진을 잊길 바랐던 건 자신 아니었던가? 그러나 막상 성원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보자 괜히 심통이 난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냈다.
"야! 진성은! 너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 취소해."
"아니, 나는 취소 안해. 나는 네가 그럴 줄은 몰랐어. 적어도 다른 여자가 생기면 나한테 바로 알려줄 거라 생각했단 말이야. 지금 내가 얼마나 배신감 느끼는 줄 아니? 그리고 그건 유진이도 마찬가지 일거야."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 벌떡 일어나 쿵쿵 거리며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쾅- 하고 그녀의 문이 세게 닫히면서 울렸다. 성원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해 아무말도 못했다. 홀짝거리던 맥주를 내려 놓고 한참 생각하던 그는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키고는 벌러덩 거실에 누웠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 계집애가, 하고 성원은 중얼거렸다. TV에서는 셀린느와 제시가 쓸데없는 잡담을 쉬지도 않고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사소한 말에도 깔깔 거리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성원의 귀를 괴롭혔다. 성원은 벌떡 일어나 리모콘을 들어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그는 성은의 방문을 한 번 노려본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순식간에 짙은 침묵이 집에 내리닥쳤다.
"어! 왔어? 빨리 이리 와봐. 이번에 새로 구상한 이야기야. 어제 밤새도록 썼다구."
"나참, 아침부터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기분 좋게 풍겼다.
"자, 이거. 어제 쓴 건데. 역시 네 평가가 필요해."
성원은 그녀에게 한번 웃어주고 그녀가 건네는 노트를 건네 받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옆에서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같은 눈빛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때? 응?"
"기다려. 이제 막 읽기 시작했잖아."
"빨리이~ 빨리 읽고 평가를 해줘. 난 이 시간이 제일 떨린단 말이야!"
그녀는 성원의 팔을 잡아 흔들면서 아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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