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와 해바라기 -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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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722회 작성일 20-01-17 00:51본문
은영의 몸은 새처럼 가벼웠다. 그리고 꽃처럼 향기가 있었다. 성원은 은영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몸을 휘청거렸으나 곧 바로 잡았다. 성원의 양 팔을 부여잡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은영의 흰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났다. 그녀는 정말 작은 새처럼 보였다.
"갑자기 왜 그래."
성원은 그녀가 놀란 이유를 알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몸의 채취가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원은 목을 가다듬고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은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은영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의 가슴에 파묻고 있을 뿐이었다. 성원은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가 꽃에서 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제비꽃일까 장미일까. 아니면 길가에 핀 봉숭아.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어떠한 꽃의 향기도 맡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향기는 은영꽃의 향기겠지. 성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은영은 얼굴을 더욱 성원의 가슴에 묻어왔다. 성원은 그런 은영을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진정해. 이 세상에 유령이 어디있어?"
"하지만 갑자기 들리잖아. 저기에서."
은영은 손만 살짝 들어 책장이 있을법한 방향을 가리켰다. 성원은 은영의 손가락을 따라 책장을 노려보았다. 정말, 흐느낌은 미약하게 그리고 간헐적으로 책장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성원은 이 대화가 굉장히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세상에는 유령 따위는 없다고 믿었고 혹 있더라도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나 자신들을 놀래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한이라던가 이루지 못한 한 같은 것이 있지 않고서야.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그런 것을 품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그녀라면. 아니, 성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의외야. 네가 유령을 무서워할 줄은 몰랐는데."
"무서워하는 거 아니야."
성원의 말에 은영은 들릴락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떨고 있는데, 하고 성원은 그녀의 떨림을 느끼며 말했다. 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놀라서 그런 거야. 의외의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
성원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은 여전히 고개만 묻은 채 숨을 내쉬었다. 색색- 거리는 얕은 숨이 성원의 명치 언저리로 부어졌다. 그는 자신의 옷을 가볍게 뚫고 들어오는 그 따뜻함에 가슴이 떨렸다.
"그럼 넌 여기에 있어. 내가 가서 확인하고 올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은영은 꼭 잡은 성원의 두 팔에 힘을 더욱 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 성원은 그런 은영을 내려다보았다. 은영은 다시 고개를 그의 가슴에 파묻고 도리도리 저었다.
"가지마."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잖아."
"시간이 지나면 유령도 가버릴 거야. 그러니까 가지마. 이렇게 조금만 더 있어."
"그래도 안가면 어떡해? 이러고 날 샐 거야?"
"응. 그럴거야."
성원은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자신에게 안겨있는 은영을 바라보며 이대로 더 있는 것도 좋겠지, 하고 생각을 했다. 은영의 몸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고 그보다 더 자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떨리는 몸의 온기인지 자신의 명치 언저리에 부어지는 은영의 작은 숨결인지,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는 손을 살짝 들어 은영의 머리위로 올렸다. 그 상태로 머뭇거리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겁먹지마. 이대로 있을게."
"응..."
그들은 그대로 한참을 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느낌의 주기가 빨라질 뿐이었다. 은영은 여전히 어쩌지 못한 채 성원에게 안겨 있었고 성원은 그런 은영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은영의 조그만 떨림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그는 은영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 따라서 시골에 자주 갔어."
은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빼꼼히 들어 성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위로 치켜 올라왔다. 성원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토끼굴에서 고개를 내미는 작은 동물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네 집으로 모셔오겠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사람은 태어난 곳에서 죽어야 한다며 전기만 간신히 들어오는 시골에 살기를 원하는 할아버지 때문이었지. 내 기억에 할아버지 댁은 정말 가로등불빛 하나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산골이었던 것같아. 거긴 정말 밤이 되면 까만 색종이처럼 어두워져서 아무 것도 안보였거든. 달이 밝은 날이면 그나마 걸을 만 한데 그렇지 않으면 정말 깜깜해. 오죽하면 저녁 근처에 외출하려면 휴대용 플래시를 들고 다녀야 할 정도였으니까."
은영은 다시 고개를 그의 가슴팍에 묻었다.
"그런데 문제는 할아버지 댁에 화장실이 마당 한 켠에 따로 있었던 거야. 으레 시골집이 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정말 싫었어. 그때는 정말 밤에 화장실 가는 게 세상 무엇보다 싫었던 것 같아. 오죽했으면 시골 내려가면 물이나 음료수, 과일 같은 건 안먹으려고 애썼겠어. 먹으면 오줌 마려우니까. 먹고 싶어도 그것보다 무서운게 더 싫어서 그냥 참았어. 아빠는 사내새끼가 배짱이 없다고 비웃었고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지."
은영이 쿡쿡- 하고 웃는 것이 성원에게 느껴졌다. 웃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작게 떨렸고 그 떨림은 어렴풋이 성원에게 전달되었다.
"그래도 어디 생리현상이 마음대로 되나. 그래도 오줌 마려울 때가 있고 그럴때면 나는 항상 지옥을 방문하는 기분이었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고 있는 엄마를 깨워서 같이 가는 거였어. 이렇게 손을 꼬옥 잡고."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양 팔을 잡고 있는 은영의 작은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의 손의 온기,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일까. 그는 어렸을 때 느꼈던 엄마의 손과 은영의 따뜻함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등에 도드라진 파랗고 얇은 힘줄이 성원의 눈에 들어왔다. 성원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 엄마가 내 옆에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거든. 나는 어렸고 이 세상에 엄마만큼 든든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위안이 되었던 건, 화장실까지 가는 동안 올려다 본 하늘이었어. 그곳에는 별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거든. 진짜로 진짜로, 너무 아름다웠어. 그건 마치 안개꽃이 가득 핀 꽃밭과도 같았다고 기억해. 나는 어린 나이에 한참을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지. 엄마는 그런 내게 웃으면서, 성원아 정말 예쁘지, 성원아 착한일 많이 하면 나중에 저기갈 수 있단다, 그러니까 엄마말, 아빠말, 선생님 말 잘 들어야해, 하고 말하고는 했어. 나는 그 말을 믿고 정말로 착한 아들이 되려고 했지. 네가 믿지 않겠지만 정말 난 어렸을 때 착한 아이였어."
다시 한번 쿡쿡- 하고 은영이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떨림이 성원의 몸에 전해졌다. 성원은 이게, 그녀가 웃어서 몸이 떨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은영이 안정이 된 것 같으니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 뒤로 나는 무서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어. 아마 사람은 여러가지 감정을 동시에 품지 못하나봐. 내가 하늘의 별을 보면서 무서움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주는 장관에 압도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야. 세상 모든 일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성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까만 색종이처럼 깜깜하기만 한 밖에는 별빛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역시 서울의 하늘은 별빛을 보기 힘들어, 그렇게 생각한 성원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은영을 찾았다. 은영도 그를 따라 창밖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좀 괜찮아?"
"응. 그런 것 같아."
"다행이야. 역시 별이 효과가 있나보다."
은영은 작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네가 손을 잡고 있으니까. 네 손은 차가운데, 잡고 있으면 따뜻해. 그래서 안심이 돼."
은영은 웃었다. 성원은 그녀의 웃음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식. 성원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왜 웃니?"
"생각해보니 가까이에 별이 있었는데 깜빡했어."
"그래? 어디에?"
"넌 몰라도 돼."
"치."
성원은 그렇게 은영을 조심스럽게 떼어놓고 일어났다. 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다가 깜짝 놀라 손에 힘을 주어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성원은 단호했다. 그러자 은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잔뜩 겁먹은 송아지같은 눈동자를 하고 성원을 따라 일어났다. 성원은 은영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없이 그의 팔을 작고 귀여운 양손으로 꼭 잡을 뿐이었다.
"같이 갈래?"
성원의 물음에 은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원은 그녀가 자신의 팔을 잡게 내버려둔 뒤 조심스럽게 책장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자 은영이 자신의 팔을 꼭 쥐고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전쟁터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 같았다.
"흐윽."
책장에 다가갈수록 흐느낌의 소리는 명확해졌다. 이제는 흐느낌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안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또 환희에 들뜬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성원은 그 소리를 들으며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지금 책장 너머에서 나는 소리가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은 탓이다. 그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은영은, 지금 당장 성원을 잡고 있는 손만 아니었다면 두 귀를 막았을 것이 틀림없는 표정으로 성원을 따를 뿐이었다.
성원은 책장에 붙어 주저 앉았다. 은영도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성원은 은영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성원의 이두 쯤에 고개를 조심이 기댔다. 그의 맥박이 조심스레 뛰었다.
"하아."
책장에 다다르자 더욱 명확하게 흐느낌이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성원은 주의를 더 기울였다. 적막한 사위에 은영이 조심스레 내뿜는 숨소리와 책장 너머의 흐느낌이 안개처럼 뿌려졌다. 그는 그대로 한참을 책장에 귀를 기울인 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흐느낌의 주기가 더욱 빨라지고 이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정도로 커다랗고 가빠졌을 때쯤에 성원은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은영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나, 하고 성원은 고민했다.
성원은 털썩, 소리가 날 만큼 힘을 빼고 주저 앉았다. 옆에서 은영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령이라..."
성원의 중얼거림에 은영이 입모양으로 "왜?" 하고 물었다. 그는 은영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아무것도 아냐. 일단 확실한 건, 여기에 유령은 없다는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어떻게 확신하니?"
"저 소리를 잘 들어봐."
그러나 은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숙여버렸다. 이번에는 아예 손으로 귀를 막아버린 채였다. 성원은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귀를 막고 있는 손을 힘으로 떼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성원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왜그래, 하고 묻는 듯 했다. 성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그래도..."
"괜찮으니까 저 소리를 들어봐. 저게 정말 유령인 것처럼 들리니?"
은영은 여전히 울상인 얼굴로 마지못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한참을 같은 자세로 눈까지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성원은 그 틈을 타, 마음껏 은영의 얼굴을 감상했다. 단정한 이마, 곧은 눈썹, 눈, 코, 조금씩 발개지는 볼을 지나 입술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은영이 눈을 떴다. 그녀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거 혹시..."
그녀는 수줍음이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원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영은 어떡해, 하고 짧게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응! 나 몰라."
이제 충분히 커진 소리는 얼굴을 감싸고 부끄러워하는 은영과 성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충분히 커다랗고 들떠있어 누구라도 들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소리였다.
"거참, 섹시한 유령이다. 그지?"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은영은 대꾸하지 못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식히려는 듯 손으로 마구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아! 오빠, 조금만 살살."
책장 너머, 아니 정확히 책장과 맞닿아있는 벽 너머에서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아주 커져버려 주의를 집중하지 않아도 들릴 정도가 되었다. 은영은 귀를 막아야 할까, 하고 고민하는 표정으로 손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다가 괜히 웃고 있는 성원이 얄미워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탁, 쳤다.
"왜 때려?"
"몰라."
"이제는 때려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안하는구나. 폭력적이야."
성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보다 저 소리좀 어떻게 할 수 없니?"
"내가 무슨 수로? 남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매너가 아니야."
"신성한 학교에서 저러는 것도 매너가 아니잖아."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거야. 처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꽤 됐으니까.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다 저렇게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건데 뭘.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수위 아저씨 찾아가서 신고라도 할까?"
"그건 아니지만..."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은영은 못마땅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같이 눈을 감았다.
"아, 아- 오빠 나 어떡해. 아아 너무 좋아."
"어디다 쌀까?"
"안에다가. 그냥 안에다가 싸도 돼."
"그래? 으으 싼다."
벽 너머의 소리가 사그라든건 그대로 십분 쯤 지나서였다. 소리가 멈추고 몇분동안 그대로 있다가 성원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은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집에 가자, 하고 성원이 말하자 그제서야 은영은 눈을 떴다.
"지금 몇 시니?"
"열시 반.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그럼 이만 갈까. 더 이상 공부도 안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은영과 성원은 주섬주섬 일어나려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벽 너머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하아, 아아 따위의 적나라한 신음이 다시 들려오자 성원과 은영은 반사적으로 주저앉았다. 성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참. 저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나."
"그러게..." 하고 은영은 부끄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면 조용히라도 하던가. 민폐야 민폐."
"어쩔 수 없잖아. 여자는 소리 참기가 힘드니까..."
"응?"
"아, 아니야."
은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줄 깨닫고는, 다시 한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대로 은영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성원은 그런 그녀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조용히 은영의 모습을 살폈다. 은영이 조심스럽게 내뱉는 숨에 따라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탓에 흘러내린 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가렸지만 성원은 어쩐지 그녀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벽 너머에서는 아까보다 더 과감한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한번 무사히 거사를 치르고 난 뒤라 과감해졌는지 여자는 참지 않는 듯 했다. 부끄러워하는 은영과 벽 너머의 신음, 늦은 밤. 이런 것들이 조화되자 성원은 정말 유령에라도 홀린 기분이 되었다.
벽 너머의 남녀가 정사를 끝낸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성원이 시계를 보니 열한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동안 성원과 은영은 말 한마디 않고 그들의 소리를 모두 들었다.
"진짜로 집에 가자."
성원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고 은영이 주섬주섬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짐을 챙겨 동아리방을 벗어나는 동안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하루가 거의 저물어가는 시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성원은 역시 어두운 밤의 캠퍼스가 어색한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어, 저기 좀 봐."
성원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은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옆에서 걷다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반짝, 몇 개의 별이 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평소보다 별이 더 많이 보이네. 저기 보여? 오리온 자리야."
"응."
"오리온 자리가 있으면 근처에 카시오페아 자리도 있다는 건데. 아 저기 있다. 저기 가장 밝은 별은 아마도 시리우스 일거야."
성원은 신나서 자신이 아는 별자리들을 몇 개 지목했고 그제서야 은영은 풋, 하고 작게 웃었다. 왜웃어, 하고 묻는 성원의 말에 은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학교 정문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더이상 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환한 가로등이 그들을 반겼다.
"이제는 더 이상 안보이네."
"가로등이 워낙 밝으니까. 하늘이 아무리 맑아도 어쩔 수 없잖아."
"그렇구나. 그래도 별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은데."
"뭐가?"
"실제로 따지면 저 따위 가로등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밝은데, 너무 멀리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그 크기보다 거리가 중요할 때가 있어. 그리고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리잖아. 오히려 이정도가 딱 좋지 않을까."
성원은 그렇게 말하는 은영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빛이 떨어져내려 그녀를 정직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깨가 은색으로 빛이 났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은영을 보며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별이라면 은영은 가로등이다. 누구보다 커다랗고 큰 존재였지만 멀어진 지금에는, 은영의 조그만 존재에도 잊혀져버리는 것이다. 성원은 그녀를 떠올리며 가슴 아프던 때가 언제인지 떠올렸다. 꽤 됐다는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건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너 또 그사람 생각하는구나?"
은영은 그렇게 물으며 성원의 상념을 깼다. 성원은 은영을 보았다. 은영은 작은 미소를 입에 걸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원은 묻는 표정으로 은영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그랬잖아. 내가 떠올리기 싫은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구. 지금 딱 그 표정이야."
"아, 미안해."
성원은 황급히 사과를 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 자꾸 그사람 떠올리게 해서."
은영은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바보야. 네가 왜 미안하냐. 네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내 멋대로 이러는건데. 그리고..."
성원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요즘은 별로 가슴 아프지도 않아. 예전에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말 마음이 아팠는데 자주 떠올리다보니까 내성이 생겼나봐. 역시 사람은 뭐든지 정면으로 부딪혀서 극복해야 한다던 말이 맞은 거지. 그래서 오히려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네 덕분에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극복할 수 있으니까."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너는 참. 내가 미안하고 내가 고맙다니까 왜 자꾸 네가 그러는거야?"
"그냥..."
성원은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오늘은 하늘에 떠있는 별도 봤고 유령의 노래도 듣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길 잘한 것 같아. 고마워 네 덕분이야."
"유령의 노래?"
"응. 아까 동아리방에서 들었잖아. 아주 섹시하게 노래하는 유령."
"아...!"
은영은 다시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탁, 하고 쳤다. 성원은 그런 은영의 반응에 쿡쿡거리며 웃었다.
"못됐어."
"곧 버스 오겠다. 서두르자."
그들이 정류장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아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성원과 은영은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늦은 밤의 버스에는 사람이 얼마 있지 않았다. 성원과 은영은 뒤에서 두번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 버스 너희 집까지 안가잖아?"
"괜찮아.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면 되니까."
"귀찮게 뭐 하러 그래? 한번에 가는 버스 많으면서."
"내 맘이야. 바보야." 하고 은영은 새침하게 대꾸했다.
버스는 금방 성원이 내릴 정류장에 도착했다. "잘가." "내일봐." 은영과 성원은 짧게 작별인사를 했다. 은영은 버스에서 내려 뒤돌아 걸어가는 성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계속 걸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창문에 입김을 호- 하고 불었다. 그러자 서리가 맺혀 뿌옇게 변한 창문은 성원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잠시 후 버스가 덜컹거리면서 정직하게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슥슥- 소매로 창문에 맺힌 입김을 지웠다. 곧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선명해진 창문 너머로 성원이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성원도 손을 마주 흔들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는 이제 속도가 붙어 순식간에 정류장을 벗어났다. 그동안 서로는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완전히 성원의 시야에서 벗어날때까지 성원과 은영은 계속 손을 흔들었다. 버스의 몸통이 큰 길 사거리를 돌아 사라지자 그제야 성원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의 머리 위에 작은 별들이 반딫불처럼 따라왔다.
*오랜만입니다. 휴일 잘 보내세요.
"갑자기 왜 그래."
성원은 그녀가 놀란 이유를 알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몸의 채취가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원은 목을 가다듬고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은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은영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의 가슴에 파묻고 있을 뿐이었다. 성원은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가 꽃에서 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제비꽃일까 장미일까. 아니면 길가에 핀 봉숭아.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어떠한 꽃의 향기도 맡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향기는 은영꽃의 향기겠지. 성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은영은 얼굴을 더욱 성원의 가슴에 묻어왔다. 성원은 그런 은영을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진정해. 이 세상에 유령이 어디있어?"
"하지만 갑자기 들리잖아. 저기에서."
은영은 손만 살짝 들어 책장이 있을법한 방향을 가리켰다. 성원은 은영의 손가락을 따라 책장을 노려보았다. 정말, 흐느낌은 미약하게 그리고 간헐적으로 책장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성원은 이 대화가 굉장히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세상에는 유령 따위는 없다고 믿었고 혹 있더라도 난데없이 이곳에 나타나 자신들을 놀래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한이라던가 이루지 못한 한 같은 것이 있지 않고서야.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그런 것을 품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그녀라면. 아니, 성원은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의외야. 네가 유령을 무서워할 줄은 몰랐는데."
"무서워하는 거 아니야."
성원의 말에 은영은 들릴락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떨고 있는데, 하고 성원은 그녀의 떨림을 느끼며 말했다. 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놀라서 그런 거야. 의외의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
성원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은 여전히 고개만 묻은 채 숨을 내쉬었다. 색색- 거리는 얕은 숨이 성원의 명치 언저리로 부어졌다. 그는 자신의 옷을 가볍게 뚫고 들어오는 그 따뜻함에 가슴이 떨렸다.
"그럼 넌 여기에 있어. 내가 가서 확인하고 올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은영은 꼭 잡은 성원의 두 팔에 힘을 더욱 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 성원은 그런 은영을 내려다보았다. 은영은 다시 고개를 그의 가슴에 파묻고 도리도리 저었다.
"가지마."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잖아."
"시간이 지나면 유령도 가버릴 거야. 그러니까 가지마. 이렇게 조금만 더 있어."
"그래도 안가면 어떡해? 이러고 날 샐 거야?"
"응. 그럴거야."
성원은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자신에게 안겨있는 은영을 바라보며 이대로 더 있는 것도 좋겠지, 하고 생각을 했다. 은영의 몸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났고 그보다 더 자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떨리는 몸의 온기인지 자신의 명치 언저리에 부어지는 은영의 작은 숨결인지,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는 손을 살짝 들어 은영의 머리위로 올렸다. 그 상태로 머뭇거리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겁먹지마. 이대로 있을게."
"응..."
그들은 그대로 한참을 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흐느낌의 주기가 빨라질 뿐이었다. 은영은 여전히 어쩌지 못한 채 성원에게 안겨 있었고 성원은 그런 은영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은영의 조그만 떨림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그는 은영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거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 따라서 시골에 자주 갔어."
은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빼꼼히 들어 성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위로 치켜 올라왔다. 성원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토끼굴에서 고개를 내미는 작은 동물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네 집으로 모셔오겠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사람은 태어난 곳에서 죽어야 한다며 전기만 간신히 들어오는 시골에 살기를 원하는 할아버지 때문이었지. 내 기억에 할아버지 댁은 정말 가로등불빛 하나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산골이었던 것같아. 거긴 정말 밤이 되면 까만 색종이처럼 어두워져서 아무 것도 안보였거든. 달이 밝은 날이면 그나마 걸을 만 한데 그렇지 않으면 정말 깜깜해. 오죽하면 저녁 근처에 외출하려면 휴대용 플래시를 들고 다녀야 할 정도였으니까."
은영은 다시 고개를 그의 가슴팍에 묻었다.
"그런데 문제는 할아버지 댁에 화장실이 마당 한 켠에 따로 있었던 거야. 으레 시골집이 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정말 싫었어. 그때는 정말 밤에 화장실 가는 게 세상 무엇보다 싫었던 것 같아. 오죽했으면 시골 내려가면 물이나 음료수, 과일 같은 건 안먹으려고 애썼겠어. 먹으면 오줌 마려우니까. 먹고 싶어도 그것보다 무서운게 더 싫어서 그냥 참았어. 아빠는 사내새끼가 배짱이 없다고 비웃었고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지."
은영이 쿡쿡- 하고 웃는 것이 성원에게 느껴졌다. 웃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작게 떨렸고 그 떨림은 어렴풋이 성원에게 전달되었다.
"그래도 어디 생리현상이 마음대로 되나. 그래도 오줌 마려울 때가 있고 그럴때면 나는 항상 지옥을 방문하는 기분이었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고 있는 엄마를 깨워서 같이 가는 거였어. 이렇게 손을 꼬옥 잡고."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양 팔을 잡고 있는 은영의 작은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의 손의 온기,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일까. 그는 어렸을 때 느꼈던 엄마의 손과 은영의 따뜻함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등에 도드라진 파랗고 얇은 힘줄이 성원의 눈에 들어왔다. 성원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 엄마가 내 옆에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거든. 나는 어렸고 이 세상에 엄마만큼 든든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위안이 되었던 건, 화장실까지 가는 동안 올려다 본 하늘이었어. 그곳에는 별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거든. 진짜로 진짜로, 너무 아름다웠어. 그건 마치 안개꽃이 가득 핀 꽃밭과도 같았다고 기억해. 나는 어린 나이에 한참을 멍하니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지. 엄마는 그런 내게 웃으면서, 성원아 정말 예쁘지, 성원아 착한일 많이 하면 나중에 저기갈 수 있단다, 그러니까 엄마말, 아빠말, 선생님 말 잘 들어야해, 하고 말하고는 했어. 나는 그 말을 믿고 정말로 착한 아들이 되려고 했지. 네가 믿지 않겠지만 정말 난 어렸을 때 착한 아이였어."
다시 한번 쿡쿡- 하고 은영이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떨림이 성원의 몸에 전해졌다. 성원은 이게, 그녀가 웃어서 몸이 떨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은영이 안정이 된 것 같으니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 뒤로 나는 무서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어. 아마 사람은 여러가지 감정을 동시에 품지 못하나봐. 내가 하늘의 별을 보면서 무서움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주는 장관에 압도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야. 세상 모든 일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성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까만 색종이처럼 깜깜하기만 한 밖에는 별빛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역시 서울의 하늘은 별빛을 보기 힘들어, 그렇게 생각한 성원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은영을 찾았다. 은영도 그를 따라 창밖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제 좀 괜찮아?"
"응. 그런 것 같아."
"다행이야. 역시 별이 효과가 있나보다."
은영은 작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네가 손을 잡고 있으니까. 네 손은 차가운데, 잡고 있으면 따뜻해. 그래서 안심이 돼."
은영은 웃었다. 성원은 그녀의 웃음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식. 성원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왜 웃니?"
"생각해보니 가까이에 별이 있었는데 깜빡했어."
"그래? 어디에?"
"넌 몰라도 돼."
"치."
성원은 그렇게 은영을 조심스럽게 떼어놓고 일어났다. 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다가 깜짝 놀라 손에 힘을 주어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성원은 단호했다. 그러자 은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잔뜩 겁먹은 송아지같은 눈동자를 하고 성원을 따라 일어났다. 성원은 은영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없이 그의 팔을 작고 귀여운 양손으로 꼭 잡을 뿐이었다.
"같이 갈래?"
성원의 물음에 은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원은 그녀가 자신의 팔을 잡게 내버려둔 뒤 조심스럽게 책장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자 은영이 자신의 팔을 꼭 쥐고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전쟁터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 같았다.
"흐윽."
책장에 다가갈수록 흐느낌의 소리는 명확해졌다. 이제는 흐느낌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안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또 환희에 들뜬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성원은 그 소리를 들으며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지금 책장 너머에서 나는 소리가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은 탓이다. 그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은영은, 지금 당장 성원을 잡고 있는 손만 아니었다면 두 귀를 막았을 것이 틀림없는 표정으로 성원을 따를 뿐이었다.
성원은 책장에 붙어 주저 앉았다. 은영도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성원은 은영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성원의 이두 쯤에 고개를 조심이 기댔다. 그의 맥박이 조심스레 뛰었다.
"하아."
책장에 다다르자 더욱 명확하게 흐느낌이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성원은 주의를 더 기울였다. 적막한 사위에 은영이 조심스레 내뿜는 숨소리와 책장 너머의 흐느낌이 안개처럼 뿌려졌다. 그는 그대로 한참을 책장에 귀를 기울인 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흐느낌의 주기가 더욱 빨라지고 이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정도로 커다랗고 가빠졌을 때쯤에 성원은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은영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나, 하고 성원은 고민했다.
성원은 털썩, 소리가 날 만큼 힘을 빼고 주저 앉았다. 옆에서 은영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령이라..."
성원의 중얼거림에 은영이 입모양으로 "왜?" 하고 물었다. 그는 은영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아무것도 아냐. 일단 확실한 건, 여기에 유령은 없다는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어떻게 확신하니?"
"저 소리를 잘 들어봐."
그러나 은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숙여버렸다. 이번에는 아예 손으로 귀를 막아버린 채였다. 성원은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귀를 막고 있는 손을 힘으로 떼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성원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왜그래, 하고 묻는 듯 했다. 성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그래도..."
"괜찮으니까 저 소리를 들어봐. 저게 정말 유령인 것처럼 들리니?"
은영은 여전히 울상인 얼굴로 마지못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한참을 같은 자세로 눈까지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성원은 그 틈을 타, 마음껏 은영의 얼굴을 감상했다. 단정한 이마, 곧은 눈썹, 눈, 코, 조금씩 발개지는 볼을 지나 입술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은영이 눈을 떴다. 그녀는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거 혹시..."
그녀는 수줍음이 가득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원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영은 어떡해, 하고 짧게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응! 나 몰라."
이제 충분히 커진 소리는 얼굴을 감싸고 부끄러워하는 은영과 성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충분히 커다랗고 들떠있어 누구라도 들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소리였다.
"거참, 섹시한 유령이다. 그지?"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은영은 대꾸하지 못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식히려는 듯 손으로 마구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아! 오빠, 조금만 살살."
책장 너머, 아니 정확히 책장과 맞닿아있는 벽 너머에서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아주 커져버려 주의를 집중하지 않아도 들릴 정도가 되었다. 은영은 귀를 막아야 할까, 하고 고민하는 표정으로 손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다가 괜히 웃고 있는 성원이 얄미워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탁, 쳤다.
"왜 때려?"
"몰라."
"이제는 때려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안하는구나. 폭력적이야."
성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보다 저 소리좀 어떻게 할 수 없니?"
"내가 무슨 수로? 남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매너가 아니야."
"신성한 학교에서 저러는 것도 매너가 아니잖아."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거야. 처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꽤 됐으니까. 그리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다 저렇게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건데 뭘.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수위 아저씨 찾아가서 신고라도 할까?"
"그건 아니지만..."
성원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은영은 못마땅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같이 눈을 감았다.
"아, 아- 오빠 나 어떡해. 아아 너무 좋아."
"어디다 쌀까?"
"안에다가. 그냥 안에다가 싸도 돼."
"그래? 으으 싼다."
벽 너머의 소리가 사그라든건 그대로 십분 쯤 지나서였다. 소리가 멈추고 몇분동안 그대로 있다가 성원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은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집에 가자, 하고 성원이 말하자 그제서야 은영은 눈을 떴다.
"지금 몇 시니?"
"열시 반. 이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그럼 이만 갈까. 더 이상 공부도 안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은영과 성원은 주섬주섬 일어나려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벽 너머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하아, 아아 따위의 적나라한 신음이 다시 들려오자 성원과 은영은 반사적으로 주저앉았다. 성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참. 저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나."
"그러게..." 하고 은영은 부끄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면 조용히라도 하던가. 민폐야 민폐."
"어쩔 수 없잖아. 여자는 소리 참기가 힘드니까..."
"응?"
"아, 아니야."
은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줄 깨닫고는, 다시 한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대로 은영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성원은 그런 그녀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조용히 은영의 모습을 살폈다. 은영이 조심스럽게 내뱉는 숨에 따라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탓에 흘러내린 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가렸지만 성원은 어쩐지 그녀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을것만 같았다. 벽 너머에서는 아까보다 더 과감한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한번 무사히 거사를 치르고 난 뒤라 과감해졌는지 여자는 참지 않는 듯 했다. 부끄러워하는 은영과 벽 너머의 신음, 늦은 밤. 이런 것들이 조화되자 성원은 정말 유령에라도 홀린 기분이 되었다.
벽 너머의 남녀가 정사를 끝낸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성원이 시계를 보니 열한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동안 성원과 은영은 말 한마디 않고 그들의 소리를 모두 들었다.
"진짜로 집에 가자."
성원이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고 은영이 주섬주섬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짐을 챙겨 동아리방을 벗어나는 동안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하루가 거의 저물어가는 시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성원은 역시 어두운 밤의 캠퍼스가 어색한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어, 저기 좀 봐."
성원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은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옆에서 걷다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반짝, 몇 개의 별이 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었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평소보다 별이 더 많이 보이네. 저기 보여? 오리온 자리야."
"응."
"오리온 자리가 있으면 근처에 카시오페아 자리도 있다는 건데. 아 저기 있다. 저기 가장 밝은 별은 아마도 시리우스 일거야."
성원은 신나서 자신이 아는 별자리들을 몇 개 지목했고 그제서야 은영은 풋, 하고 작게 웃었다. 왜웃어, 하고 묻는 성원의 말에 은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학교 정문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더이상 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환한 가로등이 그들을 반겼다.
"이제는 더 이상 안보이네."
"가로등이 워낙 밝으니까. 하늘이 아무리 맑아도 어쩔 수 없잖아."
"그렇구나. 그래도 별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은데."
"뭐가?"
"실제로 따지면 저 따위 가로등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밝은데, 너무 멀리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그 크기보다 거리가 중요할 때가 있어. 그리고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리잖아. 오히려 이정도가 딱 좋지 않을까."
성원은 그렇게 말하는 은영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빛이 떨어져내려 그녀를 정직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깨가 은색으로 빛이 났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은영을 보며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별이라면 은영은 가로등이다. 누구보다 커다랗고 큰 존재였지만 멀어진 지금에는, 은영의 조그만 존재에도 잊혀져버리는 것이다. 성원은 그녀를 떠올리며 가슴 아프던 때가 언제인지 떠올렸다. 꽤 됐다는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건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너 또 그사람 생각하는구나?"
은영은 그렇게 물으며 성원의 상념을 깼다. 성원은 은영을 보았다. 은영은 작은 미소를 입에 걸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원은 묻는 표정으로 은영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그랬잖아. 내가 떠올리기 싫은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구. 지금 딱 그 표정이야."
"아, 미안해."
성원은 황급히 사과를 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 자꾸 그사람 떠올리게 해서."
은영은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원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바보야. 네가 왜 미안하냐. 네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내 멋대로 이러는건데. 그리고..."
성원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요즘은 별로 가슴 아프지도 않아. 예전에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말 마음이 아팠는데 자주 떠올리다보니까 내성이 생겼나봐. 역시 사람은 뭐든지 정면으로 부딪혀서 극복해야 한다던 말이 맞은 거지. 그래서 오히려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네 덕분에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극복할 수 있으니까."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너는 참. 내가 미안하고 내가 고맙다니까 왜 자꾸 네가 그러는거야?"
"그냥..."
성원은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오늘은 하늘에 떠있는 별도 봤고 유령의 노래도 듣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길 잘한 것 같아. 고마워 네 덕분이야."
"유령의 노래?"
"응. 아까 동아리방에서 들었잖아. 아주 섹시하게 노래하는 유령."
"아...!"
은영은 다시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탁, 하고 쳤다. 성원은 그런 은영의 반응에 쿡쿡거리며 웃었다.
"못됐어."
"곧 버스 오겠다. 서두르자."
그들이 정류장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아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성원과 은영은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늦은 밤의 버스에는 사람이 얼마 있지 않았다. 성원과 은영은 뒤에서 두번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이 버스 너희 집까지 안가잖아?"
"괜찮아.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면 되니까."
"귀찮게 뭐 하러 그래? 한번에 가는 버스 많으면서."
"내 맘이야. 바보야." 하고 은영은 새침하게 대꾸했다.
버스는 금방 성원이 내릴 정류장에 도착했다. "잘가." "내일봐." 은영과 성원은 짧게 작별인사를 했다. 은영은 버스에서 내려 뒤돌아 걸어가는 성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계속 걸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창문에 입김을 호- 하고 불었다. 그러자 서리가 맺혀 뿌옇게 변한 창문은 성원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잠시 후 버스가 덜컹거리면서 정직하게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슥슥- 소매로 창문에 맺힌 입김을 지웠다. 곧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선명해진 창문 너머로 성원이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성원도 손을 마주 흔들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는 이제 속도가 붙어 순식간에 정류장을 벗어났다. 그동안 서로는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완전히 성원의 시야에서 벗어날때까지 성원과 은영은 계속 손을 흔들었다. 버스의 몸통이 큰 길 사거리를 돌아 사라지자 그제야 성원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의 머리 위에 작은 별들이 반딫불처럼 따라왔다.
*오랜만입니다. 휴일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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