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와 해바라기 -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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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777회 작성일 20-01-17 00:51본문
1-3. 비와 꽃
얇고 고운 실이 하늘에서부터 대지까지 고르게 이어져 내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 정직하게 직선을 그리는 실은 맑고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토록 기다렸을 봄비. 진정한 생명의 출원이 되어줄 봄비는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아침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곳에라도 반갑게 얼굴을 내비쳤다. 푸르름이 약동하는 초목산천에도, 회색 빛의 콘크리트와 검은 아스팔트 위에도, 새벽 바삐 움직이는 각양각색의 우산 위와 미쳐 걷지 못한 빨래들 틈에도. 봄비는 어김없이 장난꾸러기처럼 들이닥쳤다. 누군가는 그런 봄비를 보며 미소 짓고 누군가는 울상을 지으며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와의 약속이 취소될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건, 지구는 봄비를 맞이해 더욱 선명하고 진하게 얼굴을 단장하리라는 것이었다.
은영이 베란다에 놓아두었던 화분에도 비는 떨어졌다. 수줍고 가냘픈 로즈마리는 비를 두 손 들어 환영하듯 자신의 잎을 한껏 드높였다. 비가 한 방울 툭툭 떨어질 때마다 로즈마리는 가볍게 잎을 떨었다. 비는 그 잎을 타고 또르르 흙 속으로 사라지고 그 위로 새로운 빗방울이 연신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고 흘러내리고 스며드는 자연의 반복. 그 앞에서, 은영은 미소 지으며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잘 잤니? 비가 와서 시원하겠구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은영은 자신의 식물을 향해 그렇게 인사를 했다. 방금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촉촉하고 맑은 그녀의 얼굴이 창문에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갯벌과도 같은 빛으로 가득 찬 이른 아침이었다.
"나도 잘 잤어.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걸."
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은영의 방은 그녀의 성격처럼 단정했다. 그녀의 몸이 꼭 하나 들어갈 아담한 목제 침대와 작은 책상, 옷장이 전부였다. 한쪽 벽에 놓인 거울에 그녀의 예쁜 옆모습이 담겼다. 침대 위에는 하얀 이불이 곱게 포개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다가가 분홍색 커튼을 제쳤다. 타닥타닥-. 마치 불씨가 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봄비가 창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연주를 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옷장에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의 옷장에는 예쁜 원피스와 캐쥬얼 복장이 가득해다. 그녀는 옷을 하나씩 넘기다가 그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성원이 보았던 톤 다운된 오렌지색 원피스였다. 그것을 침대에 조심이 내려놓고 티셔츠를 벗었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그녀의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잡티 없이 하얀 그녀의 몸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몸 어디라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배와 어깨, 팔뚝, 호리병을 연상케 하는 잘록한 허리와 그 위로 자리를 잡은 봉긋한 젖무덤. 화가라면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을만큼 그녀의 몸은 균형이 잡혀 있었고 예뻤다. 은영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덮고 있는 브래지어의 위치를 바로 잡고 잠옷 바지를 마저 벗었다. 그녀는 수수한 분홍색 팬티를 입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바지를 벗는 동안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가 팬티에 감싸인 채 위로 치켜 들렸다. 호박같은 그녀의 엉덩이는 아담한 체구와 맞물려 더욱 풍성한 느낌을 주었다. 은영은 바지를 벗고 허리를 폈다. 그러자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조심스레 드러났다. 새하얗고 육감적인 허벅지와 그것이 만나는 지점은 아찔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속옷에 감싸여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순결하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듯했다.
은영은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는 원피스를 재빨리 입었다. 그녀의 맨살이 서서히 원피스에 의해 가려져 갔다. 봉긋한 젖무덤, 매끈한 복부와 허리, 탐스러운 엉덩이와 비밀섬이 차례로 옷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옷을 다 입은 은영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았다. 옷을 입느라 약간 상기된 얼굴과 그 아래로 맵시 있게 펼쳐진 그녀의 몸매가 거울에 나타났다. 은영은 만족한 듯 웃고는 자신이 벗은 티셔츠와 바지를 곱게 개어 옷장 한켠에 두었다.
은영은 창문을 열어볼까, 하고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침대만큼이나 아담한 책상에 다가가 앉았다. 그곳에 앉아서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손을 뻗어 책상 서랍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별다른 장식 없는 사진첩 하나를 꺼내어 책상에 놓았다. 꽤 오래된 듯 색이 약간 바랜 사진첩이었다. 사진첩의 표지에는 그녀의 손글씨로 예쁘게 "은영이꺼"라고 적혀 있었다. 은영은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진첩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예쁘고 작은 손이 사진첩을 조심스레 넘기기 시작했다.
사진첩 속에는 여러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기억조차 못하는 유아 시절부터 순수한 웃음이 예쁘던 어린 시절, 조금은 반항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생기 넘치던 사춘기 시절까지. 그녀는 조심스레 한장한장 사진첩을 넘겼다. 그럴 때마다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편의 책이 되어버린, 그 시절들이 떠오르고 저물며 그렇게 넘어갔다.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과 원반처럼 큰 눈동자로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은영, 작은 손을 뻗어 꼭 그만한 크기의 엄마 손가락을 잡는 은영, 노란 유치원 교복과 모자를 쓰고 울상을 짓는 은영, 회색 교복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앉은 은영... 사진첩에는 은영의 일생이 작게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장 한장, 자신의 추억을 넘기던 은영의 손이 어느 부분에서 멈췄다. 그곳에서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움직일 줄 몰랐다. 은영은 아련한 눈빛으로 사진첩 속의 사진들을 바라만 보았다.
사진첩에는 몇 장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모두 같은 사람이 있었다. 꽃 밭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어느 바닷가에서 은영과 손을 꼭 마주잡고 행복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은영만큼이나 예쁜 여자 아이였다.
"오랜만이야. 비오니까 네 생각이 났어." 하고 은영은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은영은 손을 들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를 쓰다듬었다. 애정 어린 손길로 친구의 사진을 매만지는 은영의 눈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너는 봄비를 참 좋아했지. 오늘 같은 날이면 너와 함께 비를 맞으러 나가곤 했었는데. 벌써 오래된 일이야."
은영은 왼팔을 베고 엎드렸다.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그녀의 턱과 오른쪽 눈을 가렸다. 은영은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긴 후 자신이 볼 수 있게 사진첩을 세웠다. 검지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친구의 온기라도 느낄 작정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친구의 머리카락, 예쁜 얼굴과 둥그런 어깨, 브이를 그리는 귀여운 손가락까지.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은 어느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친구의 몸을 구석구석 매만지고는 다시 차가운 책상 위로 돌아갔다. 은영의 얼굴에는 아련한 미소가 맺혔다.
"너는 잘 지내니?"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은영은 그런 것은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이 그대로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불씨같은 빗노래만이 그녀의 방안을 조용히 울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에는 봄비와 꼭 닮은 맑고 슬픈 것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진첩 속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친구.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손으로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다음 봄비에 봐."
그녀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사진첩을 조심스럽게 서랍에 넣었다. 타닥타닥- 내리는 봄비만이 조용히 울렸다.
성은은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어젯밤에 물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볼일이 급했다. 소변을 보고 잠이 들었어야 했다며 투덜대던 그녀는 올라가있는 변기 커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볼일 본 뒤에는 내리라고 말했는데도."
성은은 손으로 변기 커버를 덮고 급하게 바지와 팬티를 내렸다. 그녀의 새하얀 엉덩이가 드러나기도 잠시, 변기에 주저앉은 그녀는 곧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 쪼르르- 하는 소리가 작은 화장실을 울렸다. 성은은 변기에 앉아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부러워할 매끈한 다리가 반듯한 게 보기 좋았다. 성은은 다리를 살짝 벌려 보았다. 그대로 다리를 이리저리 꼬아보던 성은은 풋,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자신이 야한 여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볼일을 마친 성은은 휴지로 닦고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방금 막 잠에서 깬 탓에 얼굴이 푸석해져 있었다. 얼굴을 좌우로 돌려가며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수도꼭지를 올려 차갑게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여자치고는 커다란 손이 물에 젖어 빛을 반사시켰다. 그녀는 그대로 손을 씻고 나와 시원한 물을 한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식도를 타고 단번에 위에까지 닿은 차가움은 성은의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거실에 달린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슴푸레한 빛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성은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쓰고는 중얼거렸다.
"비 오잖아."
성은은 컵을 신경질적으로 식탁에 놓았다. 성은은 비오는 날을 싫어했다. 그녀는 생리적으로 비와 자신이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몸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쑤시거나 이유없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날은 예외 없이 비가 쏟아졌다. 또한 유난히 비가 오면 재수 없는 일을 많이 겪었던 성은이기에 비를 보면 끔찍이도 싫어했다.
성은은 자신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깨어난 것도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안한 얼굴로 "오늘은 어쩐지 재수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하고 중얼거리며 성은은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자신의 방문앞에 도착한 그녀는 그대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무슨 생각에선지, 몸을 돌려 자기 쌍둥이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성은이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잠기지 않은 동생의 문의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이른 아침의 방 안에는 어둠이 얼기설기 뭉쳐있었다. 성은은 어둠을 몰아내려는 듯 숨을 한차례 내쉬고 성원이 잠들어있을 침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와의 거리가 세 걸음쯤 되었을 때 성은은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신과 닮아 예쁜 얼굴을 하고서는 곤히 잠든 성원은 성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
"세상 모르고 자는구나." 하고 성은은 조그맣게 말했다. 언제나 자신보다 부지런하던 동생이었다. 같은 대학에 입학하고 부모님의 권유로 같이 살기 시작한 후로는 성원은 매일 그녀보다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깨어나 잠든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성은은 조금 더 다가가 조심스레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성원은 코도 골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성은은 몸을 비틀어 그에게 얼굴을 향하게 한 뒤 따뜻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자 그가 볼을 성은의 손바닥에 비벼왔다. 아기 같은 그의 모습에 성은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코를 살짝 쥐어 보이고는 이불 속에 감춰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성원의 손은 따뜻했다. 성은은 새삼스레 인간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주잡은 그의 손, 가운데 손가락에 잡힌 물집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평소에 연필을 잡고 글을 많이 쓴 탓에 생긴 상처였다. 성원은 그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성은이 보기에 그건 미련한 동생의 마음에 난 생채기의 현상이었다.
성은은 잡고 있던 동생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 거야, 하고 생각하며 성은은 잡고 있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갖다 대었다.
"너는 아직도 잊지 못한 거니..."
성은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따뜻한 성원의 손이 전해주는 온기와는 다르게 성은의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은 여전히 잊지 못한 채 짐을 가득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너는 바보야. 알고 있니?" 하고 성은은 물었다. 그러나 성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성원의 손을 잡고 있던 성은은 돌연 그 손을 놓고 자신의 얼굴을 성원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녀의 눈이 옅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잠시 후 성은의 붉은 입술이 성원의 넓은 이마에 닿으며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대로 속으로 시간을 셌다. 하나, 둘, 셋. 동시에 그녀는 입술을 떼고 숨을 내쉬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얼굴이 성원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냈다.
"이것도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 거야."
잠든 동생이 알 리가 없는데도, 성은은 그렇게 핑계대듯 말하며 일어났다. 이제 막 동이 터오고 있었다.
4월 초가 되어 중간고사기간에 접어들자 학생들은 바빠졌다. 모두들 개미처럼 도서관에 드나들며 바쁜 날을 보냈다. 그들은 이해조차 제대로 못하는 두꺼운 책을 펼치고, 금붕어처럼 눈을 깜빡이며 색깔 있는 펜으로 밑줄을 긋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배우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책 속의 내용을 암기하고 적어내는 기계적인 일들을 반복하며 만족하고 웃었다.
성원은 창문을 통해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젊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성원은 그런 이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지는 않았다. 자신이라고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 만약 그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창 밖의 교정을 바삐 걷는 이들과 다르지 않은 날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귀여운 여학생이 책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젖어버린 책을 조심스레 주워 들고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이 성원의 눈에 들어왔다. 저 여학생도 자신도 그렇게 연속되어온 배움의 일생이었다. 그 누구라고, 저렇게 아둥바둥하는 이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성원은 그런 생각에, 모두에게 존재하는 각자의 사정을 어렴풋이 느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수업을 듣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넌 시험공부조차 하지 않을 생각이니?"
그리고 그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은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성원에게 한소리 하고 있었다. 시원한 봄비가 얌전히 내린 탓에 굳게 닫힌 창문에서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오후였다. 오렌지색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 입은 그녀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
"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
성원은 연신 창 밖을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은영에게 대답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구. 바보야."
은영은 이제 스스럼없이 성원에 대한 생각을 내뱉고 있었다. 바보나 멍청이, 심지어는 천치라는 말까지 한적 있는 은영이었다. 성원은 언젠가부터 마치 엄마나 누나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은영이 못마땅했지만 딱히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씩 신선한 모습을 보이는 은영을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도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해지지는 않는지 그는 바보라는 말에 작게 인상을 썼다. 은영은 성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앗!"하고 경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황급히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성원은 그런 은영의 모습에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내가 더 잘 알아."
"고집쟁이." 하고 은영이 투덜댔다.
"너야말로." 하고 성원은 가볍게 대꾸했다. 은영은 여전히 삐딱하게 구는 성원을 밉지 않은 눈으로 한번 흘겨보고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공부하는 건 어때? 응?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게 많을 거야. 너와 다르게 난 수업을 충실하게 들었으니까."
"난 혼자가 편해."
"때론 혼자보다 둘이 좋을 때도 있어. 그리고 어쩌면 내가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잖아."
"수업을 듣지도 않는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니, 그것 참 영광이군."
은영의 설득에도 성원은 비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은영은 그의 손을 꼬집으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
"참 못됐어!"
"아야! 이거 왜이래?"
성원은 손을 쓰다듬으며 은영에게 소리쳤다. 은영은 그 모습을 보며 또다시 "미안해."하고 사과했다. 성원은 그녀를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주 습관이 됐구나. 때리고 미안해. 욕하고 미안해. 꼬집고 미안해. 다음에는 뭐 할거야?"
"네가 말을 얄밉게 하니까 그렇지. 미안해."
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성원은 그녀의 미소를 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은영이 저렇게 웃으면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녕."
그렇게 그들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원과 은영의 고개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마치 한 쌍처럼 동작하는 그들의 모습은 잘 어울리는 커플처럼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키 큰 남자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성원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재수를 해 그들보다 한 살 많은 김우진이었다. 잔디처럼 짧은 머리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가 강직한 인상을 주는 남자로, 주도적이고 책임감이 강해 과대로 선출된 후 여러가지 과행사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내였다. 큰 체격에 어울리는 당당한 표정과 직설적인 어법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운동도 꽤나 잘했고 남을 곧잘 배려했기 때문에 과에서 남녀불문 인기가 많은 남자이기도 했다.
"안녕? 너희는 진성원 그리고 이은영 맞지?"
그는 성원과 은영을 바라보며 사람 좋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던 성원과 은영은 "네." 하고 동시에 대답을 했다. 상대가 인사를 한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과대인 김우진이라고 해."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성원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학기 초에는 그의 곱상한 외모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동기들이 말을 걸어왔었지만 모두들 채 이틀이 되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떠났다. 성원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같이 차갑게 대했던 것이다. 아예 무시를 하거나 비꼬는 식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두려했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성원은 혼자였다. 하지만 그건 그도 원하는 것이었기에 불만 없이 지냈던 그였다. 성원은 그랬던 자신에게 새삼스레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자 의아했던 것이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하고 우진이 말했다.
"아,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런데 이제까지 말을 걸어 온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성원은 진중하게 사과했다.
"하하. 아니야 아니야. 사실은 무슨 일이 있는 게 맞으니까."
우진은 성원의 사과에 호쾌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성원은 그가 참 시원하게 웃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데요?" 하고 은영이 되물었다.
우진은 은영의 목소리에 은영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응. 오늘 밤에 작은 모임이 학교 앞 술집에서 있을 거거든. 그 모임에 너희들도 참석해주었으면 하고 말이야."
의외의 제안에 성원과 은영은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과의 무리들과는 동떨어져 자신들끼리 어울렸던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초대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험기간이잖아요?" 하고 은영이 다시 물었다. 우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본격적으로 시험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파이팅 하자는 의미로 모이는 거라고 해둘까.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런 모임을 꽤 자주 가졌거든."
성원은 우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모여 단체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는 또다시 자연스레 파벌이 생긴다. 그리고 자신은 학기초부터 아웃사이더로 취급되고 있었던 신세였다. 또한 은영도 어쩐 일인지 자신 이외에는 친한 친구가 없어 보였기에 내심 자신과 같은 입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성원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모르는 모임이 자주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희 없이 모여왔는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신 이유가 있나요?"
성원은 거기까지 생각한 후 말을 했다. 자신과 은영은 그런 파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우진은 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하. 이상한 의심을 하지 말아줘.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너희들과 이런 자리를 갖길 원해왔으니까. 알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우리과의 유명인사야. 그런 인물들과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영광이지 않겠어? 다만 지금까지 용기가 없어 말을 걸지 못했다고 할까."
우진은 자주 웃었다. 성원은 그가 웃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불쑥 물었다. 유명인사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유명인사요?"
"물론. 아주 유명하지. 미모의 과 수석 입학생과 문학계가 주목하는 미남 작가지망생이 한 쌍처럼 매일 붙어 다니는데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남자는 또 다시 웃었다. 짧은 웃음이 지난 후 남자는 성원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리고 더욱 재미있는 건 말이야. 그들이 둘이서만 어울리고 다른 동기들을 이웃집 닭 보듯이 한다는 거야. 마치 자신들은 다른 생물체인 것마냥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창가에 앉아 모두를 굽어 보는거지. 그래서 우리는 너희를 사자 커플이라고 불러. 밀림의 왕 사자 말이야. 도도하게 자기 이외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 딱 어울린다고 할까? 우리가 너희들과 꼭 같이 이야기를 해보길 원하는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어."
성원은 우진의 말을 들으며 놀랐다.
"무언가 크게 오해하고 계시네요. 여러 가지로."
커다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소문이란 게 원래 그래. 하나의 생명체처럼 점점 자라난단 말이야.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소리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자라면서 급속도로 커지고 구체적인 형체를 띄게 되는 것 쯤은 너희들도 잘 알잖아?"
"그래도 거짓이 진실이 될 순 없어요. 저희는 커플이 아닐뿐더러 남을 무시하지도 않았어요."
"하하. 그렇게 부정해도 누가 믿겠냐. 우선, 너희들은 꽤나 어울리거든. 게다가 항상 그렇게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듣는데 누구라도 커플이라고 생각할거야."
커다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성원은 그 웃음에 인상을 찡그리고는 은영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은영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비춰질 줄은 생각도 못했던 성원이었다. 그러나 은영은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그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우진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싫으면 더욱더 오늘 밤에 모임에 오는 게 어때? 그것으로 너희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좋아요! 갈게요."
성원이 망설이는데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영이 말했다. 성원은 놀란 얼굴로 은영을 돌아보았다. 우진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씀대로 재미있을 것 같아요. 괜찮다면 저와 성원이도 참석할게요."
은영은 그렇게 말하고 성원을 바라보며 "괜찮지?" 하고 물었다. 성원은 갑작스러운 은영의 행동에 눈쌀을 찌푸렸다.
"생각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은영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어떠니? 이번 기회에 과 사람들과 어울리면 좋을 거야. 가자 응?" 하며 은영은 성원을 설득했다. "그래. 친구가 저렇게 원하잖아." 옆에서 우진도 거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망설이는 성원을 보며 은영은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원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은영이 정말로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뭐. 은영과 같이 가면 재미없지는 않겠지."
성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득, 성원은 이상한 생각에 멈칫했다.
성원은 고개를 돌려 은영을 바라보았다. 고운 검은 단발과 예쁜 얼굴, 그를 향해 언제나 재잘거리는 도톰한 입술이 반짝였다. 문득, 성원은 은영과 나란히 앉아 잡담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입학한 뒤로 언제나 혼자서 지냈던 그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은영이 그의 조촐한 인생에 끼어들었다. 별 것 아닌 잡담과 잔소리로 성원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원은 불편했었다. 하지만 성원은 어쩐지 그녀를, 늘 해왔던 대로 떼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왜 은영을 거부하지 못했던가?
"나는 은영과 지내는 것이 즐거운가?"
성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은영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심상치 않은 성원의 표정을 보고는 "왜 그래?" 하고 입술을 달그락거렸다.
"아무것도 아냐." 하고 성원은 조용히 대꾸했다. 어쨌든 자신은 매일 은영과 대화를 하고 꽤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며, 어떤 결과로 마음에 남을지는 나중의 일이었다. 성원은 언젠가 그 결과를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은영이와 같이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성원의 대답에 우진과 은영 모두 밝은 얼굴이 되었다. 우진은 그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설명했다.
"학교 정문에서 오십걸음 정도만 걸으면 2층에 "애슐리"라는 술집이 하나 있어. 그곳에 8시까지 오면 돼."
"알겠어요." 하고 성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도 괜찮으니까 꼭 와 달라구."
그렇게 말하며 우진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수업이 끝난 후 동아리방에 온 성원과 은영은 책상에 마주 앉았다. 성원은 늘 하던 것처럼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대신 은영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인거야?"
"응?"
은영은 성원의 앞뒤 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 모임에 가고 싶다고 한 것 말이야."
성원은 다시 질문을 했고 그제서야 은영은 "아아 그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하고 은영은 말했다.
그러나 성원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재미로 그런 모임에 덥석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성원의 말에 은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에 대해 꽤 잘 알고 있구나."
은영의 대답에 성원은 고개를 긁적였다. 몇 주 동안 매일 은영과 같이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동아리 방에 올라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에 대한 "감"이라는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성원은 은영이 무얼 정말 원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는 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감은 말하고 있었다. 은영이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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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고 고운 실이 하늘에서부터 대지까지 고르게 이어져 내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 정직하게 직선을 그리는 실은 맑고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토록 기다렸을 봄비. 진정한 생명의 출원이 되어줄 봄비는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하여 아침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곳에라도 반갑게 얼굴을 내비쳤다. 푸르름이 약동하는 초목산천에도, 회색 빛의 콘크리트와 검은 아스팔트 위에도, 새벽 바삐 움직이는 각양각색의 우산 위와 미쳐 걷지 못한 빨래들 틈에도. 봄비는 어김없이 장난꾸러기처럼 들이닥쳤다. 누군가는 그런 봄비를 보며 미소 짓고 누군가는 울상을 지으며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와의 약속이 취소될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건, 지구는 봄비를 맞이해 더욱 선명하고 진하게 얼굴을 단장하리라는 것이었다.
은영이 베란다에 놓아두었던 화분에도 비는 떨어졌다. 수줍고 가냘픈 로즈마리는 비를 두 손 들어 환영하듯 자신의 잎을 한껏 드높였다. 비가 한 방울 툭툭 떨어질 때마다 로즈마리는 가볍게 잎을 떨었다. 비는 그 잎을 타고 또르르 흙 속으로 사라지고 그 위로 새로운 빗방울이 연신 떨어져 내렸다. 떨어지고 흘러내리고 스며드는 자연의 반복. 그 앞에서, 은영은 미소 지으며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잘 잤니? 비가 와서 시원하겠구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은영은 자신의 식물을 향해 그렇게 인사를 했다. 방금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촉촉하고 맑은 그녀의 얼굴이 창문에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갯벌과도 같은 빛으로 가득 찬 이른 아침이었다.
"나도 잘 잤어.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걸."
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은영의 방은 그녀의 성격처럼 단정했다. 그녀의 몸이 꼭 하나 들어갈 아담한 목제 침대와 작은 책상, 옷장이 전부였다. 한쪽 벽에 놓인 거울에 그녀의 예쁜 옆모습이 담겼다. 침대 위에는 하얀 이불이 곱게 포개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다가가 분홍색 커튼을 제쳤다. 타닥타닥-. 마치 불씨가 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봄비가 창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연주를 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옷장에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의 옷장에는 예쁜 원피스와 캐쥬얼 복장이 가득해다. 그녀는 옷을 하나씩 넘기다가 그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성원이 보았던 톤 다운된 오렌지색 원피스였다. 그것을 침대에 조심이 내려놓고 티셔츠를 벗었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그녀의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잡티 없이 하얀 그녀의 몸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몸 어디라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배와 어깨, 팔뚝, 호리병을 연상케 하는 잘록한 허리와 그 위로 자리를 잡은 봉긋한 젖무덤. 화가라면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을만큼 그녀의 몸은 균형이 잡혀 있었고 예뻤다. 은영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덮고 있는 브래지어의 위치를 바로 잡고 잠옷 바지를 마저 벗었다. 그녀는 수수한 분홍색 팬티를 입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바지를 벗는 동안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가 팬티에 감싸인 채 위로 치켜 들렸다. 호박같은 그녀의 엉덩이는 아담한 체구와 맞물려 더욱 풍성한 느낌을 주었다. 은영은 바지를 벗고 허리를 폈다. 그러자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조심스레 드러났다. 새하얗고 육감적인 허벅지와 그것이 만나는 지점은 아찔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속옷에 감싸여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순결하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듯했다.
은영은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는 원피스를 재빨리 입었다. 그녀의 맨살이 서서히 원피스에 의해 가려져 갔다. 봉긋한 젖무덤, 매끈한 복부와 허리, 탐스러운 엉덩이와 비밀섬이 차례로 옷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옷을 다 입은 은영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았다. 옷을 입느라 약간 상기된 얼굴과 그 아래로 맵시 있게 펼쳐진 그녀의 몸매가 거울에 나타났다. 은영은 만족한 듯 웃고는 자신이 벗은 티셔츠와 바지를 곱게 개어 옷장 한켠에 두었다.
은영은 창문을 열어볼까, 하고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침대만큼이나 아담한 책상에 다가가 앉았다. 그곳에 앉아서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손을 뻗어 책상 서랍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별다른 장식 없는 사진첩 하나를 꺼내어 책상에 놓았다. 꽤 오래된 듯 색이 약간 바랜 사진첩이었다. 사진첩의 표지에는 그녀의 손글씨로 예쁘게 "은영이꺼"라고 적혀 있었다. 은영은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진첩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예쁘고 작은 손이 사진첩을 조심스레 넘기기 시작했다.
사진첩 속에는 여러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기억조차 못하는 유아 시절부터 순수한 웃음이 예쁘던 어린 시절, 조금은 반항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생기 넘치던 사춘기 시절까지. 그녀는 조심스레 한장한장 사진첩을 넘겼다. 그럴 때마다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편의 책이 되어버린, 그 시절들이 떠오르고 저물며 그렇게 넘어갔다. 몇 가닥 없는 머리카락과 원반처럼 큰 눈동자로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은영, 작은 손을 뻗어 꼭 그만한 크기의 엄마 손가락을 잡는 은영, 노란 유치원 교복과 모자를 쓰고 울상을 짓는 은영, 회색 교복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앉은 은영... 사진첩에는 은영의 일생이 작게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장 한장, 자신의 추억을 넘기던 은영의 손이 어느 부분에서 멈췄다. 그곳에서 그녀의 손은 더 이상 움직일 줄 몰랐다. 은영은 아련한 눈빛으로 사진첩 속의 사진들을 바라만 보았다.
사진첩에는 몇 장의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모두 같은 사람이 있었다. 꽃 밭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어느 바닷가에서 은영과 손을 꼭 마주잡고 행복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은영만큼이나 예쁜 여자 아이였다.
"오랜만이야. 비오니까 네 생각이 났어." 하고 은영은 사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은영은 손을 들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를 쓰다듬었다. 애정 어린 손길로 친구의 사진을 매만지는 은영의 눈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너는 봄비를 참 좋아했지. 오늘 같은 날이면 너와 함께 비를 맞으러 나가곤 했었는데. 벌써 오래된 일이야."
은영은 왼팔을 베고 엎드렸다.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그녀의 턱과 오른쪽 눈을 가렸다. 은영은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긴 후 자신이 볼 수 있게 사진첩을 세웠다. 검지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친구의 온기라도 느낄 작정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친구의 머리카락, 예쁜 얼굴과 둥그런 어깨, 브이를 그리는 귀여운 손가락까지.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은 어느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친구의 몸을 구석구석 매만지고는 다시 차가운 책상 위로 돌아갔다. 은영의 얼굴에는 아련한 미소가 맺혔다.
"너는 잘 지내니?"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은영은 그런 것은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이 그대로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불씨같은 빗노래만이 그녀의 방안을 조용히 울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에는 봄비와 꼭 닮은 맑고 슬픈 것이 어려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진첩 속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친구. 그녀는 자신의 친구를 손으로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다음 봄비에 봐."
그녀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사진첩을 조심스럽게 서랍에 넣었다. 타닥타닥- 내리는 봄비만이 조용히 울렸다.
성은은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어젯밤에 물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볼일이 급했다. 소변을 보고 잠이 들었어야 했다며 투덜대던 그녀는 올라가있는 변기 커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볼일 본 뒤에는 내리라고 말했는데도."
성은은 손으로 변기 커버를 덮고 급하게 바지와 팬티를 내렸다. 그녀의 새하얀 엉덩이가 드러나기도 잠시, 변기에 주저앉은 그녀는 곧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 쪼르르- 하는 소리가 작은 화장실을 울렸다. 성은은 변기에 앉아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부러워할 매끈한 다리가 반듯한 게 보기 좋았다. 성은은 다리를 살짝 벌려 보았다. 그대로 다리를 이리저리 꼬아보던 성은은 풋,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자신이 야한 여자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볼일을 마친 성은은 휴지로 닦고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방금 막 잠에서 깬 탓에 얼굴이 푸석해져 있었다. 얼굴을 좌우로 돌려가며 얼굴을 살피던 그녀는 수도꼭지를 올려 차갑게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여자치고는 커다란 손이 물에 젖어 빛을 반사시켰다. 그녀는 그대로 손을 씻고 나와 시원한 물을 한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식도를 타고 단번에 위에까지 닿은 차가움은 성은의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거실에 달린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슴푸레한 빛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성은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쓰고는 중얼거렸다.
"비 오잖아."
성은은 컵을 신경질적으로 식탁에 놓았다. 성은은 비오는 날을 싫어했다. 그녀는 생리적으로 비와 자신이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몸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쑤시거나 이유없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날은 예외 없이 비가 쏟아졌다. 또한 유난히 비가 오면 재수 없는 일을 많이 겪었던 성은이기에 비를 보면 끔찍이도 싫어했다.
성은은 자신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깨어난 것도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안한 얼굴로 "오늘은 어쩐지 재수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하고 중얼거리며 성은은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자신의 방문앞에 도착한 그녀는 그대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무슨 생각에선지, 몸을 돌려 자기 쌍둥이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성은이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잠기지 않은 동생의 문의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이른 아침의 방 안에는 어둠이 얼기설기 뭉쳐있었다. 성은은 어둠을 몰아내려는 듯 숨을 한차례 내쉬고 성원이 잠들어있을 침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와의 거리가 세 걸음쯤 되었을 때 성은은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자신과 닮아 예쁜 얼굴을 하고서는 곤히 잠든 성원은 성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
"세상 모르고 자는구나." 하고 성은은 조그맣게 말했다. 언제나 자신보다 부지런하던 동생이었다. 같은 대학에 입학하고 부모님의 권유로 같이 살기 시작한 후로는 성원은 매일 그녀보다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했다. 이렇게 자신이 먼저 깨어나 잠든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성은은 조금 더 다가가 조심스레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성원은 코도 골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성은은 몸을 비틀어 그에게 얼굴을 향하게 한 뒤 따뜻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을 들어 그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자 그가 볼을 성은의 손바닥에 비벼왔다. 아기 같은 그의 모습에 성은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코를 살짝 쥐어 보이고는 이불 속에 감춰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성원의 손은 따뜻했다. 성은은 새삼스레 인간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주잡은 그의 손, 가운데 손가락에 잡힌 물집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평소에 연필을 잡고 글을 많이 쓴 탓에 생긴 상처였다. 성원은 그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성은이 보기에 그건 미련한 동생의 마음에 난 생채기의 현상이었다.
성은은 잡고 있던 동생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 거야, 하고 생각하며 성은은 잡고 있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갖다 대었다.
"너는 아직도 잊지 못한 거니..."
성은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따뜻한 성원의 손이 전해주는 온기와는 다르게 성은의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동생은 여전히 잊지 못한 채 짐을 가득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너는 바보야. 알고 있니?" 하고 성은은 물었다. 그러나 성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성원의 손을 잡고 있던 성은은 돌연 그 손을 놓고 자신의 얼굴을 성원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녀의 눈이 옅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잠시 후 성은의 붉은 입술이 성원의 넓은 이마에 닿으며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대로 속으로 시간을 셌다. 하나, 둘, 셋. 동시에 그녀는 입술을 떼고 숨을 내쉬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얼굴이 성원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냈다.
"이것도 너무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 거야."
잠든 동생이 알 리가 없는데도, 성은은 그렇게 핑계대듯 말하며 일어났다. 이제 막 동이 터오고 있었다.
4월 초가 되어 중간고사기간에 접어들자 학생들은 바빠졌다. 모두들 개미처럼 도서관에 드나들며 바쁜 날을 보냈다. 그들은 이해조차 제대로 못하는 두꺼운 책을 펼치고, 금붕어처럼 눈을 깜빡이며 색깔 있는 펜으로 밑줄을 긋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배우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책 속의 내용을 암기하고 적어내는 기계적인 일들을 반복하며 만족하고 웃었다.
성원은 창문을 통해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젊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성원은 그런 이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지는 않았다. 자신이라고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 만약 그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창 밖의 교정을 바삐 걷는 이들과 다르지 않은 날을 보냈을지도 몰랐다. 귀여운 여학생이 책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젖어버린 책을 조심스레 주워 들고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이 성원의 눈에 들어왔다. 저 여학생도 자신도 그렇게 연속되어온 배움의 일생이었다. 그 누구라고, 저렇게 아둥바둥하는 이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성원은 그런 생각에, 모두에게 존재하는 각자의 사정을 어렴풋이 느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수업을 듣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넌 시험공부조차 하지 않을 생각이니?"
그리고 그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은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성원에게 한소리 하고 있었다. 시원한 봄비가 얌전히 내린 탓에 굳게 닫힌 창문에서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오후였다. 오렌지색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 입은 그녀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
"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
성원은 연신 창 밖을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은영에게 대답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구. 바보야."
은영은 이제 스스럼없이 성원에 대한 생각을 내뱉고 있었다. 바보나 멍청이, 심지어는 천치라는 말까지 한적 있는 은영이었다. 성원은 언젠가부터 마치 엄마나 누나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은영이 못마땅했지만 딱히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씩 신선한 모습을 보이는 은영을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도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해지지는 않는지 그는 바보라는 말에 작게 인상을 썼다. 은영은 성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앗!"하고 경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황급히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성원은 그런 은영의 모습에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내가 더 잘 알아."
"고집쟁이." 하고 은영이 투덜댔다.
"너야말로." 하고 성원은 가볍게 대꾸했다. 은영은 여전히 삐딱하게 구는 성원을 밉지 않은 눈으로 한번 흘겨보고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공부하는 건 어때? 응?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게 많을 거야. 너와 다르게 난 수업을 충실하게 들었으니까."
"난 혼자가 편해."
"때론 혼자보다 둘이 좋을 때도 있어. 그리고 어쩌면 내가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잖아."
"수업을 듣지도 않는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니, 그것 참 영광이군."
은영의 설득에도 성원은 비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은영은 그의 손을 꼬집으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
"참 못됐어!"
"아야! 이거 왜이래?"
성원은 손을 쓰다듬으며 은영에게 소리쳤다. 은영은 그 모습을 보며 또다시 "미안해."하고 사과했다. 성원은 그녀를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주 습관이 됐구나. 때리고 미안해. 욕하고 미안해. 꼬집고 미안해. 다음에는 뭐 할거야?"
"네가 말을 얄밉게 하니까 그렇지. 미안해."
은영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성원은 그녀의 미소를 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은영이 저렇게 웃으면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녕."
그렇게 그들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원과 은영의 고개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마치 한 쌍처럼 동작하는 그들의 모습은 잘 어울리는 커플처럼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키 큰 남자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성원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재수를 해 그들보다 한 살 많은 김우진이었다. 잔디처럼 짧은 머리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가 강직한 인상을 주는 남자로, 주도적이고 책임감이 강해 과대로 선출된 후 여러가지 과행사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사내였다. 큰 체격에 어울리는 당당한 표정과 직설적인 어법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운동도 꽤나 잘했고 남을 곧잘 배려했기 때문에 과에서 남녀불문 인기가 많은 남자이기도 했다.
"안녕? 너희는 진성원 그리고 이은영 맞지?"
그는 성원과 은영을 바라보며 사람 좋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던 성원과 은영은 "네." 하고 동시에 대답을 했다. 상대가 인사를 한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과대인 김우진이라고 해."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성원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학기 초에는 그의 곱상한 외모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동기들이 말을 걸어왔었지만 모두들 채 이틀이 되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떠났다. 성원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같이 차갑게 대했던 것이다. 아예 무시를 하거나 비꼬는 식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두려했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성원은 혼자였다. 하지만 그건 그도 원하는 것이었기에 불만 없이 지냈던 그였다. 성원은 그랬던 자신에게 새삼스레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자 의아했던 것이다.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하고 우진이 말했다.
"아,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런데 이제까지 말을 걸어 온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성원은 진중하게 사과했다.
"하하. 아니야 아니야. 사실은 무슨 일이 있는 게 맞으니까."
우진은 성원의 사과에 호쾌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성원은 그가 참 시원하게 웃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데요?" 하고 은영이 되물었다.
우진은 은영의 목소리에 은영을 한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응. 오늘 밤에 작은 모임이 학교 앞 술집에서 있을 거거든. 그 모임에 너희들도 참석해주었으면 하고 말이야."
의외의 제안에 성원과 은영은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과의 무리들과는 동떨어져 자신들끼리 어울렸던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초대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험기간이잖아요?" 하고 은영이 다시 물었다. 우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본격적으로 시험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파이팅 하자는 의미로 모이는 거라고 해둘까.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런 모임을 꽤 자주 가졌거든."
성원은 우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모여 단체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는 또다시 자연스레 파벌이 생긴다. 그리고 자신은 학기초부터 아웃사이더로 취급되고 있었던 신세였다. 또한 은영도 어쩐 일인지 자신 이외에는 친한 친구가 없어 보였기에 내심 자신과 같은 입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성원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모르는 모임이 자주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희 없이 모여왔는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신 이유가 있나요?"
성원은 거기까지 생각한 후 말을 했다. 자신과 은영은 그런 파벌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있었던 탓이다. 우진은 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하. 이상한 의심을 하지 말아줘.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너희들과 이런 자리를 갖길 원해왔으니까. 알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우리과의 유명인사야. 그런 인물들과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영광이지 않겠어? 다만 지금까지 용기가 없어 말을 걸지 못했다고 할까."
우진은 자주 웃었다. 성원은 그가 웃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불쑥 물었다. 유명인사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유명인사요?"
"물론. 아주 유명하지. 미모의 과 수석 입학생과 문학계가 주목하는 미남 작가지망생이 한 쌍처럼 매일 붙어 다니는데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남자는 또 다시 웃었다. 짧은 웃음이 지난 후 남자는 성원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리고 더욱 재미있는 건 말이야. 그들이 둘이서만 어울리고 다른 동기들을 이웃집 닭 보듯이 한다는 거야. 마치 자신들은 다른 생물체인 것마냥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창가에 앉아 모두를 굽어 보는거지. 그래서 우리는 너희를 사자 커플이라고 불러. 밀림의 왕 사자 말이야. 도도하게 자기 이외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 딱 어울린다고 할까? 우리가 너희들과 꼭 같이 이야기를 해보길 원하는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어."
성원은 우진의 말을 들으며 놀랐다.
"무언가 크게 오해하고 계시네요. 여러 가지로."
커다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소문이란 게 원래 그래. 하나의 생명체처럼 점점 자라난단 말이야.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소리도 사람들의 입을 타고 자라면서 급속도로 커지고 구체적인 형체를 띄게 되는 것 쯤은 너희들도 잘 알잖아?"
"그래도 거짓이 진실이 될 순 없어요. 저희는 커플이 아닐뿐더러 남을 무시하지도 않았어요."
"하하. 그렇게 부정해도 누가 믿겠냐. 우선, 너희들은 꽤나 어울리거든. 게다가 항상 그렇게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듣는데 누구라도 커플이라고 생각할거야."
커다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성원은 그 웃음에 인상을 찡그리고는 은영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은영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비춰질 줄은 생각도 못했던 성원이었다. 그러나 은영은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그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우진은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싫으면 더욱더 오늘 밤에 모임에 오는 게 어때? 그것으로 너희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좋아요! 갈게요."
성원이 망설이는데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영이 말했다. 성원은 놀란 얼굴로 은영을 돌아보았다. 우진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씀대로 재미있을 것 같아요. 괜찮다면 저와 성원이도 참석할게요."
은영은 그렇게 말하고 성원을 바라보며 "괜찮지?" 하고 물었다. 성원은 갑작스러운 은영의 행동에 눈쌀을 찌푸렸다.
"생각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은영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어떠니? 이번 기회에 과 사람들과 어울리면 좋을 거야. 가자 응?" 하며 은영은 성원을 설득했다. "그래. 친구가 저렇게 원하잖아." 옆에서 우진도 거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망설이는 성원을 보며 은영은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성원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은영이 정말로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뭐. 은영과 같이 가면 재미없지는 않겠지."
성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득, 성원은 이상한 생각에 멈칫했다.
성원은 고개를 돌려 은영을 바라보았다. 고운 검은 단발과 예쁜 얼굴, 그를 향해 언제나 재잘거리는 도톰한 입술이 반짝였다. 문득, 성원은 은영과 나란히 앉아 잡담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입학한 뒤로 언제나 혼자서 지냈던 그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은영이 그의 조촐한 인생에 끼어들었다. 별 것 아닌 잡담과 잔소리로 성원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원은 불편했었다. 하지만 성원은 어쩐지 그녀를, 늘 해왔던 대로 떼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왜 은영을 거부하지 못했던가?
"나는 은영과 지내는 것이 즐거운가?"
성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은영을 바라보았다. 은영은 심상치 않은 성원의 표정을 보고는 "왜 그래?" 하고 입술을 달그락거렸다.
"아무것도 아냐." 하고 성원은 조용히 대꾸했다. 어쨌든 자신은 매일 은영과 대화를 하고 꽤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며, 어떤 결과로 마음에 남을지는 나중의 일이었다. 성원은 언젠가 그 결과를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은영이와 같이 갈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성원의 대답에 우진과 은영 모두 밝은 얼굴이 되었다. 우진은 그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설명했다.
"학교 정문에서 오십걸음 정도만 걸으면 2층에 "애슐리"라는 술집이 하나 있어. 그곳에 8시까지 오면 돼."
"알겠어요." 하고 성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도 괜찮으니까 꼭 와 달라구."
그렇게 말하며 우진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수업이 끝난 후 동아리방에 온 성원과 은영은 책상에 마주 앉았다. 성원은 늘 하던 것처럼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대신 은영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인거야?"
"응?"
은영은 성원의 앞뒤 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 모임에 가고 싶다고 한 것 말이야."
성원은 다시 질문을 했고 그제서야 은영은 "아아 그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하고 은영은 말했다.
그러나 성원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재미로 그런 모임에 덥석 나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성원의 말에 은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에 대해 꽤 잘 알고 있구나."
은영의 대답에 성원은 고개를 긁적였다. 몇 주 동안 매일 은영과 같이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동아리 방에 올라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에 대한 "감"이라는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성원은 은영이 무얼 정말 원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는 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감은 말하고 있었다. 은영이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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