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회(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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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613회 작성일 20-01-17 00:05본문
뻔뻔한 년… 네가 나에게 이렇게 질퍽거리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분위기에 집중할 수 없잖아… 오, 오! 그래, 그래! 좀 더 옆으로… 좀 더… 이런 변태 같은 생각을 하는 내가 밉기도 했지만 술에 취해 멜랑꼬리가 된 아라가 고마웠다.
오동이가 건배 제의를 하고 이국이가 그 건배 제의에 술잔을 든다. 우리는 모두 이국이의 뒤를 따라 앞에 놓인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내 무릎에 엎어진 아라 때문에 술잔을 잡고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내 무릎에 쓰러진 아라에게 뭔가 자극이 필요했다.
“아라야,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게 잠시 저리 가봐…”
저리 비키라는 나의 말에 아라가 고개를 들더니 귀찮다며 팔을 허공에 휘졌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내 앞에 놓인 술잔을 손으로 쳤다. 술잔은 엎어지며 안에 담긴 술들이 내 무릎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야, 야! 술!”
친구들이 엎어진 술잔의 술이 아까워서 인지 아니면 건배를 해야 하는데 술이 엎어져 안타까워서인지 소란을 피웠다. 그 덕에 아라의 얼굴은 내 중심부로 더욱 밀착되었다. 아라의 얼굴이 내 중심부에 코를 박고 쓰러지게 되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지 줘봐, 얘 진짜 많이 취했나봐. 큰일이네.”
아라의 주정에 놀란 가인이가 나와 아라의 자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엎어진 술을 휴지로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왠지 모를 흥분감이 중심부에서 기둥이 되어 일어선가.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원숭이, 자리에서 일어나 봐. 술 좀 닦게.”
“어, 응.”
나는 아쉬웠지만 아라의 머리를 들고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바로 옆으로 조금 엉덩이를 밀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대현이가 붙지 말라며 다시 나를 밀쳤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라의 얼굴이 내 중심부에 정확히 밀착되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해야 했다. 테이블 밑으로는 친구들이 모습을 볼 수 없다. 지퍼를 살짝 내리고 빨딱 선 내 중심을 꺼낼까 말까 하는 고민… 만약 그랬다가 친구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는 동창회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터. 고민고민고민…
친구들은 내 앞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껌과 초코릿이든 바구니를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눈은 살짝 떠있는 상태의 아주머니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며 껌과 초코릿을 사달란다.
“이보세요, 제가 어려운 처지인데 껌과 초코릿 좀 사주시면 안 될까요?”
“어?”
그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하진이가 대꾸한다.
“어제 술 마실 때 오셨던 분이네. 어제 제가 껌 두통에 만 원 주고 샀잖아요. 기억하세요?”
“응? 어이쿠, 그럼요 기억하죠.”
“죄송한데 다음에 사드릴게요. 오늘은 돌아가 주세요.”
“그래도 얼마 하지 않는데 좀 도와주세요.”
껌 두통에 만 원이라는데 얼마하지 않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악덕장사도 이런 악덕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죽했으면 이렇게 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갈까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착하지는 않지만 착한 마음에 내가 껌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가 하는 말,
“아가씨가 너무 좋아 하는 것 같네.”
“네?”
아가씨가 너무 좋아 하는 것 같다는 말에 그게 무슨 뜻일까 고민을 하는데 친구들이 가인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가인이가 내 다리 사이, 중심부에 얼굴을 묻고 쓰러진 모습을 보자마자 여자 동창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 지른다.
“꺄! 가인아, 너 어디에 얼굴을 묻고 있는 거야 지금!”
“미쳤나봐, 어머머… 어서 몸을 일으켜.”
젠장… 젠장! 저 아주머니 때문에 완전 망했다. 내 최고의 포지션을 아주머니의 말도 안 되는 만 원짜리 껌 두통에 빼앗기다니… 순간 아주머니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셔서 저의 행복을 아사가십니까!
“그런데 아라가 저러고 있는 걸 어떻게 아셨지? 맹인이시잖아.”
응? 맞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도움을 요청하던 아주머니가 도대체 어떻게 이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하셨을까? 순간 당황스러우면서 궁금해졌다.
“콜록, 콜록. 저쪽으로 가봐야겠네.”
아주머니가 갑자기 우리 쪽에 계시다가 옆 테이블로 가시는 모습에 의심이 들었다. 정녕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연기를 하시는 것인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뭐라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럴 때 엉뚱한 정의감(?)이 발휘된다.
“아주머니, 바지 지퍼 열리셨는데요?”
“어머나! 정말?”
껌을 팔던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바지 지퍼를 쳐다본다. 나와 우리 친구들 그리고 주변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기에 충분했다.
“사기꾼.”
아주머니의 살짝 뜬 실눈이 부릅떠지더니 나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면 어디에 덧 나냐?! 잘났다 이놈아, 에라이~ ?!”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진짜 어려운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이 다양하지만 이렇게 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강매를 하는 장사꾼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 아주머니가! 제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니고!”
“너는 애미애비도 없냐?! 배고파서 좀 먹고 살려고 하는데… 치사해서 원.”
투덜거리며 술집 밖으로 나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정에 술맛이 뚝 떨어졌다. 의기 소심해 하고 있는 나를 향해 친구들이 괜찮다며 저런 아주머니들 많다고 위로해준다.
쓴 술잔을 매만지며 집에 있는 엄마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술집 창밖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창밖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앞에 웬 벤츠 차량 한 대가 서더니 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아주머니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 알짜배기였던 것인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어른의 공경심과 효심이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야, 봐라. 저 아줌마 벤츠 탄다.”
그러자 며칠 전 한번 만났다고 했던 하진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저 아주머니 불쌍해 보여서 돈 오만 원치 사줬더니 주변 사람들이 왜 그걸 사주냐고 하더라고.”
“왜?”
“저 아주머니 이 일대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라고 하면서 새벽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항상 고급승용차를 타고 퇴근한다고 하더라.”
“정말?”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아까 아는 척 했는데 모르는 척 하잖아. 킥킥킥.”
나는 하진이의 말을 듣고 아까보다 더 쓰게 느껴지는 소주잔을 마시게 되었다. 내가 잘못 한 게 아니었어… 이런 젠장 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어 있는 법… 나의 행동에 정당함을 느끼며 자축하는 의미로 소주를 또 한 잔, 두 잔을 연속으로 마시다보니 머리가 빙글빙글.
우성이가 나를 쳐다보며 걱정되는 말로 물었다.
“야, 너 술 잘 마시는 건 알겠는데 너무 무리해서 마시지마. 취하겠다.”
“아니야, 이정도 가지고 뭘.”
사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우성이의 말에 자극받아 술에 대한 우쭐함이 생겼다. 남자는 ‘못 먹어도 고’라는 생각을 가지며 연달아 두 잔을 더 비워냈다. 그랬더니 진짜 눈깔부터 머리까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척 하기 위해 일명 ‘쌘 척’을 하며 남다른 연기력을 발휘하는 나를 본 아라가 눈이 풀린 채 내 얼굴을 만지며 말한다.
“우와~ 우리 원숭이 술 잘 마신다. 안주 먹어.”
그 말과 함께 왜 이런 장난을 나에게 안치나 생각했다. 바나나를 하나들어 먹어보란다. 내가 진짜 원숭이로 보여서 이러는 것은 아니고 별명이 원숭이다보니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이 자주 나에게 했던 장난이었다.
나는 고맙다며 호리가 포크로 찍어준 바나나를 한입 물었다. 그리고 원숭이처럼 씹어대자 친구들이 여전하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렇게 웃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말 생각했다.
‘좋냐? 이 새끼들…’
우물거리고 있는 내 입을 바라보던 아라가 다시 내 다리사이로 얼굴을 묻으며 쓰러진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친구들이 이제는 그런 아라와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기만 한다.
호리가 그런 아라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 이러다가 네들 모텔가서 ‘응응’하고 커플 되는 거 아냐?”
“응응?”
“응, 응응. 킥킥킥.”
“어머, 호리야! 호호호.”
가인이가 호리의 말에 민망하다며 앙탈을 부리고 있고 다른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오늘 자기들이 모텔비용을 줄 테니 한번 가보라며 아우성이다. 그런 친구들의 아우성이 왜 나는 기분이 좋았을까…
두빈이가 자리를 옮겨 우리들끼리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작은 술집으로 이차를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조금 더 이렇게 앉아 있고 싶었는데 저 새끼는 눈치도 없이 또 나와 아라를 갈라놓으려 한다. 개새끼.
“그래, 이제 자리 좀 옮겨서 마시자.”
“그럼… 미안하지만, 나는 우리 애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호리가 애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서 먼저 간단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지금 황홀하다. 내 무릎 사이에 쓰러져 있는 아라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며 혼자 즐기고 있기에…
‘아라야… 좀 더 위로… 위로…’
“이거 아쉬워서 어쩌지? 그럼 내 결혼식장에서 만나야겠네. 그때 남자 친구랑 같이 와.”
애인을 만나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떠난다는 호리에게 동규가 섭섭하다며 틀에 짜여진 예의와 같은 말을 한다. 호리는 동규를 안아주며 결혼 축하를 대신한다.
“잘살아, 대견하네. 우리친구.”
“고맙다. 그날 꼭 와.”
“나 그때 제주도에 남자친구랑 놀러가기로 했는데… 만나서 얘기해봐야겠네.”
“훗.”
제주도로 애인과 놀러간다는 호리가 나는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너무 황홀한 순간이기에. 반쯤 풀린 눈으로 현재를 누리고 있는 나를 본 가인이가 변태 아저씨 그만 느끼시고 일어나라며 나의 팔을 잡는다.
“내… 내가 뭘 느껴!”
“표정에 다 써 있거든요? 아라 이제 이리 내놔.”
“나쁜 년.”
정말 나쁜 년이다. 친구가 이렇게 즐긴다기보다 호강을 하고 있는데 배가 아파서 그런 건가… 그럼 너도 나한테 달라붙지. 이런 씩으로 질투를 하며 우릴 방해하다니… 고얀 년… 별수 없이 나는 나한테 기대어 쓰러져 있는 아라를 가인이에게 인계해야 했다.
그렇게 호리가 떠나고 나와 다른 친구들이 조용하고 우리끼리 대화를 할 수 있는 술집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명동거리… 추운 날씨에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이 유독 눈에 띠었다. 부럽기도 하고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 요즘…
갑자기 누군가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수호천사인가? 내가 모르는 마니또가 존재한 것 인가. 반가운 마음과 감동의 눈빛을 하며 내 팔짱을 낀 상대를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다. 헉! 동규다…
“야, 너 왜 이렇게 비틀거려? 취한 것 같은데?”
“꺼져라, 병신아.”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왜? 넘어져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네 결혼식에 하객 한명이 줄어들까봐 걱정 되냐? 염장 지르는 새끼… 내가 그날 암에 걸려 죽더라도 네 결혼식은 꼭 가서 죽을게. 걱정마라. 그리고 제발 이 팔 좀 놔줄래?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놔. 징그럽게.”
“자식, 징그럽긴. 친구끼리.”
나의 핀잔이 민망했던지 동규는 잡고 있던 내 팔을 빼며 뻘줌 해 했다. 그 순간 다시 팔짱을 끼었다. 나는 짜증이 몰려왔다. 내 팔을 당연히 붙잡고 있는 동규를 향해 소리쳤다.
“놓으라고, 이 병신아!”
고함을 치며 고개를 돌리니 아라가 취한 눈동자로 나를 금붕어처럼 쳐다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라가 인상을 쓰며 내 팔에 낀 팔장을 풀고 울먹이려 한다. 세상에나… 아라 일 줄이야. 미쳐 몰랐다. 아라 뒤에 동규가 아라는 왜 욕을 먹어야했는지 모른다는 듯 눈만 껌벅이고 서있었다.
“아라야, 넌 줄 몰랐어.”
“됐어! 못생긴 원숭이 새끼야!”
아라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나는 내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라에게 고함을 친 이 순간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취해서 사리구분이 되지 않는 듯 했다. 마음에서 눈물이 흐른다.
“아라야, 울지 마. 미안해.”
“병신이라며? 넌 왜 병신이랑 얘기 하냐! 저리가!”
화가 난 아라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손에 지문이 사라질 정도로 싹싹 빌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던 가인이가 나에게 말했다.
“야, 아까처럼 원숭이 흉내 내보던가. 킥킥킥.”
“응?”
아까 명동 한복판에서 벌였던 나만의 서커스가 생각났다. 가인이에게 보인 행동을 지금 이곳에서 또 반복하라는 말인가? 지금 날 어떻게 보고… 머리에 이렇게 붕대를 매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습게 보이더냐!
“우우우웅~”
다시 시작된 나의 원숭이 흉내에 가인이와 다른 남자친구들이 웃기 시작했다. 아라는 날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살짝살짝 쳐다보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열정을 다해 몸을 흔들어가며 진짜 원숭이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춤을 췄다.
“큭큭큭…”
아라의 웃음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하지만 자신 있게 웃는 소리가 아닌 웃음을 참는 소리다. 개그맨들이 가장 싫어 한다는 소리… 소리는 안 나는데 얼굴은 웃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웃음, 짧게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웃음… 아라의 웃음이 바로 그랬다.
“꺄르르르!”
나의 열정에 아라가 마음을 연 것인가. 깊은 땅속에 묻혀 있던 원유가 터지듯 아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울고 있다. 물론 그 덕에 내 주변의 사람들이 또 다시 몰려들며 원숭이의 쇼를 보듯 즐거워한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이란 CM송처럼 찬바람 속에 나는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닌 내 이미지 고착과 작업을 성공하기 위한 늑대의 속마음으로 길거리 판을 펼치고 있었다.
“야, 야! 그만 해라. 이제 됐어. 하하하하하.”
“미치겠다, 진짜! 킥킥킥.”
친구들의 웃음과 즐거움, 아라의 환한 미소와 폭소에 나의 체면이고 뭐고 다 버렸다. 나는 춤을 멈추고 아라에게 윙크를 날렸다. 가인이는 아까보다 더 잘 췄다며 아라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나에게 약을 올린다.
“아라가 아까부터 달궈 줬나 왜 이렇게 신나게 추냐?”
“알 것 없거든.”
“수상하다. 아라 말고 너!”
“뭔 개소리야.”
가인이는 눈치가 백단은 넘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 나이에 아직도 남자도 없이 이러고 있겠지. 차가운 년. 이제 그만 눈치 채시고 가만히 좀 계세요. 제발.
“승이 때문에 한참 웃었다. 이제 그만 술집으로 가자.”
“그래, 그래.”
친구들이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2차 술집을 찾아 걸어간다. 아라가 나의 팔짱을 다시 끼고 웃으며 내 얼굴을 쳐다본다. 흐미… 심장 떨리는 거. 취해서 그런지 아라가 오늘따라 정말 예쁘게 보였다. 평소 자주 못 본 친구라 그런 건가?
그렇게 몇 분 걷고 있는데 오동이가 펀치기계를 발견했다.
“어, 우리 이거 한번 해보자.”
“추운데 무슨 펀치야. 그냥 가자.”
“이거 해서 펀치 점수가 제일 낮게 나오는 사람이 2차 술값 해결하기. 어때?”
“그럼 우리 중에 싸움 제일 잘했던 승이가 일등이구만.”
“해봐, 해봐. 늙어서 모르는 거야. 그리고 나 요즘 헬스 하잖아.”
오동이가 갑자기 자기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포즈를 취하기 시작한다. 두꺼운 옷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 이두박근을 뭐하러 저렇게 자랑 질을 하는지… 쯧쯧쯧.
“뭔데?”
내가 먼저 앞서간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와봐. 이걸로 술값 내기 할 거야.”
“펀치?”
펀치기계에서 소리가 들린다.
“오빠, 잘 쳐? 쳐봐, 쳐봐!”
우리는 기계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폭소했다. 마케팅을 위해 녹음된 소리겠지만 그 상황에 왜 그렇게 웃기던지. 내 팔짱을 끼고 있던 아라가 비틀거리며 기계 쪽으로 가서니 아직 시작도 안한 펀지를 주먹으로 때렸다. 콩!
“아야! 손 아파. 이걸 왜 해?”
자신의 손을 잡고 아프다는 아라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좋아… 아라에게 나의 힘을 보여주고 남성미를 풍겨 오늘 밤… 낄낄낄.
“내가 먼저 할게. 난 힘이 제일 약하니까.”
“1등 점수가 얼마야?”
“974점이네.”
우리 중에 체구도 제일 작은 두빈이가 펀치기계에 동전을 넣고 폼을 잡기 시작한다. 양팔을 돌리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통해 근육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 같았다. 뭐 그런다고 너의 점수가 얼마나 나오려나.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럼 간다!”
펀치기계에서 한 참 뒤로 물러선 두빈이가 쏜살같이 달려와 두 주먹으로 펀치를 때렸다. 쾅!
“뚜루루루루루루…”
두빈이의 펀치는 의외로 강했다. 기계에서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고 우리는 모두 기계의 점수판을 향해 집중되었다.
“733.”
“푸하하. 733이 뭐냐?”
“에잇! 잘 맞았는데.”
두빈이의 펀치 점수를 무시하는 친구들 틈 사이로 내가 말을 했다.
“자식들, 지들은 얼마나 나오려고 두빈이 무시하는 거야.”
“좋아, 이번에는 내가 쳐볼게.”
오동이가 두빈이 다음으로 펀치를 칠 준비를 했다. 그간 다져진 헬스의 도움을 받아 고득점이 예상되었다. 오동이는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던졌다. 나름 탄탄한 몸 근육이 자태를 뽐냈고 가인이와 아라가 서로 오동의 이두근을 만져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나의 이두근을 바라봤지만 오동이 만큼 큰 알덩어리가 없었다.
‘자식, 그래봤자 내 밑에서 허우덕 거리던 놈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름 부러운 몸을 갖고 있던 오동이에게 나도 시선을 고정시킬 수 밖에 없었다. 기지개를 크게 한번 켜더니 다시 올라온 펀치기계를 향해 달려와 펀치를 때렸다. 꽝!!!!
“우와~!”
두빈이 때보다 더 큰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고 기계의 점수판이 숨막힐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뚜루루루루루루…!!!!!!!!!”
“대박이다. 1등 점수 바뀔 수 있겠는 걸?”
“설마…”
멈출지 모르는 점수판의 숫자가 조금씩 늦춰지며 대략적인 점수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세 자리의 점수 중 첫 번째 숫자는 9였다.
“900점대인가 봐. 대박이네.”
“뚜루루루루루루…”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점수판은 7. 최고 점수가 974점인데 벌써 970점을 확보했다. 마지막 숫자를 기다리며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한동안 방구석에만 쳐박혀 있던 나는 솔직히 그렇게 높은 점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해서였다. 다른 친구들이 나보다 많이 나오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또로또로…”
마지막 숫자는 3! 최고 점수에서 1점이 부족한 973점이다. 휴~ 다행이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친구들이 모두 오동이의 점수에 환호성을 치며 대단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 내가 저 최고 점수만 넘긴다면… 넘긴다면!
“오빠, 최고야! 하지만 아쉽네. 보너스 한 번 더~ 덜컹!”
기계가 아쉽다며 보너스로 한 번 더 펀치를 칠 수 있게 펀치바를 올려주었다. 이제 남은 남자들은 나와 우성이, 대현, 이국, 동규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났다고 내가 펀치를 치려고 폼을 잡자 우성이가 자신이 먼저 하겠다며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이얏!”
쾅!!!
“뚜루루루루루루…”
“889.”
우성이는 889점으로 그리 나쁜 점수는 아니었다. 선방했네, 우성이. 그리고 다음으로 대현이가 힘차게 주먹을 날렸다. 쾅!!!
“뚜루루루루루루…”
“900.”
“오예~ 꼴찌는 아니다. 캬캬캬캬캬.”
“야, 어쨌거나 두빈이가 현재 꼴찌야. 우린 술값 굳었다.”
“야호!”
애들의 순서가 지나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오자 왠지 모를 긴장감이 몰려왔다. 고작 펀치기계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아라와 가인이는 우리 중에 최고 점수를 기록한 오동이 옆에 서서 계속 오동이의 이두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부러웠다.
“나도 꼴찌는 아니겠지? 아잣!”
대현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쾅!!!
“뚜루루루루루루…”
“830.”
꼴찌 점수가 나와 있는 상태에서 마킹되는 펀치기계의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두빈이만 가슴을 조리며 두 손을 모아 제발 자신보다 낮은 점수가 나오길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 보다 당연히 높게 나오리라 생각하며 오동이 만큼만 나오길 바랐다.
대현이도 꼴찌가 아니므로 이번 미션(?) 같은 내기에서 성공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이국이와 동규, 그리고 나다. 그런데 동규는 얼마 후 결혼을 하니 그냥 빼주라며 여자 애들이 난리다. 그런 법이 어디있냐며 우리가 반박했지만 예비 신랑에 대한 예우라고 하여 수긍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남은 사람은 이국이와 나다. 이국이가 이빨을 꽉 물며 펀치기계 앞으로 다가간다. 자신의 오른손목에 왼손으로 감싸며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펀치를 쳤다.
쾅!!!
“과연?”
“이국이가 승이 다음으로 싸움 잘하지 않았니?”
가인이가 묻자 오동이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다 내 시다바리였어! 이 자식들. 캬캬캬캬.
“997!”
“우와!”
헉… 이국이가 최고 점수를 넘어 997이라는 놀라운 점수가 마킹되었다. 순간 나는 다리가 후둘거리며 현실을 부정하게 되었다. 오동이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여자애들이 이국이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며 이국이의 이두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국아, 어떻게 이렇게 점수가 많이 나와?”
아라의 질문에 이국이가 대답한다.
“우리 누나가 세쌍둥이를 낳았잖아. 같이 놀아주다 보면 이 정도는 뭐. 허허허허.”
“정말? 그렇구나. 너 다시 보인다. 대단해!”
아라와 가인이가 이국이의 몸을 이리저리 주물럭대며 남성미의 절정을 느끼는 모습은 나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갑자기 분노의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평소 승부욕이 강했던 나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지는 것을 싫어했다.
“저리 비켜.”
등 뒤에서 싸늘함을 느낀 두빈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흠칫 놀라며 내가 걸어가는 길을 비켜선다. 내 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만연했고 입가는 실룩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펀치기계를 부셔버리기에 충분했다.
“너희들 중에 싸움 제일 잘했던 원숭이가 드디어 나타나셨네.”
“헐… 승이야, 진정해라. 기계 부서질라.”
이글거리는 나의 눈빛과 터져 나올 것 같은 주먹의 기운을 느낀 친구들이 진정하라며 날 위로하지만 이미 나의 심리는 전투본능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도 날 막을 수 없다. 내가 가는 이 길 끝에 있는 펀치기계를 부셔버릴 테다…!
“우아아악!”
“마치 실성한… 괴수 같아!”
나의 고함소리에 친구들이 잔뜩 겁을 먹고 있는 표정이었다. 정말 기계가 망가지면 어쩌냐며 도망쳐야 한다고 서로 뛰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자만의 미소가 내 얼굴 한 가득 채워졌다. 나의 주먹을 받아라, 펀치기계야!
“받아랏!”
“드… 드디어 간다! 모두 조심해!”
“우아아악!”
쾅!!!
…이런 소리가 나야 했다. 검은자가 사라진 나의 눈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흰자만 가득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바람을 부실만큼 큰…
휘잉~
“!”
“뭐… 뭐야…”
변명이 아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자가 다시 흰자 가운데로 오자 보이는 것은 아직도 멀쩡하게 서있는 펀치바였다. 내 분노의 펀치가 그 옆을 비켜간 것이다. 허공에 삽질이라니… 망할…
“뭐야? 이거 안보여? 이거를 때려야지.”
“똥폼쟁이.”
따이씨… 빌어먹을… 모든 정기와 힘을 모아 담은 나의 분노 펀치가 허공을 향해 날아갈 줄이야.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 남아 있는 전투력이 내 주먹에 남아 있음을…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시 빨딱 서있는 펀치바를 향해 노려봤다.
“이번에는 날려 버릴 거야.”
“제발.”
“흥.”
친구들의 비난은 나의 전투력을 더 극대화시켰다. 내 눈에서는 이미 살기가 느껴질 정도의 분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든 내 주먹에 맞으면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고 드래곤 볼 만화책에 나오는 슈퍼 초사이어인과 같은 내 몸 주변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크허헉!”
“원숭이에게 다가가지마! 이 살기는 뭐지?!”
“부셔버리겠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향해 빨딱 일어선 펀치를 강타하기 위해 잔발을 시작했다. 나의 한쪽 발이 뗘지고 공포의 주먹이 펀치바를 향해 뻗어 나갔다. 쉐에엑!
꽝!!!!!!!!!!!!!!!!!!
“허헉!”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나의 강력한 펀치를 확인했다. 주먹이 아파왔다. 그만큼 강하고 쌘 펀치가 뻗어졌다. 핵주먹 타이슨도 울고 갈 최강의 펀치! 그게 바로… 나, 원승이다!
아라가 멍하니 날 쳐다보다 힘겹게 입을 연다.
“병… 병… 병원… 병원!”
훗… 날 걱정하는 것인가? 걱정 마. 난 이런 펀치기계 따위에…
내가 눈을 뜨고 펀치기계를 보는 순간 펀치기계의 전광판 부분에 내 손이 정확하게 꼿친 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우뚝 서있는 펀치바는 땀을 흘리며 나를 향해 하품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고… 주먹이 펀치기계 속으로 처박혀 있고 내 손은 통증을 일으킨다.
“꺄울~! 악! 내 주먹!”
“맙소사…”
“미련한 자식 같으니…”
오동이가 황급히 달려와 나를 엎고 명동근처에 있는 백병원으로 달려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난 후 오른쪽 새끼손가락 골절이란 판정을 받았다. 머리를 꿰매고 손가락은 기브스… 하루 일과가 상당히 사나운 하루다. 날 한심하게 쳐다보는 가인이가 혀를 차며 말한다.
“쯧쯧쯧… 인생 참, 힘겹게 산다.”
엄마의 실수로 많은 용돈(?)을 손에 얻은 나는 그만큼 적지 않은 지출을 감수해야 했다. 돈이 나간다. 내 주머니에 있던 현금들이 빠져나간다. 곧 이 말의 뜻은 다음 달 엄마에게 갚아야 하는 빚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엄마에게 뒤지게 얻어터져 사망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함께 들었다.
아라가 내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던지 내 어깨를 다독여주며 힘내라고 위로해 주는데 그 위로조차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이것들이 오늘 날 아주 물 먹이는 주범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통의 문자가 왔다. 엄마다.
‘아들, 친구 병원 갔니? 진짜 병원비로 빌려 간 거지?’
엄마의 확인문자에 비통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미안해… 날 죽여줘.’
내 휴대전화를 붙들고 울음을 터트리자 아라가 깜짝 놀라며 나보고 왜 그러냐며 걱정을 해준다. 친구들도 내 울음에 놀라 의사를 찾기 시작한다.
“의사 선생님, 이상해요. 분명 손가락을 다쳤는데 머리까지 충격이 왔나 봐요!”
그래, 이 자식아. 나 미쳤다! 그렇게 해서라도 날 좀 살려줘라. ㅠ_ㅠ
“그… 그럴 리가… 제 의사 인생동안 그런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친구의 말에 당황하며 달려온 의사가 더 황당하다. 그 말을 믿고 진짜 나에게 달려온 것 인가… 미친 의사라 욕하고 싶었지만 그런 것조차 귀찮았다. 차라리 진짜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섰다. 나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잔다. 더 놀고 싶다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난 죽을 것이다. 그것도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가.
“그럼, 나랑 원숭이 집이 같은 방향이니까 우린 따로 갈게. 오늘 너무 즐거웠어.”
“둘이? 모텔 가냐?”
“죽을래?”
“킥킥킥. 미안, 농담이야.”
술이 어느 정도 깬 아라가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먼저들 가라는 말에 친구들이 뭔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나 그냥 집에 갈래. 나 돌아갈래!”
“............”
친구들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와 아라만 남았다.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택시를 타고 가기 전 가인이가 한 말이 맴돌고 있다.
‘야, 원숭이! 아라 건들지 말고 집에 바로 보내라! 알겠지?’
그 생각과 함께 내 옆을 같이 걷고 있는 아라의 얼굴을 보니 뭔가 잔뜩 고무되고 즐거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라 덮치기 전에 아라가 날 덮칠 것 같은데 뭘 빨리 보내. 망할 년.’
한 10분 정도 함께 걸은 것 같다. 택시가 없어서? 아니다. 그냥 걸었다. 추운데 왜 걸었냐고? 모르겠다. 그냥 걸었다. 노랫말이 떠올랐다.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해서. 오랜만에 그 길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서.’
울적하다, 진짜. 아라가 갑자기 내 코드 주머니 속으로 자신의 손을 넣더니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왜 또 이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아라를 쳐다봤다. 헉! 저 똘망똘망한 눈빛은 뭐지… 뭔가 불안하면서 무서워지는 이유는 뭘까.
“우리, 한잔 더하고 갈까? 내가 살게.”
“한잔 더?”
“아파서 못 마시겠어? 그럼 나 혼자 마실 테니 옆에 앉아만 있어줘라. 응? 응? 아잉~”
애교떠는 너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정 붙어… 그래, 가보자! 너랑 함께 지옥이라도 가보자. 오늘 나는 반드시 너와… 흐흐흐. 아이구, 손가락 아파라.
“저기 그런데… 미안한데 손 좀 놔주면 안 될까? 아파서…”
“어머! 미안, 깜빡 했네. 흐흐흐.”
그렇게 해서 작은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는 잘 몰랐던 두통이 시작됐다. 머리를 꿰매고 술을 마셔서 그런 것 인가. 병원에서 술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내 고집으로 마신 술이 화근인 것 같았다.
“뭐드릴까요?”
“소주 한 병이랑 마른안주 주세요.”
“소주를 마른안주랑?”
“맛있어. 몰랐니?”
웬걸. 집에서도 노가리 하나랑 소주를 마시는 내가 그걸 모를까. 네 취향이 조금 나랑 비슷한 것 같아 예의상 물어 본건데. 술을 주문하고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문한 술과 안주가 도착했다.
“맛있게 드리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사장님, 어묵 국물 없나요?”
“가져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마른안주에 어묵 국물이라… 술이 뭔가 아는 녀석이다. 호화롭게 마시는 술도 좋지만 이렇게 간단한 메뉴로 마시는 소주의 참 맛을 진정 느낄 줄 아는 아라는 나름 구미가 당기는 이성 친구였다.
“자, 잔만 받아. 마시지는 말고. 나 혼자 마시려니까 심심하니 건배만 해줘.”
“그… 그래.”
꿀렁~ 꿀렁~
소주가 잔에 따라지는 소리는 어느 오케스트라의 명연주보다 듣기 좋은 소리다. 더군다나 아라가 따라주는 첫잔이란…
“건배!”
“어… 응.”
서로 첫잔을 입에 털어내고 빈잔을 머리에 들어 털어내며 웃음꽃이 활짝 핀 자리였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맨주먹 펀치의 통증을 잊을 만큼 아라와의 술자리는 행복했다.
“넌 무슨 일 하니?”
아라가 나에게 던진 사적인 첫 질문이 직업이 뭐냐는 말이었다. 나는 실업자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아라가 나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나… 난 글 써.”
“글?”
“응. 글…”
갑자기 박수를 치며 대박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아라.
“작가야? 무슨 글 쓰는데?”
“그게… 그…”
뭘 쓴다고 해야 하지? 멋진 거… 멋진 거… 뭐가 있을까. 그러다 내 옆자리를 보니 오래 되 보이는 도자기가 보였다. 옳거니, 이거다!
“역사학에 대해… 쓰고 있어.”
“와! 역사!”
목이 말라왔다. 빈잔에 내가 소주를 부어 자작하며 갈증을 달랬다. 그리고 아라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라가 역사에 관심이 많단다. 젠장…
“정말? 나 저번에 명랑보고 진짜 감동했잖아. 임진왜란이 언제… 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지?”
“응? 임진왜란?”
국사에 국자도 몰랐던 지난 학창시절, 유독 역사관이 부족해 지금도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정확히 모르는 나에게 임진왜란이 웬 말이란 말이던가.
“그… 그게…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무슨 방법이냐면 이 위기,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그 묘수를 찾아야 했다. 기억해 내봐! 승이야, 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는지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께 기도하란 말이다!
“1592년.”
바로 그때 아까 아라가 부탁한 어묵 국물을 들고 오신 술집 사장이 말씀해 주셨다. 나는 순간적인 센스와 기질을 발휘하여 아저씨보다 0.87초 늦게 입을 벌리며 말했다.
“1591… 이 아닌, 2년.”
“오, 맞다! 맞아. 대단하다!”
후~ 살았다. 어묵 국물을 들고 오신 술집 사장과 눈이 마주치자 내가 감사하다는 사인을 보냈는데 그 사장이 그 사인을 받고 날 흐뭇하게 쳐다보시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신다. 너무 친절한 사장님… 다음에 또 올게요. 사랑합니다.
그 뒤로 아라의 국사 얘기가 이어질까 내가 화재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선 축구 얘기를 꺼내자 아라는 운동에 관심이 없단다. 쳇! 그나마 조금 알고 있는 건축 얘기를 하자 더더욱 재미없단다. 따이씨! 하는 수 없이 여자들이 싫어하는 군대 얘기를 꺼내려하자…
“입 다물어라.”
미치겠네. 어쩌지… 혼자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감사한 현상이 내 몸을 나타났다. 화장실! 소변이 마려웠다.
“아라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까부터 참았더니…”
“응. 빨리 다녀 와, 나 심심하니까.”
“알겠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데 아까부터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술집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나도 흐뭇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짓고 계신 사장이 이상했지만 아까의 도움도 있고 해서 같이 웃어주었다.
“씨익.”
나의 미소에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까 했는데 사장이 내 미소를 받고 담배 니코틴이 낀 이빨을 보이며 더 큰 미소를 보내준다. 속이 약간 메스꺼웠지만 예의라 생각하고 그보다 더 큰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내 미소의 의미가 잘못 전해진 것 일까.
“흐흐흐.”
소리를 내며 웃던 사장이 심장 쪽으로 두 손을 모으더니 하트를 만들어 나를 향해 발사를 하고 손 키스를 보냈다.
“허걱!”
사장은 게이였다. 나는 화장실로 가는 길이 너무 무서웠다. 하필 게이에게 내가 웃음을 보였으니 오해의 소지가 분명 있을 법도 했다. 화장실로 가는 짧은 거리가 돌아오지 못하는 지옥의 길목처럼 느껴지며 다시 아라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이 되돌려졌다.
“어? 화장실 간다며? 왜 안가?”
겁을 먹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를 본 아라가 왜 화장실에 가지 않냐며 빨리 갔다 오라고 보채는데 미치겠더라. 그 게이사장은 계속 날 향해 이상하고 미친 애정공세를 날리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빨리 이 술집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뭐야? 벌써 술을 다마셨네. 사장님 여기 한 병 더요!”
아라가 술이 없다며 소주를 한병 더 시키자 싱글벙글 웃는 사장이 소주병을 들고 이쪽으로 온다. 무섭다. 살려주세요. 제발…
“여기 있습니다. 이야, 여자 분이 소주를 잘 드시네요.”
“제가 술 좀 하죠.”
술집 사장이 술을 잘 마신다는 칭찬에 아라가 좋아하며 소주병의 뚜껑을 딴다. 얘기는 아라와 하지만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는 사장에게 그만 카운터로 돌아가라고 조심스럽게 얘기 했다.
“감… 감사합니다. 카운터 쪽으로 돌아가세요.”
그러는 사이 아라는 자신의 빈잔에 소주를 부으며 나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승이야, 나 사실… 오늘 너보고 너무 좋았어.”
“응?”
테이블 밑에서 아라의 발 한쪽이 내 종아리와 허벅지 사이를 자극하고 있었고 나는 게이사장과 아라의 행동을 둘 다 감당하고 있었다.
“흐미…”
사장의 눈길은 너무 무서웠다. 돌아가지도 않고 내 쪽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보이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라는 나에게 말하는데 뭐가 부끄러워서 인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여자라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 네가 좋아졌나봐. 그래서 나 집에 오늘 안 들어가도…”
아라의 말과 함께 사장의 손이 내 손에 닿았다. 순간 그 자리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악! 나 먼저 갈께! 싫어~ 저리가! 만지지 마!
정신없이 술집을 뛰쳐나가는 나의 모습을 본 아라가 절망적이라며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고 게이사장은 내 뒤를 따라 나오며 가지 말라고 손을 뻗어 흔들고 있었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리다 보니 그 먼 길을 오로지 내 두 다리로만 뛰어 집에 도착했다.
나의 초등학교 동창회는 그렇게 허무하고 아픈 기억만 남긴 채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게이사장의 공포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 한구석에서 몸을 쭈그린 채 설잠을 자게 되었다.
아침이 되었다. 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기가 무서웠다. 게이사장 때문이 아니다. 내 동생과 엄마의 폭풍 질문과 잔소리 때문이었다. 시계를 봤다. 오전 8시. 동생과 아버지가 출근할 시간이다. 지금 밖으로 나가기에는 이르다. 조금 더 방에 쳐박혀 있어야 한다. 째깍째깍… 오전 10시. 엄마가 운동을 갈 시간이다. 과연 갔을까? 좀 더 버텨보자.
째깍째깍… 오전 11시. 정말 집에는 이제 나만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내방 문에 귀를 대고 거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확인했다. 고요한 거실… 엄마가 있다면 텔레비전 소리나 주방 쪽에서 살림하는 소리가 날 것인데 아무 소리도 없다.
방문을 살짝 열어 거실의 동향을 살폈다. 비무장지대와 같이 고요한 거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헛기침을 해본다.
“콜록!”
아무도 없다. 엄마가 운동을 간 모양이다. 그제야 내 경계는 풀렸다.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려는 순간 쪽지가 한 장 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들, 너 어제 엄마 돈 가지고 뭔 짓했니? 자세한 것은 엄마 운동 다녀와서 얘기하자. 아참, 아빠에게 택배가 하나 올 거야. 받아 놔라.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엄마의 쪽지를 읽고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있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도망칠까? 아무도 없는 산속으로 도망쳐 혼자 살다 죽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오늘밤 엄마에게 뒤지게 맞으리라 다짐을 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아버지 택배가 벌써 왔나?
“누구세요?”
문을 열자 꽃단장을 하고 잎에 장미를 문 택배기사 날 보더니 기겁하며 바닥에 쓰러진다.
“깜짝이야!”
“왜… 왜 그러세요?”
“아, 초련 양 집 아닌가요?”
“초련 양?”
초련 양이라 함은 여자를 뜻하는 건데 우리 집에는 그런 여자가… 헐… 설마…
“혹시, 원초련…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 맞아요. 초련 양.”
“-_-”
“당… 당신 누구야? 강도야? 뭐야?!”
초련… 우리 아버지 성함은 원자 초자 련자 다…
택배기사는 나의 설명을 듣고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며 전화통화를 시켜달란다. 아버지와의 전화통화 후 택배기사가 민망해 하며 택배를 전해주고 돌아간다.
“저런 변태 자식…”
그리고 내 휴대전화에 문자 한통이 왔다.
“또 뭐야? 에이, 짜증나.”
‘원숭아, 안녕! 나 지대야. 중학교 동창. 기억하니?’
중학교 동창 유지대의 문자가 왔다. 이 자식도 10년이 넘게 연락이 안 되다가 도착한 문자다. 설마 또 동창회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ps / 나의 동창회 초등학교 편은 이것으로 마무리 하고 중학교 편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동이가 건배 제의를 하고 이국이가 그 건배 제의에 술잔을 든다. 우리는 모두 이국이의 뒤를 따라 앞에 놓인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내 무릎에 엎어진 아라 때문에 술잔을 잡고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내 무릎에 쓰러진 아라에게 뭔가 자극이 필요했다.
“아라야,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게 잠시 저리 가봐…”
저리 비키라는 나의 말에 아라가 고개를 들더니 귀찮다며 팔을 허공에 휘졌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내 앞에 놓인 술잔을 손으로 쳤다. 술잔은 엎어지며 안에 담긴 술들이 내 무릎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야, 야! 술!”
친구들이 엎어진 술잔의 술이 아까워서 인지 아니면 건배를 해야 하는데 술이 엎어져 안타까워서인지 소란을 피웠다. 그 덕에 아라의 얼굴은 내 중심부로 더욱 밀착되었다. 아라의 얼굴이 내 중심부에 코를 박고 쓰러지게 되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지 줘봐, 얘 진짜 많이 취했나봐. 큰일이네.”
아라의 주정에 놀란 가인이가 나와 아라의 자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엎어진 술을 휴지로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왠지 모를 흥분감이 중심부에서 기둥이 되어 일어선가.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원숭이, 자리에서 일어나 봐. 술 좀 닦게.”
“어, 응.”
나는 아쉬웠지만 아라의 머리를 들고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바로 옆으로 조금 엉덩이를 밀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대현이가 붙지 말라며 다시 나를 밀쳤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라의 얼굴이 내 중심부에 정확히 밀착되었다.
잠시 딴 생각을 해야 했다. 테이블 밑으로는 친구들이 모습을 볼 수 없다. 지퍼를 살짝 내리고 빨딱 선 내 중심을 꺼낼까 말까 하는 고민… 만약 그랬다가 친구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는 동창회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터. 고민고민고민…
친구들은 내 앞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껌과 초코릿이든 바구니를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눈은 살짝 떠있는 상태의 아주머니는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며 껌과 초코릿을 사달란다.
“이보세요, 제가 어려운 처지인데 껌과 초코릿 좀 사주시면 안 될까요?”
“어?”
그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하진이가 대꾸한다.
“어제 술 마실 때 오셨던 분이네. 어제 제가 껌 두통에 만 원 주고 샀잖아요. 기억하세요?”
“응? 어이쿠, 그럼요 기억하죠.”
“죄송한데 다음에 사드릴게요. 오늘은 돌아가 주세요.”
“그래도 얼마 하지 않는데 좀 도와주세요.”
껌 두통에 만 원이라는데 얼마하지 않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악덕장사도 이런 악덕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죽했으면 이렇게 해서라도 생계를 이어갈까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착하지는 않지만 착한 마음에 내가 껌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가 하는 말,
“아가씨가 너무 좋아 하는 것 같네.”
“네?”
아가씨가 너무 좋아 하는 것 같다는 말에 그게 무슨 뜻일까 고민을 하는데 친구들이 가인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가인이가 내 다리 사이, 중심부에 얼굴을 묻고 쓰러진 모습을 보자마자 여자 동창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 지른다.
“꺄! 가인아, 너 어디에 얼굴을 묻고 있는 거야 지금!”
“미쳤나봐, 어머머… 어서 몸을 일으켜.”
젠장… 젠장! 저 아주머니 때문에 완전 망했다. 내 최고의 포지션을 아주머니의 말도 안 되는 만 원짜리 껌 두통에 빼앗기다니… 순간 아주머니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셔서 저의 행복을 아사가십니까!
“그런데 아라가 저러고 있는 걸 어떻게 아셨지? 맹인이시잖아.”
응? 맞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도움을 요청하던 아주머니가 도대체 어떻게 이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을 하셨을까? 순간 당황스러우면서 궁금해졌다.
“콜록, 콜록. 저쪽으로 가봐야겠네.”
아주머니가 갑자기 우리 쪽에 계시다가 옆 테이블로 가시는 모습에 의심이 들었다. 정녕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연기를 하시는 것인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뭐라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럴 때 엉뚱한 정의감(?)이 발휘된다.
“아주머니, 바지 지퍼 열리셨는데요?”
“어머나! 정말?”
껌을 팔던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바지 지퍼를 쳐다본다. 나와 우리 친구들 그리고 주변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채기에 충분했다.
“사기꾼.”
아주머니의 살짝 뜬 실눈이 부릅떠지더니 나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면 어디에 덧 나냐?! 잘났다 이놈아, 에라이~ ?!”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진짜 어려운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이 다양하지만 이렇게 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강매를 하는 장사꾼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 아주머니가! 제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니고!”
“너는 애미애비도 없냐?! 배고파서 좀 먹고 살려고 하는데… 치사해서 원.”
투덜거리며 술집 밖으로 나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정에 술맛이 뚝 떨어졌다. 의기 소심해 하고 있는 나를 향해 친구들이 괜찮다며 저런 아주머니들 많다고 위로해준다.
쓴 술잔을 매만지며 집에 있는 엄마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술집 창밖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창밖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앞에 웬 벤츠 차량 한 대가 서더니 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아주머니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 알짜배기였던 것인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어른의 공경심과 효심이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야, 봐라. 저 아줌마 벤츠 탄다.”
그러자 며칠 전 한번 만났다고 했던 하진이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저 아주머니 불쌍해 보여서 돈 오만 원치 사줬더니 주변 사람들이 왜 그걸 사주냐고 하더라고.”
“왜?”
“저 아주머니 이 일대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라고 하면서 새벽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항상 고급승용차를 타고 퇴근한다고 하더라.”
“정말?”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아까 아는 척 했는데 모르는 척 하잖아. 킥킥킥.”
나는 하진이의 말을 듣고 아까보다 더 쓰게 느껴지는 소주잔을 마시게 되었다. 내가 잘못 한 게 아니었어… 이런 젠장 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어 있는 법… 나의 행동에 정당함을 느끼며 자축하는 의미로 소주를 또 한 잔, 두 잔을 연속으로 마시다보니 머리가 빙글빙글.
우성이가 나를 쳐다보며 걱정되는 말로 물었다.
“야, 너 술 잘 마시는 건 알겠는데 너무 무리해서 마시지마. 취하겠다.”
“아니야, 이정도 가지고 뭘.”
사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우성이의 말에 자극받아 술에 대한 우쭐함이 생겼다. 남자는 ‘못 먹어도 고’라는 생각을 가지며 연달아 두 잔을 더 비워냈다. 그랬더니 진짜 눈깔부터 머리까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지 않은 척 하기 위해 일명 ‘쌘 척’을 하며 남다른 연기력을 발휘하는 나를 본 아라가 눈이 풀린 채 내 얼굴을 만지며 말한다.
“우와~ 우리 원숭이 술 잘 마신다. 안주 먹어.”
그 말과 함께 왜 이런 장난을 나에게 안치나 생각했다. 바나나를 하나들어 먹어보란다. 내가 진짜 원숭이로 보여서 이러는 것은 아니고 별명이 원숭이다보니 어렸을 적부터 친구들이 자주 나에게 했던 장난이었다.
나는 고맙다며 호리가 포크로 찍어준 바나나를 한입 물었다. 그리고 원숭이처럼 씹어대자 친구들이 여전하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렇게 웃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말 생각했다.
‘좋냐? 이 새끼들…’
우물거리고 있는 내 입을 바라보던 아라가 다시 내 다리사이로 얼굴을 묻으며 쓰러진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친구들이 이제는 그런 아라와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기만 한다.
호리가 그런 아라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 이러다가 네들 모텔가서 ‘응응’하고 커플 되는 거 아냐?”
“응응?”
“응, 응응. 킥킥킥.”
“어머, 호리야! 호호호.”
가인이가 호리의 말에 민망하다며 앙탈을 부리고 있고 다른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오늘 자기들이 모텔비용을 줄 테니 한번 가보라며 아우성이다. 그런 친구들의 아우성이 왜 나는 기분이 좋았을까…
두빈이가 자리를 옮겨 우리들끼리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작은 술집으로 이차를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조금 더 이렇게 앉아 있고 싶었는데 저 새끼는 눈치도 없이 또 나와 아라를 갈라놓으려 한다. 개새끼.
“그래, 이제 자리 좀 옮겨서 마시자.”
“그럼… 미안하지만, 나는 우리 애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호리가 애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서 먼저 간단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지금 황홀하다. 내 무릎 사이에 쓰러져 있는 아라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며 혼자 즐기고 있기에…
‘아라야… 좀 더 위로… 위로…’
“이거 아쉬워서 어쩌지? 그럼 내 결혼식장에서 만나야겠네. 그때 남자 친구랑 같이 와.”
애인을 만나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떠난다는 호리에게 동규가 섭섭하다며 틀에 짜여진 예의와 같은 말을 한다. 호리는 동규를 안아주며 결혼 축하를 대신한다.
“잘살아, 대견하네. 우리친구.”
“고맙다. 그날 꼭 와.”
“나 그때 제주도에 남자친구랑 놀러가기로 했는데… 만나서 얘기해봐야겠네.”
“훗.”
제주도로 애인과 놀러간다는 호리가 나는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너무 황홀한 순간이기에. 반쯤 풀린 눈으로 현재를 누리고 있는 나를 본 가인이가 변태 아저씨 그만 느끼시고 일어나라며 나의 팔을 잡는다.
“내… 내가 뭘 느껴!”
“표정에 다 써 있거든요? 아라 이제 이리 내놔.”
“나쁜 년.”
정말 나쁜 년이다. 친구가 이렇게 즐긴다기보다 호강을 하고 있는데 배가 아파서 그런 건가… 그럼 너도 나한테 달라붙지. 이런 씩으로 질투를 하며 우릴 방해하다니… 고얀 년… 별수 없이 나는 나한테 기대어 쓰러져 있는 아라를 가인이에게 인계해야 했다.
그렇게 호리가 떠나고 나와 다른 친구들이 조용하고 우리끼리 대화를 할 수 있는 술집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명동거리… 추운 날씨에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이 유독 눈에 띠었다. 부럽기도 하고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 요즘…
갑자기 누군가 내 팔에 팔짱을 꼈다. 수호천사인가? 내가 모르는 마니또가 존재한 것 인가. 반가운 마음과 감동의 눈빛을 하며 내 팔짱을 낀 상대를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다. 헉! 동규다…
“야, 너 왜 이렇게 비틀거려? 취한 것 같은데?”
“꺼져라, 병신아.”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왜? 넘어져서 다리라도 부러지면 네 결혼식에 하객 한명이 줄어들까봐 걱정 되냐? 염장 지르는 새끼… 내가 그날 암에 걸려 죽더라도 네 결혼식은 꼭 가서 죽을게. 걱정마라. 그리고 제발 이 팔 좀 놔줄래?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놔. 징그럽게.”
“자식, 징그럽긴. 친구끼리.”
나의 핀잔이 민망했던지 동규는 잡고 있던 내 팔을 빼며 뻘줌 해 했다. 그 순간 다시 팔짱을 끼었다. 나는 짜증이 몰려왔다. 내 팔을 당연히 붙잡고 있는 동규를 향해 소리쳤다.
“놓으라고, 이 병신아!”
고함을 치며 고개를 돌리니 아라가 취한 눈동자로 나를 금붕어처럼 쳐다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라가 인상을 쓰며 내 팔에 낀 팔장을 풀고 울먹이려 한다. 세상에나… 아라 일 줄이야. 미쳐 몰랐다. 아라 뒤에 동규가 아라는 왜 욕을 먹어야했는지 모른다는 듯 눈만 껌벅이고 서있었다.
“아라야, 넌 줄 몰랐어.”
“됐어! 못생긴 원숭이 새끼야!”
아라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나는 내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아라에게 고함을 친 이 순간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취해서 사리구분이 되지 않는 듯 했다. 마음에서 눈물이 흐른다.
“아라야, 울지 마. 미안해.”
“병신이라며? 넌 왜 병신이랑 얘기 하냐! 저리가!”
화가 난 아라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손에 지문이 사라질 정도로 싹싹 빌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던 가인이가 나에게 말했다.
“야, 아까처럼 원숭이 흉내 내보던가. 킥킥킥.”
“응?”
아까 명동 한복판에서 벌였던 나만의 서커스가 생각났다. 가인이에게 보인 행동을 지금 이곳에서 또 반복하라는 말인가? 지금 날 어떻게 보고… 머리에 이렇게 붕대를 매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습게 보이더냐!
“우우우웅~”
다시 시작된 나의 원숭이 흉내에 가인이와 다른 남자친구들이 웃기 시작했다. 아라는 날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살짝살짝 쳐다보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열정을 다해 몸을 흔들어가며 진짜 원숭이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춤을 췄다.
“큭큭큭…”
아라의 웃음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하지만 자신 있게 웃는 소리가 아닌 웃음을 참는 소리다. 개그맨들이 가장 싫어 한다는 소리… 소리는 안 나는데 얼굴은 웃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웃음, 짧게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웃음… 아라의 웃음이 바로 그랬다.
“꺄르르르!”
나의 열정에 아라가 마음을 연 것인가. 깊은 땅속에 묻혀 있던 원유가 터지듯 아라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울고 있다. 물론 그 덕에 내 주변의 사람들이 또 다시 몰려들며 원숭이의 쇼를 보듯 즐거워한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이란 CM송처럼 찬바람 속에 나는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닌 내 이미지 고착과 작업을 성공하기 위한 늑대의 속마음으로 길거리 판을 펼치고 있었다.
“야, 야! 그만 해라. 이제 됐어. 하하하하하.”
“미치겠다, 진짜! 킥킥킥.”
친구들의 웃음과 즐거움, 아라의 환한 미소와 폭소에 나의 체면이고 뭐고 다 버렸다. 나는 춤을 멈추고 아라에게 윙크를 날렸다. 가인이는 아까보다 더 잘 췄다며 아라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나에게 약을 올린다.
“아라가 아까부터 달궈 줬나 왜 이렇게 신나게 추냐?”
“알 것 없거든.”
“수상하다. 아라 말고 너!”
“뭔 개소리야.”
가인이는 눈치가 백단은 넘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 나이에 아직도 남자도 없이 이러고 있겠지. 차가운 년. 이제 그만 눈치 채시고 가만히 좀 계세요. 제발.
“승이 때문에 한참 웃었다. 이제 그만 술집으로 가자.”
“그래, 그래.”
친구들이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2차 술집을 찾아 걸어간다. 아라가 나의 팔짱을 다시 끼고 웃으며 내 얼굴을 쳐다본다. 흐미… 심장 떨리는 거. 취해서 그런지 아라가 오늘따라 정말 예쁘게 보였다. 평소 자주 못 본 친구라 그런 건가?
그렇게 몇 분 걷고 있는데 오동이가 펀치기계를 발견했다.
“어, 우리 이거 한번 해보자.”
“추운데 무슨 펀치야. 그냥 가자.”
“이거 해서 펀치 점수가 제일 낮게 나오는 사람이 2차 술값 해결하기. 어때?”
“그럼 우리 중에 싸움 제일 잘했던 승이가 일등이구만.”
“해봐, 해봐. 늙어서 모르는 거야. 그리고 나 요즘 헬스 하잖아.”
오동이가 갑자기 자기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포즈를 취하기 시작한다. 두꺼운 옷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 이두박근을 뭐하러 저렇게 자랑 질을 하는지… 쯧쯧쯧.
“뭔데?”
내가 먼저 앞서간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와봐. 이걸로 술값 내기 할 거야.”
“펀치?”
펀치기계에서 소리가 들린다.
“오빠, 잘 쳐? 쳐봐, 쳐봐!”
우리는 기계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폭소했다. 마케팅을 위해 녹음된 소리겠지만 그 상황에 왜 그렇게 웃기던지. 내 팔짱을 끼고 있던 아라가 비틀거리며 기계 쪽으로 가서니 아직 시작도 안한 펀지를 주먹으로 때렸다. 콩!
“아야! 손 아파. 이걸 왜 해?”
자신의 손을 잡고 아프다는 아라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좋아… 아라에게 나의 힘을 보여주고 남성미를 풍겨 오늘 밤… 낄낄낄.
“내가 먼저 할게. 난 힘이 제일 약하니까.”
“1등 점수가 얼마야?”
“974점이네.”
우리 중에 체구도 제일 작은 두빈이가 펀치기계에 동전을 넣고 폼을 잡기 시작한다. 양팔을 돌리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통해 근육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 같았다. 뭐 그런다고 너의 점수가 얼마나 나오려나.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럼 간다!”
펀치기계에서 한 참 뒤로 물러선 두빈이가 쏜살같이 달려와 두 주먹으로 펀치를 때렸다. 쾅!
“뚜루루루루루루…”
두빈이의 펀치는 의외로 강했다. 기계에서 숫자가 빠르게 올라가고 우리는 모두 기계의 점수판을 향해 집중되었다.
“733.”
“푸하하. 733이 뭐냐?”
“에잇! 잘 맞았는데.”
두빈이의 펀치 점수를 무시하는 친구들 틈 사이로 내가 말을 했다.
“자식들, 지들은 얼마나 나오려고 두빈이 무시하는 거야.”
“좋아, 이번에는 내가 쳐볼게.”
오동이가 두빈이 다음으로 펀치를 칠 준비를 했다. 그간 다져진 헬스의 도움을 받아 고득점이 예상되었다. 오동이는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던졌다. 나름 탄탄한 몸 근육이 자태를 뽐냈고 가인이와 아라가 서로 오동의 이두근을 만져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나의 이두근을 바라봤지만 오동이 만큼 큰 알덩어리가 없었다.
‘자식, 그래봤자 내 밑에서 허우덕 거리던 놈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름 부러운 몸을 갖고 있던 오동이에게 나도 시선을 고정시킬 수 밖에 없었다. 기지개를 크게 한번 켜더니 다시 올라온 펀치기계를 향해 달려와 펀치를 때렸다. 꽝!!!!
“우와~!”
두빈이 때보다 더 큰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고 기계의 점수판이 숨막힐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뚜루루루루루루…!!!!!!!!!”
“대박이다. 1등 점수 바뀔 수 있겠는 걸?”
“설마…”
멈출지 모르는 점수판의 숫자가 조금씩 늦춰지며 대략적인 점수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세 자리의 점수 중 첫 번째 숫자는 9였다.
“900점대인가 봐. 대박이네.”
“뚜루루루루루루…”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점수판은 7. 최고 점수가 974점인데 벌써 970점을 확보했다. 마지막 숫자를 기다리며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한동안 방구석에만 쳐박혀 있던 나는 솔직히 그렇게 높은 점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해서였다. 다른 친구들이 나보다 많이 나오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또로또로…”
마지막 숫자는 3! 최고 점수에서 1점이 부족한 973점이다. 휴~ 다행이라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친구들이 모두 오동이의 점수에 환호성을 치며 대단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 내가 저 최고 점수만 넘긴다면… 넘긴다면!
“오빠, 최고야! 하지만 아쉽네. 보너스 한 번 더~ 덜컹!”
기계가 아쉽다며 보너스로 한 번 더 펀치를 칠 수 있게 펀치바를 올려주었다. 이제 남은 남자들은 나와 우성이, 대현, 이국, 동규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났다고 내가 펀치를 치려고 폼을 잡자 우성이가 자신이 먼저 하겠다며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이얏!”
쾅!!!
“뚜루루루루루루…”
“889.”
우성이는 889점으로 그리 나쁜 점수는 아니었다. 선방했네, 우성이. 그리고 다음으로 대현이가 힘차게 주먹을 날렸다. 쾅!!!
“뚜루루루루루루…”
“900.”
“오예~ 꼴찌는 아니다. 캬캬캬캬캬.”
“야, 어쨌거나 두빈이가 현재 꼴찌야. 우린 술값 굳었다.”
“야호!”
애들의 순서가 지나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오자 왠지 모를 긴장감이 몰려왔다. 고작 펀치기계인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아라와 가인이는 우리 중에 최고 점수를 기록한 오동이 옆에 서서 계속 오동이의 이두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부러웠다.
“나도 꼴찌는 아니겠지? 아잣!”
대현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쾅!!!
“뚜루루루루루루…”
“830.”
꼴찌 점수가 나와 있는 상태에서 마킹되는 펀치기계의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두빈이만 가슴을 조리며 두 손을 모아 제발 자신보다 낮은 점수가 나오길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 보다 당연히 높게 나오리라 생각하며 오동이 만큼만 나오길 바랐다.
대현이도 꼴찌가 아니므로 이번 미션(?) 같은 내기에서 성공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이국이와 동규, 그리고 나다. 그런데 동규는 얼마 후 결혼을 하니 그냥 빼주라며 여자 애들이 난리다. 그런 법이 어디있냐며 우리가 반박했지만 예비 신랑에 대한 예우라고 하여 수긍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남은 사람은 이국이와 나다. 이국이가 이빨을 꽉 물며 펀치기계 앞으로 다가간다. 자신의 오른손목에 왼손으로 감싸며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펀치를 쳤다.
쾅!!!
“과연?”
“이국이가 승이 다음으로 싸움 잘하지 않았니?”
가인이가 묻자 오동이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다 내 시다바리였어! 이 자식들. 캬캬캬캬.
“997!”
“우와!”
헉… 이국이가 최고 점수를 넘어 997이라는 놀라운 점수가 마킹되었다. 순간 나는 다리가 후둘거리며 현실을 부정하게 되었다. 오동이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여자애들이 이국이 쪽으로 우르르 몰려들며 이국이의 이두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국아, 어떻게 이렇게 점수가 많이 나와?”
아라의 질문에 이국이가 대답한다.
“우리 누나가 세쌍둥이를 낳았잖아. 같이 놀아주다 보면 이 정도는 뭐. 허허허허.”
“정말? 그렇구나. 너 다시 보인다. 대단해!”
아라와 가인이가 이국이의 몸을 이리저리 주물럭대며 남성미의 절정을 느끼는 모습은 나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갑자기 분노의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평소 승부욕이 강했던 나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지는 것을 싫어했다.
“저리 비켜.”
등 뒤에서 싸늘함을 느낀 두빈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흠칫 놀라며 내가 걸어가는 길을 비켜선다. 내 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만연했고 입가는 실룩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펀치기계를 부셔버리기에 충분했다.
“너희들 중에 싸움 제일 잘했던 원숭이가 드디어 나타나셨네.”
“헐… 승이야, 진정해라. 기계 부서질라.”
이글거리는 나의 눈빛과 터져 나올 것 같은 주먹의 기운을 느낀 친구들이 진정하라며 날 위로하지만 이미 나의 심리는 전투본능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도 날 막을 수 없다. 내가 가는 이 길 끝에 있는 펀치기계를 부셔버릴 테다…!
“우아아악!”
“마치 실성한… 괴수 같아!”
나의 고함소리에 친구들이 잔뜩 겁을 먹고 있는 표정이었다. 정말 기계가 망가지면 어쩌냐며 도망쳐야 한다고 서로 뛰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자만의 미소가 내 얼굴 한 가득 채워졌다. 나의 주먹을 받아라, 펀치기계야!
“받아랏!”
“드… 드디어 간다! 모두 조심해!”
“우아아악!”
쾅!!!
…이런 소리가 나야 했다. 검은자가 사라진 나의 눈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흰자만 가득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바람을 부실만큼 큰…
휘잉~
“!”
“뭐… 뭐야…”
변명이 아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자가 다시 흰자 가운데로 오자 보이는 것은 아직도 멀쩡하게 서있는 펀치바였다. 내 분노의 펀치가 그 옆을 비켜간 것이다. 허공에 삽질이라니… 망할…
“뭐야? 이거 안보여? 이거를 때려야지.”
“똥폼쟁이.”
따이씨… 빌어먹을… 모든 정기와 힘을 모아 담은 나의 분노 펀치가 허공을 향해 날아갈 줄이야.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 남아 있는 전투력이 내 주먹에 남아 있음을… 마음을 안정시키고 다시 빨딱 서있는 펀치바를 향해 노려봤다.
“이번에는 날려 버릴 거야.”
“제발.”
“흥.”
친구들의 비난은 나의 전투력을 더 극대화시켰다. 내 눈에서는 이미 살기가 느껴질 정도의 분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든 내 주먹에 맞으면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고 드래곤 볼 만화책에 나오는 슈퍼 초사이어인과 같은 내 몸 주변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크허헉!”
“원숭이에게 다가가지마! 이 살기는 뭐지?!”
“부셔버리겠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향해 빨딱 일어선 펀치를 강타하기 위해 잔발을 시작했다. 나의 한쪽 발이 뗘지고 공포의 주먹이 펀치바를 향해 뻗어 나갔다. 쉐에엑!
꽝!!!!!!!!!!!!!!!!!!
“허헉!”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나의 강력한 펀치를 확인했다. 주먹이 아파왔다. 그만큼 강하고 쌘 펀치가 뻗어졌다. 핵주먹 타이슨도 울고 갈 최강의 펀치! 그게 바로… 나, 원승이다!
아라가 멍하니 날 쳐다보다 힘겹게 입을 연다.
“병… 병… 병원… 병원!”
훗… 날 걱정하는 것인가? 걱정 마. 난 이런 펀치기계 따위에…
내가 눈을 뜨고 펀치기계를 보는 순간 펀치기계의 전광판 부분에 내 손이 정확하게 꼿친 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우뚝 서있는 펀치바는 땀을 흘리며 나를 향해 하품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고… 주먹이 펀치기계 속으로 처박혀 있고 내 손은 통증을 일으킨다.
“꺄울~! 악! 내 주먹!”
“맙소사…”
“미련한 자식 같으니…”
오동이가 황급히 달려와 나를 엎고 명동근처에 있는 백병원으로 달려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난 후 오른쪽 새끼손가락 골절이란 판정을 받았다. 머리를 꿰매고 손가락은 기브스… 하루 일과가 상당히 사나운 하루다. 날 한심하게 쳐다보는 가인이가 혀를 차며 말한다.
“쯧쯧쯧… 인생 참, 힘겹게 산다.”
엄마의 실수로 많은 용돈(?)을 손에 얻은 나는 그만큼 적지 않은 지출을 감수해야 했다. 돈이 나간다. 내 주머니에 있던 현금들이 빠져나간다. 곧 이 말의 뜻은 다음 달 엄마에게 갚아야 하는 빚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엄마에게 뒤지게 얻어터져 사망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함께 들었다.
아라가 내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던지 내 어깨를 다독여주며 힘내라고 위로해 주는데 그 위로조차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이것들이 오늘 날 아주 물 먹이는 주범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통의 문자가 왔다. 엄마다.
‘아들, 친구 병원 갔니? 진짜 병원비로 빌려 간 거지?’
엄마의 확인문자에 비통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미안해… 날 죽여줘.’
내 휴대전화를 붙들고 울음을 터트리자 아라가 깜짝 놀라며 나보고 왜 그러냐며 걱정을 해준다. 친구들도 내 울음에 놀라 의사를 찾기 시작한다.
“의사 선생님, 이상해요. 분명 손가락을 다쳤는데 머리까지 충격이 왔나 봐요!”
그래, 이 자식아. 나 미쳤다! 그렇게 해서라도 날 좀 살려줘라. ㅠ_ㅠ
“그… 그럴 리가… 제 의사 인생동안 그런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친구의 말에 당황하며 달려온 의사가 더 황당하다. 그 말을 믿고 진짜 나에게 달려온 것 인가… 미친 의사라 욕하고 싶었지만 그런 것조차 귀찮았다. 차라리 진짜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섰다. 나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잔다. 더 놀고 싶다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난 죽을 것이다. 그것도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가.
“그럼, 나랑 원숭이 집이 같은 방향이니까 우린 따로 갈게. 오늘 너무 즐거웠어.”
“둘이? 모텔 가냐?”
“죽을래?”
“킥킥킥. 미안, 농담이야.”
술이 어느 정도 깬 아라가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먼저들 가라는 말에 친구들이 뭔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나 그냥 집에 갈래. 나 돌아갈래!”
“............”
친구들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와 아라만 남았다.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택시를 타고 가기 전 가인이가 한 말이 맴돌고 있다.
‘야, 원숭이! 아라 건들지 말고 집에 바로 보내라! 알겠지?’
그 생각과 함께 내 옆을 같이 걷고 있는 아라의 얼굴을 보니 뭔가 잔뜩 고무되고 즐거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라 덮치기 전에 아라가 날 덮칠 것 같은데 뭘 빨리 보내. 망할 년.’
한 10분 정도 함께 걸은 것 같다. 택시가 없어서? 아니다. 그냥 걸었다. 추운데 왜 걸었냐고? 모르겠다. 그냥 걸었다. 노랫말이 떠올랐다.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해서. 오랜만에 그 길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서.’
울적하다, 진짜. 아라가 갑자기 내 코드 주머니 속으로 자신의 손을 넣더니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왜 또 이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아라를 쳐다봤다. 헉! 저 똘망똘망한 눈빛은 뭐지… 뭔가 불안하면서 무서워지는 이유는 뭘까.
“우리, 한잔 더하고 갈까? 내가 살게.”
“한잔 더?”
“아파서 못 마시겠어? 그럼 나 혼자 마실 테니 옆에 앉아만 있어줘라. 응? 응? 아잉~”
애교떠는 너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정 붙어… 그래, 가보자! 너랑 함께 지옥이라도 가보자. 오늘 나는 반드시 너와… 흐흐흐. 아이구, 손가락 아파라.
“저기 그런데… 미안한데 손 좀 놔주면 안 될까? 아파서…”
“어머! 미안, 깜빡 했네. 흐흐흐.”
그렇게 해서 작은 호프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는 잘 몰랐던 두통이 시작됐다. 머리를 꿰매고 술을 마셔서 그런 것 인가. 병원에서 술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내 고집으로 마신 술이 화근인 것 같았다.
“뭐드릴까요?”
“소주 한 병이랑 마른안주 주세요.”
“소주를 마른안주랑?”
“맛있어. 몰랐니?”
웬걸. 집에서도 노가리 하나랑 소주를 마시는 내가 그걸 모를까. 네 취향이 조금 나랑 비슷한 것 같아 예의상 물어 본건데. 술을 주문하고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문한 술과 안주가 도착했다.
“맛있게 드리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사장님, 어묵 국물 없나요?”
“가져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마른안주에 어묵 국물이라… 술이 뭔가 아는 녀석이다. 호화롭게 마시는 술도 좋지만 이렇게 간단한 메뉴로 마시는 소주의 참 맛을 진정 느낄 줄 아는 아라는 나름 구미가 당기는 이성 친구였다.
“자, 잔만 받아. 마시지는 말고. 나 혼자 마시려니까 심심하니 건배만 해줘.”
“그… 그래.”
꿀렁~ 꿀렁~
소주가 잔에 따라지는 소리는 어느 오케스트라의 명연주보다 듣기 좋은 소리다. 더군다나 아라가 따라주는 첫잔이란…
“건배!”
“어… 응.”
서로 첫잔을 입에 털어내고 빈잔을 머리에 들어 털어내며 웃음꽃이 활짝 핀 자리였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맨주먹 펀치의 통증을 잊을 만큼 아라와의 술자리는 행복했다.
“넌 무슨 일 하니?”
아라가 나에게 던진 사적인 첫 질문이 직업이 뭐냐는 말이었다. 나는 실업자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아라가 나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나… 난 글 써.”
“글?”
“응. 글…”
갑자기 박수를 치며 대박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아라.
“작가야? 무슨 글 쓰는데?”
“그게… 그…”
뭘 쓴다고 해야 하지? 멋진 거… 멋진 거… 뭐가 있을까. 그러다 내 옆자리를 보니 오래 되 보이는 도자기가 보였다. 옳거니, 이거다!
“역사학에 대해… 쓰고 있어.”
“와! 역사!”
목이 말라왔다. 빈잔에 내가 소주를 부어 자작하며 갈증을 달랬다. 그리고 아라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라가 역사에 관심이 많단다. 젠장…
“정말? 나 저번에 명랑보고 진짜 감동했잖아. 임진왜란이 언제… 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지?”
“응? 임진왜란?”
국사에 국자도 몰랐던 지난 학창시절, 유독 역사관이 부족해 지금도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정확히 모르는 나에게 임진왜란이 웬 말이란 말이던가.
“그… 그게…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무슨 방법이냐면 이 위기,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그 묘수를 찾아야 했다. 기억해 내봐! 승이야, 임진왜란이 언제 일어났는지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께 기도하란 말이다!
“1592년.”
바로 그때 아까 아라가 부탁한 어묵 국물을 들고 오신 술집 사장이 말씀해 주셨다. 나는 순간적인 센스와 기질을 발휘하여 아저씨보다 0.87초 늦게 입을 벌리며 말했다.
“1591… 이 아닌, 2년.”
“오, 맞다! 맞아. 대단하다!”
후~ 살았다. 어묵 국물을 들고 오신 술집 사장과 눈이 마주치자 내가 감사하다는 사인을 보냈는데 그 사장이 그 사인을 받고 날 흐뭇하게 쳐다보시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신다. 너무 친절한 사장님… 다음에 또 올게요. 사랑합니다.
그 뒤로 아라의 국사 얘기가 이어질까 내가 화재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선 축구 얘기를 꺼내자 아라는 운동에 관심이 없단다. 쳇! 그나마 조금 알고 있는 건축 얘기를 하자 더더욱 재미없단다. 따이씨! 하는 수 없이 여자들이 싫어하는 군대 얘기를 꺼내려하자…
“입 다물어라.”
미치겠네. 어쩌지… 혼자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감사한 현상이 내 몸을 나타났다. 화장실! 소변이 마려웠다.
“아라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까부터 참았더니…”
“응. 빨리 다녀 와, 나 심심하니까.”
“알겠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데 아까부터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술집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나도 흐뭇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짓고 계신 사장이 이상했지만 아까의 도움도 있고 해서 같이 웃어주었다.
“씨익.”
나의 미소에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까 했는데 사장이 내 미소를 받고 담배 니코틴이 낀 이빨을 보이며 더 큰 미소를 보내준다. 속이 약간 메스꺼웠지만 예의라 생각하고 그보다 더 큰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내 미소의 의미가 잘못 전해진 것 일까.
“흐흐흐.”
소리를 내며 웃던 사장이 심장 쪽으로 두 손을 모으더니 하트를 만들어 나를 향해 발사를 하고 손 키스를 보냈다.
“허걱!”
사장은 게이였다. 나는 화장실로 가는 길이 너무 무서웠다. 하필 게이에게 내가 웃음을 보였으니 오해의 소지가 분명 있을 법도 했다. 화장실로 가는 짧은 거리가 돌아오지 못하는 지옥의 길목처럼 느껴지며 다시 아라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이 되돌려졌다.
“어? 화장실 간다며? 왜 안가?”
겁을 먹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나를 본 아라가 왜 화장실에 가지 않냐며 빨리 갔다 오라고 보채는데 미치겠더라. 그 게이사장은 계속 날 향해 이상하고 미친 애정공세를 날리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빨리 이 술집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뭐야? 벌써 술을 다마셨네. 사장님 여기 한 병 더요!”
아라가 술이 없다며 소주를 한병 더 시키자 싱글벙글 웃는 사장이 소주병을 들고 이쪽으로 온다. 무섭다. 살려주세요. 제발…
“여기 있습니다. 이야, 여자 분이 소주를 잘 드시네요.”
“제가 술 좀 하죠.”
술집 사장이 술을 잘 마신다는 칭찬에 아라가 좋아하며 소주병의 뚜껑을 딴다. 얘기는 아라와 하지만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는 사장에게 그만 카운터로 돌아가라고 조심스럽게 얘기 했다.
“감… 감사합니다. 카운터 쪽으로 돌아가세요.”
그러는 사이 아라는 자신의 빈잔에 소주를 부으며 나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승이야, 나 사실… 오늘 너보고 너무 좋았어.”
“응?”
테이블 밑에서 아라의 발 한쪽이 내 종아리와 허벅지 사이를 자극하고 있었고 나는 게이사장과 아라의 행동을 둘 다 감당하고 있었다.
“흐미…”
사장의 눈길은 너무 무서웠다. 돌아가지도 않고 내 쪽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보이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라는 나에게 말하는데 뭐가 부끄러워서 인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여자라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나 네가 좋아졌나봐. 그래서 나 집에 오늘 안 들어가도…”
아라의 말과 함께 사장의 손이 내 손에 닿았다. 순간 그 자리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악! 나 먼저 갈께! 싫어~ 저리가! 만지지 마!
정신없이 술집을 뛰쳐나가는 나의 모습을 본 아라가 절망적이라며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고 게이사장은 내 뒤를 따라 나오며 가지 말라고 손을 뻗어 흔들고 있었다.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리다 보니 그 먼 길을 오로지 내 두 다리로만 뛰어 집에 도착했다.
나의 초등학교 동창회는 그렇게 허무하고 아픈 기억만 남긴 채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게이사장의 공포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 한구석에서 몸을 쭈그린 채 설잠을 자게 되었다.
아침이 되었다. 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기가 무서웠다. 게이사장 때문이 아니다. 내 동생과 엄마의 폭풍 질문과 잔소리 때문이었다. 시계를 봤다. 오전 8시. 동생과 아버지가 출근할 시간이다. 지금 밖으로 나가기에는 이르다. 조금 더 방에 쳐박혀 있어야 한다. 째깍째깍… 오전 10시. 엄마가 운동을 갈 시간이다. 과연 갔을까? 좀 더 버텨보자.
째깍째깍… 오전 11시. 정말 집에는 이제 나만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내방 문에 귀를 대고 거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확인했다. 고요한 거실… 엄마가 있다면 텔레비전 소리나 주방 쪽에서 살림하는 소리가 날 것인데 아무 소리도 없다.
방문을 살짝 열어 거실의 동향을 살폈다. 비무장지대와 같이 고요한 거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헛기침을 해본다.
“콜록!”
아무도 없다. 엄마가 운동을 간 모양이다. 그제야 내 경계는 풀렸다.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 문을 열려는 순간 쪽지가 한 장 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들, 너 어제 엄마 돈 가지고 뭔 짓했니? 자세한 것은 엄마 운동 다녀와서 얘기하자. 아참, 아빠에게 택배가 하나 올 거야. 받아 놔라.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엄마의 쪽지를 읽고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있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도망칠까? 아무도 없는 산속으로 도망쳐 혼자 살다 죽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오늘밤 엄마에게 뒤지게 맞으리라 다짐을 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아버지 택배가 벌써 왔나?
“누구세요?”
문을 열자 꽃단장을 하고 잎에 장미를 문 택배기사 날 보더니 기겁하며 바닥에 쓰러진다.
“깜짝이야!”
“왜… 왜 그러세요?”
“아, 초련 양 집 아닌가요?”
“초련 양?”
초련 양이라 함은 여자를 뜻하는 건데 우리 집에는 그런 여자가… 헐… 설마…
“혹시, 원초련…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 맞아요. 초련 양.”
“-_-”
“당… 당신 누구야? 강도야? 뭐야?!”
초련… 우리 아버지 성함은 원자 초자 련자 다…
택배기사는 나의 설명을 듣고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며 전화통화를 시켜달란다. 아버지와의 전화통화 후 택배기사가 민망해 하며 택배를 전해주고 돌아간다.
“저런 변태 자식…”
그리고 내 휴대전화에 문자 한통이 왔다.
“또 뭐야? 에이, 짜증나.”
‘원숭아, 안녕! 나 지대야. 중학교 동창. 기억하니?’
중학교 동창 유지대의 문자가 왔다. 이 자식도 10년이 넘게 연락이 안 되다가 도착한 문자다. 설마 또 동창회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ps / 나의 동창회 초등학교 편은 이것으로 마무리 하고 중학교 편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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