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사랑 -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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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634회 작성일 20-01-17 00:10본문
오랫만에 글을 올립니다.
부끄럽지만 또 허접한 글로 여러분을 뵙게되었네요.
어느분이 또 질타하면 그때다시 잠수 타지요뭐..!
암튼 기운빠지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중동이 생각^^)
===========================================================
내가 한 사랑
나를 지배하는 힘은 무엇인가?
40년 가까이 보고,듣고,느끼며 나의 의식과 자아가 정립 되었고
그런 까닭에 선과 악,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을 구분하며
세상의 관습과 도덕 그리고 윤리에 마음과 육신을 맞추며 살아왔다.
그런 40년의 세월에 단련 되어진 철옹성 같은 의식이란 담벼락도
욕망이란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서는 모래 위에 지어진 성처럼
한 순간의 물거품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이야기 하고 싶다.
지금 하는 나의 이야기가 자칫, 저질러버린 죄를 면해보려는 회피의 의도로
비추어질까? 라는 우려에서 미리 말해 두고싶다.
남들은 자기들의 잣대로 나를 죄인이라 말 할 수도 있을 겄이다.
분명한 것은 남들은 뭐라 하든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다만 과오가 있었을 뿐이고, 그렇지만 세월을 되돌린다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런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싶다.
전철에서 내려 백화점 회전문을 잡으려는 순간 내 팔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하얗게 잘생긴 청년이었다.
“누구시죠?”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나는..?”
“아이참! 저 상영이요 유상영?”
“상영이..? 어머 어머!그래 상영이구나?!”
희미하고 뿌옇던 머리 속이 맑아지며 13년 전의 상황이 영상처럼 재생되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새내기 교사로서 꿈도 많고 콧대도 높았던 내게
친정 아버지는 친구 분의 자제라며 성실하고 인품 또한 빠질데 없다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곱살 이나 만은 사람에게 거의 강권하듯이 혼사를 결정지어
운명?적으로 결혼한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없이 그냥 그렇게 결혼 생활은 이어졌고 남편이 시골학교에
근무하는 관계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그 불만 이라는 것도 매일을 함께 해보지 못한 무지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나는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서야 깨닫게 되었다.
90년의 봄볕은 유난히도 따사로 왔다.
나는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남편은 경기도 광주의 시골마을 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주말부부로 지내는 상황을 몹시도 불편해 할 즈음 이었다.
스물 여섯의 3년차 중학교 국어교사로 관록이 붙어갈 무렵 남편은
“부부가 무어냐? 함께 살아야 부부 아니냐? 당신이 이곳으로 오는 것이 좋겠다
시골에서 서울로 전근 신청은 힘드니까 당신이 와라 함께 사는 것이 소원이다”
등등의 애원과 설득에 논리도 그럴듯하여 근무지를 내가 옮겨 남편과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때 그애를 알게 되는 내 인생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단초가 되었다.
남편은 5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그중 유영상이란 아이의 부모가 생강을 저장해놓은
토굴에 들어가 작업하다 가스에 질식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 하였다.
남편은 그 아이가 가엽다며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였고, 그런 저런 이유로
영상이의 집에 가정방문을 함께 하였다.
양부모를 졸지에 잃어버린 집안의 분위기는 생각처럼 어둡지 않았고 그 동네에서는
상당한 부농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조용하지만 그늘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의 의연함은 조부모의 영향이었고 특히 할머니는 촌로답지않은 반듯함과
옛날 여인네의 인자함과 꼿꼿함, 예절과 도리를 정갈하고 단아하게 보여 주시는
나에겐 처음 느껴보는 우러름의 대상이었다.
주말이면 나는 남편과 함께든 혼자든 상관없이 할머니를 찾았고 그분에게서
한복 만드는 법, 젯상 차리는 법, 전통요리등등 세월과 인내로 터득하신
소중한 지혜들을 배우며 그분과의 만남에 너무나 감사해 하였다.
그 아이와도 자연스럽게 친족이상의 정을 나누게 되었고 남편의 제자를 넘어
영상 이와는 또 다른 인연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지혜에 빠진 시간도, 영상이게 느끼는 측은함의 연민도 사실은 남편과의
소원함이 원인중의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일에 몰두하는 것 말고 딱히 내가 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마음주고 심취해야 할 대상이 필요했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할지도..?
그렇게 영상이가 중학생이 될 때 까지 영상이 가족과 함께하다 남편과의 관계가
대화의 단절 상태에 이르러 결국 나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가진 의식의
모든 부분에서 남편과 관계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
광주에서의 모든 일들을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었다.
그 후로 남편은 태안군의 섬 학교로 자원해 우리부부는 법적인 서류상의
부부 일뿐 추석,설 명절 같은 피할 수 없는 때를 제외하곤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한 거의 만나는 일이 없는 각자의 생활을 따로 하는 사실상의이혼상태에 들어갔다.
어른들 살아 계신 동안만 이란 단서를 달아 놓은 채..
그렇게 살갑게 지내다 어느 한순간 냉정하게 연락을 끊어버린 상영을 다시
만나니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나를 잡고 아는척하는 그가 예전의
상영 이로는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그때 모르는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당하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꽃처럼 예쁘고 산하처럼 늠름한 남자에게 팔목을 잡혀있을 뿐이었다.
커피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겨 그간의 근황에 대해 묻고 들으며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시고 건강하시단 얘기엔 오히려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도 독자라서 군대를 면제 받은 까닭에 기업에서 의뢰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파는
프리랜서로 지위를 확고히 한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나이였다.
나는 나를 변명 하기에 바빠서 그가 묻지도 않는 남편과의 일들과 연계하여
소식을 끊게된 사연들을 장황히 설명하려 하였고 그런 나를보며 그는 빙긋이
웃으며 이해한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와 함께한 두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약속이 있다는 그의 사정으로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그 애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매일을 하루 열번도 넘게 전화 하였고 어떤 때는 수업 중에 그가 무얼 하는 지가 궁금해
자습을 시켜놓고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전화기로 소근 거린 적도 있었다.
그도 역시 배고프다며,잠이 안 온다며, 지금 기분이 무척 꿀꿀하다며 등등일상의
작은 일들까지내게 알려주었고 새벽 두 세시에 걸려온 그의 전화도 나는 반가웠다.
만나고 싶을 때는 언제나 만나 식사하고 차 마시며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함께 걸을 때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고 바람이불면 그는 내 어깨를 안아 주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작은 무서움에도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크게 소리치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대학로에서 이름 모를 어느 락 그룹의 공연을 보며 그가 장난치듯이 가슴을 쥐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주었지만 가슴속에선 천둥이 치고 머리에선 번개가 일었다.
나는 많은 것을 염려 하였고 기대도 하였지만 그이상의 진전은 없엇다
그가 맡은 프로젝트를 끝냈다며 2주만에야 만난 날이었다.
그가 내게 그간 얻어먹은 원수를 갚겠다며 내가 좋아하는 게 요리를 사준 날이었다.
차 마시고 노래방에서 맥주까지 살짝 한잔 걸친 그날,그는 우리집에 오고 싶어 했다.
집에 있던 발렌타인에 물을 많이 희석하여 마시며 그는 내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부끄럽지만 또 허접한 글로 여러분을 뵙게되었네요.
어느분이 또 질타하면 그때다시 잠수 타지요뭐..!
암튼 기운빠지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중동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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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사랑
나를 지배하는 힘은 무엇인가?
40년 가까이 보고,듣고,느끼며 나의 의식과 자아가 정립 되었고
그런 까닭에 선과 악,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을 구분하며
세상의 관습과 도덕 그리고 윤리에 마음과 육신을 맞추며 살아왔다.
그런 40년의 세월에 단련 되어진 철옹성 같은 의식이란 담벼락도
욕망이란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서는 모래 위에 지어진 성처럼
한 순간의 물거품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이야기 하고 싶다.
지금 하는 나의 이야기가 자칫, 저질러버린 죄를 면해보려는 회피의 의도로
비추어질까? 라는 우려에서 미리 말해 두고싶다.
남들은 자기들의 잣대로 나를 죄인이라 말 할 수도 있을 겄이다.
분명한 것은 남들은 뭐라 하든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다만 과오가 있었을 뿐이고, 그렇지만 세월을 되돌린다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런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싶다.
전철에서 내려 백화점 회전문을 잡으려는 순간 내 팔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하얗게 잘생긴 청년이었다.
“누구시죠?”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나는..?”
“아이참! 저 상영이요 유상영?”
“상영이..? 어머 어머!그래 상영이구나?!”
희미하고 뿌옇던 머리 속이 맑아지며 13년 전의 상황이 영상처럼 재생되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새내기 교사로서 꿈도 많고 콧대도 높았던 내게
친정 아버지는 친구 분의 자제라며 성실하고 인품 또한 빠질데 없다며 초등학교
교사로, 일곱살 이나 만은 사람에게 거의 강권하듯이 혼사를 결정지어
운명?적으로 결혼한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없이 그냥 그렇게 결혼 생활은 이어졌고 남편이 시골학교에
근무하는 관계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그 불만 이라는 것도 매일을 함께 해보지 못한 무지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나는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서야 깨닫게 되었다.
90년의 봄볕은 유난히도 따사로 왔다.
나는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남편은 경기도 광주의 시골마을 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주말부부로 지내는 상황을 몹시도 불편해 할 즈음 이었다.
스물 여섯의 3년차 중학교 국어교사로 관록이 붙어갈 무렵 남편은
“부부가 무어냐? 함께 살아야 부부 아니냐? 당신이 이곳으로 오는 것이 좋겠다
시골에서 서울로 전근 신청은 힘드니까 당신이 와라 함께 사는 것이 소원이다”
등등의 애원과 설득에 논리도 그럴듯하여 근무지를 내가 옮겨 남편과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때 그애를 알게 되는 내 인생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단초가 되었다.
남편은 5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그중 유영상이란 아이의 부모가 생강을 저장해놓은
토굴에 들어가 작업하다 가스에 질식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 하였다.
남편은 그 아이가 가엽다며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보였고, 그런 저런 이유로
영상이의 집에 가정방문을 함께 하였다.
양부모를 졸지에 잃어버린 집안의 분위기는 생각처럼 어둡지 않았고 그 동네에서는
상당한 부농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조용하지만 그늘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의 의연함은 조부모의 영향이었고 특히 할머니는 촌로답지않은 반듯함과
옛날 여인네의 인자함과 꼿꼿함, 예절과 도리를 정갈하고 단아하게 보여 주시는
나에겐 처음 느껴보는 우러름의 대상이었다.
주말이면 나는 남편과 함께든 혼자든 상관없이 할머니를 찾았고 그분에게서
한복 만드는 법, 젯상 차리는 법, 전통요리등등 세월과 인내로 터득하신
소중한 지혜들을 배우며 그분과의 만남에 너무나 감사해 하였다.
그 아이와도 자연스럽게 친족이상의 정을 나누게 되었고 남편의 제자를 넘어
영상 이와는 또 다른 인연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지혜에 빠진 시간도, 영상이게 느끼는 측은함의 연민도 사실은 남편과의
소원함이 원인중의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일에 몰두하는 것 말고 딱히 내가 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마음주고 심취해야 할 대상이 필요했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할지도..?
그렇게 영상이가 중학생이 될 때 까지 영상이 가족과 함께하다 남편과의 관계가
대화의 단절 상태에 이르러 결국 나는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내가가진 의식의
모든 부분에서 남편과 관계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
광주에서의 모든 일들을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었다.
그 후로 남편은 태안군의 섬 학교로 자원해 우리부부는 법적인 서류상의
부부 일뿐 추석,설 명절 같은 피할 수 없는 때를 제외하곤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한 거의 만나는 일이 없는 각자의 생활을 따로 하는 사실상의이혼상태에 들어갔다.
어른들 살아 계신 동안만 이란 단서를 달아 놓은 채..
그렇게 살갑게 지내다 어느 한순간 냉정하게 연락을 끊어버린 상영을 다시
만나니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나를 잡고 아는척하는 그가 예전의
상영 이로는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그때 모르는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당하는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꽃처럼 예쁘고 산하처럼 늠름한 남자에게 팔목을 잡혀있을 뿐이었다.
커피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겨 그간의 근황에 대해 묻고 들으며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시고 건강하시단 얘기엔 오히려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도 독자라서 군대를 면제 받은 까닭에 기업에서 의뢰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파는
프리랜서로 지위를 확고히 한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나이였다.
나는 나를 변명 하기에 바빠서 그가 묻지도 않는 남편과의 일들과 연계하여
소식을 끊게된 사연들을 장황히 설명하려 하였고 그런 나를보며 그는 빙긋이
웃으며 이해한다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와 함께한 두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약속이 있다는 그의 사정으로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그 애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매일을 하루 열번도 넘게 전화 하였고 어떤 때는 수업 중에 그가 무얼 하는 지가 궁금해
자습을 시켜놓고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전화기로 소근 거린 적도 있었다.
그도 역시 배고프다며,잠이 안 온다며, 지금 기분이 무척 꿀꿀하다며 등등일상의
작은 일들까지내게 알려주었고 새벽 두 세시에 걸려온 그의 전화도 나는 반가웠다.
만나고 싶을 때는 언제나 만나 식사하고 차 마시며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함께 걸을 때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고 바람이불면 그는 내 어깨를 안아 주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작은 무서움에도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크게 소리치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대학로에서 이름 모를 어느 락 그룹의 공연을 보며 그가 장난치듯이 가슴을 쥐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주었지만 가슴속에선 천둥이 치고 머리에선 번개가 일었다.
나는 많은 것을 염려 하였고 기대도 하였지만 그이상의 진전은 없엇다
그가 맡은 프로젝트를 끝냈다며 2주만에야 만난 날이었다.
그가 내게 그간 얻어먹은 원수를 갚겠다며 내가 좋아하는 게 요리를 사준 날이었다.
차 마시고 노래방에서 맥주까지 살짝 한잔 걸친 그날,그는 우리집에 오고 싶어 했다.
집에 있던 발렌타인에 물을 많이 희석하여 마시며 그는 내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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