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의 그녀 - 1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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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875회 작성일 20-01-17 00:35본문
"저기... 도망가세요."
난 사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주저앉아있는 유경 누나에게
슬쩍 말했다. 그녀는 아직 진정되지 않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날 보았다.
"...으, 응?"
"도망가시라구요. 밖으로."
마치 어설픈 3류 영화라도 찍고있는 듯한 자괴감이 문득 들었지만 지금은 그딴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이야 선풍기로 내리찍은 그 째진 눈과 거의 기습적으로 몇방 먹인 사내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일단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일어서기만 한다면 그때부턴 정말로 위험해진다.
이게 만약 영화였다면 여기서 내가 저 두 놈을 해치우는 속편한 전개가 나오겠지만 불행하게도 이건 현실이었다.
내가 무슨 격투선수도 아니고 난 저 남자 둘과 싸워서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그랬기에 일단 어떻게든 여기서 유경 누나와 함께 벗어나는 것만을 생각해야했다.
우선 탈출부터 하고 신고를 하든 뭘 어쩌든 그 뒤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한몸 빼내는 것 보다 유경 누나를 여기서 내보내는 것이 더욱 급선무였다.
하지만 이런 내 속과는 달리 그녀는 아직 제대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듯, 블라우스가 처참하게 찢어진 채로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안쓰럽게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킬 것 같은 사내를 계속 주시하며 바짝바짝 말라들어가는 심정으로 유경 누나를 겨우
부축해 일으켜세웠다. 그녀의 몸이 가벼웠기 때문에 일으켜세우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과연 그녀가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세요. 여기서 나가라구요."
"...어,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거야?"
간신히 어느정도 정신을 수습했는지 내 얼굴을 알아본 듯,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보였지만 지금은 우선 한순간이라도 빨리 움직여야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어서 여기서... 제기랄!"
난 말을 하다말고 다급히 옆에 떨어뜨려놓은 선풍기를 다시 집어들어 붕 휘둘렀다.
몸을 일으킨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아까 선방으로 선풍기로 내려찍은 그 놈은
아직 신음성을 흘리며 바닥에서 몸을 꿈틀대고 있었지만 사내는 이제 완전히 일어서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가세요! 빨리!"
거꾸로 집어든 선풍기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그 사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두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유경 누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다시 쓰러지려는 것을 버티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 너는 어떡해?"
"알아서 나갈게요, 빨리 가세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부엌 입구에 서있었기 때문에 뒤로 빠져나가 현관으로 도망갈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한손으론 선풍기를 끊임없이 휘두르며 다른 한손으로는 유경 누나의 등을 억지로 떠밀며 부엌 밖으로
내보냈다. 선풍기를 등에 얻어맞고 바닥에 뻗어있던 째진 눈의 남자가 그제서야 겨우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부릅뜨며 사내에게 소리쳤다.
"잡아!"
씨발!
나는 선풍기에 얻어맞을 것을 아예 각오했는지 양팔로 몸을 웅크리며 내게 덤벼들어오는 사내의 모습에
미친 듯이 선풍기를 이리저리 내려쳤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째진 눈의 남자놈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유경 누나를 잡으려는 듯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난 유경 누나가 집 밖으로 완전히 나갔나 보기위해 그 와중에도 고개를 재빨리 힐끗 한번 돌렸다.
누나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정쩡하게 걸음을 옮기고는 있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다가
내가 걱정되는지 계속해서 이쪽을 돌아보느라 자꾸만 서성거리고 있었다.
제길! 빨리 안나가고 왜 아직도 거기있는거야?
나는 다급한 심정에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다.
"누나! 거기 계속 있으면 내가 힘들어진다구요! 왜 빨리 안 나가는거에요?"
"그치만..."
내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느라 시선이 돌아간 틈을 놓칠 상대가 아니었다.
째진 눈의 남자가 사내를 후려패던 선풍기가 휘둘러지는 틈새를 파고들어 거세게 주먹을 휘둘러왔다.
간신히 팔을 들어 막아냈지만 충격으로 몸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뒤로 넘어간 내게 다른 사내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옆구리에 그 발차기를 얻어맞는 내 모습을 본 유경 누나가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고통이 느껴짐과 더불어 애써 억누르려고 했던 두려움까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나는 그것을 떨쳐내려는 듯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가세요! 제발 가시라구요!"
간절히 외치는 내 고함 소리에 그녀도 더이상 이 자리에서 자신이 머뭇거릴수록 내가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추스르며 현관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째진 눈의 남자는 도망치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여 그녀를 잡기위해 자신도 부엌에서 달려나가려고 몸을
날렸지만 나는 다른 사내에게 발길질로 줄기차게 얻어맞으면서도 달려나가는 그 남자의 발목을 움켜쥐어
바닥에 넘어뜨렸다.
"씨발! 저년 잡아! 어서!"
발목이 내 손에 걸려 바닥에 엎어진 그 남자는 날 계속 발길질로 걷어차고 있는 사내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사내는 날 걷어차던 발을 멈추고는 재빨리 그녀를 쫓아 현관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나는 이미 째진 눈의 남자를 있는 힘껏 붙들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도저히 그 사내가 부엌에서 달려나가는
것 까지는 저지할 수가 없었다.
"제기랄!"
욕지거리를 속으로 내뱉으며 그 사내를 막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내는 벌써 부엌에서 몸을 날려
빠져나간 후 현관문으로 그녀를 뒤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벌써 현관문을 나서 집 안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지만 여인의 달리기 속도를
남자의 뜀박질이 굳이 따라잡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이를 갈며 부디 그녀가 그 사내에게 따라잡히지
않기만을 속으로 빌 수 밖에 없었다.
째진 눈의 남자는 내게 붙들린 발목을 비틀어 빼내고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젠 그 남자와 나 둘 만이 이 집 안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 씹새끼... 뭐하는 새낀지는 모르겠지만 낄 자리를 보고 끼어들었어야지. 어린 놈의 새끼가... 넌 오늘 뒈졌어."
거의 씹어죽일 듯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는 그 남자의 모습에 나는 어쩌면
무사히 곱게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 밖에 없었다.
"...좆까, 씨발아."
목구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개새끼에게 유경 누나가 그런 짓을 당하도록 그냥
내버려뒀다면 아마 평생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을 것이다. 분명 여기에 끼어든 내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째진 눈의 남자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내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우우, 마중나온다구 해놓구선 왜 안 오지?"
윤아는 손목 시계를 계속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상가로 길목 앞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한 언니의 모습이 벌써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 나와있겠다고 말을 했으니 자신이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언니는 이미 여기에 도착해 있어야했다.
하지만 윤아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물론이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언니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 혹시 내가 잘못들은건가?"
문득 슬슬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녀의 언니는 분명 결코 남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언니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는 동생을 이렇게 길거리에
아무 이유없이 세워둘 리가 없었다. 어쩌면 언니는 지금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윤아는 마지막으로 손목 시계를 한번 더 내려다보고는 집에 들어가기로 하고 걸음을 떼었다.
윤아는 책가방을 둘러매고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예의 그 검은 목검을 집어들고 자신과 언니의 집인
빌라 입구로 향했다. 상가로와 빌라는 거리가 얼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윤아는 금새
빌라 입구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려고 층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윤아는 위에서 다급하게 뛰어내려오는 누군가의 인영과
맞부딪혀야 했다.
- 쾅!
"아야!"
계단을 급히 뛰어내려오는 그 누군가와 부딪힌 윤아는 뒤로 넘어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려는 것을 간신히
중심을 잡아 버티고는 울컥 화가나서 자신과 부딪힌 그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그렇게 갑자기 뛰어내려오면 어떡...!"
하지만 윤아의 목소리는 계단 바닥에 자신과 부딪혀 힘없이 주저앉아버린 그 누군가의 얼굴을 본 순간
딱 끊어지고 말았다. 자신과 충돌한 그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을 마중나오기로 했던 그녀의 언니였던 것이다.
"어라...? 언니?"
이 황당한 상황에 윤아는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 언니를 일으켜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곧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얼굴이 쩍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언니! 이, 이게 무슨 꼴이야?"
자신의 하나뿐인 언니의 모습은 지금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원피스 블라우스는 마치 찢겨진 듯 너덜너덜하게
뜯어져있어 안의 브래지어가 훤하게 보일 정도였고 그 브래지어까지 무슨 이유에선지 앞섬이 조금 뜯어져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었다. 게다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모습에,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얼굴 등등...
"무슨 일이야, 언니!? 왜 이러고 있어!"
"...유, 윤아야?"
망연자실하게 계단 층계에 주저앉아있던 유경은 자신과 부딪힌 사람이 곧 자신의 동생이었음을 깨닫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가 채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곧 그녀를 뒤쫓아 계단을 달려내려온 사내는
잽싸게 유경의 어깨를 잡아붙들었다.
"큭큭, 네 년이 뛰어봤자 얼마나 가겠냐. 좋게 말할 때 따라오지 그래."
"이, 이거 놓으세요."
어깨를 붙잡힌 유경은 당황하며 그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사정없이 유경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얼른 따라와, 이 년아!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커헉!"
- 뻐걱.
순간 뒤에서 알 수 없는 무겁기 그지없는 소리가 한차례 울렸다.
그리고 유경을 잡아끌고 가려던 사내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야했다.
"당신 뭐야? 누군데 우리 언니한테 막말이야?!"
앙칼지게 소리치는 윤아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그 검은 목검을 쥐고 서있었다.
아마 그 목검으로 사내의 머리를 그대로 내려친 모양이었다.
"이, 이 계집은 또 뭐야!"
"계집? 죽을래?"
사내는 정신이 끊어질 것 같은 뒤통수를 부여잡고 윤아를 돌아보려 했지만
윤아는 사정없이 몸을 일으키려는 사내의 머리를 목검으로 계속해서 내리쳤다.
중간에 발까지 써가며 지근지근 밟아대는 것이 아예 시체를 만들려는 기세였다.
18 세의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에게 얻어맞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윤아가 사내를 후려패고 있는 목검은 연습용 나무 목검이 아니라 무게가 가득 실린 중량 목검이었다.
거합용 흑단 재질의 목검에 특수중량까지 실린 그런 비범한 목검을 귀여운 소녀가 들고다닌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목검에 얻어맞는 것은 몽둥이로 찜질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윤아의 깜찍한 외모만 보아서는 도저히 그런 생각을 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의
검도를 연마한 몸이다. 능숙하게 목검을 휘둘러 가장 효과적으로 사람을 후려패는 그 솜씨에 사내는 찍소리도
못하고 지근지근 얻어맞아야헀다.
그 냉혹한 모습은 교복을 입은 한 귀여운 여고생의 행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 현실과
지독한 괴리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이 년이 죽을려고!"
용케도 목검 찜질에 정신을 잃지않은 사내가 버럭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달려들 기세를 취했지만
윤아는 인정사정없이 그 사내의 사타구니 정중앙을 있는 힘껏 올려차버렸다.
"너야말로 죽을려고?"
낭심을 있는 힘껏 가격 당한 그 사내는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하고 자신의 물건을 감싸쥔채 입에서 거품을 물며
계단 층계에 힘없이 널부러져 눈을 까뒤집었다. 그렇게 한 사내를 냉정하게 KO 시킨 윤아는 그 사내를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곧 자신의 언니를 다급히 돌아보았다.
"언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언니 꼴이 왜 그래? 게다가 이건 또 누구고?"
자신의 동생이 사내를 처참하게 짓밟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경은 동생의 그 다그침에
정신을 차리고는 떨려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 윤아야. 지금 이럴 때가 아냐. 얼른 경찰에라도 신고해야..."
"...뭐?"
윤아는 눈을 가늘게뜨며 반문했다.
- 와장창!
째진 눈의 남자가 날린 주먹에 뒤로 나가떨어진 내 몸이 부엌 선반에 처박히며 선반에 놓여있던 접시들이 바닥
으로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난 이를 악물며 재차 들어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반쯤 일으켜 옆으로 굴렀다.
"이 새끼!"
그 놈이 날 걷어차려고 뻗은 발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채이긴 했지만 나는 간신히 그 발을 양 팔로 꽉 안고
끌어당겨 놈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 놈의 얼굴에 재빨리 주먹을 힘껏 꽂아넣은
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부엌에서 빠져나왔다.
어릴 적부터 싸움을 별로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1:1 싸움에서 형편없이 깨진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학생끼리 주고받는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정신없는 난투극에다 인정사정없는
개싸움이었다. 단순히 상대방의 코피를 터트렸다고 끝나는 애들 싸움이 아닌 것이다.
부엌에서 빠져나온 내 뒤로 바짝 쫓아오는 놈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서로 거리도 얼마 떨어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열고 도망쳐나갈 틈이 없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그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놈이 몸을 뒤로 빼는 반응이 더 빨랐기 때문에 힘없이 허공을 가른 주먹을 추스르며 잔뜩 긴장한 채 놈을 계속
살피고 있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부릅떠야했다. 놈이 집 안 한쪽에 놓여있는 실내 화분 하나를 집어들고 있었다.
"설마 던질려는건... 아니겠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상상은 현실로 맞아떨어졌다. 놈이 날린 화분이 무섭게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내 귀퉁이를 스치고 뒤쪽 벽에 맞은 후 산산조각나서 흩어져내렸다.
미리 긴장을 하고있던 나는 겨우 그것을 스쳐 피할 수 있었지만 벽에 맞은 화분이 깨지며 튀어오른 파편까지
모두 피해낼 수는 없었다. 떨어져나온 화분의 파편 한조각이 눈 윗가를 살짝 베고 지나갔다.
"씨발..."
눈썹 위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시야를 금새 붉게 물들여갔다. 이런 미친 짓까지 저지를 줄은 미처 몰랐기에
나는 그 놈을 질렸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세상에 뭐 이런 막나가는 새끼가 다 있어?
시야가 핏물로 가려지자 놈을 주시하는 것 조차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낭패감과 당혹감으로 입 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그리고 역시 놈은 궁지에 몰린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뻐컥 소리와 함께 내 몸이 금새 나가떨어져 벽 뒤에 처박혀 쓰러져내렸다. 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내 몸 위에 올라타 주먹을 들어올렸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나는 그 주먹을 보며 그저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곧 얼굴에 주먹이 사정없이 꽂힐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 퍼억!
소리는 들렸지만 고통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몸을 짓누르고 있던 놈의 체중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았다.
"...."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놈은 마룻 바닥에 나가떨어져 쓰러져 있었다.
"야! 너 괜찮아?"
핏물이 흘러내려 가려진 눈을 겨우 치켜뜨고 위를 올려다보니 그곳엔 웬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의 소녀가
서있었다.
"소, 송윤아...?"
윤아는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집안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난무하고 가구들이 사정없이 뒤집혀져 엉망이 된 집, 눈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얼굴을 아는 남학생, 그리고 자신의 목검을 맞고 잠시 나가떨어진 남자... 절대로 잊지못할 증오스런
바로 그 남자.
"송현준. 너 오랜만이다?"
그 저주받을 불구대천의 원수와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윤아의 눈이 마치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현준은 목검에 얻어맞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호.. 이게 누구야. 우리 귀여운 막내동생님 아냐?"
윤아의 얼굴을 확인한 현준은 그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씨익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능글맞은 태도에 윤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박살난 화분 파편들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뭐.. 집이 완전 난장판이잖아. 이거 니가 이렇게 한거지?"
"큭큭, 미안하게 됐구만. 그래도 간만에 보는 오빠한테 너무 화내지는 말라고."
"됐어. 어차피 꼭 이게 아니라도 널 죽여놔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으니까."
윤아는 마룻바닥에 흩어진 화분의 조각들을 대충 운동화를 신은 발로 옆으로 슥 밀어치우더니
흑단 중량목검을 치켜들었다.
"첫째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깽판쳐놓은 거, 둘째는 넌 원래 살려줄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는 거,
셋째는... 우리 언니한테 또 그딴 지랄같은 짓을 할려고한 거. 이것만 해도 넌 충분히 사형감이야."
아담한 체구의 인형같은 얼굴의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굉장히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맹렬한 폭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화자가 개미 한마리 못 죽일 것처럼 생긴 너무나 귀엽게 생긴 18세의 여고생이라는 점이
그런 독설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현준은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흐흐, 거친 입담은 여전한데. 하긴 난 예전부터 네 그런 성격이 맘에 들었지."
아무래도 현준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이 소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소녀는 자신에게 어떤 물리적인 위협도 되지 않을 것임을 내심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누가봐도 그럴 것처럼 당연한 사실로 보였다.
"언니 못지않게 매력적인걸. 얼굴도 귀엽게 컸고 말야. 하지만 이걸 어쩌나? 타이밍이 조금 안좋았어."
현준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을 옮겨 서서히 윤아에게 다가오는 그 모습에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던 남학생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야, 송윤아! 너 뭐하는거야? 당장 도망가!"
유경에 이어 윤아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성재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윤아는 여유가 넘치는 듯한 태연한 표정으로 교복 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하나 꺼내 그에게 휙 던졌다.
"시끄러워. 피나 닦아."
"....."
도대체 저 건방진 계집애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뭘 믿고 저렇게 태연자약한 것인지 성재는 갑갑해서
목이 멜 지경이었다. 하지만 성재가 미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이미 현준은 윤아에게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두 명 다 전혀 긴장이라고는 없이, 마치 서로 방심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여유로워보였다.
"언니 닮아서 참 매력적이란 말이야.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언니하고 너, 둘 다 즐겨봐야겠는걸."
"아하하! 그건 좀 무서운 얘기인데...."
윤아는 얼빠진 사람 마냥 상황에 맞지않는 웃음을 터뜨리며 턱 언저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치 잔상이라도 남기듯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흑단 목검이 그림자처럼 휘둘러졌다.
- 뻐억!
그 번개같은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현준은 간신히 팔을 들어막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욱 결정적인 실수였다.
윤아는 목검을 휘두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작고 앙증맞은 발을 들어 현준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버린 것이다.
물론 어린 여고생의 각력 자체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급소를 허용하고만 현준은
급히 자세를 뒤틀며 뒤로 서너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윤아는 날렵하게 그 간격을 따라붙으며 그보다
더욱 심한 엄청난 급소에 인정사정없는 발차기를 꽂아넣었다. 뒤로 몸을 빼느라 현준의 양다리 사이가
슬쩍 벌어져버린 그 틈사이에 냉정한 발차기가 깨끗하게 꽂혀들어갔다.
- 퍼컥.
끔찍한 소리가 한차례 울려퍼졌다.
낭심에 발차기가 꽂힌 현준은 순간 벙찐 얼굴이 되더니, 그 순간 직후부터 해일처럼 들이닥치는 엄청난
고통의 파도에 눈을 부릅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신음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한계를 넘어선 극도의 고통은
성대의 자유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뭘 그렇게 놀래? 이거 내 필살긴데."
앞에서 상대한 계단에서의 사내에게와 마찬가지로 사내의 치명적인 급소인 사타구니 낭심을 서슴지 않고
깨끗한 킥으로 가격한 윤아는, 앞의 그 사내처럼 역시나 입을 쩍 벌린채 부들부들 떨며 무너져가는
현준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낭심을 두 손으로 감싸쥔 채 정신이 혼미해지는 고통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현준의 고개 숙인 목 뒷덜미를 윤아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흑단 목검으로 무자비하게 내려찍어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준의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바닥에 그대로 볼썽사납게 엎어져버렸다.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채인 고통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거기에다가 추가로 묵중한 중량의
흑단목검으로 목 뒷덜미를 내려찍힌 그 잔인한 데미지에 온전히 버텨낼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
그렇게 앞의 계단에서의 사내에 이어 현준까지도 무지막지하게 잠재워버린 윤아는 잠시 낭심을 감싸쥔 자세
그대로 혼절해버린 현준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다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곧 작은 발로 자근자근
그 등을 밟아대기 시작했다.
"....."
그 졸도할만큼 경악스런 광경에 성재는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괴, 괴물이다..."
마룻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져버린 째진 눈의 남자를 한참동안이나 지근지근 밟은 윤아는
그 놈이 거의 넝마처럼 후줄근한 꼴이 되고나서야 겨우 발길질을 멈추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놈은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린 듯 혼수상태에 빠져 바닥에 쓰러진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휴... 암만 패줘도 속이 안풀리네."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그 모습에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저 인형같이 깜찍하게 생긴, 성격이 좀 건방지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 특이한 정도의 여자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깡패잖아!"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 째진 눈의 남자에게 영락없이 당하는 줄 알고 가슴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느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째진 눈의 남자가 혹시 죽은건 아닌지 염려를 해야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 위기를 심하게 극적인 모습으로 구해준 눈 앞의 소녀에게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이 어처구니없고, 현실과 지독할 정도로 동떨어져 보이는 눈 앞의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쩍 굳어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 정도로 외모랑 행동에서 극과 극이 느껴지는 비현실적이고 난폭한 소녀가 있을수 있는거지?
발차기로 남자의 거시기를 사정없이 까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뒤통수를 목검으로 후려치고
마무리는 현란한 짓밟기...
과연 이게 정말 18 세의 여고생이 저지른 짓이란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귀엽게 생긴 애가?
"근데 넌 괜찮은거야?"
윤아는 패닉에 빠진 날 돌아보며 심드렁하게 한마디 던졌다. 평소의 나같았으면 나이도 한살이나 어린게 어디서
반말이냐고 떽떽거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차마 그런 소릴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어설프게 고개만
끄덕여야했다.
"어... 괘, 괜찮아."
"넌 어떻게 안 끼는데가 없는 것 같아? 허구헌날 자꾸 마주쳐."
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곧 이쪽으로 다가와서 아까 던진 손수건을 집어들더니 온 몸에 기력이 빠져
뻗어있는 내 눈가의 피를 슥슥 닦아내주었다.
"그래도 고마워."
"으, 응?"
"언니 구해줘서. 덕분에 언니가 무사했잖아."
눈 언저리의 상처를 닦아내는 그 따가움에 살짝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아직도 실감은 나지 않지만... 아마 이 아이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피떡이 되어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난 내 스스로의 무모함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대체 무슨 깡으로 이렇게 뛰어든 것이었을까?
"말로만 듣던 사랑의 힘인가?"
속으로 그런 닭살이 돋는 유치하기 짝이없는 생각이나 떠올리며 긴장이 풀린 몸을 대자로 바닥에 눕힌
내게 윤아가 질문을 이어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언니 구해주러 온거야?"
"그, 그건..."
말하자면 상당히 복잡하고 뻘쭘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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