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가족윤리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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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2,120회 작성일 20-01-17 11:39본문
새 시대의 가족윤리늦게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 아내가 돌아왔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엄마에 대해서는 내 생각이지만 아이가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또 우리 둘 간의 약속 한 가지를 해 두었다. 엄마의 섹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아빠가 천천히 바꾸고 그 동안은 비밀로 하기로 말이다. 그것에 대해 아이는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는 이렇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사 같은 내 딸의 성생활에 동참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보라와는 늘 해왔던 대로 잠을 재운다는 핑계로 아내의 눈을 피해 밤마다 키스를 나누고 보지와 자지를 서로 빨아주기도 하고 매번일 수는 없지만 좃물을 싸기도 하였다. 물론 꿈결같이 행복하다.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체력이 부족한 데 아내와의 섹스에는 다소 소홀해진다. 하지만 우선 급한 문제는 체력이 아니다.
이런 모습을 아내에게 들키기 전에 제발 아내를 설득해야한다. 우선 내가 장기적이고 현실가능하고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또 나에게도 납득 가능한 섹스에 관한 새로운 가족윤리에 대한 확실한 철학과 매뉴얼을 준비해야한다. 시간이 없다. 초조하다. 보라는 요사이 깊은 수렁에 빠진 아이처럼 매일 밤 내 애무에 흐느적거린다.
시간이 없다. 자 차분히 생각해보자. 물론 당연히 정면돌파를 해야한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는 결국엔 가족이고 뭐고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 자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간이 없다. 나는 애써 당황하지 않으려하며 주의를 집중한다. 온통 그 생각이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서 대충의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자 차분히 한번 따져보자. 인간은 섹스를 누구랑은 해도 되고 누구랑은 안 된다는 그런 기준을 스스로 깨우치는 생물학적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로 어릴 때 헤어져 아버지도 딸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세월이 지났다고 하자. 딸이 만약 술집에서 일을 한다면 젊잖고 돈이 많은 사람이 되어 그 술집에 아빠가 찾아왔을 때 매력적인 신사가 돈을 많이 준다는 데,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한 그 딸이 아빠의 외박권유를 왜 거절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랑은 할 수 있고 누구랑은 해선 안된다는 것은 문화적 관습에 불과하다. 또한 불문율처럼 이 사실이 암묵적으로 교육된 탓에 지금의 섹스 매뉴얼에 따라 살아왔지만 어릴 때부터 사실 그 룰의 울타리를 슬금슬금 상상 속에서나마 넘나들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 생각해보라...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근친상간을 꿈꾸는가? 그것도 거의 매일이다시피 우리의 성적 환타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
옆집 남자 , 처남댁, 누나, 오빠...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대상이 성적매력을 가지고 있으면 신분고하 친인척 관계를 떠나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 섹스대상자에 대한 룰이 정해진 생물학적, 문화적 이유들이 있으리라. 그중 출산이 섹스 대상자에 대한 금지의 주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즈음은 현대의 피임에 대한 지식과 기술은 대단하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매뉴얼의 시작은 이거다.
섹스는 누구나 좋아하고 성생활을 하고 있는데 물론 어떤 정신적 육체적 장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섹스 할 수 있는 사람과 해서는 안 되는 상대자에 대한 룰을 어떻게 정하느냐는 것이다.
자 답은 정해졌다.
상대편의 의사에 반해서 섹스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부부간에도 그렇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여 섹스 상대자의 선택은 자유이다.
섹스 매뉴얼 1장의 가닥이 잡혔다.
누구나 인간은 섹스 상대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섹스 자유선택권, 이게 우선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확신이 선다. 이것만 아내를 설득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쉽게 풀려 가리라. 이것이 관건이다. 1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생각해야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누구나 섹스를 강요당해선 안 된다. 그건 자유선택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섹스 선택권을 방해해서도 안된다. 설령 부부라 하더라도. 질투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매력적이지 못하여 섹스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적은 사람은 그를 가련히 여기는 어떤 섹스봉사자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재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이 룰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자 그럼 이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는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보라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사회적 형식인 결혼, 가족은 섹스에 대한 룰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섹스 자유선택권이라는 절대 명제와 기존의 것들은 어떻게 다시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렴풋이 매뉴얼의 마지막장까지 물 흐르듯 문제들이 풀려갈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진리의 한 가닥을 잡고 있다는 나의 확신은 나에게 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자, 2장이다.
그럼 섹스상대자를 자유롭게 고른다면 결혼도 할 필요 없고 가족도 무의미해지는가? 천만의 만만의 말씀!!! 난 알았다. 유레카!!! 자 이제 2장을 차분히 써 나갈 차례이다.
인류학자나 진화 생물학자들이 인간의 소통 공감 능력을 인류 생존과 번영의 중요한 원인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옛 사람들도 측은지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자기혼자만의 이익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 이제 2장의 골자를 천천히 정리해보자. 나는 순식간에 대충의 뼈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아내를 위한 친절한 설명을 준비하기로 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순간 자신에게 정신적 유대감, 섹스의 쾌락을 주는 그 사랑의 상대를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려서 자신이 혼자 될 것을 걱정한다고 해야 한다. 그 상실감은 삶을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비관적이다. 이런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해 마음이 변하여도 그것을 자제, 언제까지나 옆에 있을 줄 것을 약속한다. 자신의 즐거움보단 상대편의 고통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공감능력 때문이다. 그 약속이 결혼이다.
실제로 결혼으로 만들어진 2인 가족은 정치적 경제적인 면을 따질 게 없이 총체적인 면에서 이해를 같이 하는 운명공동체이다. 이는 사람들의 깊은 정서적 유대본능에 기초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그 2인 가족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 있는 갈등의 씨앗 하나를 안고 사는 데 그것은 바로 결혼이라는 약속이 1장의 섹스 상대자의 자유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갈등의 씨앗은 무시무시하게 위험하다. 보통의 경우엔 드러나지 않다가도 계기가 있어서 자유 선택권을 마구 주장하고 싶게 되면 이 씨앗은 파괴적이 되어 가족이 해체되는 이혼에 이르게도 된다.
남자들의 사냥 조직인 회사나 가장 기초적 성장과정의 유대인 친구집단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2인 조직이 와해되는 이혼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와해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자 그럼 천천히 다시 결혼의 시작점부터 살펴보자. 한 아이는 연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섹스라는 정상적인 성생활로 부터 완전한 정도로 격리되어 산다. 그리고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아서 성생활에 관한 어떤 균형잡힌 인식도 갖지 못한 채 암묵적인 억압아래에서 자신이 얼마나 섹스에 골몰하는가를 남에게 절대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생활한다.
비극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이다. 그렇게 혼자 있다가 상대자를 만나 정신적 육체적 깊은 유대를 가지게 되면 즉 사랑에 빠지게 되면 이 상태에서 다시 그 어두웠던 시간 자신의 손으로 매일 자신의 자지와 보지를 위로했던 그 괴상한 상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공포이다. 그래서 더 집착하게 된다. 이별범죄라고 있지 않은가? 그 두려움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상대편이 이별을 주장하는 경우는 상대편이 다른 사람과 유대가 생기는 경우나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상대자와의 유대를 기대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행복할 때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둘이 함께 함으로써 정말 비극적인 상황은 막아보자는, 즉 다른 상대자를 찾지 않겠다는 금지의 약속이 바로 결혼이다.
어쨌든 좋다. 결혼을 한다. 그리고 2인 가족은 이제 성장기의 외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원래 결혼 전 미성년기의 유대에선 섹스가 빠져있다. 항상 섹스에 관해선 자기 혼자다. 많이 어릴 때는 충분히 스킨쉽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사춘기에 이르면 그것도 금지된다. 그런데 섹스의 본능과 열망은 더욱 더 많은 상대자와 끊임없이 만나고 싶어한다.
여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대편인 남자에 대한 배려때문이지 내가 아는 한 여자들에게 허락된다면 남자보단 여자들이 남자 두 세 명과 하는 것에 더 미친다.
그럼 이 자유가 구속된 이유가 서서히 신성한 결혼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급기야 온갖 이유를 갖다 대어 자신이 결혼한 배우자와 더 이상 이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는 합리화와 변명을 시작한다. 다행히 틈틈이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경우, 즉 적당히 외도를 하는 경우엔 그 약속을 지켜가기가 조금은 쉬우리라.
깊은 유대를 가진 2인 가족 또는 전통적인 다수 가족의 핵심은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 삶의 위협에 대한 운명공동체라는 데에 있지 섹스에 있지 않다. 섹스 없이도 두 사람의 운명공동체라는 깊은 유대는 전혀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 섹스를 통해서 깊은 유대를 가졌고 또 자신이 그렇게 성장기의 그 어둠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섹스 상대자를 잃을 공포에 눌려 요사이의 핵가족이 섹스를 기반으로 한다고만 착각하게 된다. 섹스 상대자가 흔하고 어릴 때부터 섹스를 통해 성생활을 자연스럽게 해왔다면 그렇게 강열한 질투로 급기야 서로에 대한 미움으로 가족의 해체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즉 섹스 상대자를 구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고 지금 이 사람이 없으면 다시 그 어두운 동굴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포가 그 사람을 구속해야 한다는 착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도 즐기고 상대편도 즐기면 그 다지 질투나 갈등이 생길 리 만무하다. 지금 우리의 섹스에 대한 욕망은 서로가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모두다 너무도 강열하다. 아닌 척 할 뿐이다.
자신을 되돌아 보라. 단단히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럼 가장 중요한 섹스의 자유를 지키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이란 유대를 동시에 지키는 매뉴얼은 무엇인가?
자 이제 아내가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보고 2장을 정리하자.
인간은 다 자라 성장하면 어릴 때 속한 자신의 가족을 대신할 적당한 조건의 인생 반려자가 필요하다. 섹스가 그 만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현실적인 여러 이유도 따져 결혼이라는 것을 한다.
결혼은 하되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섹스를 하게하고 그 운명공동체인 상대편과 이제 같이 자유로운 섹스를 추구하는 것이다. 상대편을 배제하지 않고 말이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아마 여기서 스와핑을 떠올렸다면 그것만이 아니다. 상대편의 외도까지 포함해 자유로운 섹스에 대한 완전한 용인이다. 비록 자신이 못해도 남이 하는 것을 본다는 것. 어쨋든 섹스라는 축제에서 딸딸이를 치더라도 어두운 구석에 하던 혼자만의 비극적인 섹스는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다.
전화로 하는 대화만으로도 섹스에 대한 일부의 욕망을 채우는데 하물며 사람끼리 마주하면 어떤 섹스도 재밌다. 장담한다. 가족은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으로 완전한 운명공동체이다. 그 사실이 바뀌는 게 아니다.
남편이 또는 부인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지 거기에 골몰하지 말고 자신의 화려한 남은 인생의 불꽃같은 성생활에 집중해라. 섹스는 꼭 두 사람이서 문 닫아걸고 보지, 자지만 끼우는 게 다가 아니다.
이제 정리하자.
첫째 섹스 상대자에 대한 완벽하게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 단 상대편의 의사를 무시해선 안 된다. 둘째, 자유로운 섹스에 관해 운명공동체인 가족끼리 서로를 배려하자.
자 그럼 어려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내가 위 얘기를 못 알아들었다면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우리는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여행을 가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 인줄 안다. 거기에 관해서 우리는 많은 훈련을 받아왔다.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쾌적한 환경에서 충분한 여가를 즐기고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상대편이 씹을 한다고 절대 질투하지 말자. 노력하자. 지금이라도 아내여, 우리 보라의 보지를 한번 핥아봐라. 아이도 아내도 아마도 그 엄청난 쾌락의 교감에 경악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다른 좃을 보지에 박아줄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아내여, 여자여 자신의 진정한 욕망에 귀를 기울여 봐라.
우리 행복하게 살자. 그리고 같은 날 같이 죽자.
하지만 각양각색의 다양한 상대자, 다양한 형식의 성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질투와 미움과 외로움에서 탈출하게 해 줄 것이다. 상상 속에서만 누군가와 박고 또 박으며 자신 혼자 생활했던 그 어두운 곳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싹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장담한다.
나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자 내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우선 아내 선미를 딴 남자와 자게하는 경험을 시키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 그 뒤에 내 주장은 그녀에게 이런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하 그렇군.
자 이제 그 작전에 돌입하자. 다른 사람의 좃에 박혀 할딱대면서 아내는 자신의 편협하고 잘못된 섹스관을 교정할 준비를 하게 된다. 흥미진진하다.
보라와 선미를 데리고 나는 가족이란 배에서 당분간 선장 노릇을 할 것이다. 그리곤 우리 배가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선미와 보라가 분명히 알게 될 때까지 잠시만 가르치면 될 일이다.
출발!! 사랑하는 내 아내 선미, 그 보지가 낳은 내 천사 보라.
아내의 보지에 딴 자지가 박히고 나면 일사천리로 아내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면 우리 사회의 지독한 가식적인 성문화로 인해 우리 가족이 피해 보지 않도록 통일되고 단결된 행동지침을 만들어 우리 가족의 풍성한 성생활을 추구해 가면 될 일이다
누가 좋을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충분히 우리와 공감하는 성의식을 가진 사람. 또 조심성이 없어서 문제되는 사람은 아닐 것. 기타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쉽지 않다. 누가 좋을까? 나는 며칠을 고민해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우선 아내의 보지가 내 자지에 박혀 절정에 오르기 전에 아내가 무슨 얘기든 고개를 끄덕이는 그 시간에 집중적으로 아내를 설득했다. 체력적으로 나이도 있고 보라와 아내를 이렇게 계속 만족시켜갈 수는 없다. 시급했다.
"자기야, 자기 보지에 다른 자지가 박히는 걸 꼭 보고 싶어 그럼 너무 흥분될 것 같아"
아내는 내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권태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들 스와핑 같은 거 많이 한다더라. 우리도 딱 한번만 해보자"
아내는 내심 호기심이 이는지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어떻게 할 건데 라는 눈초리였다. 하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누가 좋을까? 누가 좋을까?’
나는 점점 보라에게 깊게 빠져들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에 빨리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 있도록 아내를 준비시켜야 한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엄마에 대해서는 내 생각이지만 아이가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또 우리 둘 간의 약속 한 가지를 해 두었다. 엄마의 섹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아빠가 천천히 바꾸고 그 동안은 비밀로 하기로 말이다. 그것에 대해 아이는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는 이렇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사 같은 내 딸의 성생활에 동참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보라와는 늘 해왔던 대로 잠을 재운다는 핑계로 아내의 눈을 피해 밤마다 키스를 나누고 보지와 자지를 서로 빨아주기도 하고 매번일 수는 없지만 좃물을 싸기도 하였다. 물론 꿈결같이 행복하다.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체력이 부족한 데 아내와의 섹스에는 다소 소홀해진다. 하지만 우선 급한 문제는 체력이 아니다.
이런 모습을 아내에게 들키기 전에 제발 아내를 설득해야한다. 우선 내가 장기적이고 현실가능하고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또 나에게도 납득 가능한 섹스에 관한 새로운 가족윤리에 대한 확실한 철학과 매뉴얼을 준비해야한다. 시간이 없다. 초조하다. 보라는 요사이 깊은 수렁에 빠진 아이처럼 매일 밤 내 애무에 흐느적거린다.
시간이 없다. 자 차분히 생각해보자. 물론 당연히 정면돌파를 해야한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는 결국엔 가족이고 뭐고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 자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간이 없다. 나는 애써 당황하지 않으려하며 주의를 집중한다. 온통 그 생각이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서 대충의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자 차분히 한번 따져보자. 인간은 섹스를 누구랑은 해도 되고 누구랑은 안 된다는 그런 기준을 스스로 깨우치는 생물학적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로 어릴 때 헤어져 아버지도 딸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게 세월이 지났다고 하자. 딸이 만약 술집에서 일을 한다면 젊잖고 돈이 많은 사람이 되어 그 술집에 아빠가 찾아왔을 때 매력적인 신사가 돈을 많이 준다는 데,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한 그 딸이 아빠의 외박권유를 왜 거절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랑은 할 수 있고 누구랑은 해선 안된다는 것은 문화적 관습에 불과하다. 또한 불문율처럼 이 사실이 암묵적으로 교육된 탓에 지금의 섹스 매뉴얼에 따라 살아왔지만 어릴 때부터 사실 그 룰의 울타리를 슬금슬금 상상 속에서나마 넘나들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 생각해보라...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근친상간을 꿈꾸는가? 그것도 거의 매일이다시피 우리의 성적 환타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
옆집 남자 , 처남댁, 누나, 오빠...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대상이 성적매력을 가지고 있으면 신분고하 친인척 관계를 떠나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 섹스대상자에 대한 룰이 정해진 생물학적, 문화적 이유들이 있으리라. 그중 출산이 섹스 대상자에 대한 금지의 주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즈음은 현대의 피임에 대한 지식과 기술은 대단하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매뉴얼의 시작은 이거다.
섹스는 누구나 좋아하고 성생활을 하고 있는데 물론 어떤 정신적 육체적 장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섹스 할 수 있는 사람과 해서는 안 되는 상대자에 대한 룰을 어떻게 정하느냐는 것이다.
자 답은 정해졌다.
상대편의 의사에 반해서 섹스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부부간에도 그렇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여 섹스 상대자의 선택은 자유이다.
섹스 매뉴얼 1장의 가닥이 잡혔다.
누구나 인간은 섹스 상대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섹스 자유선택권, 이게 우선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확신이 선다. 이것만 아내를 설득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쉽게 풀려 가리라. 이것이 관건이다. 1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생각해야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누구나 섹스를 강요당해선 안 된다. 그건 자유선택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섹스 선택권을 방해해서도 안된다. 설령 부부라 하더라도. 질투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매력적이지 못하여 섹스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적은 사람은 그를 가련히 여기는 어떤 섹스봉사자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재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이 룰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자 그럼 이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나는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보라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사회적 형식인 결혼, 가족은 섹스에 대한 룰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섹스 자유선택권이라는 절대 명제와 기존의 것들은 어떻게 다시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어렴풋이 매뉴얼의 마지막장까지 물 흐르듯 문제들이 풀려갈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진리의 한 가닥을 잡고 있다는 나의 확신은 나에게 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자, 2장이다.
그럼 섹스상대자를 자유롭게 고른다면 결혼도 할 필요 없고 가족도 무의미해지는가? 천만의 만만의 말씀!!! 난 알았다. 유레카!!! 자 이제 2장을 차분히 써 나갈 차례이다.
인류학자나 진화 생물학자들이 인간의 소통 공감 능력을 인류 생존과 번영의 중요한 원인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옛 사람들도 측은지심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자기혼자만의 이익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 이제 2장의 골자를 천천히 정리해보자. 나는 순식간에 대충의 뼈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아내를 위한 친절한 설명을 준비하기로 한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순간 자신에게 정신적 유대감, 섹스의 쾌락을 주는 그 사랑의 상대를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려서 자신이 혼자 될 것을 걱정한다고 해야 한다. 그 상실감은 삶을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비관적이다. 이런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해 마음이 변하여도 그것을 자제, 언제까지나 옆에 있을 줄 것을 약속한다. 자신의 즐거움보단 상대편의 고통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공감능력 때문이다. 그 약속이 결혼이다.
실제로 결혼으로 만들어진 2인 가족은 정치적 경제적인 면을 따질 게 없이 총체적인 면에서 이해를 같이 하는 운명공동체이다. 이는 사람들의 깊은 정서적 유대본능에 기초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그 2인 가족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 있는 갈등의 씨앗 하나를 안고 사는 데 그것은 바로 결혼이라는 약속이 1장의 섹스 상대자의 자유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갈등의 씨앗은 무시무시하게 위험하다. 보통의 경우엔 드러나지 않다가도 계기가 있어서 자유 선택권을 마구 주장하고 싶게 되면 이 씨앗은 파괴적이 되어 가족이 해체되는 이혼에 이르게도 된다.
남자들의 사냥 조직인 회사나 가장 기초적 성장과정의 유대인 친구집단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2인 조직이 와해되는 이혼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와해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자 그럼 천천히 다시 결혼의 시작점부터 살펴보자. 한 아이는 연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섹스라는 정상적인 성생활로 부터 완전한 정도로 격리되어 산다. 그리고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아서 성생활에 관한 어떤 균형잡힌 인식도 갖지 못한 채 암묵적인 억압아래에서 자신이 얼마나 섹스에 골몰하는가를 남에게 절대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생활한다.
비극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이다. 그렇게 혼자 있다가 상대자를 만나 정신적 육체적 깊은 유대를 가지게 되면 즉 사랑에 빠지게 되면 이 상태에서 다시 그 어두웠던 시간 자신의 손으로 매일 자신의 자지와 보지를 위로했던 그 괴상한 상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공포이다. 그래서 더 집착하게 된다. 이별범죄라고 있지 않은가? 그 두려움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상대편이 이별을 주장하는 경우는 상대편이 다른 사람과 유대가 생기는 경우나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상대자와의 유대를 기대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행복할 때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둘이 함께 함으로써 정말 비극적인 상황은 막아보자는, 즉 다른 상대자를 찾지 않겠다는 금지의 약속이 바로 결혼이다.
어쨌든 좋다. 결혼을 한다. 그리고 2인 가족은 이제 성장기의 외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원래 결혼 전 미성년기의 유대에선 섹스가 빠져있다. 항상 섹스에 관해선 자기 혼자다. 많이 어릴 때는 충분히 스킨쉽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사춘기에 이르면 그것도 금지된다. 그런데 섹스의 본능과 열망은 더욱 더 많은 상대자와 끊임없이 만나고 싶어한다.
여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대편인 남자에 대한 배려때문이지 내가 아는 한 여자들에게 허락된다면 남자보단 여자들이 남자 두 세 명과 하는 것에 더 미친다.
그럼 이 자유가 구속된 이유가 서서히 신성한 결혼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급기야 온갖 이유를 갖다 대어 자신이 결혼한 배우자와 더 이상 이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는 합리화와 변명을 시작한다. 다행히 틈틈이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경우, 즉 적당히 외도를 하는 경우엔 그 약속을 지켜가기가 조금은 쉬우리라.
깊은 유대를 가진 2인 가족 또는 전통적인 다수 가족의 핵심은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 삶의 위협에 대한 운명공동체라는 데에 있지 섹스에 있지 않다. 섹스 없이도 두 사람의 운명공동체라는 깊은 유대는 전혀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 섹스를 통해서 깊은 유대를 가졌고 또 자신이 그렇게 성장기의 그 어둠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섹스 상대자를 잃을 공포에 눌려 요사이의 핵가족이 섹스를 기반으로 한다고만 착각하게 된다. 섹스 상대자가 흔하고 어릴 때부터 섹스를 통해 성생활을 자연스럽게 해왔다면 그렇게 강열한 질투로 급기야 서로에 대한 미움으로 가족의 해체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즉 섹스 상대자를 구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고 지금 이 사람이 없으면 다시 그 어두운 동굴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포가 그 사람을 구속해야 한다는 착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도 즐기고 상대편도 즐기면 그 다지 질투나 갈등이 생길 리 만무하다. 지금 우리의 섹스에 대한 욕망은 서로가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모두다 너무도 강열하다. 아닌 척 할 뿐이다.
자신을 되돌아 보라. 단단히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럼 가장 중요한 섹스의 자유를 지키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족이란 유대를 동시에 지키는 매뉴얼은 무엇인가?
자 이제 아내가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보고 2장을 정리하자.
인간은 다 자라 성장하면 어릴 때 속한 자신의 가족을 대신할 적당한 조건의 인생 반려자가 필요하다. 섹스가 그 만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현실적인 여러 이유도 따져 결혼이라는 것을 한다.
결혼은 하되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섹스를 하게하고 그 운명공동체인 상대편과 이제 같이 자유로운 섹스를 추구하는 것이다. 상대편을 배제하지 않고 말이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아마 여기서 스와핑을 떠올렸다면 그것만이 아니다. 상대편의 외도까지 포함해 자유로운 섹스에 대한 완전한 용인이다. 비록 자신이 못해도 남이 하는 것을 본다는 것. 어쨋든 섹스라는 축제에서 딸딸이를 치더라도 어두운 구석에 하던 혼자만의 비극적인 섹스는 완전히 종결되는 것이다.
전화로 하는 대화만으로도 섹스에 대한 일부의 욕망을 채우는데 하물며 사람끼리 마주하면 어떤 섹스도 재밌다. 장담한다. 가족은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으로 완전한 운명공동체이다. 그 사실이 바뀌는 게 아니다.
남편이 또는 부인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지 거기에 골몰하지 말고 자신의 화려한 남은 인생의 불꽃같은 성생활에 집중해라. 섹스는 꼭 두 사람이서 문 닫아걸고 보지, 자지만 끼우는 게 다가 아니다.
이제 정리하자.
첫째 섹스 상대자에 대한 완벽하게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 단 상대편의 의사를 무시해선 안 된다. 둘째, 자유로운 섹스에 관해 운명공동체인 가족끼리 서로를 배려하자.
자 그럼 어려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내가 위 얘기를 못 알아들었다면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우리는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여행을 가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 인줄 안다. 거기에 관해서 우리는 많은 훈련을 받아왔다.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쾌적한 환경에서 충분한 여가를 즐기고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상대편이 씹을 한다고 절대 질투하지 말자. 노력하자. 지금이라도 아내여, 우리 보라의 보지를 한번 핥아봐라. 아이도 아내도 아마도 그 엄청난 쾌락의 교감에 경악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다른 좃을 보지에 박아줄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아내여, 여자여 자신의 진정한 욕망에 귀를 기울여 봐라.
우리 행복하게 살자. 그리고 같은 날 같이 죽자.
하지만 각양각색의 다양한 상대자, 다양한 형식의 성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질투와 미움과 외로움에서 탈출하게 해 줄 것이다. 상상 속에서만 누군가와 박고 또 박으며 자신 혼자 생활했던 그 어두운 곳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싹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장담한다.
나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자 내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우선 아내 선미를 딴 남자와 자게하는 경험을 시키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 그 뒤에 내 주장은 그녀에게 이런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하 그렇군.
자 이제 그 작전에 돌입하자. 다른 사람의 좃에 박혀 할딱대면서 아내는 자신의 편협하고 잘못된 섹스관을 교정할 준비를 하게 된다. 흥미진진하다.
보라와 선미를 데리고 나는 가족이란 배에서 당분간 선장 노릇을 할 것이다. 그리곤 우리 배가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선미와 보라가 분명히 알게 될 때까지 잠시만 가르치면 될 일이다.
출발!! 사랑하는 내 아내 선미, 그 보지가 낳은 내 천사 보라.
아내의 보지에 딴 자지가 박히고 나면 일사천리로 아내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면 우리 사회의 지독한 가식적인 성문화로 인해 우리 가족이 피해 보지 않도록 통일되고 단결된 행동지침을 만들어 우리 가족의 풍성한 성생활을 추구해 가면 될 일이다
누가 좋을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충분히 우리와 공감하는 성의식을 가진 사람. 또 조심성이 없어서 문제되는 사람은 아닐 것. 기타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쉽지 않다. 누가 좋을까? 나는 며칠을 고민해도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우선 아내의 보지가 내 자지에 박혀 절정에 오르기 전에 아내가 무슨 얘기든 고개를 끄덕이는 그 시간에 집중적으로 아내를 설득했다. 체력적으로 나이도 있고 보라와 아내를 이렇게 계속 만족시켜갈 수는 없다. 시급했다.
"자기야, 자기 보지에 다른 자지가 박히는 걸 꼭 보고 싶어 그럼 너무 흥분될 것 같아"
아내는 내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권태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들 스와핑 같은 거 많이 한다더라. 우리도 딱 한번만 해보자"
아내는 내심 호기심이 이는지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어떻게 할 건데 라는 눈초리였다. 하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누가 좋을까? 누가 좋을까?’
나는 점점 보라에게 깊게 빠져들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에 빨리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 있도록 아내를 준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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