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 시리즈(2)혼돈 속의 남매 -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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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1,895회 작성일 20-01-17 14:34본문
남매 시리즈(2)
혼돈 속의 남매
이건 우리 남매의 순탄치 못 한 이야기이다.
나는 육이오 동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여간 안 하던 아버지의 이야기였지만 임종을 얼마 안 두고 어머니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본래 농사밖에 모르고 살았으나 어느 날인지는 모르지만 외출이 빈번하며 농사일을 등한시 하더니
육이오가 터지자마자 잠적을 하였고 나중에 경찰서에서 순경이 우리 집으로 빈번하게 들락거리기에
순경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며 물었더니 그 때서야 아버지가 공산당이 되어서 전쟁에 참여를 하였고
그래서 우리 집이 요주의 집이 되어서 감시를 한다고 하며 빨갱이 가족이라 배급은 제외가 되었다고 하였고
그 후로 전쟁이 끝났으나 아버지의 행방이 요연해지자 입에 풀칠을 하기 급급해 져서 어쩔 수 없이
술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하였으며 그 와중에 깜둥이 양놈 군인과 동거를 하다가 낳은 것이 동생이라고 하였다.
그랬다.
나는 분명히 황색 피부를 가진 한국 토종이었지만 여동생은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누가 봐도 튀기였다.
난 그래 어려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지를 못 하였다.
밖에만 나가면 양갈보 아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 일쑤였고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하고 함께
나가기라도 하면 양갈보 아이라는 손가락질도 부족하여 돌팔매질을 당하여야 하였기에 동생은
내가 유일한 친구였고 나 역시 동생이 유일한 친구이자 말 상대로 지내다 보니 우리 남매는 항상 붙어서 있었다.
어렴풋이 나는 기억으로는 내가 아마 5살 때 정도의 나이였는데 껌둥이를 데리고 오더니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였고
얼마 안 가서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껌둥이의 피부색과 비슷한 아이를 엄마는 낳았고 그 후로
나는 다시 그 껌둥이 얼굴을 보지를 못 하였는데 지금 생각을 하면 한국에서 있을 기간이 지나자
다른 양놈들은 기간을 연장하여 한국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어머니가 놈의 아이를 낳자 도망을 가듯이 본국으로 갔지 싶다.
여동생은 어려서 못 봤는지 기억에 없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본 것이라고는 밤이면 어머니가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우리 남매는 다락방에 올라가서 못 내려오게 하고는 안방을 차지하고 낮선 남자와 깔깔거리며
알몸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이 거의 전부였고 제 정신을 가진 적은 거의 없이 매일같이 술에 절여 있었다.
처음에는 낮선 남자가 어머니 몸 위를 짓누르고 올라가 있자 난 그 낮선 남자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거나
때리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다락방에서 뛰어 내려와 낮선 남자의 등을 때리며 울었지만 어머니는
그 낮선 남자에게 반항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깔깔대며 나에게 다락방으로 올라가라고 하며 그 낮선 남자를 끌어안기만 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려서 본 것이라고는 시쳇말로 빠구리 하는 모습뿐이었다.
어떤 때는 초저녁에 왔던 사람 얼굴과 저녁 늦게 오는 사람의 얼굴이 달랐고 그 사람하고 빠구리를 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는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 아예 그 사람을 집에서 자게하면 그 사람과 어머니는
열이란 열은 다 올리고 집이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며 다락방에서 우리 남매를 잠도 못 들게 하였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낮선 남자가 나가면 걸레나 헌 종이로 밑을 닦고 나갔는데 그게 당시에는 좆 물인 줄도 몰랐지만
여동생과 나는 서로 깔깔대며 그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맡으면서 웃었었고 그렇게 하면 으레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배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어리고 어린 여동생의 보지를 만지는 일이 일이라면 일이었고 놀이라면 놀이였다.
더구나 여동생이 싫어만 하였다면 그 놀이도 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동생의 보지를 만지고 그 전에 아빠라고 부르던 그 깜둥이와 엄마가 하던 대로 여동생 보지를 빨아주면
여동생은 입을 헤헤 벌리며 좋아하였고 나의 작은 고추를 물려주면 나처럼 빨기 시작을 한 것은 여동생 나이 고작 5살의 일이다.
초등학교? (당시엔 국민 학교였지만)
문턱도 못 밟았다.
사친회비(요즘은 의무교육이라 수업료를 안 받지만 당시에는 사친회비라고 하여 받음)가 없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양갈보며 창녀의 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 싫어서였다.
몰론 입학식에는 갔었다.
하지만 혼자 갔었고 아이들의 놀림은 물론 따라온 아이들 엄마들까지 이상한 눈으로 보며 자기 아이에게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쟤 엄마는 양갈보이니 함께 놀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말을 하자
학교라는 자체가 싫어졌는데 거기다가 선생님이란 년이 나에게는 짝도 안 주고는 보는 둥 마는 둥 하자 어린 나이였고
철이 없는 나이였지만 그 다음 날부터 안 학교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여동생하고만 놀아야 하였다.
그리고 저녁이면 여동생을 들쳐 업고 어머니가 술을 따르는 술집을 기웃기웃하여 동전 몇 닢을 얻으면
눈깔사탕을 사서 동생과 교대로 빨아먹으며 지네야 하였는데 문제는 그놈의 눈깔사탕이 문제였다.
먼 옛날의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그 기억이 난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고 하면 여동생 나이 5살이었고 내 나이 11살이었지 싶다.
그날도 난 여동생손을 잡고 어머니가 술을 따르는 술집으로 갔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을 하여 작부 노릇을 하는 집이란 것이 바른 말일 것이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들쳐 업은 나를 발견을 하고 가라고 손짓을 하였지만 난 계속 주변에서 기웃기웃 하였고
그 덕에 어머니의 치마 안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깔깔대던 남자에게 알밤을 한 대 맞는 대신 몇 닢의 동전을 얻자
나는 구멍가게로 달려가 막대가 달린 눈깔사탕 2개를 사서 집으로 와 하나는 여동생에게 하나씩 빨아먹었다.
한참을 빨다가 난 묘한 생각을 하였다.
앞에서도 조금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동생과 나의 놀이는 이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서로의 고추를
서로가 빨아주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낮선 남자와 킥킥거리며 알몸으로 노는 모습을 거의 매일 봐 왔는데
어떤 날은 낮선 남자의 등만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또 어떤 날은 낮선 남자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잡고 올라타 있을 때는
엄마의 고추 안으로 낮선 남자의 고추가 들락날락 하는 것을 종종 봤는데 동생의 보지를 빨면서도
자세히 봤지만 구멍이 아주 작아서 나의 작을 고추도 못 들어 갈 것처럼 보였는데 물론 어머니는 어른이라
여동생 고추의 구멍에 비하여 크겠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그래도 낮선 남자의 그 굵은 고추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들어가는지 궁금하였는데 막대 눈깔사탕의 굵기가 내 고추보다 훨씬 작아진 것을 알고는
난 그 막대 눈깔사탕 정도면 들어가려 나 하는 마음으로 눈깔사탕을 빨고 있던 여동생을 다락방으로 데리고
눕히자 여동생은 환하게 웃으며 눈깔사탕을 빨면서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를 다 안다는 듯이
가랑이를 벌리고 눕자 난 그 사이에 말라버린 눈깔사탕에 침을 묻히고 여동생 보지의 금을 벌려 살짝 넣어 봤다.
그러자 여동생은 눈깔사탕을 빨면서 미간을 약간 찌푸렸지만 눈깔사탕의 알갱이는 여동생 보지 안으로 무난하게 들어갔다.
정말이지 신기하였다.
분명히 여동생 보지 구멍보다 조금은 더 큰 눈깔사탕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눈깔사탕을 다시 여동생 보지 안에서 뺐다.
빼고는 난 그만 놀라고 말았다.
여동생 보지 구멍 안에 들어갔다 나온 막대 눈깔사탕에는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여동생은 그 것을 기억하고 자기의 처녀는 내가 먹은 것이 아니라 막대 눈깔사탕에게 도둑을 맞았다고 하며
말을 하는 통에 우리는 서로를 잡고 한참을 깔깔대며 웃은 것이 본격적인 근친상간의 계기가 되었지만........
하여간 그 일이 있고는 여동생과 나의 놀이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가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아무 철이 없었기에 동생과 나는 서로의 고추를 빨아주다가
나중에는 젓가락이나 길고 가는 것이라면 무엇이고 가리지 않고 넣었고 회가 거듭하자 오히려
여동생이 젓가락은 물론 숟가락까지 가져와 손잡이 부분을 넣으라고 하였고 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여동생이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무조건 여동생 보지 구멍 안에 넣는 놀이를 재미있게 생각하고 하였다.
그런 놀이를 거의 매일 하다가 일 년이지나 내가 12살이었고 여동생이 6살이 되었던 해였다.
그땐 이미 여동생 보지 구멍 안으로 나의 새끼손가락도 손쉽게 들어갔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다락방으로 우리 남매를 올라가게 하고는 빠구리를 하였는데
어머니의 신음소리에 계단으로 내려와 다락방 문틈으로 보았더니 어머니의 보지 안으로 낮선 남자의 좆이
(이때는 대충 알아 좆이며 씹 그리고 빠구리란 용어를 알았다.)힘차게 들락날락하는 희한한 광경이
내 눈에 자세하게 보였는데 여동생도 나와 함께 보다가는 나에게 올라가자고 하기에 올라갔더니
나에게 저렇게 해 보자는 제안을 하기에 너도 엄마처럼 소리를 내면 안 되기 때문에 엄마에게 발각이 되면
큰일이라며 안 하겠다고 하였더니 다락방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더니 헌 옷가지를 하나 잡고는
그 것으로 입을 가리고 나에게 묶으라고 하였고 난 그 헌 옷으로 여동생 입을 가리고 뒤로 단단하게 묶었다.
그러자 여동생은 아랫도리를 홀랑 벗고 어머니처럼 가랑이를 벌렸다.
나는 소리를 죽이며 옷을 벗었고 조심스럽게 여동생 가랑이사이에 낮선 남자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한 손으로 좆을 쥐고는 평소에 여동생 보지에 꼬챙이를 넣을 때처럼 침을 잔뜩 바르고 침이 좆에서 흐르자
다른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여동생이 벌려준 보지에 대고 엎드리자 놀랍게도 나의 좆은 빡빡한 느낌과 함께
여동생 보지 안으로 진입을 하였고 지금까지 넣었던 것 중에 가장 굵었던 것이라 그랬던지 여동생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상체를 들어 밑을 봤더니 도무지 안 들어 갈 것 같던 여동생 보지 안으로 나의 좆은 귀두 부분 조금 더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밑에 방에서 낮선 남자가 어머니 보지에 좆을 박고 움직이던 것처럼 들락날락 해 보려고 하였으나
아주 쉽게 빠져버렸고 그래서 난 밑의 낮선 남자가 어머니에게 하는 것처럼 해 보지는 못 하고
따뜻한 느낌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여동생 보지 안에 좆을 박고 가만히 있다가 낮선 남자의 목소리며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잦아들자 서둘러 빼고는 동생에게 옷을 입으라고 하고는 나도 옷을 입고는 자는 척을 하였다.
그 다음 날부터 어머니가 작부 노릇을 하러 가면 우리의 놀이에는 그 놀이가 하나 더 추가가 되었다.
요즘이야 초등학교 3~4학년이면 좆 물이 나올 정도로 성숙도 하고 또 영양섭취도 좋지만 당시에는 12살 나이였지만
영양섭취는커녕 입에 풀칠을 하기에도 급급하였던지 여동생이 아무리 빨아 주어도 좆 물은 안 나왔었다.
여동생의 나이가 8살이 되었지만 여동생도 놀림이 받기 싫다며 학교에 안 갔다.
아마 엄마가 억지로 가라고 하였다면 갔을 것이었지만 사친회비는 물론 먹을거리 걱정이 더 우선이었던
어머니는 여동생이 학교에 안 간다고 하였으나 학교에 안 간다는 여동생에게 억지로 가라고는 안 하자
여동생과 나는 거의 종일 다락방에서 함께 있어야 하였는데 그 때는 어머니가 밤과 낮은 안 가리고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밑에서 빠구리를 하는 바람에 우리 남매는 아예 요강을 다락에 올려놓고 있다가
소변이고 대변도 요강에다 누고는 남자가 나가면 그 틈을 타서 요강을 비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본 것이 빠구리 하는 것뿐이요 눈으로 익힌 것도 빠구리뿐이니 우리 남매가 할 수 있는 것도 빠구리뿐이었다.
어머니가 밑에 방에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빠구리를 하면 우리 남매도 다락방에서 하는 일이라곤 빠구리뿐이었다.
그러던 그 때는 이미 여동생의 보지는 내 좆이 쉽게 들락날락 하기 시작을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데리고 온 낮선 남자들처럼 나의 좆에선 물이 안 나왔다.
그해 5월이었지 싶다.
엄마가 평소처럼 낮선 남자와 밑에 방에서 빠구리를 하자 여동생과 나도 자연스럽게 빠구리를 시작을 하였다.
한참을 여동생 보지 안에 좆을 박고 들락날락 시키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며 무엇인가가 나왔고
여동생은 깜짝 놀라며 나의 귀에 입을 대고 뜨거운 뭐가 들어온다며 울상을 지었고 난 여동생을
다독이며 난 여동생에게 낮선 남자가 엄마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돈을 집어던지고 가면 신문지나
걸레로 닦던 것을 생각을 하고 나도 그 낮선 남자들처럼 물이 나온 모양이라고 하였더니 그때서야
여동생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더 이산 안 나오자 나의 가슴을 밀쳤고 그리고 일어나 앉아
손가락을 보지 구멍 안으로 넣어 내가 싼 물을 찍더니 코로 냄새를 맡고는 같은 물이라고 하며 좋아하였다.
그리고 내 나이 13살이 되던 해부터 구두닦이로 나섰기에 낮에는 비가 오지 않는 다음에는 좀처럼
여동생과 빠구리를 하지 못 하고 밤에 집에 오면 어머니가 낮선 남자와 밑에 방에서 빠구리를 하는 틈을 타서 빠구리를 하였다.
내가 좆 물이 늦게 나온 반면에 여동생의 생리는 요즘 유식한 말로 나의 남성호르몬을 많이 받은 탓인지
모르지만 11살이 되든 해에 시작이 되었고 첫 생리가 시작이 되자 여동생은 아이를 밴 것이 아니냐며
겁을 먹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눈치가 빠른 어머니는 여동생이 생리가 나온 것을 알고 어머니의
생리대를 채워주며 여자는 생리가 나오면 임신을 할 수가 있게 된다며 자신의 처지답지 않게
여동생에게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였고 그와 동시에 나에게는 한 가지의 일이 늘어나게 되었었다.
그것은 여동생에게 임신은 시킬 수가 없었기에 콘돔이 필요하였으나 어린 나이에 콘돔이 구하기가 쉽지 않자
엄마가 낮선 남자와 빠구리를 하면서 어떤 때는 생으로 하였지만(당시에는 너무나 무식하여
생리 주기법으로 피임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음)자주 사용을 하던 콘돔을 훔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동생하고 빠구리를 할 때면 무조건 콘돔을 끼우고 하였었다.
그러다가 구두닦이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 생리 주기법 피임이었는데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콘돔을 사용하면
느낌도 안 좋고 흥도 안 나서 더 배운 것이 루프 피임법이었고 그것을 배우고는 여동생 보지 안에서는
루프가 빠질 날이 없을 정도로 여동생은 생리 주기법에 따라 안전하다고 생각이 드는 날 이외에는 루프를 보지 안에 넣고 살았다.
그리고 내 나이 25살이 되던 해에 몸을 아무에게나 몇 푼의 돈을 받고 굴린 탓인지 어머니는
병색이 돌기시작을 하였으나 나의 구두닦이 벌이와 19살 여동생이 다니던 공장에서 받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어머니의 약값은커녕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었기에 그 다락방 신세를(집은 단칸방에
다락방과 부엌이 전부였지만 루이 집이었음)못 면하고 약국에서 양만 사서 엄마에게 먹이는 형편이었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밑의 방에 기거를 하다가 어머니가 잠이 들연 다락방으로 올라와 나와 빠구리는 거의 매일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그 해를 넘기지 못 하고 숨을 거두었다.
남은 것을 우리들 문제였다.
배운 것이 있고 돈이라도 있으면 떳떳하게 장가도 가고 시집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낡아빠진 단칸방의 허름한 집 한 뿐이요 나는 불알 두 쪽에 좆 몽둥이 하나뿐이었고 여동생에게는
나의 좆에 의하여 이미 걸레 수준인 보지 하나뿐이었는데 나야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이 없지만
아무리 서로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지만 여동생이 불행하게 사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에 고민을 한 결과 한 가지 방법 밖에 별달리 뾰쪽한 방법이 없었다.
고아에게 새로운 호적을 만들어 준다는 말을 들었었다.
낮선 남자들을 끌어들여 몸 팔기는 바빴지만 딸년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시간은 없었던지 다행히(?)여동생은 무적자였다.
백방으로 알아 본 결과 몇 푼의 돈만 집어주면 호적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허름한 단칸방의 집을 팔았다.
그리고 그 일부분을 줬더니 동생에게 천 씨라는 성에 이름은 그대로 미순이란 이름으로 된 새 호적을 만들어주었다.
박가인 나와 아무리 아버지는 다르지만 같은 뱃속에서 나왔기에 부부란 이름으로 내 호적에 입적을 시킬 수가 없었던
여동생이었지만 새 호적이 나오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동생과 나는 평생을 부부로 함께 하자고
약속을 하고 여동생을 떳떳하게 내 호적에 내 아내로 등재를 하였지만 우리가 남매란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너무나 많아 그 동안 정성을 들여 손님을 확보 해 둔 구두닦이 터와 방세를 빼서 동생과 나는
우리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갔고 지금 우리 남매 아니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사는
이곳에 정착을 하여 남부럽지 않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으나 당시에 막상 처음 이사를 왔으나
여동생 아니 나의 마누라나 나나 둘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처지라 우리는 서로 도우며
글을 깨우치기로 하였고 낮이면 마누라는 식당에 나가 일을 하였고 나는 노가다를 다니며 돈을 벌었지만
저녁이면 나는 야학에 가서 길을 익히기 시작을 하여 마누라가 식당 일을 마치고 오면 그 날
내가 배운 것을 마누라에게 가르쳐주기를 반복하여 지금은 크지는 않지만 번듯한 우리 집도 가졌고
마누라와 함께 일층에다 식당을 차려 운영을 하여 이제 부러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여동생 아니
마누라나 나나 영원히 한 줌의 흙이 되는 그날까지도 지켜야 할 비밀이라면 우리가 남매였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지금 우리 부부사이에는 2남 1녀가 무럭무럭 자라 큰아들은 대학을 나와 직장에 다니고 작은 아들은 군대에 다녀와 복학을 하였고 딸아이는 금년에 대학을 입학을 하였다.
우리 남매 아니 부부의 공통된 소원이 하나가 있다면 우리들이 자랄 때처럼 우리 아이들은 혼돈 속에 살지 말고 환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어렵고 혼돈 된 시대에 못 볼 것만 보고 자랐고 못 할 짓만 하며 살았으며 또한 부부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될 사이가 부부로 함께 살지만 말이다.
혼돈 속의 남매
이건 우리 남매의 순탄치 못 한 이야기이다.
나는 육이오 동란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여간 안 하던 아버지의 이야기였지만 임종을 얼마 안 두고 어머니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본래 농사밖에 모르고 살았으나 어느 날인지는 모르지만 외출이 빈번하며 농사일을 등한시 하더니
육이오가 터지자마자 잠적을 하였고 나중에 경찰서에서 순경이 우리 집으로 빈번하게 들락거리기에
순경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며 물었더니 그 때서야 아버지가 공산당이 되어서 전쟁에 참여를 하였고
그래서 우리 집이 요주의 집이 되어서 감시를 한다고 하며 빨갱이 가족이라 배급은 제외가 되었다고 하였고
그 후로 전쟁이 끝났으나 아버지의 행방이 요연해지자 입에 풀칠을 하기 급급해 져서 어쩔 수 없이
술집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하였으며 그 와중에 깜둥이 양놈 군인과 동거를 하다가 낳은 것이 동생이라고 하였다.
그랬다.
나는 분명히 황색 피부를 가진 한국 토종이었지만 여동생은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누가 봐도 튀기였다.
난 그래 어려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지를 못 하였다.
밖에만 나가면 양갈보 아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기 일쑤였고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하고 함께
나가기라도 하면 양갈보 아이라는 손가락질도 부족하여 돌팔매질을 당하여야 하였기에 동생은
내가 유일한 친구였고 나 역시 동생이 유일한 친구이자 말 상대로 지내다 보니 우리 남매는 항상 붙어서 있었다.
어렴풋이 나는 기억으로는 내가 아마 5살 때 정도의 나이였는데 껌둥이를 데리고 오더니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였고
얼마 안 가서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그 껌둥이의 피부색과 비슷한 아이를 엄마는 낳았고 그 후로
나는 다시 그 껌둥이 얼굴을 보지를 못 하였는데 지금 생각을 하면 한국에서 있을 기간이 지나자
다른 양놈들은 기간을 연장하여 한국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어머니가 놈의 아이를 낳자 도망을 가듯이 본국으로 갔지 싶다.
여동생은 어려서 못 봤는지 기억에 없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본 것이라고는 밤이면 어머니가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우리 남매는 다락방에 올라가서 못 내려오게 하고는 안방을 차지하고 낮선 남자와 깔깔거리며
알몸으로 있는 것을 보는 것이 거의 전부였고 제 정신을 가진 적은 거의 없이 매일같이 술에 절여 있었다.
처음에는 낮선 남자가 어머니 몸 위를 짓누르고 올라가 있자 난 그 낮선 남자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거나
때리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다락방에서 뛰어 내려와 낮선 남자의 등을 때리며 울었지만 어머니는
그 낮선 남자에게 반항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깔깔대며 나에게 다락방으로 올라가라고 하며 그 낮선 남자를 끌어안기만 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려서 본 것이라고는 시쳇말로 빠구리 하는 모습뿐이었다.
어떤 때는 초저녁에 왔던 사람 얼굴과 저녁 늦게 오는 사람의 얼굴이 달랐고 그 사람하고 빠구리를 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서는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 아예 그 사람을 집에서 자게하면 그 사람과 어머니는
열이란 열은 다 올리고 집이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며 다락방에서 우리 남매를 잠도 못 들게 하였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낮선 남자가 나가면 걸레나 헌 종이로 밑을 닦고 나갔는데 그게 당시에는 좆 물인 줄도 몰랐지만
여동생과 나는 서로 깔깔대며 그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을 맡으면서 웃었었고 그렇게 하면 으레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배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어리고 어린 여동생의 보지를 만지는 일이 일이라면 일이었고 놀이라면 놀이였다.
더구나 여동생이 싫어만 하였다면 그 놀이도 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동생의 보지를 만지고 그 전에 아빠라고 부르던 그 깜둥이와 엄마가 하던 대로 여동생 보지를 빨아주면
여동생은 입을 헤헤 벌리며 좋아하였고 나의 작은 고추를 물려주면 나처럼 빨기 시작을 한 것은 여동생 나이 고작 5살의 일이다.
초등학교? (당시엔 국민 학교였지만)
문턱도 못 밟았다.
사친회비(요즘은 의무교육이라 수업료를 안 받지만 당시에는 사친회비라고 하여 받음)가 없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양갈보며 창녀의 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 싫어서였다.
몰론 입학식에는 갔었다.
하지만 혼자 갔었고 아이들의 놀림은 물론 따라온 아이들 엄마들까지 이상한 눈으로 보며 자기 아이에게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쟤 엄마는 양갈보이니 함께 놀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말을 하자
학교라는 자체가 싫어졌는데 거기다가 선생님이란 년이 나에게는 짝도 안 주고는 보는 둥 마는 둥 하자 어린 나이였고
철이 없는 나이였지만 그 다음 날부터 안 학교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여동생하고만 놀아야 하였다.
그리고 저녁이면 여동생을 들쳐 업고 어머니가 술을 따르는 술집을 기웃기웃하여 동전 몇 닢을 얻으면
눈깔사탕을 사서 동생과 교대로 빨아먹으며 지네야 하였는데 문제는 그놈의 눈깔사탕이 문제였다.
먼 옛날의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그 기억이 난다.
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고 하면 여동생 나이 5살이었고 내 나이 11살이었지 싶다.
그날도 난 여동생손을 잡고 어머니가 술을 따르는 술집으로 갔다.
아니 더 정직하게 말을 하여 작부 노릇을 하는 집이란 것이 바른 말일 것이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들쳐 업은 나를 발견을 하고 가라고 손짓을 하였지만 난 계속 주변에서 기웃기웃 하였고
그 덕에 어머니의 치마 안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깔깔대던 남자에게 알밤을 한 대 맞는 대신 몇 닢의 동전을 얻자
나는 구멍가게로 달려가 막대가 달린 눈깔사탕 2개를 사서 집으로 와 하나는 여동생에게 하나씩 빨아먹었다.
한참을 빨다가 난 묘한 생각을 하였다.
앞에서도 조금 이야기를 하였지만 여동생과 나의 놀이는 이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서로의 고추를
서로가 빨아주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나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낮선 남자와 킥킥거리며 알몸으로 노는 모습을 거의 매일 봐 왔는데
어떤 날은 낮선 남자의 등만 보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또 어떤 날은 낮선 남자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잡고 올라타 있을 때는
엄마의 고추 안으로 낮선 남자의 고추가 들락날락 하는 것을 종종 봤는데 동생의 보지를 빨면서도
자세히 봤지만 구멍이 아주 작아서 나의 작을 고추도 못 들어 갈 것처럼 보였는데 물론 어머니는 어른이라
여동생 고추의 구멍에 비하여 크겠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그래도 낮선 남자의 그 굵은 고추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들어가는지 궁금하였는데 막대 눈깔사탕의 굵기가 내 고추보다 훨씬 작아진 것을 알고는
난 그 막대 눈깔사탕 정도면 들어가려 나 하는 마음으로 눈깔사탕을 빨고 있던 여동생을 다락방으로 데리고
눕히자 여동생은 환하게 웃으며 눈깔사탕을 빨면서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를 다 안다는 듯이
가랑이를 벌리고 눕자 난 그 사이에 말라버린 눈깔사탕에 침을 묻히고 여동생 보지의 금을 벌려 살짝 넣어 봤다.
그러자 여동생은 눈깔사탕을 빨면서 미간을 약간 찌푸렸지만 눈깔사탕의 알갱이는 여동생 보지 안으로 무난하게 들어갔다.
정말이지 신기하였다.
분명히 여동생 보지 구멍보다 조금은 더 큰 눈깔사탕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눈깔사탕을 다시 여동생 보지 안에서 뺐다.
빼고는 난 그만 놀라고 말았다.
여동생 보지 구멍 안에 들어갔다 나온 막대 눈깔사탕에는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여동생은 그 것을 기억하고 자기의 처녀는 내가 먹은 것이 아니라 막대 눈깔사탕에게 도둑을 맞았다고 하며
말을 하는 통에 우리는 서로를 잡고 한참을 깔깔대며 웃은 것이 본격적인 근친상간의 계기가 되었지만........
하여간 그 일이 있고는 여동생과 나의 놀이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가 되었다.
지금 생각을 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아무 철이 없었기에 동생과 나는 서로의 고추를 빨아주다가
나중에는 젓가락이나 길고 가는 것이라면 무엇이고 가리지 않고 넣었고 회가 거듭하자 오히려
여동생이 젓가락은 물론 숟가락까지 가져와 손잡이 부분을 넣으라고 하였고 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여동생이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무조건 여동생 보지 구멍 안에 넣는 놀이를 재미있게 생각하고 하였다.
그런 놀이를 거의 매일 하다가 일 년이지나 내가 12살이었고 여동생이 6살이 되었던 해였다.
그땐 이미 여동생 보지 구멍 안으로 나의 새끼손가락도 손쉽게 들어갔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다락방으로 우리 남매를 올라가게 하고는 빠구리를 하였는데
어머니의 신음소리에 계단으로 내려와 다락방 문틈으로 보았더니 어머니의 보지 안으로 낮선 남자의 좆이
(이때는 대충 알아 좆이며 씹 그리고 빠구리란 용어를 알았다.)힘차게 들락날락하는 희한한 광경이
내 눈에 자세하게 보였는데 여동생도 나와 함께 보다가는 나에게 올라가자고 하기에 올라갔더니
나에게 저렇게 해 보자는 제안을 하기에 너도 엄마처럼 소리를 내면 안 되기 때문에 엄마에게 발각이 되면
큰일이라며 안 하겠다고 하였더니 다락방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더니 헌 옷가지를 하나 잡고는
그 것으로 입을 가리고 나에게 묶으라고 하였고 난 그 헌 옷으로 여동생 입을 가리고 뒤로 단단하게 묶었다.
그러자 여동생은 아랫도리를 홀랑 벗고 어머니처럼 가랑이를 벌렸다.
나는 소리를 죽이며 옷을 벗었고 조심스럽게 여동생 가랑이사이에 낮선 남자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한 손으로 좆을 쥐고는 평소에 여동생 보지에 꼬챙이를 넣을 때처럼 침을 잔뜩 바르고 침이 좆에서 흐르자
다른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여동생이 벌려준 보지에 대고 엎드리자 놀랍게도 나의 좆은 빡빡한 느낌과 함께
여동생 보지 안으로 진입을 하였고 지금까지 넣었던 것 중에 가장 굵었던 것이라 그랬던지 여동생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상체를 들어 밑을 봤더니 도무지 안 들어 갈 것 같던 여동생 보지 안으로 나의 좆은 귀두 부분 조금 더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밑에 방에서 낮선 남자가 어머니 보지에 좆을 박고 움직이던 것처럼 들락날락 해 보려고 하였으나
아주 쉽게 빠져버렸고 그래서 난 밑의 낮선 남자가 어머니에게 하는 것처럼 해 보지는 못 하고
따뜻한 느낌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여동생 보지 안에 좆을 박고 가만히 있다가 낮선 남자의 목소리며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잦아들자 서둘러 빼고는 동생에게 옷을 입으라고 하고는 나도 옷을 입고는 자는 척을 하였다.
그 다음 날부터 어머니가 작부 노릇을 하러 가면 우리의 놀이에는 그 놀이가 하나 더 추가가 되었다.
요즘이야 초등학교 3~4학년이면 좆 물이 나올 정도로 성숙도 하고 또 영양섭취도 좋지만 당시에는 12살 나이였지만
영양섭취는커녕 입에 풀칠을 하기에도 급급하였던지 여동생이 아무리 빨아 주어도 좆 물은 안 나왔었다.
여동생의 나이가 8살이 되었지만 여동생도 놀림이 받기 싫다며 학교에 안 갔다.
아마 엄마가 억지로 가라고 하였다면 갔을 것이었지만 사친회비는 물론 먹을거리 걱정이 더 우선이었던
어머니는 여동생이 학교에 안 간다고 하였으나 학교에 안 간다는 여동생에게 억지로 가라고는 안 하자
여동생과 나는 거의 종일 다락방에서 함께 있어야 하였는데 그 때는 어머니가 밤과 낮은 안 가리고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밑에서 빠구리를 하는 바람에 우리 남매는 아예 요강을 다락에 올려놓고 있다가
소변이고 대변도 요강에다 누고는 남자가 나가면 그 틈을 타서 요강을 비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본 것이 빠구리 하는 것뿐이요 눈으로 익힌 것도 빠구리뿐이니 우리 남매가 할 수 있는 것도 빠구리뿐이었다.
어머니가 밑에 방에 낮선 남자를 데리고 와 빠구리를 하면 우리 남매도 다락방에서 하는 일이라곤 빠구리뿐이었다.
그러던 그 때는 이미 여동생의 보지는 내 좆이 쉽게 들락날락 하기 시작을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데리고 온 낮선 남자들처럼 나의 좆에선 물이 안 나왔다.
그해 5월이었지 싶다.
엄마가 평소처럼 낮선 남자와 밑에 방에서 빠구리를 하자 여동생과 나도 자연스럽게 빠구리를 시작을 하였다.
한참을 여동생 보지 안에 좆을 박고 들락날락 시키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며 무엇인가가 나왔고
여동생은 깜짝 놀라며 나의 귀에 입을 대고 뜨거운 뭐가 들어온다며 울상을 지었고 난 여동생을
다독이며 난 여동생에게 낮선 남자가 엄마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돈을 집어던지고 가면 신문지나
걸레로 닦던 것을 생각을 하고 나도 그 낮선 남자들처럼 물이 나온 모양이라고 하였더니 그때서야
여동생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더 이산 안 나오자 나의 가슴을 밀쳤고 그리고 일어나 앉아
손가락을 보지 구멍 안으로 넣어 내가 싼 물을 찍더니 코로 냄새를 맡고는 같은 물이라고 하며 좋아하였다.
그리고 내 나이 13살이 되던 해부터 구두닦이로 나섰기에 낮에는 비가 오지 않는 다음에는 좀처럼
여동생과 빠구리를 하지 못 하고 밤에 집에 오면 어머니가 낮선 남자와 밑에 방에서 빠구리를 하는 틈을 타서 빠구리를 하였다.
내가 좆 물이 늦게 나온 반면에 여동생의 생리는 요즘 유식한 말로 나의 남성호르몬을 많이 받은 탓인지
모르지만 11살이 되든 해에 시작이 되었고 첫 생리가 시작이 되자 여동생은 아이를 밴 것이 아니냐며
겁을 먹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눈치가 빠른 어머니는 여동생이 생리가 나온 것을 알고 어머니의
생리대를 채워주며 여자는 생리가 나오면 임신을 할 수가 있게 된다며 자신의 처지답지 않게
여동생에게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였고 그와 동시에 나에게는 한 가지의 일이 늘어나게 되었었다.
그것은 여동생에게 임신은 시킬 수가 없었기에 콘돔이 필요하였으나 어린 나이에 콘돔이 구하기가 쉽지 않자
엄마가 낮선 남자와 빠구리를 하면서 어떤 때는 생으로 하였지만(당시에는 너무나 무식하여
생리 주기법으로 피임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음)자주 사용을 하던 콘돔을 훔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동생하고 빠구리를 할 때면 무조건 콘돔을 끼우고 하였었다.
그러다가 구두닦이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 생리 주기법 피임이었는데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콘돔을 사용하면
느낌도 안 좋고 흥도 안 나서 더 배운 것이 루프 피임법이었고 그것을 배우고는 여동생 보지 안에서는
루프가 빠질 날이 없을 정도로 여동생은 생리 주기법에 따라 안전하다고 생각이 드는 날 이외에는 루프를 보지 안에 넣고 살았다.
그리고 내 나이 25살이 되던 해에 몸을 아무에게나 몇 푼의 돈을 받고 굴린 탓인지 어머니는
병색이 돌기시작을 하였으나 나의 구두닦이 벌이와 19살 여동생이 다니던 공장에서 받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어머니의 약값은커녕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었기에 그 다락방 신세를(집은 단칸방에
다락방과 부엌이 전부였지만 루이 집이었음)못 면하고 약국에서 양만 사서 엄마에게 먹이는 형편이었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밑의 방에 기거를 하다가 어머니가 잠이 들연 다락방으로 올라와 나와 빠구리는 거의 매일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그 해를 넘기지 못 하고 숨을 거두었다.
남은 것을 우리들 문제였다.
배운 것이 있고 돈이라도 있으면 떳떳하게 장가도 가고 시집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낡아빠진 단칸방의 허름한 집 한 뿐이요 나는 불알 두 쪽에 좆 몽둥이 하나뿐이었고 여동생에게는
나의 좆에 의하여 이미 걸레 수준인 보지 하나뿐이었는데 나야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이 없지만
아무리 서로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지만 여동생이 불행하게 사는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에 고민을 한 결과 한 가지 방법 밖에 별달리 뾰쪽한 방법이 없었다.
고아에게 새로운 호적을 만들어 준다는 말을 들었었다.
낮선 남자들을 끌어들여 몸 팔기는 바빴지만 딸년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시간은 없었던지 다행히(?)여동생은 무적자였다.
백방으로 알아 본 결과 몇 푼의 돈만 집어주면 호적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허름한 단칸방의 집을 팔았다.
그리고 그 일부분을 줬더니 동생에게 천 씨라는 성에 이름은 그대로 미순이란 이름으로 된 새 호적을 만들어주었다.
박가인 나와 아무리 아버지는 다르지만 같은 뱃속에서 나왔기에 부부란 이름으로 내 호적에 입적을 시킬 수가 없었던
여동생이었지만 새 호적이 나오자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동생과 나는 평생을 부부로 함께 하자고
약속을 하고 여동생을 떳떳하게 내 호적에 내 아내로 등재를 하였지만 우리가 남매란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너무나 많아 그 동안 정성을 들여 손님을 확보 해 둔 구두닦이 터와 방세를 빼서 동생과 나는
우리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갔고 지금 우리 남매 아니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 사는
이곳에 정착을 하여 남부럽지 않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으나 당시에 막상 처음 이사를 왔으나
여동생 아니 나의 마누라나 나나 둘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처지라 우리는 서로 도우며
글을 깨우치기로 하였고 낮이면 마누라는 식당에 나가 일을 하였고 나는 노가다를 다니며 돈을 벌었지만
저녁이면 나는 야학에 가서 길을 익히기 시작을 하여 마누라가 식당 일을 마치고 오면 그 날
내가 배운 것을 마누라에게 가르쳐주기를 반복하여 지금은 크지는 않지만 번듯한 우리 집도 가졌고
마누라와 함께 일층에다 식당을 차려 운영을 하여 이제 부러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여동생 아니
마누라나 나나 영원히 한 줌의 흙이 되는 그날까지도 지켜야 할 비밀이라면 우리가 남매였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지금 우리 부부사이에는 2남 1녀가 무럭무럭 자라 큰아들은 대학을 나와 직장에 다니고 작은 아들은 군대에 다녀와 복학을 하였고 딸아이는 금년에 대학을 입학을 하였다.
우리 남매 아니 부부의 공통된 소원이 하나가 있다면 우리들이 자랄 때처럼 우리 아이들은 혼돈 속에 살지 말고 환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어렵고 혼돈 된 시대에 못 볼 것만 보고 자랐고 못 할 짓만 하며 살았으며 또한 부부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될 사이가 부부로 함께 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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