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의 브레이크였던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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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55회 작성일 21-03-22 11:23본문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이토 히로부미는 본국에서도 악평이 자자한 사생활을 지니고 있었으나 정치인으로써는 탁월한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음.
일본이 만주 문제에 한참 손대려 하던 1906년 5월, 이토의 요구로 일본에서는 만주 문제에 관한 협의회가 개최되었음.
이 협의는 최고수뇌회의급이었는데, 이토는 여기서 이렇게 주장하였음
'미,영이 요구하고있는 만주문호개방 정책에 맞추어 성실한 문호개방으로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한다.'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들었음.
1. 미,영의 지원이 절실한 처지에서 만주 문호를 폐쇄하여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것은 자1살행위이다.
2. 만주에서 보이는 일제의 행동은 청국 정부와 인민의 불만을 불러일으켜고 있다. 이대로는 청국 전체가 반일민심으로 치닫게 될것이다.
그러나 만주에 대한 야욕이 강했던 군부는 별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고
이토는 이미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평화가 회복된 상황에서 전시적 군정을 계속하려는 군부의 잘못을 통렬히 지적하였음.
회의가 끝날 무렵 만주의 주권을 담당할 관아 조직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오자 이토가 매우 역정을 냈는데,
1. 군은 만주에서 일본이 가지는 지위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고있다.
만주에서 일본의 권리는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요동반도 조차지 외엔 아무것도 없다.
2. 군이 '만주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만주는 결코 일본의 속지가 아니다.
순전한 청국 영토의 일부이며 속지가 아닌 땅에 주권을 행사할수는 없는것이다.
이처럼 이토는 만주 문제가 자칫 미,영과의 관계를 커다란 문제로 비화시킬수 있음을 알고 군과 정부 정책에 끊임없이 제동을 걸었음.
당시 이토의 권력은 대단했던 반면 반대로 군은 사회적으로도 무시당하는 풍조가 짙어 입지가 비교적 좁았고
이토가 고위급 인사를 모아놓고 역정을 내면서 정책에 제동을 걸어도 함부로 거기에 덤빌 수가 없었음.
(흔히 생각하는 일제의 군 이미지는 나중에 생긴것으로, 다이쇼 시대 당시에는 군인이 제복을 입고 전차에 타면 민원이 쏟아질 정도로 군 멸시 풍조가 매우 강했음)
그러나 이토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총격, 살해당하면서 날뛰는 군부에 제동을 걸어줄 권력자는 사라졌고
그 뒤, 잘 알려진 역사와 같이 브레이크가 풀린 일제는 만주의 수렁에 발이 빠진채 무리한 확장을 계속하다가 미국과 충돌하여 태평양 전쟁을 거친 끝에 패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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