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에 가입했던거 썰 품 . 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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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85회 작성일 20-01-07 12:11본문
한국이 유엔 회원국인건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 과정이 북한의 방해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는 일베인 많을거야.
그래서 유엔에 가입했던 썰을 풀려고 해.
유엔 가입은 우리나라가 그때까지 기울였던 총체적인 외교전의 소중한 결실이라 할 수 있어.
정부가 1991년 1월 `유엔 동시 가입'을 공식 천명했지만, 그 성공 배경에는 이전부터 물밑에서 이루어진 다각적인 노력이 있었지;;
특히 동유럽 국가의 체제변환에 맞물려 진행된 정부의 북방외교가 여건 조성을위한 노력의 핵심이었어.
유엔의 신규 회원국 가입은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냐면,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총회에서 결정되는방식이고 상임이사국 5개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야
우리나라는 한반도 평화유지와 유엔군의 개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방지하기위한 목적으로
유엔에 가입함과 동시에 북한도 동시에 가입시키는, 남북동시가입을 추진하고 있었지
그러나 적화통일 야욕을 숨기고 있던 북한은 당시 검은 속셈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유엔가입을 반대했었어.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면, 전면전 시 유엔평화군이 개입하게 되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처음에는 상임이사국 5개국중 소련과 중국이
"유엔 동시가입시 분단이 영구화된다"는 북한의 주장을 지지하는듯 하면서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에 반대했었지.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1990년 '소련과의 수교'란 결실을 보면서 상황이 변했어
구소련이 '한국 지지'로 돌아섰던거지. 그런데 중국은 여전히 반대입장을 고수했었어
여기에다 북방외교는 유엔 총회 회원국 사이에서 우호적 여론을 만드는데도 일조했었는데
국제적으로 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문제에 대해서 일종의 대세론이 형성하는데 큰 힘이 됬었어.
아무튼 이런 상태에서 정부는 "북한이 유엔 가입을 거부하면 단독 가입도 불사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국내외에 표출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었어.
유엔본부 현장은 물론 재외공관의 외교채널을 통해서 이런 의지를 주요 국가에 전하면서
"유엔 동시가입이 오히려 남북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했었어
동시가입이 결과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정세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는 뜻이었지.
이런 우리 정부의 입장이 국제적 공감대를 얻으면서 국내외에서 반대 여론을 조성하려는 북한의 '방해공작'은 힘을 잃기 시작했지.
이런 배경 속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향한 청신호라 할수있는 첫 사건이 일어났어.
1991년 5월 초 "동시가입은 남북 간 합의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면서 사실상 북한을 지지했던 중국의 '리펑' 총리가 평양을 찾은 사건이야.
리 총리의 방북 후 대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확인했다"는 발표만 나왔지만,
국제 여론의 흐름을 감안할 때 리 총리의 평양 방문은 "한국의 유엔 가입에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북한에 설명하기 위해서갔던거라고 보였지.
그러나 관측만 있었을 뿐 `물증'은 잡히지 않았었어
한반도에서는 물론 뉴욕에서도 리 총리의 방북 내용을 알아내고자 정보력이 총동원했엇는데 중국이 무슨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어.
1991년 5월 24일 우리정부는 '리다오유' 주유엔 중국대사와 면담하면서 중국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 떠봣엇지.
그런데 중국인 리 대사는 "평양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른다"며 냉대했었음.
그런데 문제가 뭐였냐면 중국의 입장 변화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 정부도 가입 절차를시작할 수가 없었어
만약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가입이 불발되버리면, 다시 가입을추진하는 데 절차적으로 시간이 많이 필요했었거든.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1991년 5월 27일 한국 대사에게 중대한 전화가 걸려왔었는데
그동안 우리의 접촉 요구를 거부해왔던 박길연 주유엔 북한대사의 전화였어 .
북한 대사는 우리측 대사에게 급히 만나자는예상 밖의말을 전했고 이 만남은 10분도 안되서 마무리 됐어.
북한 대사가 북한의 기존 입장을 설명하면서 "동시 가입이 안되면 단독 가입을 강행할 것이냐"고 물었고
우리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없다는 것만 재확인한 채 별다른 교섭 없이 자리를 떴기 때문이지.
박 대사가 이상한 만남을 요청한 이유가 뭐였을까?
여하튼 북한이 박 대사가 돌아간뒤 10시간도 안 돼 한국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겠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외무성 명의로 발표하며 사실상 '백기 투항'을 했어.
특히 북한은 "남조선 당국자에 의해 조성된 일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유엔가입의 길을 택했다"고 밝히면서,
한국의 외교적 노력으로 형성된 '대세론'이 북한의 태도 변화를 강제한 계기가 됐음을 사실상 시인했어.
여기서 중요한건 바로 "대세론"이야. 국제 여론이 대세를 타면 그 대세를 거스르기 힘들다는 사실을 증명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지.
여하튼 이후 우리 정부는 유엔 실제 가입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북한을 잘 이끌며 상황을 관리했고,
북한이 먼저 신청서를 내도록 했어. 그래야 북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거든.
그리고 각각 제출된 가입신청이 본회의에서는 하나의 안건으로 상정되도록 했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사실상 완전한 주권국가로 공인을 받았고,
향후 남북관계가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처럼 계산적인 관계로 변할수 있는 초석이 놓인 셈이었지.
그래서 유엔에 가입했던 썰을 풀려고 해.
유엔 가입은 우리나라가 그때까지 기울였던 총체적인 외교전의 소중한 결실이라 할 수 있어.
정부가 1991년 1월 `유엔 동시 가입'을 공식 천명했지만, 그 성공 배경에는 이전부터 물밑에서 이루어진 다각적인 노력이 있었지;;
특히 동유럽 국가의 체제변환에 맞물려 진행된 정부의 북방외교가 여건 조성을위한 노력의 핵심이었어.
유엔의 신규 회원국 가입은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냐면,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총회에서 결정되는방식이고 상임이사국 5개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야
우리나라는 한반도 평화유지와 유엔군의 개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방지하기위한 목적으로
유엔에 가입함과 동시에 북한도 동시에 가입시키는, 남북동시가입을 추진하고 있었지
그러나 적화통일 야욕을 숨기고 있던 북한은 당시 검은 속셈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유엔가입을 반대했었어.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면, 전면전 시 유엔평화군이 개입하게 되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처음에는 상임이사국 5개국중 소련과 중국이
"유엔 동시가입시 분단이 영구화된다"는 북한의 주장을 지지하는듯 하면서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에 반대했었지.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1990년 '소련과의 수교'란 결실을 보면서 상황이 변했어
구소련이 '한국 지지'로 돌아섰던거지. 그런데 중국은 여전히 반대입장을 고수했었어
여기에다 북방외교는 유엔 총회 회원국 사이에서 우호적 여론을 만드는데도 일조했었는데
국제적으로 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문제에 대해서 일종의 대세론이 형성하는데 큰 힘이 됬었어.
아무튼 이런 상태에서 정부는 "북한이 유엔 가입을 거부하면 단독 가입도 불사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국내외에 표출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었어.
유엔본부 현장은 물론 재외공관의 외교채널을 통해서 이런 의지를 주요 국가에 전하면서
"유엔 동시가입이 오히려 남북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했었어
동시가입이 결과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정세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는 뜻이었지.
이런 우리 정부의 입장이 국제적 공감대를 얻으면서 국내외에서 반대 여론을 조성하려는 북한의 '방해공작'은 힘을 잃기 시작했지.
이런 배경 속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향한 청신호라 할수있는 첫 사건이 일어났어.
1991년 5월 초 "동시가입은 남북 간 합의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면서 사실상 북한을 지지했던 중국의 '리펑' 총리가 평양을 찾은 사건이야.
리 총리의 방북 후 대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확인했다"는 발표만 나왔지만,
국제 여론의 흐름을 감안할 때 리 총리의 평양 방문은 "한국의 유엔 가입에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북한에 설명하기 위해서갔던거라고 보였지.
그러나 관측만 있었을 뿐 `물증'은 잡히지 않았었어
한반도에서는 물론 뉴욕에서도 리 총리의 방북 내용을 알아내고자 정보력이 총동원했엇는데 중국이 무슨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어.
1991년 5월 24일 우리정부는 '리다오유' 주유엔 중국대사와 면담하면서 중국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 떠봣엇지.
그런데 중국인 리 대사는 "평양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른다"며 냉대했었음.
그런데 문제가 뭐였냐면 중국의 입장 변화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 정부도 가입 절차를시작할 수가 없었어
만약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가입이 불발되버리면, 다시 가입을추진하는 데 절차적으로 시간이 많이 필요했었거든.
이런 답답한 상황 속에서 1991년 5월 27일 한국 대사에게 중대한 전화가 걸려왔었는데
그동안 우리의 접촉 요구를 거부해왔던 박길연 주유엔 북한대사의 전화였어 .
북한 대사는 우리측 대사에게 급히 만나자는예상 밖의말을 전했고 이 만남은 10분도 안되서 마무리 됐어.
북한 대사가 북한의 기존 입장을 설명하면서 "동시 가입이 안되면 단독 가입을 강행할 것이냐"고 물었고
우리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없다는 것만 재확인한 채 별다른 교섭 없이 자리를 떴기 때문이지.
박 대사가 이상한 만남을 요청한 이유가 뭐였을까?
여하튼 북한이 박 대사가 돌아간뒤 10시간도 안 돼 한국과 유엔에 동시 가입하겠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외무성 명의로 발표하며 사실상 '백기 투항'을 했어.
특히 북한은 "남조선 당국자에 의해 조성된 일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유엔가입의 길을 택했다"고 밝히면서,
한국의 외교적 노력으로 형성된 '대세론'이 북한의 태도 변화를 강제한 계기가 됐음을 사실상 시인했어.
여기서 중요한건 바로 "대세론"이야. 국제 여론이 대세를 타면 그 대세를 거스르기 힘들다는 사실을 증명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지.
여하튼 이후 우리 정부는 유엔 실제 가입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북한을 잘 이끌며 상황을 관리했고,
북한이 먼저 신청서를 내도록 했어. 그래야 북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거든.
그리고 각각 제출된 가입신청이 본회의에서는 하나의 안건으로 상정되도록 했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사실상 완전한 주권국가로 공인을 받았고,
향후 남북관계가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처럼 계산적인 관계로 변할수 있는 초석이 놓인 셈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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