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수도권과 2040세대들을 잡으려면 반드시 김종인을 잡아야 한다.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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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05회 작성일 20-01-07 11:42본문
김종인이 경제민주화의 상징이 된 이유
김종인이 경제민주화로 뜨니까 이제 문재인과 민주당에서 원조 시비까지 붙는다. 난 1987년 헌법 경제민주화 조항의 원조는 김종인이 아니라는 문재인과 민주당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김종인이 지난 25년 동안 일관되게 경제민주화 노선을 걸을 때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동안 2번이나 집권한 민주당 당신들은 무얼 했는지. 김종인이 경제민주화의 상징이 된 건 그냥 된 게 아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전두환을 설득시켜 당시 재벌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었고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하면서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을 밀어붙이고 참여정부 시절 구 민주당 의원을 하며 금산분리 완화에 반대한 일관된 삶의 궤적이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은 5공부터 현재까지 역대 정부에서 거의 빠짐없이 입각설이 돌았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재벌 보유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재벌 업종전문화,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등의 실적을 올린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만한 경제관료가 과연 문재인 캠프와 민주당에 있긴 하나? 김종인이 새누리당에 간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의회에서 경제민주화를 지지할 다수파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이 민주당에 백날 있어봐야 새누리당이 법안 통과 반대하면 끝이다. 하지만 김종인이 당내에서 박근혜와 새누리당만 설득하면 민주당의 지지는 자동으로 따라온다.
김종인은 언제나 강력한 리더십을 방패삼아 위로부터 개혁을 밀어붙이는 권위주의 시대 기술관료의 모습을 보인다. 역사의 교훈은 민주주의의 발전이 반드시 민주적 방식으로 실현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법과 미국의 민권법 입법과정을 보라. 정치를 볼 때 주의점은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와 규범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개혁은 규범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상충되는 면이 많다. 그러나 개혁이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 강화에 기여한다면 정당성이 획득된다.
반면에 정작 문재인과 민주당이 말하는 경제민주화론은 문재인과 민주당 자신들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하는 재벌개혁론에서 과거 김대중 정권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론을 칵테일로 섞은 수준에 불과하며 결국 문재인의 경제민주화론은 철저히 현실적이지도 실현가능하지도 못한 문재인과 민주당의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경제민주화란 시장의 전횡에 고통받는 경제적 약자들이 시장원리로 환원되지 않은 다양한 교환관계에 기초한 사회 공동체 내부의 "경제시민"으로 조직되어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관철하고 궁극적으로 시장에 대한 공동체의 사회적 통제를 지향하는 일종의 정치적 노선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정치적으로 조직된 경제시민도, 대안적 경제모델도, 시장에 맞서는 시민적 공동체도 없이 헌법조항을 둘러싼 요상한 언쟁과 기술관료적 정책 경쟁으로 전락 중이다. 박상훈의 지적대로 이는 "경제시민 없는 경제민주화"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강력한 대중정당은 시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 조직의 힘이 미약한 한국에서 아래로부터의 경제민주화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의 원천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라. 친노가 장악한 민주당은 지금 정당인지도 모르겠고 안철수는 아예 정당없는 경제민주화를 추진 중이다. 이래서야 김종인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면서 집권직후부터 김종인과의 약속을 어기고 경제민주화를 처음부터 포기한 노무현의 비서실장인 문재인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신뢰할 수 있었을까? 김종인이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의 정치인인 박근혜를 선택한 건 결국 김종인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정치집단은 공산혁명까지 일으킨 내로라 하는 좌파정당들이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에서 공산화의 위협에 맞서야 했던 일본 자민당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극적이고 허망하다. 농민의 이름으로 혁명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이 1950년, 1960년대 농민을 굶겨죽이는 대약진 운동으로 혁명을 배반할 때 일본 자민당은 농업 기본법이라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사회주의적인 농촌보호 정책을 관철하며 농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950년, 1960년대 일본 자민당의 각종 사회입법은 현재 한국에서 논의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50년이나 앞서 실현한 것이다. 그 시기에 도입된 하청기업법, 백화점법은 도시 노동자와 영세상공업자의 권익을 보호하며 자민당 50년 일당지배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복지국가의 롤모델로 알려진 스웨덴 복지국가의 신화 벗겨내기
스웨덴 복지국가의 신화적인 역사를 보면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주도한다는 민중사관에 회의적이 된다. 아담 쉐보르스키의 말대로 "사회민주주의는 인류의 최대 발명품"이며 그 발명은 한손, 비그포르스, 뮐레르같은 소수의 천재적 리더십들이 주도했다. 보통사람의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란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현실화하는 작업은 결국 신화적 지도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놀라운 일을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해냈고 오늘의 복지국가를 만들었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국부로 추앙받는 페르 알빈 한손은 노동계급 출신의 매력적인 총리로 정적들조차 존경할만큼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신화적인 리더십이었다. 그는 보통사람의 언어로 사회 변화를 이끌 줄 아는, 지금으로 치면 룰라 업그레이드 버전의 인물이었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격변의 시기에 17년 동안 재무부 장관을 맡으면서 복지국가의 물적 기반을 닦았다. 그는 전통적 국유화 노선을 버리고 연대임금과 산업합리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권 강화를 도모했던 무서운 인물이었다.
보편적 복지체제의 창시자 구스타브 뮐레르는 15년간 사회부 장관을 지내며 전통적 재분배 정책 대신 보편적 복지란 당시로선 혁신적인 노선을 수립하여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실력을 키워 복지국가의 관료화를 제어하려 했던 탁월한 리더였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두 설계자 비그포르스와 뮐레르는 늘 마찰을 빚는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비그포르스는 뭘레르의 보편적 복지 노선을 이해하지 못했고 뮐레르는 비그포르스의 국유화 포기에 부정적이었다. 둘을 화합시킨 건 한손 총리였다. 천운이 따로 없었다. 비그포르스-뮐레르란 천재들과 이들을 화합시킨 한손의 신화적 지도력, 최상의 대외경제 여건과 촘촘한 공동체 관계망, 소련에 맞서 형성된 강력한 내셔널리즘, 이 모든 조건이 맞물려 스웨덴 복지국가란 신화가 탄생했다. 이 신화를 재현하는 게 가능할까 싶다.
비그포르스는 70년대까지 살며 그의 최종 목표였던 산업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지원했다. 이 계획은 임노동자 기금이란 정책으로 구체화됐는데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고 이후 스웨덴 복지국가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천재도 실패한 일이다. 70년대 임노동자 기금안이란 유령이 떠돌던 스웨덴은 그야말로 세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의 문턱까지 온 결정적 순간을 맞이했다. 이 고비에서 그들은 좌절했고 사회주의의 꿈은 영영 멀어졌다. 아마 기회는 다시 안 올 것이다.
스웨덴 복지국가는 무려 3세대에 걸쳐 사민당이란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좌파정당에서 유능한 리더십들이 나왔기에 신화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역으로 말해서 이런 정당과 리더십이 없으면 신화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스웨덴 사민주의 연구자 신정완 교수는 한 강연에서 "우리도 스웨덴처럼 되는 게 가능한가요?"란 간절한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한국의 좌파는 독일의 녹색당과 좌파당을 성공적인 좌파정당의 모델로 극찬하지만 그 정당들에 요슈카 피셔와 오스카 라퐁텐이란 강력한 리더십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별로 언급하지 않으며 집권좌파정당 사민당의 존재가 도약의 발판이었다는 점도 강조하지 않는다. 좌파정당이 평당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건 패망의 지름길이다. 다양한 분파 간의 세력 균형이 강력한 리더십의 형성을 방해했던 독일 사민당은 나치에 쓸려나갔고 얄마르 브란팅의 지도력 아래 통일된 대오를 수립했던 스웨덴 사민당은 빛나는 역사를 만들었다.
성공한 좌파정당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1.사기캐릭에 가까운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고 2.현실주의 노선이 급진주의 노선을 숙청하거나 포섭했으며 3.자유주의 정당과의 연정에 적극적이었고 4.무엇보다 운이 좋았다. 급진파의 노선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게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의 주장은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다. "부르주아 정당과의 타협은 기만이며,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에 맞서자." 그러다 파시즘에 쓸려나가고 자유주의의 변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대공황이 터졌을 때, 케인즈주의가 오일쇼크로 무너졌을 때,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급진파는 늘 "이번에야말로 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늘 자본주의 대신 자기들이 망했다.
급진파들은 늘 자본주의 질서에 안주하는 사민주의 정당의 우경화를 비판한다. 물론 상당 부분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100년 동안 사민주의와 차별화되는 수준의 반자본주의 모델을 개척한 적은 없다. "지금은 곤란하다 100년만 더 기다려달라" 적어도 스웨덴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그런 무력한 예언 따위 하지 않았다. 비그포르스는 피안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면서도 전환기의 정치경제학 패러다임을 학습하고 당장 10년, 20년 안에 해낼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을 세워 현존하는 최선의 좌파 모델을 수립했다. 결국 좌파들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성공하려면 100년 전 비그포르스가 그랬듯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통달하고 전환기의 새로운 정치경제 패러다임을 수립하여 그것을 정치적 지도력과 결부시키는 천재적 능력이 필요한데... 차라리 그냥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믿고 말겠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 비그포르스는 원래 당내 급진파의 리더였다. 하지만 그는 당의 지도자 한손의 노선에 반대하는 급진파의 추대를 스스로 뿌리치고 한손을 지지하여 당의 노선을 통합했다. 그리고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한손의 지도력 아래 관철했다. 급진파들은 100년 전부터 좌파정당의 우경화를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막상 노동계급의 권익을 확장시키고 복지국가란 새로운 모델을 수립한 건 그 더러운 부르주아들과 타협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급진파 비그포르스의 노선 전환은 여러모로 교훈적이다.
북유럽 복지국가 최초의 보편적 복지제도가 스웨덴과 노르웨이 모두 하필 출산수당과 아동수당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인구-젠더-가족-출산 문제는 북유럽 복지국가 형성기에 전략적으로 동원된 창조적 의제였고 좌파정당은 이 의제를 지배하면서 승리했다. 1934년 스웨덴에서 출간된 뮈르달 부부의 기념비적 저작 "인구문제의 위기"는 저출산의 원인이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경제적 불안이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진단을 내놓으며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스웨덴 사민당은 이 보고서를 채택하여 재집권에 성공했다.
뮈르달 부부는 노벨상 커플로 유명한 천재 부부로 남편 군나르 뮈르달은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의 선구자로 노벨 경제학상을, 그의 배우자였던 알바 뮈르달은 정치가, 페미니스트 사회학자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아주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먹은 부농들이었다. 재미있는 건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인 또다른 천재이자 당시 사회부 장관 묄레르는 "알바 뮈르달의 사회공학적 관리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에 냉소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를 지지하여 선거에서 완승을 거뒀다는 것이다. 하여간 무서운 인간들이다. 구스타브 묄레르는 저출산과 인구 문제를 우파로부터 빼앗는 것이 집권 플랜의 핵심이라고 봤다. 뼛속까지 소련식 관료주의를 혐오하고 노동계급의 힘을 신뢰했던 그는 뮈르달 부부 보고서의 전문가주의적 경향을 제거한 대중적인 정책수단을 기획한다.
뮈르달 부부의 혁신적 보고서는 인구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보편적 출산장려 정책과 주거 복지, 여성의 취업조건 개선, 노동시간 단축 등 광범위한 사회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이는 당시 여론의 큰 지지를 받지만, 맬서스주의를 믿는 노조의 반대에 부딪친다. 일찍부터 보편적 복지국가 노선을 추구한 묄레르는 뮈르달 부부의 제안이 그의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전략임을 간파한다. 대신 그는 관료주의와 급진 페미니즘적 색채가 강한 뮈르달 부부의 공공보육시설안을 폐기하고 출산수당을 밀어붙여 반대파를 잠재운다
묄레르는 뮈르달 부부의 전문가 중심 개입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에 냉소적이었다. 그는 오히려 가족과 민족을 중시하는 보수층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뮈르달 구상을 한손 총리의 전설적 슬로건 "국민의 집"과 결합시켜 1936년 총선 압승을 이끈다. "국민의 집"이라는 구호는 스웨덴의 국부 페르 알빈 한손 총리의 작품으로 가부장적 온정주의의 색채 탓에 당내 반발에 직면했다. 비그포르스도 이 극우적 구호를 지독히 싫어했다. 하지만 타고난 전략가 묄레르는 이 구호를 적극 활용하여 새로운 역사를 쓴다.
1937년 묄레르가 도입한 스웨덴의 출산수당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임산부에게 지급된 진보적 사회정책이었다. 몇 년 후 아동수당이 통과됐고, 정치적 타협을 위해 폐기된 공공보육서비스도 훗날 도입된다. 그후 스웨덴은 최고의 성평등 국가가 된다. 보편적 복지국가는 처음부터 젠더-가족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아 탄생했다. 스웨덴 리더들은 산업화에 따른 사회변동이 노동-젠더 문제의 동시 해결을 요구한다는 걸 알았고, 계급정치와 젠더정치를 결합시켰다. 물론 젠더정치는 항상 계급정치의 하위 파트너였다.
여성운동이 사민당과 노동운동에 종속되다시피 한 스웨덴이 여성운동이 독자적 흐름을 형성한 미국, 독일, 영국보다 더 강력한 성평등 국가가 됐다는 사실은 흔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스웨덴 사민당은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긴장관계를 성공적으로 조율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웨덴 사민당은 20세기 초 60여 년 동안 얄마르 브란팅-페르 알빈 한손-타게 엘란데르로 이어지는 넘사벽의 지도자들을 3대에 걸쳐 배출하면서 44년 장기집권 시대를 연다. 세계사에서 이 정도 운빨은 로마제국의 5현제, 청제국의 강옹건 시대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한국이 그대로 모방할 복지국가 모델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스웨덴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했던 복지국가의 최대치와 파편적으로 개인화된 문제를 이상과 결합시켜 공적 이슈로 사회화하는 정치적 이성이지 모델 그 자체가 아니다.
이런 스웨덴식 복지에도 문제점은 있다. 스웨덴식 복지의 그늘은 이혼율이 높아 청소년들의 내상이 심하다. 스웨덴의 16~19세 청소년들의 제일 큰 소망이 친엄마 친아빠와 저녁 먹는 것이다. 미혼모에 대한 지나친 복지가 오히려 가정 내 결속을 끊어 놓은 측면이 있다. 이렇게 개인화되는 복지와 해체되는 전통적 가족공동체 사이의 괴리는 생각보다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물론 한국이 벌써부터 비혼 가정에 대한 관대한 복지를 걱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복지제도 설계 과정에서 정상가족의 긍정적 역할을 보존할 인센티브 도입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한국은 행운인 게 복지국가를 수립할 물적 기반을 갖춘 상태에서 조세부담률과 국가의 공공지출 비중이 지극히 낮아 후발주자로서 사민주의적 모델을 도입할 여유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유럽은 이제 시스템이 완성돼서 길이 안 보이지만 한국은 아니다. 현실은 한국도 자유주의 모델에 사민주의 모델의 요소가 약간 가미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최소한 국가가 뭘 해야 할지 검증된 지침이 있다는 점에서 일본이나 유럽보다 낫다. 미국 역시 젊은 국가라 오바마의 미국식 사민주의 실험이 가능한 거다.
안철수의 새정치와 조정치(鳥정치)
1930년대 일본에서 관료 주도로 지방정치에서 부패한 정당을 몰아내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자는 선거숙정운동이란 대규모의 캠페인이 일어났다. 이후 일본의 정당들은 몰락했고 캠페인 때 형성된 대중조직은 파시즘 체제의 기반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일본의 관료들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학습하고 사회를 온건한 방식으로 개혁하려 했던 선의의 엘리트였다. 그들은 선의로 부패한 정당을 공격했고, 선의로 깨끗한 정치를 주장했다. 그 결과는 군부의 강화와 파시즘의 도래였다.
부패한 정당과 썩은 정치를 공격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이가 정당의 힘이 약화됐을 때 발생하는 수많은 폐해를 고민하고 대안을 내놓는 어려운 문제를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쉬운 얘기만 하는 지도자는 포퓰리스트일 뿐이다.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의회와 정당을 무시하면서 새정치 새정치 노래를 불러대는 안철수가 겹쳐진다.
안철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있게 정당과 의회정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논지를 펼칠 때 사실을 서술하는 언어보다는 상징, 은유, 비유, 그 외 어려운 단어를 즐겨쓰는 안철수 같은 사람들은 특히 유의해야한다. 그들은 자신의 말이 미묘하게 다르게 해석될 구멍을 남겨 여차하면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철수의 반정치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담론에 익숙한 이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안철수는 지금 안철수 특유의 교언영색으로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익을 날것으로 대변함으로써 기성 정당이 이끌지 못한 공익에 대한 윤리적 열정을 견인 중이다. 그런 안철수의 반정치적 언어가 인기를 끄는 건 기존 정당, 언론, 지식인 모두 정치적 언어로 정치를 설명하는 일을 안 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정치를 묘사하는 언어를 보라. 화려한 도덕적 수사, 황폐한 여론조사 수치, 인간관계에 관한 사적 언어로 가득하다. 여론조사만 쳐다보는 싸구려 정치공학이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가 될 동안 사람들의 분노를 그나마 대변할 것 같은 착한 멘토가 등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로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안철수만 탓할 게 아니다. 기존 정당 지식인 언론 모두 공범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정치는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면서 보편적 질서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활동이다. 시대가 변해도 정치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익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공익에 부합하기를 원한다. 안철수는 바로 그런 열망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안철수는 지식기반사회의 첨단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회가 무너뜨린 공동체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독특한 정체성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의에 맞서면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까지 갖춘 지도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적합하다. 정치란 특수이익을 대변하면서 궁극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활동이다. 서구의 좌파정당들도 계급적 이익을 윤리적 지향과 결부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인간은 욕망 뿐 아니라 도덕적 열정에도 반응한다. 지금 한국정치에 부족한 건 후자일지 모른다.
안철수의 정치개혁안은 새롭긴 커녕 백 년 전 미국 진보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낡은 정치관이다. 당시 미국에선 부패한 정당의 권력을 줄이고 전문가 주도 효율적 행정의 비중을 강화하는 "정치에서 행정으로"의 개혁이 시행됐는데 이후 대중민주주의는 약화됐다. 사실 현대의 거버넌스, 신공공관리, 원내정당론 등 정당의 투입 기능보다 정책 산출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산출 중심의 민주주의관은 대체로 그 시기에 빚을 지고 있다. 분명 합리화에 기여한 건 맞는데 그 부작용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당시 시민들은 20세기 정치개혁으로 정치과정에 대한 전례없는 접근권을 보장받았다. 예비선거제, 주민소환제 등등. 그러나 참여의 새로운 기회들은 시민정신의 본질을 변화시켰다. 개인이 정부에 접근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정작 집단동원의 유인은 줄어들었다. 엘리트들은 비엘리트들을 동원할 유인이 사라지고 비엘리트들은 서로 함께할 유인이 사라진다. 그것은 정부에 개인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정치를 낳았고 그 가능성을 이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개인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결국 정부를 민주화한다는 현대의 개혁 조치들은 실제로 정치엘리트들이 대중정치의 장을 우회하여 민주적 지지를 동원하지 않고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먼저 지금 문재인과 안철수가 주장하는 비례대표제 확대는 오히려 계급 편향, 과대대표, 정치권과 유권자의 분리(중요함)를 악화시킬 가망성이 높다. 비례로만 가면 지역구에서 좆빠지게 구를 필요 없이 안철수처럼 무릎팍도사나 힐링캠프 같은 예능TV에 출연해 전국적 인지도 높이고 그 인지도로 쌓은 명성으로 신당을 만들면 그만이다. 표의 비례성을 높이기 위해 독일식 혼합형 비례대표제나 아일랜드식 선호투표제, 프랑스식 결선투표제 등을 고려해볼 수 있지만 어떤 대안이든 안철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역구 축소로 가는 건 위험하다. 지방정부의 힘이 약한 한국에서 지역구 약화는 수도권을 과대대표하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중대선구제와 연동되는 단기 비이양식 투표제는 모든 선거제도 중 최악이다. 이 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한 일본에서 자민당은 장기집권하면서 지역토호와 유착한 "이익유도정치"를 펼쳐 토건국가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리고 부동산 버블 붕괴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일본의 미래를 잃었다. 소선거구제가 승자독식의 문제를 갖고 있지만 정당 간 경쟁을 강화하고 유권자에 대한 반응성을 높이며 대중정치인을 훈련시키기 좋은 장점도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전통이 뿌리내리지 않은 한국에서 비례대표를 늘려봤자 전문가의 지배만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비례대표를 늘린다면 전국 비례대표가 아닌 스웨덴이나 독일처럼 권역별 대선거구 비례대표를 선출해야 하며 정당명부의 비례후보 순번을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전국 명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비례대표를 늘릴 경우 후보만 수백명 되는 수가 있다. 분명한 것은 선거제도개혁은 문제를 개선하는 하나의 접근일 뿐 결코 만능열쇠가 아니란 사실이다. 개혁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으며 시스템은 환경 변화로 낡는다. 시스템이 통치하는 사회란 노무현의 구호가 허망했듯 결국 시스템은 인간이 운영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인간 사회를 합리적-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구상은 안철수 뿐 아니라 18세기 이래로 수많은 엘리트들이 꿈꾸는 미래였다. 불행히도 이는 실현될 수 없다. 정치는 언제나 인간의 끝없는 변덕과 제어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 선거제도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문재인과 안철수 같은 사람들은 만병통치약 같은 수많은 처방들을 새정치라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기준에 딱 들어맞는 그리고 극히 민주적인 선거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10년 전, 지금의 안철수처럼 정치개혁과 투명한 선거를 부르짖으며 법인의 정치후원금 금지, 지구당 폐지같은 혁신적인
김종인이 경제민주화로 뜨니까 이제 문재인과 민주당에서 원조 시비까지 붙는다. 난 1987년 헌법 경제민주화 조항의 원조는 김종인이 아니라는 문재인과 민주당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김종인이 지난 25년 동안 일관되게 경제민주화 노선을 걸을 때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동안 2번이나 집권한 민주당 당신들은 무얼 했는지. 김종인이 경제민주화의 상징이 된 건 그냥 된 게 아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전두환을 설득시켜 당시 재벌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었고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하면서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을 밀어붙이고 참여정부 시절 구 민주당 의원을 하며 금산분리 완화에 반대한 일관된 삶의 궤적이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은 5공부터 현재까지 역대 정부에서 거의 빠짐없이 입각설이 돌았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재벌 보유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재벌 업종전문화,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등의 실적을 올린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만한 경제관료가 과연 문재인 캠프와 민주당에 있긴 하나? 김종인이 새누리당에 간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의회에서 경제민주화를 지지할 다수파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이 민주당에 백날 있어봐야 새누리당이 법안 통과 반대하면 끝이다. 하지만 김종인이 당내에서 박근혜와 새누리당만 설득하면 민주당의 지지는 자동으로 따라온다.
김종인은 언제나 강력한 리더십을 방패삼아 위로부터 개혁을 밀어붙이는 권위주의 시대 기술관료의 모습을 보인다. 역사의 교훈은 민주주의의 발전이 반드시 민주적 방식으로 실현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법과 미국의 민권법 입법과정을 보라. 정치를 볼 때 주의점은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와 규범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개혁은 규범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상충되는 면이 많다. 그러나 개혁이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 강화에 기여한다면 정당성이 획득된다.
반면에 정작 문재인과 민주당이 말하는 경제민주화론은 문재인과 민주당 자신들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하는 재벌개혁론에서 과거 김대중 정권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론을 칵테일로 섞은 수준에 불과하며 결국 문재인의 경제민주화론은 철저히 현실적이지도 실현가능하지도 못한 문재인과 민주당의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경제민주화란 시장의 전횡에 고통받는 경제적 약자들이 시장원리로 환원되지 않은 다양한 교환관계에 기초한 사회 공동체 내부의 "경제시민"으로 조직되어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관철하고 궁극적으로 시장에 대한 공동체의 사회적 통제를 지향하는 일종의 정치적 노선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정치적으로 조직된 경제시민도, 대안적 경제모델도, 시장에 맞서는 시민적 공동체도 없이 헌법조항을 둘러싼 요상한 언쟁과 기술관료적 정책 경쟁으로 전락 중이다. 박상훈의 지적대로 이는 "경제시민 없는 경제민주화"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강력한 대중정당은 시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 조직의 힘이 미약한 한국에서 아래로부터의 경제민주화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의 원천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라. 친노가 장악한 민주당은 지금 정당인지도 모르겠고 안철수는 아예 정당없는 경제민주화를 추진 중이다. 이래서야 김종인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면서 집권직후부터 김종인과의 약속을 어기고 경제민주화를 처음부터 포기한 노무현의 비서실장인 문재인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신뢰할 수 있었을까? 김종인이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의 정치인인 박근혜를 선택한 건 결국 김종인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정치집단은 공산혁명까지 일으킨 내로라 하는 좌파정당들이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에서 공산화의 위협에 맞서야 했던 일본 자민당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극적이고 허망하다. 농민의 이름으로 혁명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이 1950년, 1960년대 농민을 굶겨죽이는 대약진 운동으로 혁명을 배반할 때 일본 자민당은 농업 기본법이라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사회주의적인 농촌보호 정책을 관철하며 농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950년, 1960년대 일본 자민당의 각종 사회입법은 현재 한국에서 논의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50년이나 앞서 실현한 것이다. 그 시기에 도입된 하청기업법, 백화점법은 도시 노동자와 영세상공업자의 권익을 보호하며 자민당 50년 일당지배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복지국가의 롤모델로 알려진 스웨덴 복지국가의 신화 벗겨내기
스웨덴 복지국가의 신화적인 역사를 보면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주도한다는 민중사관에 회의적이 된다. 아담 쉐보르스키의 말대로 "사회민주주의는 인류의 최대 발명품"이며 그 발명은 한손, 비그포르스, 뮐레르같은 소수의 천재적 리더십들이 주도했다. 보통사람의 힘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란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현실화하는 작업은 결국 신화적 지도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놀라운 일을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해냈고 오늘의 복지국가를 만들었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국부로 추앙받는 페르 알빈 한손은 노동계급 출신의 매력적인 총리로 정적들조차 존경할만큼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신화적인 리더십이었다. 그는 보통사람의 언어로 사회 변화를 이끌 줄 아는, 지금으로 치면 룰라 업그레이드 버전의 인물이었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격변의 시기에 17년 동안 재무부 장관을 맡으면서 복지국가의 물적 기반을 닦았다. 그는 전통적 국유화 노선을 버리고 연대임금과 산업합리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권 강화를 도모했던 무서운 인물이었다.
보편적 복지체제의 창시자 구스타브 뮐레르는 15년간 사회부 장관을 지내며 전통적 재분배 정책 대신 보편적 복지란 당시로선 혁신적인 노선을 수립하여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실력을 키워 복지국가의 관료화를 제어하려 했던 탁월한 리더였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두 설계자 비그포르스와 뮐레르는 늘 마찰을 빚는 물과 기름의 관계였다. 비그포르스는 뭘레르의 보편적 복지 노선을 이해하지 못했고 뮐레르는 비그포르스의 국유화 포기에 부정적이었다. 둘을 화합시킨 건 한손 총리였다. 천운이 따로 없었다. 비그포르스-뮐레르란 천재들과 이들을 화합시킨 한손의 신화적 지도력, 최상의 대외경제 여건과 촘촘한 공동체 관계망, 소련에 맞서 형성된 강력한 내셔널리즘, 이 모든 조건이 맞물려 스웨덴 복지국가란 신화가 탄생했다. 이 신화를 재현하는 게 가능할까 싶다.
비그포르스는 70년대까지 살며 그의 최종 목표였던 산업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지원했다. 이 계획은 임노동자 기금이란 정책으로 구체화됐는데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고 이후 스웨덴 복지국가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천재도 실패한 일이다. 70년대 임노동자 기금안이란 유령이 떠돌던 스웨덴은 그야말로 세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의 문턱까지 온 결정적 순간을 맞이했다. 이 고비에서 그들은 좌절했고 사회주의의 꿈은 영영 멀어졌다. 아마 기회는 다시 안 올 것이다.
스웨덴 복지국가는 무려 3세대에 걸쳐 사민당이란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좌파정당에서 유능한 리더십들이 나왔기에 신화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역으로 말해서 이런 정당과 리더십이 없으면 신화를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스웨덴 사민주의 연구자 신정완 교수는 한 강연에서 "우리도 스웨덴처럼 되는 게 가능한가요?"란 간절한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한국의 좌파는 독일의 녹색당과 좌파당을 성공적인 좌파정당의 모델로 극찬하지만 그 정당들에 요슈카 피셔와 오스카 라퐁텐이란 강력한 리더십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별로 언급하지 않으며 집권좌파정당 사민당의 존재가 도약의 발판이었다는 점도 강조하지 않는다. 좌파정당이 평당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건 패망의 지름길이다. 다양한 분파 간의 세력 균형이 강력한 리더십의 형성을 방해했던 독일 사민당은 나치에 쓸려나갔고 얄마르 브란팅의 지도력 아래 통일된 대오를 수립했던 스웨덴 사민당은 빛나는 역사를 만들었다.
성공한 좌파정당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1.사기캐릭에 가까운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고 2.현실주의 노선이 급진주의 노선을 숙청하거나 포섭했으며 3.자유주의 정당과의 연정에 적극적이었고 4.무엇보다 운이 좋았다. 급진파의 노선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게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의 주장은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다. "부르주아 정당과의 타협은 기만이며,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에 맞서자." 그러다 파시즘에 쓸려나가고 자유주의의 변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대공황이 터졌을 때, 케인즈주의가 오일쇼크로 무너졌을 때,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급진파는 늘 "이번에야말로 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늘 자본주의 대신 자기들이 망했다.
급진파들은 늘 자본주의 질서에 안주하는 사민주의 정당의 우경화를 비판한다. 물론 상당 부분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100년 동안 사민주의와 차별화되는 수준의 반자본주의 모델을 개척한 적은 없다. "지금은 곤란하다 100년만 더 기다려달라" 적어도 스웨덴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그런 무력한 예언 따위 하지 않았다. 비그포르스는 피안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면서도 전환기의 정치경제학 패러다임을 학습하고 당장 10년, 20년 안에 해낼 수 있는 실천 프로그램을 세워 현존하는 최선의 좌파 모델을 수립했다. 결국 좌파들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성공하려면 100년 전 비그포르스가 그랬듯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통달하고 전환기의 새로운 정치경제 패러다임을 수립하여 그것을 정치적 지도력과 결부시키는 천재적 능력이 필요한데... 차라리 그냥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믿고 말겠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 비그포르스는 원래 당내 급진파의 리더였다. 하지만 그는 당의 지도자 한손의 노선에 반대하는 급진파의 추대를 스스로 뿌리치고 한손을 지지하여 당의 노선을 통합했다. 그리고 자신의 원대한 목표를 한손의 지도력 아래 관철했다. 급진파들은 100년 전부터 좌파정당의 우경화를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막상 노동계급의 권익을 확장시키고 복지국가란 새로운 모델을 수립한 건 그 더러운 부르주아들과 타협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급진파 비그포르스의 노선 전환은 여러모로 교훈적이다.
북유럽 복지국가 최초의 보편적 복지제도가 스웨덴과 노르웨이 모두 하필 출산수당과 아동수당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인구-젠더-가족-출산 문제는 북유럽 복지국가 형성기에 전략적으로 동원된 창조적 의제였고 좌파정당은 이 의제를 지배하면서 승리했다. 1934년 스웨덴에서 출간된 뮈르달 부부의 기념비적 저작 "인구문제의 위기"는 저출산의 원인이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경제적 불안이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진단을 내놓으며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스웨덴 사민당은 이 보고서를 채택하여 재집권에 성공했다.
뮈르달 부부는 노벨상 커플로 유명한 천재 부부로 남편 군나르 뮈르달은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의 선구자로 노벨 경제학상을, 그의 배우자였던 알바 뮈르달은 정치가, 페미니스트 사회학자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아주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먹은 부농들이었다. 재미있는 건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인 또다른 천재이자 당시 사회부 장관 묄레르는 "알바 뮈르달의 사회공학적 관리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에 냉소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를 지지하여 선거에서 완승을 거뒀다는 것이다. 하여간 무서운 인간들이다. 구스타브 묄레르는 저출산과 인구 문제를 우파로부터 빼앗는 것이 집권 플랜의 핵심이라고 봤다. 뼛속까지 소련식 관료주의를 혐오하고 노동계급의 힘을 신뢰했던 그는 뮈르달 부부 보고서의 전문가주의적 경향을 제거한 대중적인 정책수단을 기획한다.
뮈르달 부부의 혁신적 보고서는 인구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보편적 출산장려 정책과 주거 복지, 여성의 취업조건 개선, 노동시간 단축 등 광범위한 사회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이는 당시 여론의 큰 지지를 받지만, 맬서스주의를 믿는 노조의 반대에 부딪친다. 일찍부터 보편적 복지국가 노선을 추구한 묄레르는 뮈르달 부부의 제안이 그의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전략임을 간파한다. 대신 그는 관료주의와 급진 페미니즘적 색채가 강한 뮈르달 부부의 공공보육시설안을 폐기하고 출산수당을 밀어붙여 반대파를 잠재운다
묄레르는 뮈르달 부부의 전문가 중심 개입주의와 급진적 페미니즘에 냉소적이었다. 그는 오히려 가족과 민족을 중시하는 보수층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뮈르달 구상을 한손 총리의 전설적 슬로건 "국민의 집"과 결합시켜 1936년 총선 압승을 이끈다. "국민의 집"이라는 구호는 스웨덴의 국부 페르 알빈 한손 총리의 작품으로 가부장적 온정주의의 색채 탓에 당내 반발에 직면했다. 비그포르스도 이 극우적 구호를 지독히 싫어했다. 하지만 타고난 전략가 묄레르는 이 구호를 적극 활용하여 새로운 역사를 쓴다.
1937년 묄레르가 도입한 스웨덴의 출산수당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임산부에게 지급된 진보적 사회정책이었다. 몇 년 후 아동수당이 통과됐고, 정치적 타협을 위해 폐기된 공공보육서비스도 훗날 도입된다. 그후 스웨덴은 최고의 성평등 국가가 된다. 보편적 복지국가는 처음부터 젠더-가족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아 탄생했다. 스웨덴 리더들은 산업화에 따른 사회변동이 노동-젠더 문제의 동시 해결을 요구한다는 걸 알았고, 계급정치와 젠더정치를 결합시켰다. 물론 젠더정치는 항상 계급정치의 하위 파트너였다.
여성운동이 사민당과 노동운동에 종속되다시피 한 스웨덴이 여성운동이 독자적 흐름을 형성한 미국, 독일, 영국보다 더 강력한 성평등 국가가 됐다는 사실은 흔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스웨덴 사민당은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긴장관계를 성공적으로 조율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웨덴 사민당은 20세기 초 60여 년 동안 얄마르 브란팅-페르 알빈 한손-타게 엘란데르로 이어지는 넘사벽의 지도자들을 3대에 걸쳐 배출하면서 44년 장기집권 시대를 연다. 세계사에서 이 정도 운빨은 로마제국의 5현제, 청제국의 강옹건 시대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한국이 그대로 모방할 복지국가 모델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스웨덴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했던 복지국가의 최대치와 파편적으로 개인화된 문제를 이상과 결합시켜 공적 이슈로 사회화하는 정치적 이성이지 모델 그 자체가 아니다.
이런 스웨덴식 복지에도 문제점은 있다. 스웨덴식 복지의 그늘은 이혼율이 높아 청소년들의 내상이 심하다. 스웨덴의 16~19세 청소년들의 제일 큰 소망이 친엄마 친아빠와 저녁 먹는 것이다. 미혼모에 대한 지나친 복지가 오히려 가정 내 결속을 끊어 놓은 측면이 있다. 이렇게 개인화되는 복지와 해체되는 전통적 가족공동체 사이의 괴리는 생각보다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물론 한국이 벌써부터 비혼 가정에 대한 관대한 복지를 걱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복지제도 설계 과정에서 정상가족의 긍정적 역할을 보존할 인센티브 도입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한국은 행운인 게 복지국가를 수립할 물적 기반을 갖춘 상태에서 조세부담률과 국가의 공공지출 비중이 지극히 낮아 후발주자로서 사민주의적 모델을 도입할 여유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유럽은 이제 시스템이 완성돼서 길이 안 보이지만 한국은 아니다. 현실은 한국도 자유주의 모델에 사민주의 모델의 요소가 약간 가미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지만 최소한 국가가 뭘 해야 할지 검증된 지침이 있다는 점에서 일본이나 유럽보다 낫다. 미국 역시 젊은 국가라 오바마의 미국식 사민주의 실험이 가능한 거다.
안철수의 새정치와 조정치(鳥정치)
1930년대 일본에서 관료 주도로 지방정치에서 부패한 정당을 몰아내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자는 선거숙정운동이란 대규모의 캠페인이 일어났다. 이후 일본의 정당들은 몰락했고 캠페인 때 형성된 대중조직은 파시즘 체제의 기반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일본의 관료들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학습하고 사회를 온건한 방식으로 개혁하려 했던 선의의 엘리트였다. 그들은 선의로 부패한 정당을 공격했고, 선의로 깨끗한 정치를 주장했다. 그 결과는 군부의 강화와 파시즘의 도래였다.
부패한 정당과 썩은 정치를 공격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이가 정당의 힘이 약화됐을 때 발생하는 수많은 폐해를 고민하고 대안을 내놓는 어려운 문제를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쉬운 얘기만 하는 지도자는 포퓰리스트일 뿐이다.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의회와 정당을 무시하면서 새정치 새정치 노래를 불러대는 안철수가 겹쳐진다.
안철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있게 정당과 의회정치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논지를 펼칠 때 사실을 서술하는 언어보다는 상징, 은유, 비유, 그 외 어려운 단어를 즐겨쓰는 안철수 같은 사람들은 특히 유의해야한다. 그들은 자신의 말이 미묘하게 다르게 해석될 구멍을 남겨 여차하면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철수의 반정치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담론에 익숙한 이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안철수는 지금 안철수 특유의 교언영색으로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익을 날것으로 대변함으로써 기성 정당이 이끌지 못한 공익에 대한 윤리적 열정을 견인 중이다. 그런 안철수의 반정치적 언어가 인기를 끄는 건 기존 정당, 언론, 지식인 모두 정치적 언어로 정치를 설명하는 일을 안 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정치를 묘사하는 언어를 보라. 화려한 도덕적 수사, 황폐한 여론조사 수치, 인간관계에 관한 사적 언어로 가득하다. 여론조사만 쳐다보는 싸구려 정치공학이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가 될 동안 사람들의 분노를 그나마 대변할 것 같은 착한 멘토가 등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로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안철수만 탓할 게 아니다. 기존 정당 지식인 언론 모두 공범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정치는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면서 보편적 질서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활동이다. 시대가 변해도 정치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익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공익에 부합하기를 원한다. 안철수는 바로 그런 열망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안철수는 지식기반사회의 첨단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회가 무너뜨린 공동체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독특한 정체성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의에 맞서면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까지 갖춘 지도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적합하다. 정치란 특수이익을 대변하면서 궁극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활동이다. 서구의 좌파정당들도 계급적 이익을 윤리적 지향과 결부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인간은 욕망 뿐 아니라 도덕적 열정에도 반응한다. 지금 한국정치에 부족한 건 후자일지 모른다.
안철수의 정치개혁안은 새롭긴 커녕 백 년 전 미국 진보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낡은 정치관이다. 당시 미국에선 부패한 정당의 권력을 줄이고 전문가 주도 효율적 행정의 비중을 강화하는 "정치에서 행정으로"의 개혁이 시행됐는데 이후 대중민주주의는 약화됐다. 사실 현대의 거버넌스, 신공공관리, 원내정당론 등 정당의 투입 기능보다 정책 산출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산출 중심의 민주주의관은 대체로 그 시기에 빚을 지고 있다. 분명 합리화에 기여한 건 맞는데 그 부작용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당시 시민들은 20세기 정치개혁으로 정치과정에 대한 전례없는 접근권을 보장받았다. 예비선거제, 주민소환제 등등. 그러나 참여의 새로운 기회들은 시민정신의 본질을 변화시켰다. 개인이 정부에 접근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정작 집단동원의 유인은 줄어들었다. 엘리트들은 비엘리트들을 동원할 유인이 사라지고 비엘리트들은 서로 함께할 유인이 사라진다. 그것은 정부에 개인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정치를 낳았고 그 가능성을 이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개인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 결국 정부를 민주화한다는 현대의 개혁 조치들은 실제로 정치엘리트들이 대중정치의 장을 우회하여 민주적 지지를 동원하지 않고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먼저 지금 문재인과 안철수가 주장하는 비례대표제 확대는 오히려 계급 편향, 과대대표, 정치권과 유권자의 분리(중요함)를 악화시킬 가망성이 높다. 비례로만 가면 지역구에서 좆빠지게 구를 필요 없이 안철수처럼 무릎팍도사나 힐링캠프 같은 예능TV에 출연해 전국적 인지도 높이고 그 인지도로 쌓은 명성으로 신당을 만들면 그만이다. 표의 비례성을 높이기 위해 독일식 혼합형 비례대표제나 아일랜드식 선호투표제, 프랑스식 결선투표제 등을 고려해볼 수 있지만 어떤 대안이든 안철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역구 축소로 가는 건 위험하다. 지방정부의 힘이 약한 한국에서 지역구 약화는 수도권을 과대대표하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중대선구제와 연동되는 단기 비이양식 투표제는 모든 선거제도 중 최악이다. 이 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한 일본에서 자민당은 장기집권하면서 지역토호와 유착한 "이익유도정치"를 펼쳐 토건국가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리고 부동산 버블 붕괴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일본의 미래를 잃었다. 소선거구제가 승자독식의 문제를 갖고 있지만 정당 간 경쟁을 강화하고 유권자에 대한 반응성을 높이며 대중정치인을 훈련시키기 좋은 장점도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전통이 뿌리내리지 않은 한국에서 비례대표를 늘려봤자 전문가의 지배만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비례대표를 늘린다면 전국 비례대표가 아닌 스웨덴이나 독일처럼 권역별 대선거구 비례대표를 선출해야 하며 정당명부의 비례후보 순번을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전국 명부를 그대로 유지하고 비례대표를 늘릴 경우 후보만 수백명 되는 수가 있다. 분명한 것은 선거제도개혁은 문제를 개선하는 하나의 접근일 뿐 결코 만능열쇠가 아니란 사실이다. 개혁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으며 시스템은 환경 변화로 낡는다. 시스템이 통치하는 사회란 노무현의 구호가 허망했듯 결국 시스템은 인간이 운영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인간 사회를 합리적-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구상은 안철수 뿐 아니라 18세기 이래로 수많은 엘리트들이 꿈꾸는 미래였다. 불행히도 이는 실현될 수 없다. 정치는 언제나 인간의 끝없는 변덕과 제어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 선거제도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문재인과 안철수 같은 사람들은 만병통치약 같은 수많은 처방들을 새정치라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기준에 딱 들어맞는 그리고 극히 민주적인 선거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10년 전, 지금의 안철수처럼 정치개혁과 투명한 선거를 부르짖으며 법인의 정치후원금 금지, 지구당 폐지같은 혁신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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