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 5대 대선 당시.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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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52회 작성일 20-01-07 11:55본문
1963년 10월 15일 오전, 투표를 마친 박정희 부부는 두 대의 승용차편으로 경주로 달렸다.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 박종규 경호대장, 지홍창 주치의, 신동관 경호관이 수행했다.일행은 경주 불국사 관광호텔에 들었다. 이 운명의 밤 윤보선은 미국 정보기간 요원의 집에서, 그리고 박정희는 민족사의 영광이 서린 불국사 근처에서 국민의 심판을 기다렸다.
박정희 부부는 110호실, 이후락 실장은 103호실에 들었다. 110호실에서는 개표 중계 라디오 방송소리가 새나왔다. 103호실에서는 이 실장에게 개표결과를 알리는 전화벨 소리가 자주 울렸다.개표 직전까지도 박정희의 낙승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초저녁 투표함의 뚜껑이 열리면서의외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윤보선 후보가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6일 새벽 3시 현재윤보선은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에서 박정희를 크게 앞섰다.
박정희는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에서 윤보선을 압도했다. 부산은 막상막하. 남북으로 표의흐름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윤보선은 약 82만 표, 박정희는 약 80만 표. 2만 표이던 표차는 계속벌어져 한때는 23만 표의 격차를 이루었다.
불국사 관광호텔 110호실에선 라디오 소리도 멎었다. 박정희는 책장을 넘기다가 잠에 들었다고 전해진다.육영수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바깥으로 들고 나와 심각한 표정으로 개표방송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박정희는 이후락 실장, 주치의 지홍창 등 수행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박 의장은 " 간밤에 개표중 사고는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이 실장은 "개표는 순조롭지만 표차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라고말했다. 그때 윤보선은 약 7만 표 차이로 박정희를 앞서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공명선거란 집권자가 떨어져도 좋다는 마음의 준비와 결심이 있어야지. 사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이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은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는 선거에 군부가 개입하는것은 저지시켰으나 육군본부와 논산훈련소에서만은 지휘관이 장병들을 상대로 박정희 홍보를 하도록 했다.16일 새벽 박정희의 패색이 짙어진다고 판단한 민기식은 책상정리를 하면서 형무소에 들어가 입을 옷도 준비시켰다고 한다. 민기식은 육군 본부와 논산을 제외하고는 군인들이 몰려 사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윤보선후보의 표가 박정희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군인들이 처음으로 소신껏 투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역 앞 에비슨 회관 안에 있던 공화당사는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기획상황실에서 전화기 19대를통해서 개표상황을 집계하던 20여 명의 당원들은 15일 자정을 넘기면서 윤보선이 본격적으로 앞서나가자연필과 전화통을 집어던지고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들을 지휘하던 김용태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5.16 전야 광명인쇄소에서 김종필, 이낙선과 함께 혁명공약을 인쇄하는 일을 감독했던 김용태는 운전기사를시켜서 권총을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선거에서의 패배는 자신들이 목숨을 걸었던 5.16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을뜻한다고 생각한 그는 에비슨 회관 뒷동산의 아카시아 숲에서 자결할 궁리를 했다는 것이다. 15일 밤에는 사람들로 붐비던 공화당사도 박정희가 질 것 같은 분위기로 돌자 어느새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일부 당원들은 컴컴한 방 구석에 모여 "이러면 진다. 중앙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개표를 중단시키자"고 합의했다."김형욱 정보부장의 지시이다. 개표를 중단시키자"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단호하게 눌러버린 사람이김용태였다고 전한다. 그는 "그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어! 조용히 기다려 봐!"라고 호통을 쳤다. 제 자리로 돌아간당원들은 입버릇처럼 되어 있던 '절대다수'니 '65%지지'니 하는 소리는 아예 팽캐치고 '그저 한 표라도 더 나와야 할 텐데'하면서 발버둥치는 모습들이었다고 한다.
16일 오전, 개표 진척도가 늦었던 전라도, 경상도의 투표함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박정희 표가 쏟아지면서 박정희,윤보선의 표차는 좁혀지기 시작했다. 16일 오후가 되면서 박정희 후보의 신승이란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16일저녁부터는 박정희가 역전승의 대세를 확실하게 잡았다. 17일 새벽 4시 현재 박정희는 윤보선에 대해 약 9만 2,000표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박정희를 경주까지 수행했던 한 측근은 "10월 16일 새벽을 넘기는 일은 5.16새벽 한강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어려웠고 지루했다"고 말했다. 중앙선관위는 17일 오후 3시에 전국 개표를 모두 끝냈다. 5대 대통령 선거의 투표율은 84.9%, 유효투표율은 91.3%,박정희는 470만 2,640표를 얻어 454만 6,614표를 얻은 윤보선을 15만 6,026표 차이로 눌러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서울, 경기, 강원, 충청 지역에서 크게 패배한 박정희는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서의 압승으로 이를 만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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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대통령 선거의 핵심적 의미는 다수의 농민과 진보, 개혁, 좌파 세력의 지지를 업은 박정희로 대표되는근대화 세력이 지주 계층의 지지를 모은 윤보선의 보수적 정치세력을 눌렀다는 점이다. 군인 엘리트가부국강병론의 국가주의에 기초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역사의 흐름을 이끌도록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은셈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근대화 작업이 우리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역사관을갖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런 역사관을 매개로 하여 미래에 대한 비전과 과거에 대한 해석을 일관성 있게 연결시킴으로써 전략과 정책에 심도를 더하고 국민들을 동원하는 정치적 무기로 활용했다.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가 지녔던 혁명적 역사관의 핵심은 한민당-민주당 계열의 윤보선 세력을 조선조 양반,문민정치의 생리(당파성, 사대성, 위선적 명분론)을 이어받은 봉건적 잔재, 즉 수구적 정치세력으로 본 셈이다.박정희는 5.16 주체세력을 근대적 국가엘리트라고 규정한 뒤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킨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자조정신, 자립경제, 잦두국방에 기초한 진정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문제는그가 봉건적, 사대적, 파당적 정체세력으로 규정했던 구 민간 정치 세력이 서구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라는명분을 확보하여 국민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근대화되어야 할 수구, 사대 세력이었지만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눈에는 민주투사들로 비쳐졌다. 그 결과가 윤보선의 많은 득표로 나타났던 것이다. 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유권자들은 일단 박정희 주도의 근대화 세력에 국정의 고삐를 넘겨주었지만 민주주의 요구세력에도 엇비슷한 지지를보냄으로써 강력한 견제장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박정희는 이 견제장치로 해서 때로는 더욱 열심히 일하고때로는 반발하고 때로는 경멸하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국가를 이끌게 된다.
5대 대통령 선거는 전라도 유권자들이 경상도 후보를 지지한 드문 경우였다. 호남 지방에 뿌리박은 한민당계열의 김준연, 서민호, 조영규, 민영남 같은 인물들이 윤보선 후보 주변에서 물러났거나 밀려났고 나용균, 이정래,조한백, 정성태 같은 민주당 구파 출신 김도연 계 인사들이 당 내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있다. 그렇더라도 전남북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약 35만 표차로 이긴 데는 이런 정치적 시각만으로 설명이되지 않는 좀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지역의식을 뛰어넘게 만든(당시의 지역의식은 정치인들의 본격적인선동이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지금처럼 심하지도 않았다) 더 큰 명제가 표의 흐름을 경정했다는 말이다.
그 명제란 근대화냐 민주화냐, 민족적 민주주의냐 서구식 민주주의냐, 사대냐 자주냐, 국권이 우선인가 인권이우선인가, 경제발전인가 정치발전인가로 요약,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양대 흐름이었다. 이 역사적 명제를 놓고우리 국민들은 절묘한 선택을 했다. 15만여 표차로 권력을 박정희의 근대화 세력에게 넘겨주는 대신에 민주화세력에게는 '정신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는 양대 세력이 대한민국이란 울타리 안에서 서로 견제,경쟁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국민과 국가를 위한 충성경쟁을 벌이도록 한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근소한 표차로승부가 갈린 5대 대통령 선건느 한국 현대사의 진로와 주인공을 결정한 역사적 선거였다.
5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미국이었다.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박정희 측을 감시하던 주한미국 대사관은 10월 16일 국무부에 올린 보고서에서 '윤보선의 기대 이상의 선전, 군인표의 윤보선 지지, 그리고군사정부의 공명선거 의지'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새뮤얼 버거 대사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군사정부가 투표결과에대해 과신한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군사정부는 의식적으로 질서 있고 효육적인 투개표가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다했다' 고 높게 평가했다.
- 趙甲濟, 朴正熙 6권, 조갑제 닷컴 中 -
박정희 부부는 110호실, 이후락 실장은 103호실에 들었다. 110호실에서는 개표 중계 라디오 방송소리가 새나왔다. 103호실에서는 이 실장에게 개표결과를 알리는 전화벨 소리가 자주 울렸다.개표 직전까지도 박정희의 낙승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초저녁 투표함의 뚜껑이 열리면서의외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윤보선 후보가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6일 새벽 3시 현재윤보선은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에서 박정희를 크게 앞섰다.
박정희는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에서 윤보선을 압도했다. 부산은 막상막하. 남북으로 표의흐름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윤보선은 약 82만 표, 박정희는 약 80만 표. 2만 표이던 표차는 계속벌어져 한때는 23만 표의 격차를 이루었다.
불국사 관광호텔 110호실에선 라디오 소리도 멎었다. 박정희는 책장을 넘기다가 잠에 들었다고 전해진다.육영수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바깥으로 들고 나와 심각한 표정으로 개표방송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박정희는 이후락 실장, 주치의 지홍창 등 수행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박 의장은 " 간밤에 개표중 사고는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이 실장은 "개표는 순조롭지만 표차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라고말했다. 그때 윤보선은 약 7만 표 차이로 박정희를 앞서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공명선거란 집권자가 떨어져도 좋다는 마음의 준비와 결심이 있어야지. 사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이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은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는 선거에 군부가 개입하는것은 저지시켰으나 육군본부와 논산훈련소에서만은 지휘관이 장병들을 상대로 박정희 홍보를 하도록 했다.16일 새벽 박정희의 패색이 짙어진다고 판단한 민기식은 책상정리를 하면서 형무소에 들어가 입을 옷도 준비시켰다고 한다. 민기식은 육군 본부와 논산을 제외하고는 군인들이 몰려 사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윤보선후보의 표가 박정희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군인들이 처음으로 소신껏 투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역 앞 에비슨 회관 안에 있던 공화당사는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기획상황실에서 전화기 19대를통해서 개표상황을 집계하던 20여 명의 당원들은 15일 자정을 넘기면서 윤보선이 본격적으로 앞서나가자연필과 전화통을 집어던지고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들을 지휘하던 김용태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5.16 전야 광명인쇄소에서 김종필, 이낙선과 함께 혁명공약을 인쇄하는 일을 감독했던 김용태는 운전기사를시켜서 권총을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선거에서의 패배는 자신들이 목숨을 걸었던 5.16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을뜻한다고 생각한 그는 에비슨 회관 뒷동산의 아카시아 숲에서 자결할 궁리를 했다는 것이다. 15일 밤에는 사람들로 붐비던 공화당사도 박정희가 질 것 같은 분위기로 돌자 어느새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일부 당원들은 컴컴한 방 구석에 모여 "이러면 진다. 중앙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개표를 중단시키자"고 합의했다."김형욱 정보부장의 지시이다. 개표를 중단시키자"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단호하게 눌러버린 사람이김용태였다고 전한다. 그는 "그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어! 조용히 기다려 봐!"라고 호통을 쳤다. 제 자리로 돌아간당원들은 입버릇처럼 되어 있던 '절대다수'니 '65%지지'니 하는 소리는 아예 팽캐치고 '그저 한 표라도 더 나와야 할 텐데'하면서 발버둥치는 모습들이었다고 한다.
16일 오전, 개표 진척도가 늦었던 전라도, 경상도의 투표함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박정희 표가 쏟아지면서 박정희,윤보선의 표차는 좁혀지기 시작했다. 16일 오후가 되면서 박정희 후보의 신승이란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16일저녁부터는 박정희가 역전승의 대세를 확실하게 잡았다. 17일 새벽 4시 현재 박정희는 윤보선에 대해 약 9만 2,000표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박정희를 경주까지 수행했던 한 측근은 "10월 16일 새벽을 넘기는 일은 5.16새벽 한강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어려웠고 지루했다"고 말했다. 중앙선관위는 17일 오후 3시에 전국 개표를 모두 끝냈다. 5대 대통령 선거의 투표율은 84.9%, 유효투표율은 91.3%,박정희는 470만 2,640표를 얻어 454만 6,614표를 얻은 윤보선을 15만 6,026표 차이로 눌러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서울, 경기, 강원, 충청 지역에서 크게 패배한 박정희는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서의 압승으로 이를 만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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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대통령 선거의 핵심적 의미는 다수의 농민과 진보, 개혁, 좌파 세력의 지지를 업은 박정희로 대표되는근대화 세력이 지주 계층의 지지를 모은 윤보선의 보수적 정치세력을 눌렀다는 점이다. 군인 엘리트가부국강병론의 국가주의에 기초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역사의 흐름을 이끌도록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은셈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근대화 작업이 우리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역사관을갖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런 역사관을 매개로 하여 미래에 대한 비전과 과거에 대한 해석을 일관성 있게 연결시킴으로써 전략과 정책에 심도를 더하고 국민들을 동원하는 정치적 무기로 활용했다.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가 지녔던 혁명적 역사관의 핵심은 한민당-민주당 계열의 윤보선 세력을 조선조 양반,문민정치의 생리(당파성, 사대성, 위선적 명분론)을 이어받은 봉건적 잔재, 즉 수구적 정치세력으로 본 셈이다.박정희는 5.16 주체세력을 근대적 국가엘리트라고 규정한 뒤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킨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고자조정신, 자립경제, 잦두국방에 기초한 진정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근대화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문제는그가 봉건적, 사대적, 파당적 정체세력으로 규정했던 구 민간 정치 세력이 서구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라는명분을 확보하여 국민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근대화되어야 할 수구, 사대 세력이었지만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눈에는 민주투사들로 비쳐졌다. 그 결과가 윤보선의 많은 득표로 나타났던 것이다. 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유권자들은 일단 박정희 주도의 근대화 세력에 국정의 고삐를 넘겨주었지만 민주주의 요구세력에도 엇비슷한 지지를보냄으로써 강력한 견제장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박정희는 이 견제장치로 해서 때로는 더욱 열심히 일하고때로는 반발하고 때로는 경멸하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국가를 이끌게 된다.
5대 대통령 선거는 전라도 유권자들이 경상도 후보를 지지한 드문 경우였다. 호남 지방에 뿌리박은 한민당계열의 김준연, 서민호, 조영규, 민영남 같은 인물들이 윤보선 후보 주변에서 물러났거나 밀려났고 나용균, 이정래,조한백, 정성태 같은 민주당 구파 출신 김도연 계 인사들이 당 내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있다. 그렇더라도 전남북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약 35만 표차로 이긴 데는 이런 정치적 시각만으로 설명이되지 않는 좀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지역의식을 뛰어넘게 만든(당시의 지역의식은 정치인들의 본격적인선동이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지금처럼 심하지도 않았다) 더 큰 명제가 표의 흐름을 경정했다는 말이다.
그 명제란 근대화냐 민주화냐, 민족적 민주주의냐 서구식 민주주의냐, 사대냐 자주냐, 국권이 우선인가 인권이우선인가, 경제발전인가 정치발전인가로 요약,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양대 흐름이었다. 이 역사적 명제를 놓고우리 국민들은 절묘한 선택을 했다. 15만여 표차로 권력을 박정희의 근대화 세력에게 넘겨주는 대신에 민주화세력에게는 '정신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는 양대 세력이 대한민국이란 울타리 안에서 서로 견제,경쟁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국민과 국가를 위한 충성경쟁을 벌이도록 한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근소한 표차로승부가 갈린 5대 대통령 선건느 한국 현대사의 진로와 주인공을 결정한 역사적 선거였다.
5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미국이었다.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박정희 측을 감시하던 주한미국 대사관은 10월 16일 국무부에 올린 보고서에서 '윤보선의 기대 이상의 선전, 군인표의 윤보선 지지, 그리고군사정부의 공명선거 의지'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새뮤얼 버거 대사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군사정부가 투표결과에대해 과신한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군사정부는 의식적으로 질서 있고 효육적인 투개표가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다했다' 고 높게 평가했다.
- 趙甲濟, 朴正熙 6권, 조갑제 닷컴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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