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 마지막 사랑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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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61회 작성일 20-01-09 13:33본문
보통 첫사랑은 스쳐가는 소나기에 간절하고 애절함이 느껴지는 것이지만,
나는 꽤 긴 인연을 이어가 다른것 같다. 그래서 간절함보단 애절함에 슬픔이 더해져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살던 지역은 비평준화지역이었지만,
난 학업보단 게임에 빠져 살고 있었다.
밤 늦게 까지 게임하고, 학교에서 꿀잠자는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성적은 반에서 내 밑에 한 3~5명 있었을 정도였다.(모자른 학우들 제외하면 사실상 꼴등)
이렇게 노가다인생 직행하는 버스에 탈려고 하다가 한가지 사건으로 구제가 된다.
중2때 담당 수학선생님이 전형적인 꼰대기질있는 선생인데,
M자 대머리에 21C 교육체제로 보기 힘든 쌍팔년도 체벌을 휘두르는 선생이었다.
그래서 대놓고 자긴 그렇고, 책을 탑처럼 좀 쌓아두고, 살짝 졸거나 빌려온 판타지소설
보면서 시간 떼우면서 넘겼었다.
판타지소설이 유행하다 보니 잠보단 책보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그래서 어려권 빌려서
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주변 친구들이랑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일진넘 한마리가 빌려달라고 앙망해서
빌려줬더니, 수학시간에 대놓고 쳐보다가 걸려서 책 반납당했다.
그넘은 선생님이 안 돌려준다고,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개솔을 시전하더라.
바로 선빵치고도, 화가 안 풀려서 쌓아둔 책 하나 집어 들고 대가리 ㅈㅎ시키다가
이상하게 더 화가 나갈래, 의자로 내려쳐서 두부외상 시켰다.
정학만 받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학교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가중처벌을 받다 보니 어린 나이에 혹독한 처벌때문일까? 너무 서러웠다.
그렇게 나는 사회의 잣대에 떳떳해 지기 위해 펜을 부여잡고 공부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열공으로 중2 2학기 때 반에서 중상위권에 올라갔지만,
중3 담임선생님의 진학상담은 비관적이었다.
학업이 별 관심없으셨던 부모님도 선생님의 상담에 안되겠다 싶었던지, 학원을 끊어주셨다.
그 학원은 특이하게 남녀 짝궁에 지정좌석제를 운영되었는데, 그렇게 나는 그녀와 짝궁이 되었다.
그녀의 명칭은 이하 순수 또는 그녀 라고 하겠다. 이건 그녀가 잘 사용한 닉네임이다.
처음 본 순수는 배려심이 깊은 여자였다. 상급반에 배정되어 수업에 잘 못 따라가는
나에게 선뜻 자기가 필기한 부분을 살짝 밀어주며 보여줬다. 남녀사이의 부담감때문에
멀뚱거린 나에게 수업도중 말은 못하겠던지 살짝 눈웃음짓는 미소에 설레임을 느끼고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순수의 머리스타일은 위 이미지처럼 옆머리가 살짝 귓가에 걸치는 포니테일인데,
집중해서 공부 할 때 옆머리 사이로 살짝 자애롭게 미소 짓는 것에 호감을 넘어 반하게 되었다.
나는 성적이 좋은 순수에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보다 공부 못하면 쪽팔리자나?'
이런 생각으로 그녀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문제아라는 안 좋은 소문이 있던 나를 노력하는 모습이 좋게 보여서일까?
자존심 접어두고 헷갈리는 문제의 풀이방법을 물어볼때면문항의 의미 하나하나를 풀이해주며 응원? 격려? 뭐랄까 계속 호의를 받게 되었다.
학원은 같은 반이지만, 학교 반은 달라 복도에서 마주치면 뻘줌한 상태로 쭈삣쭈삣 행동한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안녕?" 이라고 말하면서 "이제부터 서로 마주치면 인사하자" 라는 말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가는 것보다 더 감동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호의+관심에
성적이 더 좋아져 반에서 34등이 전교 34등이 되었다.
(이 때 학원에서 학원비 3개월로 장학비 땡처리 받음 ㅍㅌㅊ? 하지만 그녀보다 성적이 2점 정도 낮았다.)
학업의 비중때문인지
중3 처음 진로 + 진학을 결정되어야 될 시기에 학원 반 애들끼리 어느학교 갈건지, 장래희망, 꿈같은 걸 애기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나는 구체적인 것보단 두리뭉실하게 그냥 평범하게 살고, 후회없이 사는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 말하고 부터 나한테 반한 다른 학교 걸레년이 있었는데, 이걸 계기로 언제 고백해서 내 마음을 표현할까
생각에서 '중요한 시기라 차일꺼 같아 표현을 못 하겠고, 나한테 반하게 만들어서 먼저 고백하게 만들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끝내 이런 내 바램은 이루어 지지 못하고 년이 지나
고등학교 진학은 안 좋았던 1,2학년 성적때문에 나는 그녀보다 1~2수준 낮은 고등학교로 진학,
서로 야간 자율학습에 학원도 그만두게 되었다. 연락이 끊겼어도 그녀를 잊지 못한 나는 한가지 어이없는 꾀를 생각했다.
순수와 나는 야자가 같은 시간에 끝이나도, 걸어가면 8분, 자전거로는 3분이 걸릴정도로 학교가 가까웠다.
나는 금요일날에 최대한 빨리 튀어나가 하교시간을 단축해서 그녀의 학교 정문 앞에 대기해서 그녀를 무작정 기다렸다.
아무도 없는 공허한 남의 학교 정문을 두번이나 지나야, 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 부탁이라는 말로 표현하긴 힘든 애원을 했다.
니가 나보다 공부도 잘하니 토요일,일요일 아무 주말이라도 좋으니까 과외 좀 시켜달라고.
그때 그녀가 어떻게 표현했는지 기억이 희미한 건 내일 학교 끝나고, 우리집으로 오라는 표현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만 심취해서 그런 것 같다. 내일도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그 마음 설레임은 무슨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방과 후가 기대되는 날은 없었고, 짐만 되지 않을려고 공부도 매우 열심히 했다.
순수는 간혹 내가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면 선생님 타령을 하며 엄하게 때론 달래기도 하며 잘 가르쳤다.
이때 부터 소질이 보인 것 같다.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고백만 하면 되는 관계, 시기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고백을 하게 되었다.
공부 도중에 머리를 묶어 올려달라는 부탁에 나는 머리는 묶어 줄 수 있는데, 올려주는건 안된다고 말을 했고
왜라는 물음에, 조선시대 때 머리 올려주는건 평생 대리고 살겠다는 말이잖아 라는 내 답변에
피식하하호호 웃으면서 왜 싫어? 물음에는 빈 말로 넘기기 싫었다.
남자 자존심에 그래, 내가 대리고 살지 뭐 라는 말을 했지만, 웃으며 왜 싫어?라고 묻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는 시험기간에는 벼락치기(순수는 벼락치기가 최고의 공부비법이라고 강조를 많이 했다.)를 했고,
그 기간동안에는 평일날에도 독서실을 같이 잡아서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독서실 가기 전 내 학교와 그녀의 학교는 하천이 흘러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간혹 내가 늦으면 그녀는 다리 까지 마중 나와
나를 기다렸다. 그렇게 늦은 밤에 제법 낡아가는 자전거를 같이 타고 독서실을 가는건, 나에겐 아름다운 추억이며,
타본 적 없는 최고급 세단의 승차감보다 좋을 것이다. 간혹 그녀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어선지, 안장에 발을 올리고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야~! 기분 조오따!" 라는 표현을 했을 때 페달을 돌리던 내 발에도 힘이
실려서 더욱 내 달렸다.
고2 때 부터 우리는 꿈 + 목표를 정해 가기 시작했는데, 순수는 선생님이 꿈이었고, 나는 게임개발자가 꿈이었다.
비교적 생소한 내 꿈에 그녀는 조언보다는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 하는게 행복할꺼라면서 격려를 해줬다.
그렇게 서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1시간이라는 학교 거리는 멀게 느껴져, 주말커플이 되었지만..
꼭 치장하지 않고 만나도, 서로 자취방에서 철 지난 영화를 봐도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안정감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그 안정감은 내가 군대를 입대했을 때도 많은 힘이 되었다.
나는 군생활을 의경으로 나왔는데, 그녀를 더 보기 위해 일부로 서울청(전의경으로는 최전방이다.) 기동대로 들어갔다.
이후에 광우병 촛불시위에 면회도 안되고, 외박,휴가도 끊끼고, 짬찌라 전화도 못 하며 하루 2~3시간 자며
시위대 진압하는 그 혼란의 소용돌이에서도, 그녀는 나를 찾을려고 광화문,시청 한복판을 서성거렸다.
못 만난 날도 있지만, 하이바 철망 아래 그녀를 보게 되면, 다가가진 못해도 몸 건강히 제대해야지. 라는 생각만 되뇌었다.
간혹 중대 대기 할 때 만나면, 그녀는 사놨던 주전부리를 풀어 중대에 보급?을 했었을 때
고참,동기,후임들의 부러운 눈초리는 기억에 선하다. 그렇게 순수의 친구들 전번을 공양?했지만 했어도 말이다.
고참이 되어 미대사관, 국회, 용산참사, 순천향병원 등 철야근무지역에 늦은 새벽이나 이른 새벽까지 같이 있어줄 때는
안 가던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이상한 국방부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사건사고 많았던 군생활을 그녀의 안정감으로 무사행군하며,
복학하기 전에 학비 충당을 위해 영업직 알바를 했다.
뭔 알바였는지 밝하긴 그렇지만, 대게 영업직이 그런듯... 로비와 접대는 오갈 수밖에 없었다.
더 팔면 추가 임금이 지급되는 상황인지라 늦게까지 계속되는 접대는 나와 순수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돈을 벌어서 학비 걱정없이 편하게 다니겠다는 나와 몸 버려가면서 왜 일을 해야되는 건지 이해 못 하는 그녀는
이때 만큼은 서로를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소원해지며 연락을 안하다가 재밌는 영화가 있다며 같이 보자고
순수가 먼저 연락을 했다. 자취방에서 본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영화였는데, 하드서커사 대리인이라는 제목으로 기억한다.
희미하지만 줄거리는 별 볼일 없는 일게이가 위기에 빠진 허드서카사를 구하며, 일자천금을 얻었지만
빠른 시장에 도태되어 가는 자신에 회의감을 느끼고, 자신을 사랑해준 여자 + 시절로 돌아가 행복을 찾는 걸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안 나는 니가 대학 졸업할 때 되서 경제관념이 떨어진거 같다,
나는 돈이 필요하고 남자가 돈 좀 벌겠다는데 그게 뭔 대수냐? 젊을 때 이런 일, 저런 일 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말로 쏘아 붙이고, 말다툼만 하다가 헤어지고, 한달 정도 지났을까.
선선한 바람, 청량한 하늘에 공허해지는 9월에 순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초중반의 20대 청년이 이해하고 마음 비우기엔 내 심정이 받쳐주지 못 했다.
왜 그 땐 나를 생각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못 느꼈는지.. 병신처럼 자기 고집만 피웠는지 후회가 된다.
내 꿈은 후회없이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아마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고, 현명하면서도 예쁜 순수같은 여자는 다시 못 만날 것 같다.
그녀와 공유했던 추억이 계속 되뇌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바로 옆에서 옆머리 쓸어넘기면서
나는 쌤이고, 너는 게임개발자인데 자식 교육 어떻게 할꺼야? 라고 물어볼 거 같다.
자살한 베르테르를 보고 로테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내 물음에
글쎄, 아무튼 살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답변한 그녀는
어두운 내 삶에 빛을 보여준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요약.1.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2.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3. 후회 + 추억이 되기 전에 잘 해 주자.4. 글을 이른 새벽부터 썼는데, 사색에 너무 잠겨 지금 끝냄. 살 사람은 살아야지.
나는 꽤 긴 인연을 이어가 다른것 같다. 그래서 간절함보단 애절함에 슬픔이 더해져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살던 지역은 비평준화지역이었지만,
난 학업보단 게임에 빠져 살고 있었다.
밤 늦게 까지 게임하고, 학교에서 꿀잠자는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성적은 반에서 내 밑에 한 3~5명 있었을 정도였다.(모자른 학우들 제외하면 사실상 꼴등)
이렇게 노가다인생 직행하는 버스에 탈려고 하다가 한가지 사건으로 구제가 된다.
중2때 담당 수학선생님이 전형적인 꼰대기질있는 선생인데,
M자 대머리에 21C 교육체제로 보기 힘든 쌍팔년도 체벌을 휘두르는 선생이었다.
그래서 대놓고 자긴 그렇고, 책을 탑처럼 좀 쌓아두고, 살짝 졸거나 빌려온 판타지소설
보면서 시간 떼우면서 넘겼었다.
판타지소설이 유행하다 보니 잠보단 책보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그래서 어려권 빌려서
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주변 친구들이랑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일진넘 한마리가 빌려달라고 앙망해서
빌려줬더니, 수학시간에 대놓고 쳐보다가 걸려서 책 반납당했다.
그넘은 선생님이 안 돌려준다고,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개솔을 시전하더라.
바로 선빵치고도, 화가 안 풀려서 쌓아둔 책 하나 집어 들고 대가리 ㅈㅎ시키다가
이상하게 더 화가 나갈래, 의자로 내려쳐서 두부외상 시켰다.
정학만 받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학교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가중처벌을 받다 보니 어린 나이에 혹독한 처벌때문일까? 너무 서러웠다.
그렇게 나는 사회의 잣대에 떳떳해 지기 위해 펜을 부여잡고 공부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열공으로 중2 2학기 때 반에서 중상위권에 올라갔지만,
중3 담임선생님의 진학상담은 비관적이었다.
학업이 별 관심없으셨던 부모님도 선생님의 상담에 안되겠다 싶었던지, 학원을 끊어주셨다.
그 학원은 특이하게 남녀 짝궁에 지정좌석제를 운영되었는데, 그렇게 나는 그녀와 짝궁이 되었다.
그녀의 명칭은 이하 순수 또는 그녀 라고 하겠다. 이건 그녀가 잘 사용한 닉네임이다.
처음 본 순수는 배려심이 깊은 여자였다. 상급반에 배정되어 수업에 잘 못 따라가는
나에게 선뜻 자기가 필기한 부분을 살짝 밀어주며 보여줬다. 남녀사이의 부담감때문에
멀뚱거린 나에게 수업도중 말은 못하겠던지 살짝 눈웃음짓는 미소에 설레임을 느끼고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순수의 머리스타일은 위 이미지처럼 옆머리가 살짝 귓가에 걸치는 포니테일인데,
집중해서 공부 할 때 옆머리 사이로 살짝 자애롭게 미소 짓는 것에 호감을 넘어 반하게 되었다.
나는 성적이 좋은 순수에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보다 공부 못하면 쪽팔리자나?'
이런 생각으로 그녀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문제아라는 안 좋은 소문이 있던 나를 노력하는 모습이 좋게 보여서일까?
자존심 접어두고 헷갈리는 문제의 풀이방법을 물어볼때면문항의 의미 하나하나를 풀이해주며 응원? 격려? 뭐랄까 계속 호의를 받게 되었다.
학원은 같은 반이지만, 학교 반은 달라 복도에서 마주치면 뻘줌한 상태로 쭈삣쭈삣 행동한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안녕?" 이라고 말하면서 "이제부터 서로 마주치면 인사하자" 라는 말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가는 것보다 더 감동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호의+관심에
성적이 더 좋아져 반에서 34등이 전교 34등이 되었다.
(이 때 학원에서 학원비 3개월로 장학비 땡처리 받음 ㅍㅌㅊ? 하지만 그녀보다 성적이 2점 정도 낮았다.)
학업의 비중때문인지
중3 처음 진로 + 진학을 결정되어야 될 시기에 학원 반 애들끼리 어느학교 갈건지, 장래희망, 꿈같은 걸 애기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나는 구체적인 것보단 두리뭉실하게 그냥 평범하게 살고, 후회없이 사는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 말하고 부터 나한테 반한 다른 학교 걸레년이 있었는데, 이걸 계기로 언제 고백해서 내 마음을 표현할까
생각에서 '중요한 시기라 차일꺼 같아 표현을 못 하겠고, 나한테 반하게 만들어서 먼저 고백하게 만들자!'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끝내 이런 내 바램은 이루어 지지 못하고 년이 지나
고등학교 진학은 안 좋았던 1,2학년 성적때문에 나는 그녀보다 1~2수준 낮은 고등학교로 진학,
서로 야간 자율학습에 학원도 그만두게 되었다. 연락이 끊겼어도 그녀를 잊지 못한 나는 한가지 어이없는 꾀를 생각했다.
순수와 나는 야자가 같은 시간에 끝이나도, 걸어가면 8분, 자전거로는 3분이 걸릴정도로 학교가 가까웠다.
나는 금요일날에 최대한 빨리 튀어나가 하교시간을 단축해서 그녀의 학교 정문 앞에 대기해서 그녀를 무작정 기다렸다.
아무도 없는 공허한 남의 학교 정문을 두번이나 지나야, 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 부탁이라는 말로 표현하긴 힘든 애원을 했다.
니가 나보다 공부도 잘하니 토요일,일요일 아무 주말이라도 좋으니까 과외 좀 시켜달라고.
그때 그녀가 어떻게 표현했는지 기억이 희미한 건 내일 학교 끝나고, 우리집으로 오라는 표현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만 심취해서 그런 것 같다. 내일도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그 마음 설레임은 무슨 말로도 표현 할 수 없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방과 후가 기대되는 날은 없었고, 짐만 되지 않을려고 공부도 매우 열심히 했다.
순수는 간혹 내가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면 선생님 타령을 하며 엄하게 때론 달래기도 하며 잘 가르쳤다.
이때 부터 소질이 보인 것 같다.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고백만 하면 되는 관계, 시기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고백을 하게 되었다.
공부 도중에 머리를 묶어 올려달라는 부탁에 나는 머리는 묶어 줄 수 있는데, 올려주는건 안된다고 말을 했고
왜라는 물음에, 조선시대 때 머리 올려주는건 평생 대리고 살겠다는 말이잖아 라는 내 답변에
피식하하호호 웃으면서 왜 싫어? 물음에는 빈 말로 넘기기 싫었다.
남자 자존심에 그래, 내가 대리고 살지 뭐 라는 말을 했지만, 웃으며 왜 싫어?라고 묻는 그녀가 참 고마웠다.
그렇게 우리는 시험기간에는 벼락치기(순수는 벼락치기가 최고의 공부비법이라고 강조를 많이 했다.)를 했고,
그 기간동안에는 평일날에도 독서실을 같이 잡아서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독서실 가기 전 내 학교와 그녀의 학교는 하천이 흘러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간혹 내가 늦으면 그녀는 다리 까지 마중 나와
나를 기다렸다. 그렇게 늦은 밤에 제법 낡아가는 자전거를 같이 타고 독서실을 가는건, 나에겐 아름다운 추억이며,
타본 적 없는 최고급 세단의 승차감보다 좋을 것이다. 간혹 그녀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어선지, 안장에 발을 올리고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야~! 기분 조오따!" 라는 표현을 했을 때 페달을 돌리던 내 발에도 힘이
실려서 더욱 내 달렸다.
고2 때 부터 우리는 꿈 + 목표를 정해 가기 시작했는데, 순수는 선생님이 꿈이었고, 나는 게임개발자가 꿈이었다.
비교적 생소한 내 꿈에 그녀는 조언보다는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 하는게 행복할꺼라면서 격려를 해줬다.
그렇게 서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1시간이라는 학교 거리는 멀게 느껴져, 주말커플이 되었지만..
꼭 치장하지 않고 만나도, 서로 자취방에서 철 지난 영화를 봐도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안정감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그 안정감은 내가 군대를 입대했을 때도 많은 힘이 되었다.
나는 군생활을 의경으로 나왔는데, 그녀를 더 보기 위해 일부로 서울청(전의경으로는 최전방이다.) 기동대로 들어갔다.
이후에 광우병 촛불시위에 면회도 안되고, 외박,휴가도 끊끼고, 짬찌라 전화도 못 하며 하루 2~3시간 자며
시위대 진압하는 그 혼란의 소용돌이에서도, 그녀는 나를 찾을려고 광화문,시청 한복판을 서성거렸다.
못 만난 날도 있지만, 하이바 철망 아래 그녀를 보게 되면, 다가가진 못해도 몸 건강히 제대해야지. 라는 생각만 되뇌었다.
간혹 중대 대기 할 때 만나면, 그녀는 사놨던 주전부리를 풀어 중대에 보급?을 했었을 때
고참,동기,후임들의 부러운 눈초리는 기억에 선하다. 그렇게 순수의 친구들 전번을 공양?했지만 했어도 말이다.
고참이 되어 미대사관, 국회, 용산참사, 순천향병원 등 철야근무지역에 늦은 새벽이나 이른 새벽까지 같이 있어줄 때는
안 가던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이상한 국방부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사건사고 많았던 군생활을 그녀의 안정감으로 무사행군하며,
복학하기 전에 학비 충당을 위해 영업직 알바를 했다.
뭔 알바였는지 밝하긴 그렇지만, 대게 영업직이 그런듯... 로비와 접대는 오갈 수밖에 없었다.
더 팔면 추가 임금이 지급되는 상황인지라 늦게까지 계속되는 접대는 나와 순수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돈을 벌어서 학비 걱정없이 편하게 다니겠다는 나와 몸 버려가면서 왜 일을 해야되는 건지 이해 못 하는 그녀는
이때 만큼은 서로를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소원해지며 연락을 안하다가 재밌는 영화가 있다며 같이 보자고
순수가 먼저 연락을 했다. 자취방에서 본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영화였는데, 하드서커사 대리인이라는 제목으로 기억한다.
희미하지만 줄거리는 별 볼일 없는 일게이가 위기에 빠진 허드서카사를 구하며, 일자천금을 얻었지만
빠른 시장에 도태되어 가는 자신에 회의감을 느끼고, 자신을 사랑해준 여자 + 시절로 돌아가 행복을 찾는 걸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안 나는 니가 대학 졸업할 때 되서 경제관념이 떨어진거 같다,
나는 돈이 필요하고 남자가 돈 좀 벌겠다는데 그게 뭔 대수냐? 젊을 때 이런 일, 저런 일 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말로 쏘아 붙이고, 말다툼만 하다가 헤어지고, 한달 정도 지났을까.
선선한 바람, 청량한 하늘에 공허해지는 9월에 순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초중반의 20대 청년이 이해하고 마음 비우기엔 내 심정이 받쳐주지 못 했다.
왜 그 땐 나를 생각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못 느꼈는지.. 병신처럼 자기 고집만 피웠는지 후회가 된다.
내 꿈은 후회없이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아마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고, 현명하면서도 예쁜 순수같은 여자는 다시 못 만날 것 같다.
그녀와 공유했던 추억이 계속 되뇌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바로 옆에서 옆머리 쓸어넘기면서
나는 쌤이고, 너는 게임개발자인데 자식 교육 어떻게 할꺼야? 라고 물어볼 거 같다.
자살한 베르테르를 보고 로테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내 물음에
글쎄, 아무튼 살 사람은 살아야지 라고 답변한 그녀는
어두운 내 삶에 빛을 보여준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요약.1.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2.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3. 후회 + 추억이 되기 전에 잘 해 주자.4. 글을 이른 새벽부터 썼는데, 사색에 너무 잠겨 지금 끝냄. 살 사람은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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