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랑 결혼할 SSUL. CHODING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07회 작성일 20-01-07 19:13본문
선요약:
1. 초딩때 지금내여친만남
2. 나 중딩때 유학
3. 아빠 사업운지, 장학금 ㄴㄴ해 한국돌아와 다시 내여친만남
4. 대학합격하고 연애
5. 여친미국발령, 나는 부랴부랴 미대학원진학
6. 여친임신
7. 곧 청혼할끄임
94년에 나는 경기도 광주시에서 살다 평촌동으로 이사를가게 됬다.
왜 이사는지는 아직도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당시 초1이라 기억하지도 않는다.
경기도 광주에서의 초등학교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고, 한국에서의 유년시절 대부분은 평촌의 기억으로 차있다.
당시 신도시였던 평촌은 새로 조성된 아파트들로 북적거렸고, 신도시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그냥 서로 안면이 없는사람들로 가득했다.
초등학교로 전학할 당시, 여느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우리 엄마는 우리반 아이중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를 찾으셨고,
그중에 한명이 지금 내가 청혼할 내 여친 (B라고 부르겠다. B컵이거든 ㅋ)이다.
같은동, 같은 반이었던 B와 나는 어머니들의 친목질에 무색해질 정도로 친해졌고, 이쁘고 아담한 성격의 B를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다.
일기장 뒤져보니 B의 어머니에게 "장모님, B를 주시지요"라고 얘기했거나 "빨리 커서 B랑 결혼하고 싶다"라는 은근 오그라드는 글도 쓰고.
(선생님이 일기검사하시면서 얼마나 오그라 들으셨을까 ㅋㅋㅋ)
전교에는 내가 B를 좋아하는게 다 소문이나서
고백만 안했을뿐 항상 둘이 붙어다니는 꼴로보아 거의 준 커플이었던 것 같다.
어린나이에 남자친구 여자친구 개념이 없었던것도 있었고,
또 그냥 서로 있는게 좋고 이뻐서, 순수하게 이뻐서 좋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3학년이 지나고 어머니와 B어머니의 관계가 전보단 서원해 지면서,
또 나와 B가 각각 서로 동성의 친구와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다른 관심사 (게임 등) 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멀어졌고, 그다지 슬프지도 않은, 이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마주하게 되고,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정도나 나누는 그러한 사이가 되었고,
그러한것에 우리둘 다 개의치 않았다.
"B가 좋아 치킨이 좋아?" 라는 친구의 짖궂은 질문에도 (내가 어렸을때에는 먹보소리 많이 듣고 좀 통통 했었다)
"이젠 치킨이 좋아" 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서로에대한 별 생각없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됬다.
나는 IMF를 잘 극복하신 아버지의 재력과
극성적인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00년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다지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하지 않았던 터라 곧 한국아이들과의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물론 졸업전 별로 얘기조차 나누지 않았던 B와의 연락이 끊어진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방학때마다 들어와 친구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방학때 들어와서도 학원 뺑뺑이와 집안 어른들게 인사드리고 난 뒤에는 정작 친구들과 연락할 여유조차 하나 없었다.
한때 엄마한테 울먹이면서 친구들 만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그럴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되는 상황이었다는거.
만나봤자 서원함만 느끼고 실망할거라는걸 나중에야 깨달았고,
친구를 못만나게 하신것에 대한 원망은 지금 없다.
B를 중고등학교 시절때 만나지 못한것 또한 지금의 B와 나와의 관계를 정의할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수도 있으니깐.
나는 엄마의 극성스러움이 맞았는지 곧 고등학교는 미국 명문 사립으로 진학할 수 있었으나,
그곳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실패로 인해
어머니가 미국에서 쟁여놓으신 돈으로 간간히 학비 교회분들한테 타 받아가며 공부했었다.
하지만 더 한심스러운 부분은, 내가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갑작스런 경제적 위치의 변동, 또 명문고에서의 치열함으로
어머니의 무한한 희생하심에도 불구하고, 내신관리에 실패했다.
그 이유로 나는 상위권 대학에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장학금 지급을 받지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Gap Year, 소위 한국말로는 재수라는걸 하게 됬다.
한국으로 돌아왔을때에는 같은 동네지만 집은 월세방이였고,
어머니는 공부방을 하셨으며,
아버지는 교도소에 계셨다.
나름 갈고 닦은 영어 실력으로 학원에서 보조교사, 과외일을 하며 월 150만원으로
가정에 좀 보태고 그때 나도 철이 조금이나마 들었던거 같다.
공부와 일을 병행한다는건 쉬운일이 아니었지만,
어떻게 또 상황의 절박함이 나를 강하게 만든거 같다.
재수하는동안 교회에서 영어예배 봉사도 했지만,
절대로 청년부나 기타 내나이 또래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피하고 다녔고,
그냥 선비처럼, 기상하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자는 생활을 반복하던중,
2004년 올림픽이 거의 마무리되는 늦은 여름 B가 교회 장애아동 봉사부에서 일할때 마주치게 되었다.
여전히 예뻤고, 장애아동 봉사부에서 일하는걸로 미루어보아 마음씨도 여전한듯 했다.
모 여대에서 사회학과를 공부하고 있었고,
미국유학까지 나가서 대학진학도 못하고 재수냐 하고있냐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B로부턴 받지 못했다.
그냥 있는 그모습대로 날 봐줄수 있었고,
그 만난 날 맥주한캔으로 마침내 내 꼬이고 꼬인 인생을 어떤사람한테 고백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 이후로 매주 교회에서 B를 보는 일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무디디 무디고 힘들기만 하던 내 삶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정말 회상해보자면, B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의 기억속에 하늘이 푸르렀던 기억은 없다.
B를 다시 만났을때가 여름이 거의 다 지나갈 즈음이었는데....
어렸을때에는 그냥 뭔가 순수하게 "좋아"한거 였다면
그때부터 B를 "사랑"한거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내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인걸 알기에,
접어두었고,
B는 그냥 한국에서의 내 하나밖에 없는친구기에,
만날때마다 뛰는 가슴을 누르고
그렇게 5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다.
B또한 눈치가 빠른지라,
나중에 얘기하길 내가 당시 자기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고 하더라.
다만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괜한 장애물이 되기싫어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그런거 보면 난 참 결혼할 사람 잘 고른거 같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대입발표가 났던날,
내가 달려간곳은 아버지가 계신 교도소도 아닌,
엄마 공부방도 아닌,
B의 학교였고,
당시 핸드폰도 없이 학교를 두시간 넘게 뛰어다니며 B를 찾아서
고백하고, 사귀기로 했다.
기다린만큼 B와의 연애는 아름다웠고, 꿀처럼 달았다.
신입생 OT할때까지 콩깎지가 끼여 헤롱헤롱거리고,
그냥 성격도 밝아지고, 만날 웃고 다녔던 거 같다.
하지만 때는 흘러 나에게도 영장이라는 놈이 왔고,
해병대인 아버지를 따라 해병대를 입대하는게 내 원래의 꿈이었지만,
조금이나마 B를 더 보고자, 잃고 싶지 않아 나름 풀린군대라는 카투사에 지원했고,
정말 하느님이 보우하사 뺑뺑이에서 당첨이되어
카투사 생활을 2년 하게 되었다.
너무 사랑의 불꽃을 일찍이 태우면서,
1. 초딩때 지금내여친만남
2. 나 중딩때 유학
3. 아빠 사업운지, 장학금 ㄴㄴ해 한국돌아와 다시 내여친만남
4. 대학합격하고 연애
5. 여친미국발령, 나는 부랴부랴 미대학원진학
6. 여친임신
7. 곧 청혼할끄임
94년에 나는 경기도 광주시에서 살다 평촌동으로 이사를가게 됬다.
왜 이사는지는 아직도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당시 초1이라 기억하지도 않는다.
경기도 광주에서의 초등학교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고, 한국에서의 유년시절 대부분은 평촌의 기억으로 차있다.
당시 신도시였던 평촌은 새로 조성된 아파트들로 북적거렸고, 신도시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그냥 서로 안면이 없는사람들로 가득했다.
초등학교로 전학할 당시, 여느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우리 엄마는 우리반 아이중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를 찾으셨고,
그중에 한명이 지금 내가 청혼할 내 여친 (B라고 부르겠다. B컵이거든 ㅋ)이다.
같은동, 같은 반이었던 B와 나는 어머니들의 친목질에 무색해질 정도로 친해졌고, 이쁘고 아담한 성격의 B를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다.
일기장 뒤져보니 B의 어머니에게 "장모님, B를 주시지요"라고 얘기했거나 "빨리 커서 B랑 결혼하고 싶다"라는 은근 오그라드는 글도 쓰고.
(선생님이 일기검사하시면서 얼마나 오그라 들으셨을까 ㅋㅋㅋ)
전교에는 내가 B를 좋아하는게 다 소문이나서
고백만 안했을뿐 항상 둘이 붙어다니는 꼴로보아 거의 준 커플이었던 것 같다.
어린나이에 남자친구 여자친구 개념이 없었던것도 있었고,
또 그냥 서로 있는게 좋고 이뻐서, 순수하게 이뻐서 좋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3학년이 지나고 어머니와 B어머니의 관계가 전보단 서원해 지면서,
또 나와 B가 각각 서로 동성의 친구와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다른 관심사 (게임 등) 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멀어졌고, 그다지 슬프지도 않은, 이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마주하게 되고,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정도나 나누는 그러한 사이가 되었고,
그러한것에 우리둘 다 개의치 않았다.
"B가 좋아 치킨이 좋아?" 라는 친구의 짖궂은 질문에도 (내가 어렸을때에는 먹보소리 많이 듣고 좀 통통 했었다)
"이젠 치킨이 좋아" 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서로에대한 별 생각없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됬다.
나는 IMF를 잘 극복하신 아버지의 재력과
극성적인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00년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다지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 하지 않았던 터라 곧 한국아이들과의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물론 졸업전 별로 얘기조차 나누지 않았던 B와의 연락이 끊어진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방학때마다 들어와 친구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방학때 들어와서도 학원 뺑뺑이와 집안 어른들게 인사드리고 난 뒤에는 정작 친구들과 연락할 여유조차 하나 없었다.
한때 엄마한테 울먹이면서 친구들 만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그럴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되는 상황이었다는거.
만나봤자 서원함만 느끼고 실망할거라는걸 나중에야 깨달았고,
친구를 못만나게 하신것에 대한 원망은 지금 없다.
B를 중고등학교 시절때 만나지 못한것 또한 지금의 B와 나와의 관계를 정의할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수도 있으니깐.
나는 엄마의 극성스러움이 맞았는지 곧 고등학교는 미국 명문 사립으로 진학할 수 있었으나,
그곳에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실패로 인해
어머니가 미국에서 쟁여놓으신 돈으로 간간히 학비 교회분들한테 타 받아가며 공부했었다.
하지만 더 한심스러운 부분은, 내가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갑작스런 경제적 위치의 변동, 또 명문고에서의 치열함으로
어머니의 무한한 희생하심에도 불구하고, 내신관리에 실패했다.
그 이유로 나는 상위권 대학에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장학금 지급을 받지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Gap Year, 소위 한국말로는 재수라는걸 하게 됬다.
한국으로 돌아왔을때에는 같은 동네지만 집은 월세방이였고,
어머니는 공부방을 하셨으며,
아버지는 교도소에 계셨다.
나름 갈고 닦은 영어 실력으로 학원에서 보조교사, 과외일을 하며 월 150만원으로
가정에 좀 보태고 그때 나도 철이 조금이나마 들었던거 같다.
공부와 일을 병행한다는건 쉬운일이 아니었지만,
어떻게 또 상황의 절박함이 나를 강하게 만든거 같다.
재수하는동안 교회에서 영어예배 봉사도 했지만,
절대로 청년부나 기타 내나이 또래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피하고 다녔고,
그냥 선비처럼, 기상하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자는 생활을 반복하던중,
2004년 올림픽이 거의 마무리되는 늦은 여름 B가 교회 장애아동 봉사부에서 일할때 마주치게 되었다.
여전히 예뻤고, 장애아동 봉사부에서 일하는걸로 미루어보아 마음씨도 여전한듯 했다.
모 여대에서 사회학과를 공부하고 있었고,
미국유학까지 나가서 대학진학도 못하고 재수냐 하고있냐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B로부턴 받지 못했다.
그냥 있는 그모습대로 날 봐줄수 있었고,
그 만난 날 맥주한캔으로 마침내 내 꼬이고 꼬인 인생을 어떤사람한테 고백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 이후로 매주 교회에서 B를 보는 일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무디디 무디고 힘들기만 하던 내 삶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정말 회상해보자면, B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의 기억속에 하늘이 푸르렀던 기억은 없다.
B를 다시 만났을때가 여름이 거의 다 지나갈 즈음이었는데....
어렸을때에는 그냥 뭔가 순수하게 "좋아"한거 였다면
그때부터 B를 "사랑"한거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내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인걸 알기에,
접어두었고,
B는 그냥 한국에서의 내 하나밖에 없는친구기에,
만날때마다 뛰는 가슴을 누르고
그렇게 5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다.
B또한 눈치가 빠른지라,
나중에 얘기하길 내가 당시 자기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고 하더라.
다만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괜한 장애물이 되기싫어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그런거 보면 난 참 결혼할 사람 잘 고른거 같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대입발표가 났던날,
내가 달려간곳은 아버지가 계신 교도소도 아닌,
엄마 공부방도 아닌,
B의 학교였고,
당시 핸드폰도 없이 학교를 두시간 넘게 뛰어다니며 B를 찾아서
고백하고, 사귀기로 했다.
기다린만큼 B와의 연애는 아름다웠고, 꿀처럼 달았다.
신입생 OT할때까지 콩깎지가 끼여 헤롱헤롱거리고,
그냥 성격도 밝아지고, 만날 웃고 다녔던 거 같다.
하지만 때는 흘러 나에게도 영장이라는 놈이 왔고,
해병대인 아버지를 따라 해병대를 입대하는게 내 원래의 꿈이었지만,
조금이나마 B를 더 보고자, 잃고 싶지 않아 나름 풀린군대라는 카투사에 지원했고,
정말 하느님이 보우하사 뺑뺑이에서 당첨이되어
카투사 생활을 2년 하게 되었다.
너무 사랑의 불꽃을 일찍이 태우면서,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