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 17년 살아본 썰.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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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70회 작성일 20-01-07 19:51본문
성북동에서만 17년을 살았다.
십대와 이십대를 모두 이곳에서 보냈으니 토박이라면 나름 토박이인 셈이다.
참 많이도 변했다.
문고판 서적들이 가득했던 골목 귀퉁이 서점은 일본식 선술집이 되었고 매 끼니마다 메뉴가 바뀌던 가정식 백반집은 테라스가 딸린 카페로 변해버렸다.
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돈이 되지도, 될 수도 없었던 것들뿐이다.
혜화동을 걸으면 사람들을 만난다.
희곡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어떤 이들은 조그마한 소극장들을 끝끝내 허물지 못하게 하려는 듯 저마다의 공연들을 홍보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마로니에 공원 주위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노래를 부른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색으로 비유하자면 딱 회색 같은 노래를 부른다.
나는 혜화동에서 느껴지는 이런 적당히 활기차면서도, 적당히 찌들어있는 느낌을 좋아한다.
혜화동은 이방인들로 가득한 번화가라기보다는 어떤 이들의 삶이다.
나는 이 현실적인 거리를 걸으면서 나와는 다른, 누군가의 삶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악사들의 노래를 뒤로 하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런 무언의 위로를 형상화한 벽화들을 만날 수 있다.
철거를 앞둔 한 가난한 동네에 그려진 예술가들의 그림은 이화마을을 명소로 만들어, 그곳이 허물어지는 일을 유예시키기도 했다.
성북동에는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만의 정취가 있다. 성북동은 고즈넉하다. 다른 이의 어깨와 치댈 일도 없거니와 때로는 그런 일들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한적하다.
그 정취에 빠져들어 걷다보면 목적지도 잊게 된다.
담장 높은 주택가를 지나면 녹지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나무들과 만난다.
그 나무들마저 뒤로 하고 걸음을 옮기면 눈아래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맞닥뜨린다.
각박한 일상에서 지워진 짐은 그곳에 놓아둔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된다.
혜화동에서 성북동으로 향하는 길은 채워내고 비워내는 길이다.
위로 받고 시름은 내려놓는다.
그러다 해가 저물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 배를 채운다.
나의 주말은 때때로 이렇다.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이만하면 좋은 주말이었다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청하는 잠은 깊을대로 깊었다.
3줄요약1. 성북동 산다2. 조용하고 살기 좋다3. 주말되면 휠체어 끌고 와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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