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지 이야기.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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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78회 작성일 20-01-07 21:07본문
달구지 이야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철로를 내고 길을 닦고 보니 종래의 운송수단이 달구지였다. 일본에서는 이미 길을 다 닦아 놓아 자동차는 다니고 달구지는 못 다니게 했지만, 조선의 도로 상태는 꼬불꼬불한 오솔길 투성이라 당분간 달구지도 허용하기로 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는 그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이었고, 대신 그때까지 있던 달구지만 면허를 주고 신규 달구지 면허는 발급하지 않았다.
해방이 된 후 달구지운송협회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적 교통수단인 달구지를 인정하라"는 주장을 하였다. 현대 자동차에 대해 많은 장점도 있다고 하였다. 우선 달구지는 값이 싸고, 기름을 먹지 않으며, 매연이 없어 친환경적이고, 빠른 속도로 인해 생기는 멀미와 교통사고가 없으며, 무엇보다 반만년간 사용해서 입증된 교통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정부는 달구지도 차량과 함께 도로를 다닐 수 있는 허가를 주었으며, 계속 달구지를 생산하고 그 운송인을 교육하게 해 주었다.
처음에는 자동차도 얼마 없고, 달구지만 다닐 수 있는 도로도 많아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에 신작로가 놓이고 자동차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달구지협회는 계속 "민족 전래의 교통수단"임을 강조하며 국토부에 압력을 넣어 "달구지진흥과"를 만들게 하였다. 특히 길이 완전히 닦이지 않은 시골 노인들의 운송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였고, 또 군대에도 달구지를 도입하여 달구지 수송대를 만들었다.(만들어 놓았지만 대부분 쓸모가 없어서 지휘관들의 관광 유람용으로 쓴다) 이들은 가끔 와서 달구지를 타는 외국 사람들의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매연도, 공해도 없고 좋아요.". "참 전원적입니다. 타는 맛이 일품이에요." 이런 칭찬들에 고무되어 "달구지의 국제화"까지 주창하게 되었다.
달구지의 국제화를 하려다보니 달구지를 "과학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현대 물리학과 공학을 도입하여 에어로다이나믹 달구지, 혹은 달구지의 바퀴는 몸체에 비해 몇%의 비율로 만들어야 하나? 하는 문제들이 토의되었다. 현대차 연구소에서는 그런 거라면 우리들이 훨씬 잘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들은 자동차만 만드는 이들은 달구지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며 끝까지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들의 주위에는 또 비판세력도 있는데, 달구지의 본질은 "소"에 있다며 소와의 교감을 중시하는 생태주의 달구지학파, 또 오로지 조상 전래의 달구지 형태를 고수해야 한다는 고전학파 등이 그들이다.
한편으로 달구지 운송협회는 "할아버지의 달구지를 몰고 나온" 일반인들은 가혹하게 단죄했다. 그들은 "달구지 운송면허"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일반인들은, 아니 우리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때부터 이 달구지를 몰았는데 무슨 소리? 하지만, 그건 "위법"하다는 것이다.
"달구지도 목표 지점까지 모셔다 드립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운치가 있습니다"가 그들의 모토인데 세상이 각박해지니 사람들이 자동차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전에는 달구지가 독점했던 시골 좁은 길이나 개펄도 맘대로 다닐 수 있는 사륜구동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달구지 업계에 위기가 닥쳤다. 그래서 이들은 "달구지의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이기통 엔진과 내비 등을 장착하려 했는데, 그러다 자동차 업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바야흐로 헌법소원을 내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엔진을 부착한 달구지는 달구지가 아닌 자동차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이들을 머쓱하게 하였다.
때로는 달구지를 타는 게 더 운치 있고 좋기도 하다. 민속촌이나 관광지역에서 그렇다. 그리고 개펄과 같은 어떤 지역-바퀴가 푹푹 빠지는-에서는 달구지가 여전히 유용하기도 하다. 그런데 달구지가 자동차를 대치하기에는 이미 세상이 너무 바뀌었다. 그리고 달구지가 "민족 전래의 운송수단", 자동차는 "외래(서양) 운송수단"도 아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철로를 내고 길을 닦고 보니 종래의 운송수단이 달구지였다. 일본에서는 이미 길을 다 닦아 놓아 자동차는 다니고 달구지는 못 다니게 했지만, 조선의 도로 상태는 꼬불꼬불한 오솔길 투성이라 당분간 달구지도 허용하기로 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는 그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이었고, 대신 그때까지 있던 달구지만 면허를 주고 신규 달구지 면허는 발급하지 않았다.
해방이 된 후 달구지운송협회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적 교통수단인 달구지를 인정하라"는 주장을 하였다. 현대 자동차에 대해 많은 장점도 있다고 하였다. 우선 달구지는 값이 싸고, 기름을 먹지 않으며, 매연이 없어 친환경적이고, 빠른 속도로 인해 생기는 멀미와 교통사고가 없으며, 무엇보다 반만년간 사용해서 입증된 교통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정부는 달구지도 차량과 함께 도로를 다닐 수 있는 허가를 주었으며, 계속 달구지를 생산하고 그 운송인을 교육하게 해 주었다.
처음에는 자동차도 얼마 없고, 달구지만 다닐 수 있는 도로도 많아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에 신작로가 놓이고 자동차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달구지협회는 계속 "민족 전래의 교통수단"임을 강조하며 국토부에 압력을 넣어 "달구지진흥과"를 만들게 하였다. 특히 길이 완전히 닦이지 않은 시골 노인들의 운송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였고, 또 군대에도 달구지를 도입하여 달구지 수송대를 만들었다.(만들어 놓았지만 대부분 쓸모가 없어서 지휘관들의 관광 유람용으로 쓴다) 이들은 가끔 와서 달구지를 타는 외국 사람들의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매연도, 공해도 없고 좋아요.". "참 전원적입니다. 타는 맛이 일품이에요." 이런 칭찬들에 고무되어 "달구지의 국제화"까지 주창하게 되었다.
달구지의 국제화를 하려다보니 달구지를 "과학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현대 물리학과 공학을 도입하여 에어로다이나믹 달구지, 혹은 달구지의 바퀴는 몸체에 비해 몇%의 비율로 만들어야 하나? 하는 문제들이 토의되었다. 현대차 연구소에서는 그런 거라면 우리들이 훨씬 잘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들은 자동차만 만드는 이들은 달구지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며 끝까지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들의 주위에는 또 비판세력도 있는데, 달구지의 본질은 "소"에 있다며 소와의 교감을 중시하는 생태주의 달구지학파, 또 오로지 조상 전래의 달구지 형태를 고수해야 한다는 고전학파 등이 그들이다.
한편으로 달구지 운송협회는 "할아버지의 달구지를 몰고 나온" 일반인들은 가혹하게 단죄했다. 그들은 "달구지 운송면허"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일반인들은, 아니 우리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때부터 이 달구지를 몰았는데 무슨 소리? 하지만, 그건 "위법"하다는 것이다.
"달구지도 목표 지점까지 모셔다 드립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운치가 있습니다"가 그들의 모토인데 세상이 각박해지니 사람들이 자동차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전에는 달구지가 독점했던 시골 좁은 길이나 개펄도 맘대로 다닐 수 있는 사륜구동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달구지 업계에 위기가 닥쳤다. 그래서 이들은 "달구지의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이기통 엔진과 내비 등을 장착하려 했는데, 그러다 자동차 업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바야흐로 헌법소원을 내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엔진을 부착한 달구지는 달구지가 아닌 자동차로 봐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이들을 머쓱하게 하였다.
때로는 달구지를 타는 게 더 운치 있고 좋기도 하다. 민속촌이나 관광지역에서 그렇다. 그리고 개펄과 같은 어떤 지역-바퀴가 푹푹 빠지는-에서는 달구지가 여전히 유용하기도 하다. 그런데 달구지가 자동차를 대치하기에는 이미 세상이 너무 바뀌었다. 그리고 달구지가 "민족 전래의 운송수단", 자동차는 "외래(서양) 운송수단"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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