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로 21년.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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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440회 작성일 20-01-07 21:27본문
태어날 때 부터 성동일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터울이 큰 형하나 누나하나가 있는데, 형누나 키울 때는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나 어릴때는 사정이 좋아져서 남부럽지않게 자랐다. 형누나한테 못해준 보상심리도 있고 해서인지 정말 고이고이 귀한 막내딸로 키우셨다. 그런데 나는 어릴때 부터 그게 참 싫었다.
아직도 기억나는게 엄마가 나에게 흰 원피스에 반투명한 레이스가 수없이 달리고 연분홍구슬까지 박힌 옷을 입혔다. 누나 어릴때는 입혀주고 싶어도 못입혔다는데 나는 그 옷이 정말 싫었다. 당연하게도, 남자애한테 그런 옷을 입힌 꼴이니까. 그 상태로 뾰루퉁하게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선생님이 막 예쁘다고 해주고 그랬는데, 예쁜 여자선생님이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전부터 나랑 자꾸 짝을 하고 싶어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나는 여자와 짝을 하고 싶어서 피했는데, 선생님이 그날따라 꼭 남녀짝을 지으라며 억지로 짝을 맞추게 해서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는 엄마와의 전쟁이었다. 나를 여성스럽게 키우고자하는 엄마의 노력과 피아노학원에서는 벽을 긁어서 뚫고, 발레학원은 가지도 않고 골목에서 공이나 차고, 예쁘게 입혀놓은 옷은 다 찢기고 더럽히는 나의 투쟁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엄마가 학교규정에 맞게 머리를 자르고 오라했다. 당시 귀 밑 5cm, 턱선에 닿기 직전쯤의 옆머리가 규정이었다. 귀찮았던 나는 아예 쇼트컷을 했다. 친구들과 교복을 맞추러 가서 교복도 바지로 맞췄다. 그날 엄마는 뭔가 잃은 느낌으로 많이 아쉬워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좀 남성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초등학교때야 성차이도 별로 없으니까.
중학교 2학년이 되며 초경을 치렀다.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엄마는 축하한다며 가족끼리 외식까지 갔는데, 나는 죽고싶었다. 나는 여자구나. 여자여자여자여자여자. 여자구나. 남자가 아니구나. 그낭 여자구나. 남자가 될 수 없구나. 그리고 그때쯤 나보다 한살 어리던 여자애가 고백을 했다. 언니, 나랑 사귀자 라고. 나보다 나이는 어리면서도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가슴도 큰 편이었고. 나는 그때서야 동성애에 대해, 그리고 성동일성 장애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때 월경을 멈추기 위해 피임약을 먹었는데, 여성호르몬제라는걸 알고 그만뒀다.
중고등학교는 계속 남녀공학을 다녔다. 머리도 기르고 화장도하고 남자도 만나봤지만, 너무 역겨웠다. 답답했다. 점심시간에 같이 뛰어놀던 남자애들과의 체력차이에서 오는 열등감도 심했지만, 여자애들 사이에서 강요되는 여성화역시 참기 힘들었다. 물론 머리도 나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도 없었다. 수능을 봤다. 언어 1 수리 9 외국어 6 사탐 3. 수리를 안보는 대학도 있었지만 여대여서 싫기도 했고, 외국어 성적이 낮아 들어가지 못했다.
엄마는 재수를 권했다. 하지만 스무살의 자유와, 만나는 여자들과의 성생활에 빠진 나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게되었고, 현 여자친구 자취방에 같이 살게 되었다. 여자친구 부모님은 그냥 룸메이트인줄 아신다.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몸은 여자여도 남자이기에 스타일도 남자처럼 하고다닌다. 그러다보니 아르바이트도 못구한다. 여자라고 하고 찾아가면 기대했던게 아닌지 거절하고, 알바모집이라기에 찾아가서 좋게좋게 면접까지 봤는데, 여자란게 밝혀지자마자 바로 떨어진 경우도 있다.
앞으로 계획은 자궁적출, 유방제거의 1차수술을 하고 등본상 성별을 바꿀 것이다. 성기를 만드는 2차 수술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고. 지금같은 트랜스젠더가, 성동일성장애자가 아닌 트랜스섹슈얼(성전환을 마친사람. 수술등을 통해 원래 성으로 돌아온 사람.)로써라도 살고 싶다.
전 여친들은 내가 레즈비언인줄 아는데, 현 여친에게는 말했다. 나는 레즈비언이 아닌 그냥 남자라고. 너를 남자로써 사랑한다고. 네가 사랑하는건 여자인 내가 아닌 남자인 나라고. 그랬더니 여자친구가 그래도 내가 나인건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21년, 성동일성 장애자로 살아왔다. 이제 막 시작이지만 순항이 되길 바란다. 그냥 이런 삶도 있다고, 한탄한번 해봤다.
3줄요약
1. 남자인데
2. 여자몸
3. 씨발 장애인
아직도 기억나는게 엄마가 나에게 흰 원피스에 반투명한 레이스가 수없이 달리고 연분홍구슬까지 박힌 옷을 입혔다. 누나 어릴때는 입혀주고 싶어도 못입혔다는데 나는 그 옷이 정말 싫었다. 당연하게도, 남자애한테 그런 옷을 입힌 꼴이니까. 그 상태로 뾰루퉁하게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선생님이 막 예쁘다고 해주고 그랬는데, 예쁜 여자선생님이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전부터 나랑 자꾸 짝을 하고 싶어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나는 여자와 짝을 하고 싶어서 피했는데, 선생님이 그날따라 꼭 남녀짝을 지으라며 억지로 짝을 맞추게 해서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는 엄마와의 전쟁이었다. 나를 여성스럽게 키우고자하는 엄마의 노력과 피아노학원에서는 벽을 긁어서 뚫고, 발레학원은 가지도 않고 골목에서 공이나 차고, 예쁘게 입혀놓은 옷은 다 찢기고 더럽히는 나의 투쟁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엄마가 학교규정에 맞게 머리를 자르고 오라했다. 당시 귀 밑 5cm, 턱선에 닿기 직전쯤의 옆머리가 규정이었다. 귀찮았던 나는 아예 쇼트컷을 했다. 친구들과 교복을 맞추러 가서 교복도 바지로 맞췄다. 그날 엄마는 뭔가 잃은 느낌으로 많이 아쉬워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좀 남성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초등학교때야 성차이도 별로 없으니까.
중학교 2학년이 되며 초경을 치렀다.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엄마는 축하한다며 가족끼리 외식까지 갔는데, 나는 죽고싶었다. 나는 여자구나. 여자여자여자여자여자. 여자구나. 남자가 아니구나. 그낭 여자구나. 남자가 될 수 없구나. 그리고 그때쯤 나보다 한살 어리던 여자애가 고백을 했다. 언니, 나랑 사귀자 라고. 나보다 나이는 어리면서도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가슴도 큰 편이었고. 나는 그때서야 동성애에 대해, 그리고 성동일성 장애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때 월경을 멈추기 위해 피임약을 먹었는데, 여성호르몬제라는걸 알고 그만뒀다.
중고등학교는 계속 남녀공학을 다녔다. 머리도 기르고 화장도하고 남자도 만나봤지만, 너무 역겨웠다. 답답했다. 점심시간에 같이 뛰어놀던 남자애들과의 체력차이에서 오는 열등감도 심했지만, 여자애들 사이에서 강요되는 여성화역시 참기 힘들었다. 물론 머리도 나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공부가 제대로 될 리도 없었다. 수능을 봤다. 언어 1 수리 9 외국어 6 사탐 3. 수리를 안보는 대학도 있었지만 여대여서 싫기도 했고, 외국어 성적이 낮아 들어가지 못했다.
엄마는 재수를 권했다. 하지만 스무살의 자유와, 만나는 여자들과의 성생활에 빠진 나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게되었고, 현 여자친구 자취방에 같이 살게 되었다. 여자친구 부모님은 그냥 룸메이트인줄 아신다.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몸은 여자여도 남자이기에 스타일도 남자처럼 하고다닌다. 그러다보니 아르바이트도 못구한다. 여자라고 하고 찾아가면 기대했던게 아닌지 거절하고, 알바모집이라기에 찾아가서 좋게좋게 면접까지 봤는데, 여자란게 밝혀지자마자 바로 떨어진 경우도 있다.
앞으로 계획은 자궁적출, 유방제거의 1차수술을 하고 등본상 성별을 바꿀 것이다. 성기를 만드는 2차 수술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고. 지금같은 트랜스젠더가, 성동일성장애자가 아닌 트랜스섹슈얼(성전환을 마친사람. 수술등을 통해 원래 성으로 돌아온 사람.)로써라도 살고 싶다.
전 여친들은 내가 레즈비언인줄 아는데, 현 여친에게는 말했다. 나는 레즈비언이 아닌 그냥 남자라고. 너를 남자로써 사랑한다고. 네가 사랑하는건 여자인 내가 아닌 남자인 나라고. 그랬더니 여자친구가 그래도 내가 나인건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21년, 성동일성 장애자로 살아왔다. 이제 막 시작이지만 순항이 되길 바란다. 그냥 이런 삶도 있다고, 한탄한번 해봤다.
3줄요약
1. 남자인데
2. 여자몸
3. 씨발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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