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실제 고려의 영토는 고구려보다 더 넓었다.s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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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515회 작성일 20-01-07 22:49본문
3차례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고려는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담당하는 한 축이 되었다. 동아시아는 중국의 송, 북방의 거란, 동방의 고려 이렇듯 삼각균형체제가 이루어진 것이다.동 시대의 송이 거란의 말발굽에 무참히 무너진 것과 대조되는 상황이다. 11세기 중엽 고려와 송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송나라는 고려사신을 다른나라 사신들과 같은 조공사가 아닌 대등한 국가의 사신인 국신사로 높여 대우했다. 더욱이 예종 10년(1115)에는 고려의 사신접대를 거란의 예에 따라 추밀원에서 관장하게 했다. 이는 당시 송이 고려에게 최고 등급의 외교적 예우를 한 것을 의미한다. 거란과의 전쟁 종결 후 서북방 지역이 안정되자, 고려의 관심은 동북쪽 여진과의 국경지역으로 쏠렸다. 여진에 대한 고려의 기본 정책은 '회유를 통한 복속'이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하자, 고려의 국력을 뼈저리게 느낀 여진족들이 대규모로 투항해 왔다. 고려의 전성기인 문종 대에는 130여 차례에 걸쳐 여진족이 고려로 귀부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많은 여진족들이 고려의 보호 아래 있기를 희망했다. 여진족의 여러 부족들이 앞을 다투어 고려에 귀화해 고려의 호적에 편입되었을 뿐 아니라 거란으로부터 받은 관작을 버리고 고려의 관작을 받는 경우가 늘어났다. 당시 고려와 거란은 여진 지배를 놓고 경쟁했는데 서여진은 거란이 동여진은 고려의 영향력이 강했다. 고려는 귀부한 여진에게 관작을 수여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고려로 투항한 여진족들은 자신들의 지역에 주군(州郡)을 설치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는 점이다. 『고려사』 권9 문종세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문종 27년(1073) 4월 동여진 15주 족장들이 무리를 이끌고 잇달아 찾아와 군, 현을 설치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5월에는 서연진 족장 만두불(漫豆弗) 등이 동여진에게 했듯이 자신들의 지역에도 주, 군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6월에 동북면병마사가 '여진족 1238호가 와서 우리 국적을 갖기를 원하니 주의 이름을 말하여 정하게 해달라'고 아뢰었다. 문종은 동북면병마사의 청을 받아들여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들의 마을에 고려식 촌락이름을 주고 여진 부족장을 도령으로 임명해 촌락을 다스리도록 했다. 고려의 속한 자치 지역을 만들어 고려의 관할로 들어오도록 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여진은 고려의 기미주(羈縻州)가 되었고, 고려의 영토는 대폭 확대되었다. 그렇지만 고려의 동북방 진출은 그 곳에 살던 다른 여진족들을 자극시켰다. 여진 부족들 간에 친고려파와 반고려파 등이 생겨나 서로 갈등이 불거졌다. 반고려파 여진족들은 고려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문종 시기만 해도 여진족과 24차례의 분쟁이 잇을 정도였다. 1080년 문종은 동여진이 침입했을 때 기병과 보병 3만을 보내 여진족을 평정하기도 했다. 고려 숙종 때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안부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합하였고, 영가를 이은 조카 오야속은 남쪽으로 내려와 고려의 관할 하에 있던 여진부락을 점령하였다. 오야속은 완안부에 항거하는 여진족의 무리를 쫒아 고려의 영토인 함경도 정평의 장성 근처까지 내려와 고려와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보냈으나, 패퇴하였고, 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보내 간신히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쳐 여진에게 패함으로써 정평, 장성 지역과 고려가 관할하던 여진부락은 완안부의 손에 떨어졌다. 윤관은 숙종에게 고려의 패배원인이 적이 날랜 기병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보병 위주로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며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11개의 부대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 화약을 사용하는 발화군 같은 특수부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여진정벌을 염원한 숙종이 죽고, 아들 예종이 즉위했다. 예종 2년(1107) 고려는 강대해지는 완안부 여진을 굴복시키기 위해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17만이라는 대규모 정벌군을 편성하여 원정길에 나섰다. 윤관의 군대는 속전속결로 여진족을 정벌했다. 윤관 장군 영정 윤관의 고려군은 점령지마다 성을 쌓았다. 해당지역을 문종 시기처럼 귀순주 방식으로 간접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군현으로 만들어 직접 통치하기 위함이다. 이는 이 지역을 영구히 고려의 땅으로 만드려는 계획이었다. 이는 완안부의 근거지를 없애고 고려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1108년 고려는 점령지에 9성을 쌓았다. 9성을 쌓은 후 고려 조정은 이 지역에 62,000호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한 호당 인구를 5명으로 잡으면 31만명의 주민을 옮긴 것으로 조선 세종의 사민정책보다 더 큰 규모의 이주정책이었다. 완안부는 자신들의 근거지를 탈환하기 위해 9성을 공격했다. 고려로서는 개경과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쟁이 장기화의 국면으로 빠지면서 고려 조정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을 치르느라 막대한 국가예산이 빠져나갔고, 인명 피해가 늘어가니 완안부에게 9성을 돌려주고 화해하자는 것이었다. 더욱이 완안부에서 사신을 보내 9성을 돌려주겠다면 영원히 고려에 복속하겠다고 하자, 당시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윤관과 별무반이 힘들게 얻은 9성을 돌려주었다. 예종 4년(1109)의 일이었다. 전쟁을 시작한 지 2년만이었다. 2년만에 결국 고려는 힘들게 얻은 9성지역에 철수했다. 그 후로 6년 뒤 오야속의 뒤를 이어 아우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운다.비록 고려-여진전쟁에서 고려는 별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아니 아예 소득을 얻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 훗날 완안부가 여진사회를 통합하여 금(金)제국을 건설하고,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북송까지 멸망시켜 회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그들은 고려를 자국한다거나 병탄하려는 시도를 보이지 않았다. 거란처럼 과거 사실을 들먹이며 땅을 할양하라 요구하지 않았다. 거란이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고려를 굴복시키려 한데 비하면 여진의 고려정책은 특별하다고 여겨진다.
왜 그들은 고려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지난 4년간에 걸친 고려-여진전쟁 때문이랴... 고려군은 여진군에 뒤지지 않는 최강의 군대였다. 고려는 거란, 송을 멸망시킨 여진의 군대와 4년 동안이나 물러섬 없이 그들과 대등하게 맞서 싸워왔다. 그렇기에 금나라는 고려를 자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설치한 9성의 위치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9성의 위치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모두 함흥평야에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9성의 위치를 오늘날의 함흥, 단천 지역인 함경남도 길주 내지는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경남도 일대에 있었다고 보았다. 이는 『영주청벽기내』를 함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한백겸과 정약용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주장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사책에는 고려 9성의 위치를 모두 함흥평야로 비정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두만강에 접한) 경원의 북쪽 700리에 공험진이, 동북쪽 700리에 선춘현이 있다 공험진은 고려가 구축한 9성 중 가장 북쪽에 있었던 성이다. 『고려사』를 보면 예종 3년(1108) '여진과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공험진에 비를 세웠다'는 기록과 '고려의 동북은 선춘령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공험진비를 선춘령에 세웠다. 선춘령은 백두산에서 동북으로 700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공험진과 선춘령은 두만강을 기점으로, 공험진은 북쪽에 선춘령은 동북쪽에 따로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윤관의 여진정벌 당시 병마령할 임언은 윤관의 지시로 동북 9성 중 하나인 영주성 관청 벽에 이 때의 원정 시말을 기록했는데, 그 원정 시말에 9성의 위치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그 지방은 300리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와 정주 두 개주에 접했다.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기름져 백성들이 살만하다. 본래 고구려의 소유였기 때문에 옛 비석과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예전에 고구려가 잃은 영토를 지금의 임금(예종)께서 찾으시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조선의 실학자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남겼다. 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으니, 두만강 북쪽 700리가 되는 곳이다 (중략)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에서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큼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로부터 비롯되었다 척경입비도(조선17-18세기, 선춘령비를 세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백두산에서 동북쪽으로 700리면 지금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 지역이 된다.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연변에 설치한 간도 임시파출소에서 간도 지역의 유적을 조사하다 연길 서쪽에서 선춘령비로 추정되는 비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같은 역사 기록을 종합해볼 때 고려가 구축한 공험진은 두만강 건너 지금의 조선족자치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조선 세종 때 명나라는 공험진 이남 지역을 조선의 경계로 인정했다. 고황제(高皇帝:영락제)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조선왕조실록』 권59 세종 15년 3월 20일 당대 윤관의 여진정벌이 고려 조정으로부터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 때 흘린 고려군의 피가 후에 조선의 영토 확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더불어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선조들의 피와 땀이 후손들에게 복을 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고려가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었지만, 영유권까지 돌려준 것은 아닌 듯 싶다. 여진으로부터 충성맹세와 조공을 받고 여진족이 9성지역에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 영유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즉 직접통치는 포기했지만, 간접통치는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고려가 영토를 최대한도로 넓힌 시기는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예종시기였을까? 하지만 간도의 역사적 귀속문제 등을 고려하고, 조선시대 때 간도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식한 것을 보면 아닌 듯 싶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공험진 이남을 우리의 영토로 강하게 인식하였다는 것은 이 지역이 오랫동안 고려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불과 2년 정도 점령했다고 공험진에 대한 인식이 조선시대까지 강하게 이어오긴 힘들었을 것이라 본다. 조선 영조 때 작성한 양계 만리 일람지 (동그란 부분이 선춘령비가 있던 지역) 그렇다면 고려의 영역확장은 바로 동여진의 고려로의 귀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문종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182년 중국 송나라 이도가 편 『속자치통감장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문종 37년(1082) 송에서는 여진이 항상 등주에 와서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馬行道)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길이 막혀 (여진족이) 오래도록 오지않았다' 마행도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을 막았다는 것은 고려가 압록강이나 두만강 이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문종 시기 고려의 세력은 동북면 전체(함경도-두만강-송화강)로 퍼졌다. 두만강 너머 여진지역은 비록 고려의 직접통치는 받지 않았지만 고려에 공물을 바치고 예속돼 평화를 유지했다. 중국식 영토 개념으로 보면 이들 지역은 고려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문종 시기 고려의 동북 영토는 흑룡강까지 미치지않았을까 여겨진다. 문종 27년 7월에 흑수 역어(통역관) 가서로가 동여진을 설득해 고려의 주현이 되도록 만드는데 공로를 세웠다며 그를 고려의 무반인 산원에 임명하고 고맹이라는 성명을 하사했다. 이는 흑수 즉 북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시사한다. 9월에는 동여진의 대란촌 등 11개촌을 빈주, 이주, 복주 등 11개 주로 삼아 귀순주에 예속시켰다. 「고려 중기 동북계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쓴 허인욱씨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의 북동쪽 영역은 만주 장광재령까지 뻗었다고 한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가 있던 지역인 현재의 길림성 일대, 송화강 유역을 포함하는 넓은 땅이었다. 거란의 요나라 조차 발해의 옛 수도인 용천까지는 고려의 북쪽 국경으로 인정했다. 12월 계사일에 요나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 이상(李湘) 등을 시켜 왕에게 옥책(玉冊), 옥인(玉印), 면류관, 수례, 장복(章服), 안마(鞍馬), 피륙 등등 물품을 보내왔다. 책문(冊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우리의 연호를 물어 가고 공물을 보내왔다. ......" 고려사 숙종 정축 2년(1097) 고려의 지속적인 북방경영으로 인해 문종 시기에 이르면 고려는 백두산 북쪽 너머 저 멀리 장광재령에 이르는 광활한 만주벌판을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게 되었다. 그 옛날 만주를 호령하며 막북세력과 중원세력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담당한 고구려의 영광을 이제는 후예인 고려가 송, 거란과 더불어 동아시아 평화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긴다. "서북쪽은 고구려의 경계애 미치지 못했지만,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3줄요약실제 공민왕때 고려가 차지했던 영토.
왜 그들은 고려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지난 4년간에 걸친 고려-여진전쟁 때문이랴... 고려군은 여진군에 뒤지지 않는 최강의 군대였다. 고려는 거란, 송을 멸망시킨 여진의 군대와 4년 동안이나 물러섬 없이 그들과 대등하게 맞서 싸워왔다. 그렇기에 금나라는 고려를 자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설치한 9성의 위치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9성의 위치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모두 함흥평야에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9성의 위치를 오늘날의 함흥, 단천 지역인 함경남도 길주 내지는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경남도 일대에 있었다고 보았다. 이는 『영주청벽기내』를 함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한백겸과 정약용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주장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사책에는 고려 9성의 위치를 모두 함흥평야로 비정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두만강에 접한) 경원의 북쪽 700리에 공험진이, 동북쪽 700리에 선춘현이 있다 공험진은 고려가 구축한 9성 중 가장 북쪽에 있었던 성이다. 『고려사』를 보면 예종 3년(1108) '여진과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공험진에 비를 세웠다'는 기록과 '고려의 동북은 선춘령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공험진비를 선춘령에 세웠다. 선춘령은 백두산에서 동북으로 700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공험진과 선춘령은 두만강을 기점으로, 공험진은 북쪽에 선춘령은 동북쪽에 따로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윤관의 여진정벌 당시 병마령할 임언은 윤관의 지시로 동북 9성 중 하나인 영주성 관청 벽에 이 때의 원정 시말을 기록했는데, 그 원정 시말에 9성의 위치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그 지방은 300리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와 정주 두 개주에 접했다.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기름져 백성들이 살만하다. 본래 고구려의 소유였기 때문에 옛 비석과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예전에 고구려가 잃은 영토를 지금의 임금(예종)께서 찾으시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조선의 실학자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남겼다. 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으니, 두만강 북쪽 700리가 되는 곳이다 (중략) 윤관이 6성을 설치하고 공험진을 개설하였는데, 고령진에서 두만강을 건너 소하강 가에 이르면 옛 터전이 그대로 있으니, 곧 선춘령의 동남쪽이요 백두산의 동북쪽이다. 그는 이만큼 국경을 멀리 개척해 놓았는데, 지금 두만강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김종서로부터 비롯되었다 척경입비도(조선17-18세기, 선춘령비를 세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백두산에서 동북쪽으로 700리면 지금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 지역이 된다.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연변에 설치한 간도 임시파출소에서 간도 지역의 유적을 조사하다 연길 서쪽에서 선춘령비로 추정되는 비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같은 역사 기록을 종합해볼 때 고려가 구축한 공험진은 두만강 건너 지금의 조선족자치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이지만, 조선 세종 때 명나라는 공험진 이남 지역을 조선의 경계로 인정했다. 고황제(高皇帝:영락제)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조선왕조실록』 권59 세종 15년 3월 20일 당대 윤관의 여진정벌이 고려 조정으로부터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 때 흘린 고려군의 피가 후에 조선의 영토 확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더불어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선조들의 피와 땀이 후손들에게 복을 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고려가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었지만, 영유권까지 돌려준 것은 아닌 듯 싶다. 여진으로부터 충성맹세와 조공을 받고 여진족이 9성지역에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 영유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즉 직접통치는 포기했지만, 간접통치는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고려가 영토를 최대한도로 넓힌 시기는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예종시기였을까? 하지만 간도의 역사적 귀속문제 등을 고려하고, 조선시대 때 간도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식한 것을 보면 아닌 듯 싶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공험진 이남을 우리의 영토로 강하게 인식하였다는 것은 이 지역이 오랫동안 고려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불과 2년 정도 점령했다고 공험진에 대한 인식이 조선시대까지 강하게 이어오긴 힘들었을 것이라 본다. 조선 영조 때 작성한 양계 만리 일람지 (동그란 부분이 선춘령비가 있던 지역) 그렇다면 고려의 영역확장은 바로 동여진의 고려로의 귀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문종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182년 중국 송나라 이도가 편 『속자치통감장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문종 37년(1082) 송에서는 여진이 항상 등주에 와서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馬行道)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길이 막혀 (여진족이) 오래도록 오지않았다' 마행도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을 막았다는 것은 고려가 압록강이나 두만강 이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문종 시기 고려의 세력은 동북면 전체(함경도-두만강-송화강)로 퍼졌다. 두만강 너머 여진지역은 비록 고려의 직접통치는 받지 않았지만 고려에 공물을 바치고 예속돼 평화를 유지했다. 중국식 영토 개념으로 보면 이들 지역은 고려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문종 시기 고려의 동북 영토는 흑룡강까지 미치지않았을까 여겨진다. 문종 27년 7월에 흑수 역어(통역관) 가서로가 동여진을 설득해 고려의 주현이 되도록 만드는데 공로를 세웠다며 그를 고려의 무반인 산원에 임명하고 고맹이라는 성명을 하사했다. 이는 흑수 즉 북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시사한다. 9월에는 동여진의 대란촌 등 11개촌을 빈주, 이주, 복주 등 11개 주로 삼아 귀순주에 예속시켰다. 「고려 중기 동북계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쓴 허인욱씨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의 북동쪽 영역은 만주 장광재령까지 뻗었다고 한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가 있던 지역인 현재의 길림성 일대, 송화강 유역을 포함하는 넓은 땅이었다. 거란의 요나라 조차 발해의 옛 수도인 용천까지는 고려의 북쪽 국경으로 인정했다. 12월 계사일에 요나라에서 야율사제(耶律思齊), 이상(李湘) 등을 시켜 왕에게 옥책(玉冊), 옥인(玉印), 면류관, 수례, 장복(章服), 안마(鞍馬), 피륙 등등 물품을 보내왔다. 책문(冊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우리의 연호를 물어 가고 공물을 보내왔다. ......" 고려사 숙종 정축 2년(1097) 고려의 지속적인 북방경영으로 인해 문종 시기에 이르면 고려는 백두산 북쪽 너머 저 멀리 장광재령에 이르는 광활한 만주벌판을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하여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게 되었다. 그 옛날 만주를 호령하며 막북세력과 중원세력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담당한 고구려의 영광을 이제는 후예인 고려가 송, 거란과 더불어 동아시아 평화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긴다. "서북쪽은 고구려의 경계애 미치지 못했지만,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3줄요약실제 공민왕때 고려가 차지했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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