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비썰좀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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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0건 조회 313회 작성일 20-01-08 03:27본문
모바일이니까 오타 이해좀 ㅋ
스물네살 남자다.
뭐 주변 친구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자리도 잡고 직장도 다니는데 난 아직 병역문제도 해결못한 병신중의 상병신이다.
썰을 풀자면 모든 원흉은 우리 애비때문이다. 뭐 책임회피나 덤태기를 씌우는거 같이보여도 내가 군입대를 했다가 빠꾸를 먹은것도 애비탓이 크다고 본다.
우리 애비는 생긴건 멀쩡한데 그 놈의 도박과 가장이면서도 나태함을 보이는 상병신중의 상병신으로써 도박 세번에 집을 두번 날려먹으신 전과가 있다. 첫번째로 경마하다가 집 날려먹고서 이사간집에선 택시라도 하면서 정신차리고 열심히산다고 우리 모친에게 앙망을 하던때가 있었는데 택시를 한다고 한걸 못말린게 내 천추의 한이다.
택시기사들이랑 어울리면서 2차로 경륜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그게 크리가 터져서 이번엔 집 전세금까지 몰래 날려먹는 개짓거리를 시작하시고는 걸려서 좆망테크타신뒤 우리 모친에게 다시 앙망문울 제시해서 방 두칸 10평짜리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때가 고1때였는데 우리 엄마가 아직도 기억난다며 나한테 얘기해주는게 있다.
내가 엄마한테 "엄마 이게 사람사는 집이야??" 라고 했었덴다.
그때부터 안해본 알바가 없다. 애비는 집 이사후 가출을 해버렸고 엄마와 나 동생만 남겨진 집은 엄마의 소득만으로는 애비가 남긴 빚 이자도 갚아내기 힘들었고 17살의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알바를 해서 새벽 4시까지 일을 하고 들어오는 생활을 하게되었다. 솔직히 이때가 가장 죽고싶었다.
그 생활을 이어가니 고3때 원서를 쓰는날이 찾아왔는데 내가 상고를 다녔고 다자인과여서 미대를 준비중이었다. 학원갈 형편이 안되서 미술샘이 방과후에 남아서 가끔 봐주셨는데 원서를 쓸때 그래도 애비라고 전화를 해서 홍대나 국민대 둘중 하나 넣어보겠다고 얘기를 했다. 아직도 애비말이 기억이 난다.
"돈도 없다. 갑자기 무슨놈의 미술이냐 때려쳐라"
진짜 억장이 무너지는게 평소에 내가 뭘 하는지도 관심없이 말밥이나 주던새끼가 그러는게 너무 억울해서 그날 밤에 엉엉 울고 미대포기하고 전문대에 들어가서 산디전공했다. 마지막으로 애비한테 등록금좀 보태달라고 하니
"대출받아라"
나 이 말듣고 전화로 애비한테 처음으로 욕해봤다.
애비때문에 남의 돈 쓰는거 정말 혐오하다시피하고 금전관계안만들고 살았는데 마흔 넷이나 된 새끼가 저러는걸 보니 인간이 아니다 싶어서 외가에 돈을 빌려서 일단 한학기를 등록하고 다녔다. 이 이후로 이 인간은 생활비 조차도 보태지않았다.
다음학기 등록금이 없어 어거지로 휴학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한테 난 공부할 팔자가 못되나봐하고 둘아 부둥켜안고 울고 또 미친듯이 일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인간관계에서 통수도 맞고하니 나에게 남겨진건 빚이랑 가면성 우울증이랑 공황장애밖에 없더라. 여자친구도 말썽이었고.
병이 생긴건 처음이 숨기다 22살때 더는 세상이 싫어 도피성으로 군입대를 결정하고 병울 숨기고 입대를 했다. 입대 몇달전엔 업어키운 사촌동생들이 죽어서 큰 충격도 받고 간 터라 상당히 불안에 떨었고 발작도 몇번있었다.
보다못한 소대장(진짜 내 목숨의 은인이다.)님이 귀가를 결정했고 육군병원에서 판정을 받은난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애비가 그랬덴다 엄마한테. 저새끼 뺑끼치는거 아니냐고 가기싫어서.
그말에 난 거품을 물고 지랄을 해댔고 발작이 심해져 병원을 갈수밖에 없었다.
정신병원이라는 그런 느낌과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다는 느낌에 목도 매달아보고 곡기도 끊어보고 별짓을 다 했지만 죽기가 진짜 제일 어렵더라.
니들은 자살기도 하지마라 ㅋㅋㅋ 목에 자국 생기고 안좋다.
암튼 그렇게 치료받아가며 2년간 6번의 재검을 받게되고 결국 4급 공익떠서 지금 심사중이다. 아직도 진정제를 복용해야하고 혹시모를 발작에 대비해서 비상약도 가지고 다니면서 비교적 사람이 없는 주방알바를 한다. 얼마전엔 내 상처 다 어루만져주는 여자친구도 만났고.
나보다 더 좆같은 상황에도 웃으며 사는 사람들 많아서 엄살피우긴 뭐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마 썰을 풀어놓으니 시원하기도 하고 씁슬하기도 하다.
이거 보는 너희들도 열심히 살아라. 고맙다
영자찡의 리플보고 나머지를 적을게 내가 생활비를 대면서 빚을 갚은덕에 엄마는 개인회생이 작년에 끝나서 돈을 조금씩 모아 지금은 방 두칸짜리 조금은 나은 월세방에서 세식구가 오손도손 살고있어. 애비는 이혼하자고 소환해도 못들은척하다 나한테 멱살이 잡히고 휘둘리는 일을 겪고말야. 학교도 졸업했다. 학자금대출받아서 졸업은 했어. 그래도 아직 살길이 막막하긴하네 ㅠㅠ ㅋㅋㅋㅋ 암튼 영자찡 신경써줘서 고마워
스물네살 남자다.
뭐 주변 친구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자리도 잡고 직장도 다니는데 난 아직 병역문제도 해결못한 병신중의 상병신이다.
썰을 풀자면 모든 원흉은 우리 애비때문이다. 뭐 책임회피나 덤태기를 씌우는거 같이보여도 내가 군입대를 했다가 빠꾸를 먹은것도 애비탓이 크다고 본다.
우리 애비는 생긴건 멀쩡한데 그 놈의 도박과 가장이면서도 나태함을 보이는 상병신중의 상병신으로써 도박 세번에 집을 두번 날려먹으신 전과가 있다. 첫번째로 경마하다가 집 날려먹고서 이사간집에선 택시라도 하면서 정신차리고 열심히산다고 우리 모친에게 앙망을 하던때가 있었는데 택시를 한다고 한걸 못말린게 내 천추의 한이다.
택시기사들이랑 어울리면서 2차로 경륜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그게 크리가 터져서 이번엔 집 전세금까지 몰래 날려먹는 개짓거리를 시작하시고는 걸려서 좆망테크타신뒤 우리 모친에게 다시 앙망문울 제시해서 방 두칸 10평짜리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때가 고1때였는데 우리 엄마가 아직도 기억난다며 나한테 얘기해주는게 있다.
내가 엄마한테 "엄마 이게 사람사는 집이야??" 라고 했었덴다.
그때부터 안해본 알바가 없다. 애비는 집 이사후 가출을 해버렸고 엄마와 나 동생만 남겨진 집은 엄마의 소득만으로는 애비가 남긴 빚 이자도 갚아내기 힘들었고 17살의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알바를 해서 새벽 4시까지 일을 하고 들어오는 생활을 하게되었다. 솔직히 이때가 가장 죽고싶었다.
그 생활을 이어가니 고3때 원서를 쓰는날이 찾아왔는데 내가 상고를 다녔고 다자인과여서 미대를 준비중이었다. 학원갈 형편이 안되서 미술샘이 방과후에 남아서 가끔 봐주셨는데 원서를 쓸때 그래도 애비라고 전화를 해서 홍대나 국민대 둘중 하나 넣어보겠다고 얘기를 했다. 아직도 애비말이 기억이 난다.
"돈도 없다. 갑자기 무슨놈의 미술이냐 때려쳐라"
진짜 억장이 무너지는게 평소에 내가 뭘 하는지도 관심없이 말밥이나 주던새끼가 그러는게 너무 억울해서 그날 밤에 엉엉 울고 미대포기하고 전문대에 들어가서 산디전공했다. 마지막으로 애비한테 등록금좀 보태달라고 하니
"대출받아라"
나 이 말듣고 전화로 애비한테 처음으로 욕해봤다.
애비때문에 남의 돈 쓰는거 정말 혐오하다시피하고 금전관계안만들고 살았는데 마흔 넷이나 된 새끼가 저러는걸 보니 인간이 아니다 싶어서 외가에 돈을 빌려서 일단 한학기를 등록하고 다녔다. 이 이후로 이 인간은 생활비 조차도 보태지않았다.
다음학기 등록금이 없어 어거지로 휴학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한테 난 공부할 팔자가 못되나봐하고 둘아 부둥켜안고 울고 또 미친듯이 일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인간관계에서 통수도 맞고하니 나에게 남겨진건 빚이랑 가면성 우울증이랑 공황장애밖에 없더라. 여자친구도 말썽이었고.
병이 생긴건 처음이 숨기다 22살때 더는 세상이 싫어 도피성으로 군입대를 결정하고 병울 숨기고 입대를 했다. 입대 몇달전엔 업어키운 사촌동생들이 죽어서 큰 충격도 받고 간 터라 상당히 불안에 떨었고 발작도 몇번있었다.
보다못한 소대장(진짜 내 목숨의 은인이다.)님이 귀가를 결정했고 육군병원에서 판정을 받은난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애비가 그랬덴다 엄마한테. 저새끼 뺑끼치는거 아니냐고 가기싫어서.
그말에 난 거품을 물고 지랄을 해댔고 발작이 심해져 병원을 갈수밖에 없었다.
정신병원이라는 그런 느낌과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다는 느낌에 목도 매달아보고 곡기도 끊어보고 별짓을 다 했지만 죽기가 진짜 제일 어렵더라.
니들은 자살기도 하지마라 ㅋㅋㅋ 목에 자국 생기고 안좋다.
암튼 그렇게 치료받아가며 2년간 6번의 재검을 받게되고 결국 4급 공익떠서 지금 심사중이다. 아직도 진정제를 복용해야하고 혹시모를 발작에 대비해서 비상약도 가지고 다니면서 비교적 사람이 없는 주방알바를 한다. 얼마전엔 내 상처 다 어루만져주는 여자친구도 만났고.
나보다 더 좆같은 상황에도 웃으며 사는 사람들 많아서 엄살피우긴 뭐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마 썰을 풀어놓으니 시원하기도 하고 씁슬하기도 하다.
이거 보는 너희들도 열심히 살아라. 고맙다
영자찡의 리플보고 나머지를 적을게 내가 생활비를 대면서 빚을 갚은덕에 엄마는 개인회생이 작년에 끝나서 돈을 조금씩 모아 지금은 방 두칸짜리 조금은 나은 월세방에서 세식구가 오손도손 살고있어. 애비는 이혼하자고 소환해도 못들은척하다 나한테 멱살이 잡히고 휘둘리는 일을 겪고말야. 학교도 졸업했다. 학자금대출받아서 졸업은 했어. 그래도 아직 살길이 막막하긴하네 ㅠㅠ ㅋㅋㅋㅋ 암튼 영자찡 신경써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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